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598)
#제598화. 어느 여름, 태양 (11)
헨리가 씩 웃었다.
“다시 보는 건 몇 년 후일 줄 알았는데.”
“저도요.”
도현은 배우였고, 헨리는 음악가였다. 또한 도현은 한국에서 거주했으며 헨리는 미국에 살았다. 접점이 없는 두 사람은 헤어지면서 다시 만나는 때가 꽤 먼 미래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런데도 이별 인사가 요란스럽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알기 때문이었다. 헨리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도현이 바이올린을 놓지 않는 한은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음악은 이어져 있으니까.
‘실제론 몇 개월 만에 만났지만.’
헨리는 맞은편의 소년을 보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게 아니다 보니까 변한 부분은 없었다. 그날, 스튜디오에서 헤어진 그때 그 소년이었다.
“휴식기를 끝낸 건가요?”
“응. 쉴 만큼 쉬었으니까. 손이 간지럽기도 했고.”
도현은 헨리의 말에 공감했다.
무대에 선 헨리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 사람 같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빛나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무대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강한 것도 당연했다,
반면, 헨리는 다른 생각 중이었다.
‘자기 때문인 걸 전혀 모르는 눈치군.’
원래도 올해 안에 복귀할 예정이기는 했다. 다만, 이런 한여름이 아니라 늦가을쯤에.
이렇게 날짜가 당겨진 것은 도현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도현과 같이 연주한 일 때문에.
그와 주고받은 경험은 신선했다.
어린 소년이 악을 쓰고 부딪치며 덤비는 경험은 다소 지쳐 있던 헨리에게 활기를 부여했다. 덕분에 그는 오랜만에 아주 즐거웠다.
‘그랬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
슬럼프라고 부를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온 힘을 다해 콩쿠르를 준비했다가, 이후엔 쉴 틈도 없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니 조금 지쳤을 뿐이었다.
사람에겐 체력이라는 게 존재하니까.
그래서 조금 쉬려고 했던 건데, 결국 무대에 서고 싶은 욕망이 이성을 이겨버렸다. 오케스트라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로 불참하게 된 피아니스트를 대신하여, 급하게 협연 요청을 해왔을 때 승낙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따지자면 눈앞의 소년이었다.
“왜요?”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에 도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흰 낯은 그저 말끔했다. 그 악마적인 음악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무구하기까지 했다.
“낯빛이 좋네. 그간 잘 지냈나 봐.”
“못 지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헨리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래? 나는 피곤했는데 말이지.”
“네?”
“그것도 누구 때문에 말이야.”
“그 ‘누구’가, 설마 저인가요?”
헨리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눈을 끔뻑였다.
나 때문에 피곤했다고?
의문이 떠오른 앳된 낯에 헨리가 다소 과장된 태도로 말했다.
“음반이 발매되고 나서 연락이 얼마나 많이 온 줄 알아?”
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헨리는 당황한 소년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음반이 발매되고 나서.
그의 음악가 친구들은 넌지시 H가 누군지 물어왔다. 본디 궁금한 것을 못 참는 이들이니 거기까진 예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뉴욕의 클래식 매거진, 포르테 피아노 편집장의 연락을 받았을 땐 아무리 헨리라고 해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까지 전화를 한다고?
– 스테파노스 프로듀서에게 아무리 문의해 봐도 묵묵부답이더군요.
평소 헨리와 약간의 안면이 있던 그는 푸념했다.
프로듀서뿐만 아니라, [The Wanderer>에 참여했던 바이올리니스트인 왈트 레이먼의 전화번호까지 힘들게 알아내어 연락해 보았는데, 돌아오는 건 ‘모른다’라는 말 뿐이라는, 피곤함이 섞인 한탄이었다.
심지어는 리암 호프 감독에게도 연락했었다는 말에서 헨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의 집념이 놀라운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나한테 연락한 거군.’
헨리는 음악계의 생리를 잘 알았다. 그래서 편집장의 곤란한 상황도 얼추 추론할 수 있었다.
