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586)
#제586화. 명사수, 아니면 배우 (21)
이그린은 헛웃음을 흘리며 르옌을 곁눈질했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험악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이 바삐 돌아갔다.
어쩌면 정말로….
그 순간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데.”
고개가 미묘하게 기운다. 살짝 기울인 각도만으로 얼굴의 분위기가 변했다. 이그린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날 뻔한 것을 참아내며, 동시에 깨달았다.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잠깐이나마 감돌았던 느슨함이, 저 소년의 허락 아래에서 이루어졌던 일이란 걸.
아서가 주먹을 쥐었다. 단단하게 쥔 손은 쉬이 물러서지 않으리란 것처럼 고집스러웠다.
“너라면 알고 있을 거 같아서.”
“알고 있을 거 같다고.”
순간, 아서는 움찔했다.
오웬 어퍼를 향했던 눈빛이 아서를 향했다. 미지근히, 까맣게 식어 있지만, 그 속의 온도를 가늠키는 어려운….
해석하기 어려운 눈빛.
르옌이 실소했다.
“그래. 네 말은, 내가 이 소동의 원인이니 그 방법도 알고 있을 거란 소린가?”
“…뭐?”
정신을 차린 아서가 황급히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니야! 애초에 물어보려던 것도 범인의 정체 같은 게 아니라, 결계…!”
르옌이 고개를 저었다. 소년은 말을 막는 가벼운 몸짓마저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문 아서는 눈썹을 구겼다.
“됐어. 네 사정엔 관심 없어.”
아서 우더. 단조로운 음색이 상대를 불렀다.
“나는 네 부탁을 들어줘야 할 의무도, 유감스럽지만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어.”
아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서는 르옌 누바라의 저런 모습이 싫었다. 남의 일이라는 양, 매번 한 발짝 뒤로 물러서 관망하는 태도도. 늘 겹겹이 둘러싸여 속내를 알 수 없는 우아한 말투도.
“네가 말해줄 때까지 비켜줄 수 없어. 너도 봤잖아, 가시에 걸린 채 죽은 그 처참한 모습을!”
“그래, 불쾌한 사실이지만 내가 가장 유력한 범인이란 것도 알겠지.”
남이 자신을 오해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놔두는 저 무신경함까지도,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너와 얽힌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직접적으로 행한 범인은 네가 아니야.”
르옌은 침묵했다.
그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갈롯족의 후보가 가시에 걸린 날 아서가 자신의 변호를 해주었다는 사실 정도는 전해 들었다.
호르헤가 싱글거리며 하는 말에 르옌은 덤덤히 생각했다. 보통은 그럴 때 고마워하던가. 그러나 소년은 그러한 감정을 느낄 줄 모르는 이였다.
다만, 떠오르는 감상 정도는 있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나의 무엇을 보고?
르옌은 알고 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존재한다.
아서 우더의 행동도 마찬가지다.
그에겐 르옌 누바라가 범인처럼 비추지 않을 만한 일이 있던 것이다. 그게 르옌이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간에 상관없이.
소년은 그 모든 생각을 무표정한 낯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아서는 그 안에서 피어난 의문을 읽어내지 못했다.
비장한 낯으로 주변을 휙휙 둘러본 아서가 목소리를 낮췄다.
“범인은 나무 밖에서 온 자니까.”
그러나 그 어떤 대답보다 저 말이 더욱 선명한 답이 되었다.
르옌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는 눈앞의 사실을 천천히 인정했다.
“내가 봤어. 결계가 일그러지는 걸. 범인은 이곳에 있는 길잡이가 아니야. 다른 외부의 세력이지. 대체 어떻게 신성한 결계를 뚫고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서 우더는 르옌 누바라를 신뢰한다.
황당함이 도를 넘어서일까? 머리 한구석이 지끈거렸다. 르옌은 이마를 누르는 대신에 상대를 건조하게 불렀다.
“아서 우더.”
그러나 터져 나오는 한숨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르옌은 자신이 한숨을 뱉었단 사실을 알고 멈칫했지만, 곧 자연스레 표정을 바꾸었기에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도대체 널 이해할 수가 없어. 내 무엇을 믿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그건 질문보단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내가 얽힌 일이라면, 목격자인 넌 계획에 방해물일 뿐이니 당장에 널 죽일 수 있어. 아니면 내일 가시에 걸린 이가 네가 될지도 모르지. 다시 물어보지, 아서 우더. 대체 무얼 믿고 그러는 거야? 네 알량한 힘? 아니면… 친구?”
시선을 받은 이그린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르옌은 미련 없이 그녀에게서 눈을 뗐다. 다시금 아서를 응시한 르옌이, 꽤 진실한 의문을 담아 물었다.
“그것도 아니면, 혹시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 * *
촬영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 정적 속에서, 데이먼 감독은 옛 기억에 빠졌다.
그가 초대했던 어린 소년은 페어리 픽처스 본사에 발을 들였다. 저를 제외한 모두가 백인, 혹은 백인의 피가 뚜렷하게 드러난 혼혈인 상황 속에서 움츠러듦 없이 당당했다.
아니, 오히려 홀로 가장 찬란히 빛났다.
도통 겁이란 게 없는 소년 같았다. 그저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너무 궁금해서, 눈앞에 주어진 대본이 너무 재밌어서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어린아이는, 데이먼의 마음속의 무언갈 건드렸다.
데이먼은 생각했다.
