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590)
#제590화. 어느 여름, 태양 (3)
까맣게 태닝된 선글라스 아래 긴 속눈썹이 팔랑댔다. 선글라스 알보다 더 검은 눈은 홉 뜨여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경☆ 도리토스 뉴욕 입성 ☆축]넉넉한 품의 티셔츠와 무릎 위까지 오는 운동복 바지를 입은 소년이 보였다. 앞머리를 뒤로 넘겨 야구 모자를 꾹 눌러쓴 채였는데, 그 아래로 드러난 하관이 무척 익숙했다.
도현은 휘둥그레 뜬 눈으로 소년과 소년의 손에 들린 플래카드를 보았다. 궁서체로 쓰인 한국어가 인지 부조화를 일으켰다.
공항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그런 소년을 한번 흘깃 보고 지나쳤다. 소년은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도 심드렁했다. 그저 한쪽 손으론 플래카드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검은 동공이 다시금 크게 흔들렸다. 입술이 간신히 달싹였다.
“…니키?”
너무 작은 목소리라서 상대에게 닿지는 못했다. 그러나 때마침 니콜라스는 고개를 들었고, 어깨에 커다란 보스턴백을 멘 채 황망히 이쪽을 쳐다보는 소년을 발견해 내고야 말았다.
잠깐 에메랄드 눈이 커졌다가, 이내 플래카드를 높이 들어 올렸다. 허공에서 흔들리는 것을 보며 도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저 말문만 막혔다.
“뭐야, 왜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않는 도현 대신에 직접 다가온 니콜라스가 이상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도현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검지로 플래카드를 가리켰다.
“…대체 뭐야, 저건?”
“이거?”
니콜라스가 쑥스러운 듯 손가락으로 코밑을 쓱 쓸었다. 그는 큼큼, 헛기침하더니 말했다.
“한국에선 공항에 마중 나갈 때 이렇게 한다며. 너는 미국인이지만, 한국인이기도 하니까.”
도현은 눈을 길게 감았다가 뜨며 물었다.
“니키, 혹시 그거 알려준 사람이 나르샤야?”
“어. 어떻게 알았어?”
도현은 입술을 꾹 다물고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입을 조금이라도 열었다간 폭소가 쏟아질 거 같았다. 그러나 뺨이 파르르 떨리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니콜라스는 그 표정을 기민하게 감지했다. 의아해하던 얼굴이 어느 순간 딱딱히 굳더니, 곧 빨갛게 물들었다.
“이, 이 마귀할멈이!”
속았다는 걸 깨달은 니콜라스가 분개했다. 그는 치가 떨린다는 듯이 몸을 파르르 떨더니, 플래카드를 반으로 접어버렸다. 그러더니 쿵쿵거리며 걸어가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지 씩씩대는 게 보였다.
도현은 맥없이 부러져 쓰레기가 된 플래카드를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버릴 거면 나 주지….
“꼭 버렸어야 했어?”
“닥쳐. 그 얘기 꺼내지 마.”
도현은 미련 어린 눈으로 쓰레기통을 곁눈질하다가, 목까지 빨개진 니콜라스를 보고 아쉬움을 접기로 했다. 저러다가 얼굴이 터질 거 같았다.
웃긴 것과 별개로 친구의 성의에는 감동했기 때문에, 도현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니콜라스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비록 네가 버리긴 했지만, 받았다고 칠게.”
“내가 그 얘기 하지 말라고….”
“나도 네게 줄 선물 가져왔어.”
니콜라스가 멈칫했다. 도현은 낮게 웃었다.
“지금은 좀 그렇고. 집에 가서 줄 거야.”
어느새 진정한 니콜라스는 평소의 안색을 되찾았다. 후우, 숨을 한번 깊게 내쉰 니콜라스가 힘없이 말했다.
“여기선 택시 타는 게 빨라.”
예상치 못한 이벤트로 인해 흐지부지하게 넘어가긴 했지만, 그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거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제 헤어지고 오늘 만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평화로운 분위기는 금방 깨졌는데, 플래카드를 들고 있던 니콜라스를 떠올린 도현이 자꾸 피식피식 웃었기 때문이었다. 주먹을 쥐고 떨어대던 니콜라스는 결국 폭발했다.
“나가! 나가, 이 자식아!”
그가 도현의 옆구리며 어깨를 퍽퍽 쳤다.
“아, 미안. 미안하다니까.”
도현은 얼얼한 어깨에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실실댔다. 진도, 나르샤도 니콜라스를 놀리는 걸 무척 좋아했는데, 도현은 그 이유를 이해했다. 툭 찌르면 펄쩍 뛰어오르는 개구리처럼 니콜라스의 반응은 재밌었다.
그 난장판이 종식된 건 인내심이 닳은 택시 기사가 비명처럼 외쳤을 때였다.
“그만!”
그는 이마가 반짝이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화가 나는 걸 오래 참았는지, 매끈한 이마에 땀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차가 흔들리잖아! 차 안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걸 못 배웠니?”
니콜라스는 부릅뜬 눈으로 도현을 한번 노려보더니, 이내 슬쩍슬쩍 택시 기사의 눈치를 살폈다. 택시 기사는 계속해서 잔소리를 쏟아냈다.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데 그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너희가 사고 쳤어도 결국엔 내 책임이 될 텐데!”
니콜라스가 창밖으로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이 상황이 민망하고 머쓱한 모양이었다. 도현은 그 대신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해요, 미스터. 저희가 경솔했어요.”