클래식 매거진은 다양한 이야기를 담긴 하지만, 그래도 업무의 중심이라고 하면 단연 ‘리뷰’였다. 그들은 리뷰를 통해서 신예 음악가를 발굴하고, 멋진 음악가들을 소개하며, 때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점이 생겨난다.
‘아무것도 알 수 없겠지. 국적도, 나이도, 성별도.’
현재 H의 정체는 음악계에서 꽤 흥미로운 화두다.
그러니 미국의 권위 있는 클래식 잡지인 ‘포르테 피아노’는 그 H가 누군지, 정확한 신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정체를 추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만약 프랑스 출신의, 흰 머리가 성성한 60대 거장이라고 말했다가,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열셋의 소년임이 밝혀지면 그러한 추측을 제시한 잡지의 위상이 추락할 테니까.
반대로 형편없는 아마추어라고 했다가 명성 있는 연주자였어도 곤란해진다. 어느 방향이든 포르테 피아노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음악계의 고질병이지.’
그저 들리는 대로 쓰면 될 텐데, 정체를 알지 못하면 리뷰조차 내지 못한다니.
이해는 되면서도 조소가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포르테 피아노는 시작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슬금슬금 다른 매거진에서도 연락을 취해왔다. 그들도 포르테 피아노의 편집장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
물론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매거진도 있기는 했다. 헨리는 그 잡지의 이름을 더듬더듬 떠올렸다. 아마 W로 시작했던 거 같은데….
아, W&W.
Wonder and Why의 약자인 이 W&W 잡지사는 클래식 전문 매거진은 아니고, 여러 코너 중에서 한 코너 정도를 클래식에 할애하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전문 잡지사보다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때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H’가 [The Wanderer>에 출연했던 어린 동양인 배우이며, 동시에 블록버스터 영화의 주연이 된 소년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증거로 도현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다. 그, 아이들끼리 밴드를 결성해서 만들었던 록 장르의 음악 말이다.
‘그리고 비난이 쏟아졌지.’
삼류도 못 될 가십지라며 어찌나 욕하던지. 진실을 아는 헨리로서는 동정심이 일 정도였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잡지사들은 ‘H’의 음반에 대한 평론을 싣지 않았다. 실어도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음반이 만들어낸 반향에 비하면 상당히 소소한 수준이었는데, 여러모로 웃지 못할 촌극이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도현은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나 흔들리는 동공에서 동요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딱, 사고를 쳐놓고 그게 얼마나 큰일인지 몰랐던 아이의 표정이었다.
“그런 줄은….”
말끝이 흐려졌다.
헨리를 흘깃거리는 시선에서 미안함이 담뿍 묻어났다.
헨리는 조금 기가 찼다.
‘크로이처 소나타를 연주할 땐 그렇게 물어뜯으려고 달려들더니.’
음악을 할 때와 평소의 이미지가 다른 음악가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독기가 싹 빠진 순둥한 얼굴을 보니 생경하긴 했다.
“그냥 말해버릴까 싶기도 했지.”
헨리는 말하고선 도현의 표정을 살폈다. 그 어디에도 불안해하거나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헨리가 쯧, 혀를 찼다.
“정말 놀리는 재미가 없어. 내가 말했으면 어쩌려고 그래?”
“제가 겪은 헨리는 그럴 사람이 아닌걸요.”
“그렇게 믿다간 크게 다친다?”
“괜찮아요. 주변 사람을 못 믿는 것보단 이게 낫….”
일순 헨리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도현이 우뚝 굳었다.
방금 내가 뭐라고 했더라?
“…….”
“기억하지?”
아주 집요한 시선이었다.
도현이 떨리는 눈으로 그를 보았지만, 헨리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도현은 느릿하게, 아주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무대 위에 선 헨리를 보는데, 정말 눈이 부셨어요.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까 더 멋지네요. 그냥 헨리가 멋진 사람이라서 어디에 있든 멋져 보이는 거겠죠?”
