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609)
#제609화. 어느 여름, 밤 (9)
파삭.
잔디를 밟는 소리에 웅크려 있던 소녀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물로 얼룩덜룩한 얼굴에는 놀람과 경계심이 가득했다.
도현은 산짐승을 발견한 사람처럼 조심스레 다가갔다. 하늘을 막아선 커다란 나무 아래를 지나자, 달빛이 까만 머리통 위를 둥글게 감쌌다.
에린의 눈이 커졌다.
“음, 안녕. 에린.”
도현이 멋쩍게 인사했다.
소년의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상황에 대한 어색함, 난감함, 그리고 서러운 낯을 향한 걱정과 약간의 후회.
“좋….”
‘좋은 밤이지?’라고 하려는 입을 빠르게 닫았다. 울고 있는데 대체 뭐가 좋단 말인가. 아무리 할 말이 생각 안 나도 그렇지.
“좋?”
“응? 아니. 달빛을 쫓아왔는데 네가 보이더라고.”
여전히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눈이 찌푸려졌다.
“너 나한테 관심 있어?”
도현은 자신의 말이 오해를 살 만한 발언이었음을 인정했다. 한숨을 내쉰 소년은 제 머리카락을 헤집다가, 에린의 반대편에 있는 나무 아래에 털썩 앉았다.
“사실 산책 중이었는데 우는 소리가 들렸어. 그래서 와본 거야.”
“구경하려고?”
도현이 황당한 눈빛을 했다.
“너 나를 뭐로 보는 거야?”
“킁, 아니면 말고.”
에린이 새침하게 말했다. 그러나 눈물을 퐁퐁 쏟고 있어서 별로 냉랭해 보이지는 않았다.
“누군지 봤으면 가. 난 더 울어야 하니까.”
“으응, 바쁘구나….”
“그래.”
도현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곧 결심한 사람처럼 숨을 내쉬었다.
“근데 에린.”
도현의 부름에 다시금 무릎에 얼굴을 파묻으려던 에린이 고개를 들었다.
“난 너인 거 알고 왔어.”
“너 나한테 관심….”
“있어.”
“뭐?”
설마 동의할 줄은 몰랐는지 에린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뺨에는 여전히 물기가 반들거리고 코끝은 붉었는데, 지저분하다기보다는 가엾고 안쓰러웠다.
“친구니까 당연하잖아. 아니면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야?”
도리어 되묻는 말에 에린이 입을 닫았다. 소녀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풍성한 머리카락에 얼굴이 가려졌다.
거부인가 싶었던 도현은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역시 모른 척하고 가는 게 맞았나.
그때였다.
“…너랑 나랑 친구야?”
웅웅, 뭉개진 소리였지만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 응.”
에린은 9학년이었다. 거기다 일 년 늦게 입학한 탓에 제 나이보다 한 학년 낮게 다녔다.
나이로만 치면 세 살 위였는데, 한국에서라면 이렇게 맞먹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여기선 별로 상관이 없었다.
“친구지. 너만 동의한다면.”
다시금 말하자 에린이 조용해졌다.
풀벌레 소리가 울렸다. 도현은 조용해진 상대에 한껏 당황했다. 친구인 게 싫은 건가? 실은 내가 마음에 안 들었나?
“그, 아니면 멘토와 멘티? 네가 나한테 승마를 가르쳐 주니까. 그것도 아니면 연구자와 관찰 대상….”
도현은 횡설수설하던 걸 멈췄다.
“으허엉!”
에린이 또다시 오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말을 말까. 도현은 아찔한 심정이 되었다.
“난, 믿었는데…. 훕.”
“…믿어?”
“믿어서, 흐끅, 기다리고….”
앞뒤가 뚝뚝 끊긴, 비슷한 말이 반복됐다.
도현은 저게 털어놓고 싶어 하는 건지, 그냥 되는 대로 뱉는 건지 판가름할 수 없었다.
“에린, 나한테 말하기 어려운 일이야?”
두서없는 말을 뱉던 에린이 멈칫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도현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얼굴을 와그작 일그러트렸다.
