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51)
제51화. 직시 (4)
서혜나는 고민했다.
아이의 상처가 너무 깊어 다가가기 쉽지 않았다.
섣불리 직접적으로 물어봤다가 도현이 자리를 피했던 순간은 서혜나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그녀는 주변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조언을 구했고.
– 아이가 우울할 땐 같이 있어줘야 해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가만히 있는 것보단 좀 더 활동적인 것을 하는 게 좋죠. 운동이라거나, 요리라거나.
뭐가 되었든지, 할 수 있는 건 전부 할 생각이었다.
서혜나는 오늘을 위해 준비해 놓은 노란색 구름 모양 손잡이가 달린 체를 도현에게 내밀었다.
“거기 가루류 모아놓은 거 있지? 체에 쳐서 내리면 돼.”
탁. 탁.
도현이 체의 옆 부분을 손바닥으로 칠 때마다 하얀 가루가 눈처럼 쌓였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중독성이 있어 계속 치다 보니 어느새 체가 텅 비었다.
도현이 고개를 들어 서혜나를 보았다.
‘이젠 뭐 하지?’ 하는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도현은 대체로 포커페이스였는데, 가끔씩 이렇게 생각이 투명하게 보일 때가 있었다.
서혜나는 잠시 부엌을 부수고 싶은 파괴적인 충동을 진정시키고선, 멀쩡한 낯으로 도현에게 물었다.
“레몬 맛이랑 초코 맛 있는데 도현이는 뭐 만들고 싶어?”
“초코요.”
그게 더 달았다.
한시의 고민도 없이 나온 대답에 서혜나가 잠깐 웃었다.
코코아 가루를 다시 한번 체로 내린 도현이 옆에서 엄마가 하는 대로 설탕을 부었다.
“응. 설탕 넣고, 거기 거품기 보이지? 그거로 잘 저어주면 돼.”
한번 시범을 보인 서혜나가 도현의 손에 거품기를 쥐여 주었다.
도현이 어색한 손놀림으로 가루를 섞기 시작했다.
어느새 집중한 얼굴이 되자, 서혜나가 미리 깨두었던 계란을 퐁당퐁당 떨어트렸다.
“계속 돌려! 다 섞일 때까지 반죽하면 되는데 팔 아프면 엄마한테 넘겨, 알았지?”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곤 반죽을 젓기 시작했다.
가루만 있을 때까지는 쉽게 섞였는데, 계란이 들어가자 질척하게 뭉쳐서 돌리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세 번째로 거품기를 놓친 도현이 반죽을 잠깐 노려보았다.
다시 거품기를 손에 쥐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 사투를 모두 지켜보고 있던 서혜나가, 반죽이 완성되자 물개 박수를 쳤다.
“우리 도현이는 반죽도 잘하네!”
도현은 조금 뿌듯해졌다.
녹인 버터를 세 번에 걸쳐 조심스럽게 넣고, 완전히 섞일 때까지 저어주자 반죽이 완성되었다.
도현이 만든 초코 맛 반죽과 자신이 만든 레몬 맛 반죽을 랩으로 감싸 냉장고에 넣은 서혜나가 도현을 보고 말했다.
“이제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하는데, 엄마랑 같이 거실에서 영화 볼까?”
“영화요?”
“응. 엄마가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는데, 도현이가 같이 봐주면 너무 좋을 것 같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혜나가 이끄는 대로 거실로 간 도현의 품에 푹신한 인형이 안겨졌다.
이번에는 바다사자 인형이었다.
서혜나가 튼 건 애니메이션 영화였다.
특이하게도, 인물들이 자신의 심정이나 대사를 노래로 이야기하는 뮤지컬 형식이었다.
– 돌아오실 때 장미 한 송이를 가져다주세요.
그저 엄마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영화를 보던 도현은 순식간에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딸에게 선물로 줄 장미를 꺾은 상인이 야수의 분노를 사게 되고, 벨이 아버지를 대신해 성으로 들어가는 부분을 보면서 손을 꼭 쥐었고.
–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요?
아름다운 소녀와 야수가 점점 가까워졌다.
외로웠던 야수와 소녀가 서로를 알아보고 끌리는 건 정말이지, 마법 같은 일이었다.
그들은 마치 형과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종의 운명을 느낀 것 같았다.
직감으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영혼에서부터 일어나는 무언가.
그렇기에 도현은 더욱 이야기에 집중했다.
야수가 위기에 처했을 땐 숨소리를 죽였고.
–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싸늘하게 식은 야수에게 키스하며 벨이 눈물과 함께 사랑을 속삭일 때 탄성을 뱉었다.
야수가 아름다운 왕자로 변하고.
두 연인이 다정하게 손을 맞잡았다.
그들의 영원한 사랑과 앞으로 펼쳐질 찬란한 나날들에 대한 노래를 마지막으로 영화가 끝이 나고.
검은 화면이 뜨고 나서야, 도현은 정신을 차렸다.
“…아.”
“어때? 재밌지?”
서혜나의 물음에 도현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멋졌다.
그렇게 노래를 통해 이야기를 진행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재밌을 것 같네.’
