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610)
#제610화. 어느 여름, 밤 (10)
“그… 음.”
요즘 애들은 다르구나.
도현은 저도 모르게 한 스물여덟은 되었을 법한 사람처럼 생각했다.
에린이 옷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도현은 휴지나, 하다못해 손수건이라도 주고 싶었지만, 그런 게 지금 있을 리가 없었다. 애매하게 쳐다만 보는데 훌쩍거리던 에린이 물었다.
“넌 아직 사랑이 뭔지 모르지?”
“…으응.”
“언젠가 하게 될 거야. 그래도 나처럼 다른 사람이랑 약혼하는 자식이랑은 하지 마.”
도현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지 않을까?
현실은 영화보다 더하다더니. 딱 그런 경우였다.
“에린, 아이덴은 왜 너랑 만나는 걸 비밀로 한 거야?”
“몰라.”
“모른다고?”
“생각 안 했어. 그냥 아이덴이랑 있는 게 좋아. 다른 사람이 알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도현은 드물게 말문이 막혔다.
“데니도 가끔 물어보던데….”
에린은 뺨을 기울였다.
호수 뒤편은 둘만의 데이트 장소였다. 에린은 마사가 아니면 늘 그곳에 가 있었다. 그날도 호수로 가자, 나무 둥치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는 아이덴이 보였다.
에린이 아이덴의 다리에 머리를 대고 눕자, 아이덴이 가만가만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새소리와 잔잔한 물결의 반짝임, 들풀이 흔들리며 나는 냄새. 그리고 그 풍경을 지탱하는 소년은 이따금 묻곤 했다.
– 에린, 너는 우리 관계를 비밀로 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 응? 응.
– …아무렇지도 않다고?
– 응!
활기찬 대답에 아이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는 무어라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곧 말 대신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선 어쩔 수 없다는 듯,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 그래. 다행이다.
그런 순간이 문득 떠올랐다.
에린은 그 후에 아이덴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준 일을 머릿속에서 지워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젠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밤, 호숫가에서 분명 약속하지 않았던가. 약혼은 원해서 성사된 일이 아니라고. 이번에 집에 가게 되면 파혼하고 오겠다고.
하지만 에린이 들은 소식은, 그가 약혼자와 무척 돈독해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함께 식사도 하고 파트너로 파티도 참석했다고.
…속에서부터 열이 들끓었다.
에린은 옷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댔다. 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게 울어서인지, 아니면 거친 마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말릴 새도 없이 터프하게 얼굴을 닦아낸 에린이 주먹을 꽉 쥐었다.
“나쁜 놈. 개자식. 약속도 안 지키는 비열한 놈!”
도현은 친구들이 바르고 고운 말을 쓰는 걸 좋아하지만, 이번만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린의 분노는 타당했다. 그리고 이렇게 화를 내서라도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천하에 다시없을 쓰레기! 레이나도 먹다 뱉을 거야!”
“…….”
좀, 과열되는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도현은 맞장구치지도, 그렇다고 말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그녀의 분노를 들어주었다. 사실 도현이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밖에는.
그 순간.
에린이 번뜩이는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목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너 배우잖아. 그렇지?”
“그, 렇긴 한데….”
“있지, 연기라 생각하고 남자 친구인 척….”
“…하기엔 아무도 안 믿지 않을까. 우리 세 살 차이야.”
성인이라면 세 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한창 자라는 청소년 시기에는 꽤 체감이 컸다.
“아이덴보다는 네 살 어리고.”
아이덴이 자신을 경쟁자로 여기기나 할까.
게다가 나이를 떠나, 아이덴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에린과 자신이 거짓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에린도 배신감에 눈이 멀어 홧김에 꺼내본 말인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트렸다.
도현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도와주진 못하지만, 힘들 땐 언제든 말해. 난 들어주는 건 잘하거든. 네가 원한다면, 지금처럼 옆에 있을 수는 있어.”
그리고 덧붙였다.
“아, 내가 다른 사람한테 말할 걱정은 하지 마. 그렇게 입이 가볍지는 않아.”
우물쭈물하던 에린이 말했다.
“…고마워.”