“걔도 약속 안 지키는데 왜 나만 지켜야 해?”
그건 질문은 확실히 아니었다.
도현은 어설프게 맞장구치는 대신에 에린이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혹은 어떤 결심을 내릴 때까지.
에린은 코를 훌쩍이며 생각에 잠겼다. 붉게 물든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담벼락 너머로 화려한 불빛이 어른거렸다. 그와 대비되는 골목은 어둑하고, 조용했다. 청년이 되어가는 소년은 불빛을 등지고 있었다.
반짝반짝한 불빛에 시선을 주자, 소년이 이쪽을 봐달라는 것처럼 팔을 잡아당겼다. 그때까지도 에린은 소년의 어깨 너머를 응시한 채였다.
– 에린, 왜 연락을 안 받아?
결국 참지 못한 아이덴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제야 에린의 시선이 눈앞의 소년에게 향했다.
– 모르지 않잖아.
아이덴이 입을 다물었다. 설핏 찡그린 눈가에 곤란함이 가득했다. 에린은 몇 번째일지 모를 좌절감에 속이 쓰렸다.
– 놔줘. 갈래.
– 에린!
아이덴이 다급히 에린을 붙잡았다. 늘 여유롭고 단정했던 얼굴에 떠오른 동요는 낯설었다. 저런 표정도 할 줄 알았던가, 하는 감상도 일었다.
– 제발. 알잖아, 에린. 할아버지는 주지사 자리를 원하고 계셔. 라이엇가가 없으면….
– 그래, 알아.
아이덴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더욱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야, 아이덴.
에린은 소년을 안아 달래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 이번 여름이 지나기 전에 파혼하겠다고 했잖아. 아이덴, 약속 지킬 수 있어?
– 에린, 화난 거 알아. 속상한 것도. 하지만 한 번만 내 말을 들어줘. 응? 제발. 부탁이야.
아이덴은 객관적으로 완벽한 연인이었다. 다정한 성정이라 화를 내는 일도 없었고, 타고난 것이 많아 늘 남들보다 여유로웠다. 아이덴은 어른 같았다.
그런데도 에린의 앞에선 장난스럽게 웃곤 했다. 저 미소를 독차지하는 게 자신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 아이덴.
– 응, 에린.
기대와 불안이 어린 갈색 눈동자는 여전히 사랑스럽다. 에린이 사랑에 빠졌던 그 눈동자 그대로였다.
하지만 에린은 더는 저기에 대고 마음껏 애정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콱, 막혔다.
에린은 제 목소리가 멀쩡하게 들리기만을 바랐다.
– 약속을 안 지킨 건 너야.
“…맞아, 먼저 어겼어.”
에린은 주어가 빠진 말을 중얼거렸다.
에린은 눈동자를 도륵 굴려 맞은편 나무에 기대앉은 소년을 보았다. 기억 속의 소년보다 훨씬 앳된 얼굴이, 모를 수가 없는 걱정을 한가득 담아내고 있었다.
지금 에린은 물이 가득 찬 컵이나 다름없었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넘칠 텐데, 저렇게 다정한 얼굴로 바라보니 어쩔 수 없이 서러워졌다.
“내가….”
입이 열리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됐지.
지끈거리는 두통이 그를 괴롭혔다.
아이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에린 헤데튼이 떠난 자리에. 그는 자신에게 속으로 속삭였다.
돌아올 수도 있잖아.
기다려야지. 이 어두운 골목에 두고 간 게 마음에 걸려서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으면 그땐 정말로 실망할 테니까….
소년이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켰다. 기다렸던 연락은 없었다. 대신에 몇 분 전에 도착한 거 같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
[릴리안 라이엇 : 학교에 왜 그렇게 빨리 간 거야?]하필이면.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아이덴은 종료 버튼을 누르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는 마치 골목길에서 죽은 유령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축제의 불빛이 하나둘씩 꺼져갔다. 희미하게 들리던 대화 소리도 멎어갔다. 수많은 사람이 골목 앞을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모두 집에 들어갔는지 조용해졌다.