도현의 마음속에 작은 흥미가 생겨났다.
“반죽은 다 됐을 것 같네. 이제 오븐에 넣고 저녁 먹으면 되겠다!”
서혜나가 방긋 웃었다.
귀여운 붕어빵 모양의 틀에 반죽을 붓고, 오븐에 넣은 두 사람은 평소보다 조금 늦은 저녁 식사 시간을 가졌다.
저녁을 먹고 조금 식은 마들렌을 베어 물었다.
폭신폭신하고 달았다.
그리고 역시 초코 맛이 조금 더 맛있었다.
서혜나가 남은 마들렌을 예쁜 봉지에 싸며 내일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나눠주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신 차려 보니 잘 시간이었다.
도현은 목 끝까지 다정히 이불을 덮어주는 서혜나를 말간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럼 잘 자. 좋은 꿈 꾸고.”
“네, 엄마도요.”
탁.
불이 꺼지고.
도현은 서혜나의 뒷모습에서, 깜깜한 천장으로 시선을 이동시켰다.
야광 별 스티커가 붙여진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홀로 남자 자연히 상념이 차올랐다.
‘저번에 직접적으로 물어볼 땐 곤란했는데….’
이번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물론 다행인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엄마가 노력하는 걸 안다.
의무감. 죄책감. 책임감.
아마 그러한 감정들이겠지만….
눈을 깜빡이다가, 반쯤 내리감았다.
도현이 자리를 피했던 날 이후로, 엄마는 눈에 띄게 도현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렸다.
도저히 모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세심하고 정성스러운 관심이 어색하고 낯설다.
한순간에 바뀐 환경은 익숙해지는 듯싶다가도 어느 순간에 온통 초록색인 세상을 보는 것처럼 기이하게 느껴졌다.
도현을 신경 쓰는 건 엄마뿐만이 아니었다.
‘진과 니콜라스도 그랬고, 맥도 리암도 로잔나도, 그리고 또….’
도현이 굳이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먼저 알아주고 발견하는 사람을 하나둘씩 떠올려 보다가.
너무 열심히 움직인 탓인지 사고가 점차 느려졌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이 스르르 감겼다.
졸음이 몰려왔다.
* * *
“으음! 맛있다!”
진이 행복한 얼굴로 마들렌을 먹었다.
요새 진이 생각이 많은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넌지시 물어봐도 고민할 게 있다고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불안했는데…
“왐냠!”
근심 걱정 없이 잘 먹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도현은 조금 흐뭇한 심정이 되어 그런 진을 구경했다.
왜 엄마가 매번 요리하고 밥을 먹는 자신을 그렇게 쳐다보는지 깊이 이해한 순간이었다.
일주일을 쉰다고 하니 진과 니콜라스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회사 일이 바빠 아이들과 놀아주지 못하는 가장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신나게 마들렌을 먹어 치운 진과 니콜라스는 직접 만들었다는 소리에 눈을 빛내다가.
“우리도 하자!”
“좋아!”
간단히 결정했다.
도현은 언제나 그랬듯, 둘에게 이길 수가 없었다.
니콜라스의 적극적인 의사 표시로 하교 후 니콜라스의 집에 갔다.
그리고.
“이왕 하는 김에 피크닉 도시락 만들어서 피크닉 가는 건 어때?”
괜히 니콜라스의 누나가 아닌 나르샤가 한술 더 떴다.
도현은 이 급전개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도리! 토마토 흘러내리잖아!”
“아.”
도현이 정신을 차리곤 토마토를 다시 곱게 올려놓았다.
“사과! 사과 빠지면 안 돼!”
진이 사과를 뭉텅이로 집어넣었고.
“…니키! 양배추를 다 빼버리면 어떡해!”
나르샤가 제 몫의 샌드위치에서 젠가를 하듯 양배추를 쏙쏙 빼고 있는 니콜라스를 보고 잔소리를 했다.
딸칵.
“자, 완성!”
간단한 피크닉 도시락이 금방 완성되고.
“가자, 가자!”
나르샤의 차에 올라탄 진과 니콜라스가 손짓했다. 진은 어디서 났는지 선글라스도 끼고 있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고민해도 바쁠 시간에 놀고 있었다. 도현은 나르샤가 크게 틀어놓은 팝송을 신나게 따라 부르며 걱정했다.
창문을 열어두어 바람이 시원하게 머리를 때렸다.
스피커는 빵빵했고.
“오예! 베이베- 아이 럽 유- 오우예!”
사람들은 미쳐 있었다.
‘아, 모르겠다.’
도현도 머릿속을 비우기로 했다.
‘리암도 푹 쉬라고 했으니까.’
애써 변명하면서.
* * *
길이 막히지 않아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발보아 파크라고 했던가. 도현은 처음 보는 아름다운 공원에 살짝 입을 벌렸다.
“여기. 보타닉 가든 앞이 제일 뷰가 예뻐. 이 근처에 돗자리 펴자.”
피크닉을 즐기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돗자리를 펴고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보였다.