오랜만에 말하려니 어색하고 민망해서 귓불이 달아올랐다. 입술을 꾹 다물고 얼굴을 붉히는 모습에 헨리가 생글생글 웃었다.
“좋아. 봐준다, 내가.”
이미 다 말했잖아.
도현의 얼굴에 억울함이 차올랐다.
그러나 곧 표정을 수습했다.
“고마워요, 헨리.”
들어보니 상당히 귀찮은 일에 많이 휘말린 거 같았다. 그런 줄 전혀 모르고 있었던 도현은 조금, 사실 조금 많이 미안했다.
‘스테파노스에게도 연락해 봐야겠네.’
헨리가 저 정도라면, 스테파노스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은 스테파노스를 떠올리니 미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눈앞의 헨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녹음부터 시작해서 계속 도움만 받네요.”
“말했잖아. 나도 배운 게 있다고.”
“그건 헨리가 좋은 사람이라서 그렇고요.”
“나, 참.”
어이없다는 듯이 반응하던 헨리는 문득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러고선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사실 처음엔 실수를 조금 했어.”
“실수요?”
“나에 대한 인터뷰는 해봤어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론 해본 적이 거의 없어서 말이야. 그래서 약간의, 음, 말실수를 했지.”
“무슨…?”
“피터, 그러니까 포르테 피아노 편집장이 나한테 W&W 얘기를 꺼내길래…. 무심코 ‘어린애 실력은 아니죠.’ 하고 말했거든.”
헨리보다 인터뷰를 접할 일이 잦은 도현은 금방 그 상황을 이해했다.
헨리는 단순히 도현의 실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으로 말한 것일 테다. 그는 첫 만남부터 도현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굴었으니까.
그러나 편집장이 받아들이기엔 달랐겠지.
“내가 네 정체를, 어리지 않은 음악가로 넌지시 흘려준 줄 알더라고. 그래서 H의 후보로 좀 나이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중심으로 찾는 거 같던데.”
“…….”
“네가 봤을진 모르겠지만, 이번에 쓴 리뷰에서도 ‘노련함이 묻어나는 연주는 연주자의 관록을 짐작하게끔 한다’라는 문장이….”
도현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려버렸다.
“웃겨?”
헨리가 자못 화난 척을 했다.
그러나 누가 봐도 화난 ‘척’이었다.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곧 표정을 풀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웃어라. 내가 생각해도 조금 바보 같으니까 말이야. 피터 씨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속인 건 아니지만.”
그는 반쯤 포기한 태도로 말했는데, 도현은 큼, 헛기침한 후에 목소리를 갈무리했다.
“웃어서 죄송해요. 혹시 헨리한테 곤란한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죠?”
헨리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뭐, 실수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어린애가 아니다’라고 말한 건 아니잖아? 어린애 실력이 아니라고 했지.”
만약 피터라는 편집장이 본다면 꽤 울분이 치솟을 거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도현은 헨리의 편이었으므로 ‘헨리의 말이 맞아요’ 하며 얌전히 동의했다.
관심 밖의 일인지, 헨리는 금방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네가 촬영 중이라는 소리는 들었는데 말이야. 최근엔 그림도 그리면서 돌아다니는 거 같고.”
그 영상을 봤나 보네.
도현은 손가락으로 뺨을 살짝 긁적였다. 큰 고민 없이 올려도 된다고 말했던 영상이 생각보다 파장이 컸다.
그날 이후, 딱 한 번 이스트빌리지에 발을 들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모자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데도 누군가 알아보았을 정도였다. 그래서 두 소년은 아지트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연주는 안 하는 거야?”
“촬영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연기에 집중하려는데….”
말을 하던 도현이 멈칫했다.
“아, 최근에 뭔갈 제안받기는 했어요. 교장 선생님이 마을에서 열리는 기부의 밤에 공연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시더라고요.”
“대답했어?”
“생각해 본다고만요.”
“그럼 지금은?”
도현이 시선을 내렸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비어버린 찻잔이 보였다. 그러나 눈앞에 아른거리는 건 이틀 전에 갔던 공연장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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