마을이 적막해질수록, 아이덴의 얼굴도 점점 무표정해졌다.
그때 그대로 보내면 안 됐는데.
붙잡았어야 했다. 설마, 그렇게 가고선 정말 돌아오지 않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에린이 정말 더는 날 안 보려는 거면….
‘아니야.’
에린이 그럴 리가 없잖아.
아이덴은 에린이 자신을 여전히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에린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니까.
하지만, 실망한 그 얼굴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아이덴이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선뜩함이 온몸에 퍼졌다.
아이덴은 생각하기도 싫은 가능성을 하나 떠올려 보았다.
에린이 나를 떠날 수 있나?
부정하고 싶은데 자꾸만 이런저런 일들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에린이 그에게 반한 이유도 보잘것없었다.
그들이 처음 만난 건 승마장에서였다. 유수 가문의 자제들이 사교 활동을 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거기서 아이덴은 ‘말에 미친 이상한 여자애’를 보았다. 아이덴을 둘러싼 아이들이 에린을 보며 은근한 비웃음을 흘렸다. 동조하길 원하는 이들 사이에서 아이덴은 가볍게 웃었다.
– 글쎄. 내 눈에는 멋있어 보이네.
에린을 도와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물론, 정말 멋있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적’을 만들지 말라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좋은 사람인 척하는 건 쉬우니까.
그래서 그 말이 에린의 호감을 불러일으킨 것도 그에게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다만, 아닌 척 은근슬쩍 주변을 맴돌고, 혼자 있을 때면 부산스레 굴면서 주의를 끌려고 하는 건 조금 우스웠다.
가벼운 우스움, 그다음은.
– 안녕, 에린.
가벼운 인사에 피어나는 봄꽃처럼 활짝 웃는다. 속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투명한 표정이 신기했다.
신기해서 관찰했다. 하면서도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금방 끝날 호기심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에린은 알면 알수록 신기한 존재였다.
에린은 숨기는 게 없었다.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억지로 호의를 사려 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수치심이란 게 없는 건지 속상하면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 오열했다.
갑자기 파티 한 가운데서 우는 에린을 역병이라도 된 양 슬슬 피하는 사람들을 보며, 아이덴은 아주 오랜만에 웃음을 참느라 온몸을 떨었다. 옆에 있던 형이 괜찮냐고 물었을 땐, 솔직히 눈물을 흘릴 뻔했다.
– 너, 너 좋아해!
그래서 어느 날, 한낮 더위를 가득 쬔 얼굴보다 더 빨개진 채 고백해 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 비밀로 하면 좋겠다는 말에도 에린은 기뻐했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좋았다. 에린의 옆에서 아이덴은 솔직하게 웃고 장난칠 수 있었다. 왜냐면, 에린이니까.
그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란 건, 조금 늦게 알았다.
그러니까….
–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래?
집안 사정으로 성사된 약혼을 당연하게 이해해 줄 줄 알았던 에린이 예쁜 얼굴에 배신감을 띄웠을 때.
아이덴은 에린이 조금 충격받더라도 결국엔 이해해 줄 줄 알았다. 결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약혼 관계를 잠깐 유지하는 것뿐이니까.
조금 서운하더라도, 그래도 나를 좋아하니까. 잘 달래고, 평소보다 더 잘하면 결국엔 마음을 풀어줄 거라고….
– 약속을 안 지킨 건 너야.
낯설도록 매정하던 목소리가 심장을 들쑤셨다.
아이덴은 한번 무언가에 빠진 에린이 얼마나 열정적일 수 있는지 알았다. 무척 사랑스럽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지금은 더없는 불안으로 다가왔다.
그 열정이 식었을 때 모습이 도저히 상상되지 않아서. 별것 아닌 일에 꽂혔다면, 돌아서는 것도 쉬울지 모르니….
아이덴이 긴 숨을 내쉬었다.
그가 골목을 빠져나왔을 땐, 평소처럼 반듯한 표정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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