택시 기사는 발화점이 낮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에게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제 얌전히 가자며 사정했다. 소년들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택시 기사의 화를 부채질하지 않으려고 반듯하게 앉아 있을 때였다. 툭, 하고 팔을 치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눈을 부라린 니콜라스가 보였다.
너. 때문. 이잖아.
그가 입 모양으로 벙긋거렸다. 도현은 뻔뻔한 낯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니콜라스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툭, 투욱, 툭, 툭.
팔꿈치로 서로를 찌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럴수록 화가 나기보다는 우스웠다.
니콜라스는 뺨을 꿈틀거리며 도현의 팔을 다시금 쳤다. 도현도 그의 팔을 치기 위해 팔꿈치를 들 때였다.
“…….”
“…….”
백미러를 통해 눈이 마주쳤다.
택시 기사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이마에 힘줄을 불룩거렸다. 그를 보던 도현은 천천히,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얌전히, 가자고, 했는데.”
안 통하네.
도현은 미소를 지우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하겠다는 의미로 입에 자크 채우는 시늉도 했다. 택시 기사는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다가, 운전해야 했기에 결국 다시 전방을 응시했다.
도현과 니콜라스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바른 학생처럼 얌전히 앉아 있었다.
* * *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택시에서 내린 니콜라스가 투덜댔다. 조금 부산스럽게 굴었기로서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냐며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다.
도현은 가만히 웃었다.
평소의 도현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내리고 나서 자신이 많이 들떠 있었단 걸 깨달았다. 평소답지 않게 굴 정도로.
그걸 니콜라스가 눈치채지 않아 다행이었다. 조금 부끄러우니까.
“우리 집은 7층이야.”
뉴욕 같은 대도시에는 아무래도 주택보다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많았고, 니콜라스 또한 샌디에이고 때와 달리 아파트에 살았다. 10층짜리 아파트였다.
“실례하겠습니다.”
도현이 중얼거리자 니콜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안에 아무도 없어.”
나르샤는 대학생이라서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아직 금요일 낮이었기에 니콜라스의 어머니, 엠버는 회사에 있었다.
도현은 햇빛이 아늑히 고인 거실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그래도.”
싱겁다는 표정을 지은 니콜라스가 앞장섰다. 도현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집 안을 구경하다가 물었다.
“나는 어디서 지내?”
“나르샤가 자기 방에서 지내도 된댔어.”
“그래도 돼?”
“안 될 게 뭐 있어?”
“성별이 다르니까 불편할 수 있잖아.”
그 말에 니콜라스가 뒤로 돌았다.
초록색 눈이 도현을 위아래로 훑더니 코웃음 쳤다. …왜 기분이 나쁘지?
“헛소리 말고 써. 서랍만 건드리지 않으면 다른 건 구경해도 된댔어.”
“응, 안 건드릴게.”
고분고분 답하니 니콜라스가 나르샤의 방으로 추정되는 방문을 열어주었다.
“어차피 볼 것도 없어. 봤다가 눈만 썩을걸.”
“그걸 어떻게 알아?”
니콜라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뒤져 봤으니까.”
“…….”
그래, 프라이버시란 게 없구나.
도현이 미지근한 표정을 짓든 말든, 당당한 니콜라스는 도현이 들어올 수 있게 몸을 비켰다. 도현은 나르샤의 방에 발을 들였다.
나르샤의 성격처럼 잘 정돈된 방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기찬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도현은 조심히 있다가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짐은 여기다 둬.”
짐을 풀고 있으려니 니콜라스가 뒤에서 서성였다. 도현은 그가 간식을 앞에 둔 강아지처럼 서성이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짐을 꺼내다 말고, 손을 깊숙이 집어넣어 무언갈 찾았다. 손끝에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도현은 그것을 곧장 꺼내어 니콜라스에게 내밀었다.
“선물이야. 그리고 미안. 게임기 같은 건 아니야.”
“네가 내 엄마냐. 나한테 게임기 사 주게.”
퉁명스레 답한 니콜라스는 선물을 받아 들었다. 까맣게 포장된 것이었는데, 그는 봐도 되냐고 묻지 않고 곧장 포장을 끌렀다.
어차피 나 준 건데, 뭐. 그런 생각이었다.
이윽고 선물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 니콜라스의 표정은 상당히 오묘해졌다.
“이거….”
“배송할 수도 있었는데, 그냥 직접 주고 싶었어.”
도현은 니콜라스의 안색을 살폈다. 막상 주고 나니, 괜한 걱정이 차올랐다. 선물이라고 말해놓고 음반을 줘서 실망했으려나.
도현에게는 의미가 깊은 물건이지만, 십 대 소년에게 보편적으로 가치 있게 여겨지는 물건은 아니니까…. 도현이 조금씩 자신감을 상실해 갈 때였다.
“…마음에 드네, 고마워.”
“진짜?”
믿기지 않아 되물었다. 니콜라스는 은근히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라, 고맙다고 말하는 때가 흔치 않아서 더욱 그랬다.
니콜라스는 도리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거짓말이겠어?”
“…아니.”
한 박자 늦게 답한 도현은 그제야 미소 지었다.
“다행이네, 마음에 들어서.”
“무려 연주자가 직접 준 음반인데 당연히 마음에 들겠지.”
“연주자라기엔 부족하지 않나.”
니콜라스가 음반을 흔들며 말했다.
“이거 완판된 거 다 알거든?”
약간은 민망한 기분에, 도현은 시선을 피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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