처음 계시를 느낀 건 발레 공연장이었을지 몰라도, 저 소년에게 진심으로 빠져든 건 그 오디션 날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 빛나던 아이가 어느새 훌쩍 커서 카메라 앞에 서 있었다. 온갖 이슈와 비난에 휘말리면서도 조금도 주춤하지 않은 채.
여전히 도현의 흠을 잡아내기 위해 눈에 불을 켠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다.
수만 명, 수백만 명, 어쩌면 수천만 명이.
그들은 도현이 조금만 삐끗해도 자비 없이 달려와 칼을 휘두를 것이다. 어떻게든 상대를 난자해 내어 날개를 뜯어가려고. 하늘을 날던 새가 볼품없이 지상으로 추락하는 순간만을 기다리며.
그걸 도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토록 단단한가?
카메라 앞에 서서, 절대로 물러나지 않으리란 듯 반듯이 어깨를 펴고, 새카만 눈으로 사람을 사로잡는 모습이 마치 다이아몬드 같았다.
스스로 세공을 마쳐서 평가를 기다리는 다이아몬드라니. 그러면서도 저를 본 존재라면 누구나 탐욕에 홀릴 걸 알아 저토록 당당한 모습이라니.
빛난다.
그 말 말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도현은 빛났다.
“다 아니야.”
헤레이즈가 도현을 똑바로 보았다.
“네가 그랬잖아. 부탁을 들어줄 의무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그러니까 난 네가 내 부탁을 들어주도록 대가를 내민 거뿐이야.”
섬세한 눈가가 설핏 찌푸려졌다.
“완전히 제멋대로군. 대가는 상대가 원하는 걸 줘야 한다는 것 정도는 상식일 텐데.”
“하지만 넌 나한테 바라는 게 없잖아. 지금 네 앞에서 사라지는 거 빼고 말이야.”
데이먼은 도현의 표정을 눈에 담았다.
누바라의 후계자에게 있어서 아서 같은 인물은 난데없는 불청객에 가까웠다. 복종, 증오, 혐오, 무시, 꺼림칙함. 그러한 것들이 그의 주변에 있던 전부였다.
아니, 사실은….
“충고 하나 하자면, 주제도 모르고 나서는 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라는 걸 그 얼빠진 머리에 새기는 게 좋겠어. 어느 날 비명횡사를 하고 싶은 게 소원이 아니라면 말이야.”
조롱하는 어투였고, 낯빛은 고고했다. 다만 그대로 가버릴 거 같던 도현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침묵이 길어진다.
대본에 지정된 것과는 다른 상황에 술렁거림이 퍼져나갔다. NG인 건지 헷갈린 기색이었다.
어디선가는 안타까운 숨이 흘러나왔다. 이 장면을 여기서 끊어야 한다는 것에서 온 애처로운 탄식이었다.
데이먼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도현을 주시했다.
정지한 듯 존재하던 얼굴에 파문이 인 건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이 작게 달싹거렸다. 검은 눈동자에 미지근함 외의 온도가 깃든다.
그러나 찰나였다.
수려한 낯이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두통을 느끼는 사람처럼 머리를 짚는 움직임에 헤레이즈가 당황하여 그를 보았다.
예정에 없던 행동이라 놀란 거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자연스러웠다. 진짜 아픈 거 아니야? 흰 얼굴에 선연하게 고통이 번지자 헤레이즈는 저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그리고 내쳐졌다.
“함부로 손대지 마.”
불쾌감이 깃든 시선과 함께.
동시에 헤레이즈는 그것이 연기란 걸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즉흥적인 연기라고는 하나, 진짜로 착각하여 장면을 망칠 뻔했다는 게 그의 자존심을 크게 할퀴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다행히 아직 컷 사인은 울리지 않았다.
아직, 기회가 있어.
그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말이 튀어 나갔다.
“…난, 도와주려고.”
“도움이 필요한 상대 정도는 구분할 줄 알면 좋겠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돌아왔다.
심장이 터질 듯한 헤레이즈와 달리 도현은 여유로웠다. 여유롭다 못해 헤레이즈를 비웃었다. 저 얼굴에 걸린 한심함이 아서를 향하는 걸 알지만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그 정도도 못 하는 지능이라면, 실컷 말해줘 봤자 소용없을 거 같으니.”
“뭐? 그럼 너는 얼마나…!”
울컥한 심정을 그대로 연기에 치환해, 반박하려던 때였다.
“잠깐!”
신시아가 난입했다.
헤레이즈는 당혹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도현 또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또 뭐야’ 하는 정도의 시선이었다.
신시아는 긴장한 낯으로 도현을 보았다.
예정에 없는 연기를 하는 건 거의 처음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하는 걸 가만히 보며 뒤처지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신시아라면 할 만한 말을 생각해 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네가 말해 주겠다고 했어. 맞아?”
그에 헤레이즈의 눈이 커졌다.
헤레이즈와 신시아는 도현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평소에 일정한 박자를 유지하던 신시아의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와 조금은 축축했다.
괜찮아. 진짜 이그린이었더라도 이렇게 긴장했을 테니까.
신시아는 그 긴장감을 거부 없이 모조리 받아들였다.
“…그래. 저 천둥벌거숭이가 더는 날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맹세해!”
도현은 곧장 대답한 헤레이즈를 의심스럽게 보았다. 헤레이즈는 볼 테면 보라는 식으로, 어깨를 쫙 펼치고 시선을 받아쳤다. 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
토드 감독은 이쯤에서 끊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애초에 촬영하기로 약속된 장면을 넘어갔다.
그러나 그는 입술을 떼지 않았다. 그저 열렬한 눈으로, 카메라 너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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