나르샤가 적당한 자리에 돗자리를 펼쳤다. 그러고선 차에서 론체어를 꺼내 와 펼치고 자신은 그 의자에 드러누웠다.
진의 선글라스가 나르샤의 것이었던 건지, 선글라스를 끼고 누워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피서를 온 사람이었다.
니콜라스가 도시락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랩으로 감싼 샌드위치와 예쁘게 자른 과일들이 꽉 찬 도시락은 장소 탓인지, 막 만들었을 때보다 더 그럴싸해 보였다.
아이들은 각자 제 몫의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론체어에 누워 게으름을 부리는 나르샤에게도 샌드위치를 하나 쥐여 주곤 도현도 샌드위치를 물었다.
아삭!
“!”
식빵 사이에 발린 케첩과 머스터드의 시큼하고 달달한 맛과 사과의 상큼함이 입 안에 확 퍼졌다. 이어 양파의 신선함과 양배추의 푸릇함, 햄의 짭조름함이 차례로 미각을 자극했다.
공원에 가득한 풀 내음 탓일까. 사람들의 웃음소리 때문일까.
평범한 샌드위치가 더없이 향기롭게 느껴졌다.
“맛있다.”
기어코 양배추를 빼내는 데 성공했던 니콜라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냠, 크게 한 입 베어 먹었다.
도현은 진심으로 동의했다.
샌드위치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인 줄 처음 알았다.
샌드위치를 해치운 그들은 보타닉 가든을 가볍게 한 바퀴 돌았다.
더 구경하기엔 시간이 마땅치 않았다.
넓은 공원의 아주 일부분을 구경했을 따름이지만, 도현은 크게 만족했다.
찰랑이는 물들이, 그 위에 떨어진 나뭇잎 몇 장이,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이 모두 그의 마음에 쏙 든 탓이었다.
관광객들이 하는 것처럼 사진 몇 장을 서로 찍어주고, 다 같이 모여 서서 다른 사람에게 찍어달라고 부탁도 하며 즐겼다.
잠깐의 산책을 끝낸 그들은 돗자리로 되돌아왔다.
저녁이 왔음을 알리듯 물들어 가는 하늘 탓일까.
진과 니콜라스는 시끄럽게 떠들기보다 조곤조곤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나누고, 장난을 치고,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마치 경쾌하고 부드러운 음악 같은 순간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모든 순간이 마법처럼 느껴졌다. 불안정하고 꿈결 같은….
도현은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아 숨소리를 낮췄다.
이토록 따뜻하고 완벽한 순간을 겪어본 적이 있다.
살결에 후덥지근한 온기를 담고 달라붙는 공기와 달리 살짝 서늘한 향이 코끝을 스쳤지만.
사방에서 배경 음악처럼 온갖 소리가 잔잔히 울리지 않고 서로의 말소리가 전부였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달콤한 것을 크게 베어 문 것 같은 순간이 있었다.
– 다음엔 같이 여행을 가보는 건 어때요?
– 여행? 어디로?
– 어디든, 같이요. 어디라도 좋을 것 같아요.
침대에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사실, 여행을 가지 않아도 좋았다.
형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여행 같았으니까.
그래도 미래를 꿈꾸다 보면 기분이 좋아져, 종종 꿈만 같은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색색이 물드는 하늘이, 형과 병실에 앉아 나란히 보았던 그때와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너무 비현실적인 탓일까.
슬픔은 짙었지만 괴롭진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찰칵!
갑작스럽게 들린 소리에 도현은 마법에서 깨어났다.
“…아, 미안.”
진이 카메라를 들곤 어색히 웃었다.
“내가 생각하는 거 방해했어…?”
진이 카펫을 물어뜯곤 주인의 눈치를 보는 강아지처럼 눈치를 봤다.
도현은 한숨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푸흐, 아냐. 괜찮아.”
붉게 물든 하늘이 조각조각 나 미소 지은 얼굴을 따라 흘렀다.
까만 머리카락이 붉게 일렁이고, 두 눈은 물결보다 예쁘게 반짝였다.
그게 너무 예뻐서 진이 흐힛- 바보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도현은 문득 심장에 둔통을 느꼈다.
소년이 처음으로 받은 애정이 남긴 건 지독한 이별의 서러움이었다.
이 또한 내게 서러움만 남기고 사라질까.
이번에 찾아올 이별은 언제가 될까….
도현이 시선을 비스듬히 깔았다. 긴 속눈썹 위로 붉은 하늘의 조각이 타고 흘렀다.
또 혼자가 된다면….
“사진 엄청 잘 나왔다.”
도현이 눈을 들었다. 진이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 찍힌 사진들 다 좋아. 집에 가면 아빠한테 인화해 달라고 부탁해야지! 니키랑 나르샤, 도리 것도 전부 인화해서 줄게!”
진이 기분 좋은 티를 숨기지 않으며 그렇게 말했고, 니콜라스와 나르샤가 좋다고 대답했다.
이 기억이 산산조각 나 살갗을 파고든다면 그때서야 후회할까.
방금까지는 그저 즐거웠는데.
이제는 도리어 복잡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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