그때쯤, 에린은 조금 진정한 기색이었다. 사실 시간으로 보면 오래 걸린 편이었다. 도현이 이곳에 도착한 후로 세 시간이 넘게 흘렀기 때문이었다.
하늘은 오히려 환해졌다. 새카만 밤을 지나서, 조금씩 희끄무레한 빛이 밝아져 오고 있었다.
에린은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에 붙어 있던 풀들이 나풀나풀 떨어졌다.
“난 이제 레이나만 신경 쓸 거야. 레이나만 사랑할 거라고. 아이덴 같은 건 필요 없어!”
기승전 레이나가 된 상황에 도현은 감탄했다.
뜬금없지만, 레이나를 향한 사랑이 진심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아마… 그 레이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아이덴을 더 좋아했던 거 같고.
문득, 도현은 아이덴이 가엾어졌다.
조건 없는 사랑, 이타적인 애정, 순수한 맹목. 그렇게 자신을 내던져 가며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자신을 상대에게 넘겨줄수록, 가리는 것 없이 투명하게 내비칠수록, 거부당하고 상처 입을 때 더욱 고통스럽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린은 그렇게 했다.
그걸 당사자인 아이덴이 몰랐을 리가 없다.
도현은 에린이 말하는 남녀 간의 사랑은 모르지만, 적어도 애정은 잃었을 때 더욱 괴롭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런 면에서 아이덴이 어리석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인지 모르는 점이.
도현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자신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두지 않을 거였다.
어떻게 해서든.
“레이나…. 보고 싶다. 흐윽.”
“…왜 우는, 아니, 그래. 그럼 마사에 가자.”
“아냐. 레이나 자는데 깨우면 어떡해. 우리 레이나 수면이 얼마나 중요한데.”
“수면은 중요하지. 그러면 기숙사에….”
“하지만 보고 싶다, 레이나….”
“…….”
일단 이 상황부터 어떻게 해야겠지만.
* * *
그날 이후로 에린은 기숙사에 콕 박혀서 나오지 않았다. 아이덴은 에린의 기숙사 근처를 맴도는 것 같긴 했지만, 들어가지는 못하고 속만 끓는 거 같았다.
그리고, 의외로 아이덴과 접점이 많아진 사람은 도현이었다.
“여기에 너밖에 없었어?”
“…네.”
“종일?”
“네.”
에린이 외출을 끊으며 도현에게 레이나를 돌봐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그날 밤, 잠깐 기다리라며 방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토이즈 사과 맛 쿠키를 건네기까지 했다.
처음엔 설마 토이즈 사과 맛 쿠키로 레이나를 꼬셨냐고 경계하던 에린이었다. 그런 에린이 제게 말 쿠키를 맡기는 모습에, 도현은 감회가 새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남들에겐 그냥 말 쿠키일지 몰라도, 에린에게 있어선 무척 중요한 거일 테니까. 그게 에린이 자신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었다는 소리 같아서, 조심스럽게 쿠키 봉지를 받았다.
– 잘 돌볼게. 사진도 보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에린.
어차피 말들을 돌보는 건 승마 클럽의 일이기도 해서, 도현은 쉬이 수긍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현은 아이덴이 하루에도 두세 번씩 마사에 방문할 줄은 몰랐다. 처음엔 당황했던 도현은, 곧 아무렇지 않게 아이덴을 맞이할 수 있었다.
도현은 마방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아이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차림새는 흠잡을 곳 하나 없이 반듯했지만, 조금 까칠해진 피부와 눈 밑에 약하게 진 그늘이 눈에 띄었다.
그조차도 아이덴이 평소의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면 가려져서,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었다.
“누구 찾으세요?”
아이덴은 잠시 갈등하는 듯한 눈빛으로 도현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도현은 더 말을 얹지 않고 수긍했다.
다시 레이나를 쓰다듬어 주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 말이랑 친해?”
“네.”
“어떻게 친해졌지?”
“처음 볼 때부터 절 좋아했어요.”
“뭐?”
아이덴이 눈썹을 휙 들었다.
“이유 없이?”
“네.”
“나한테는 관심이 없는 거 같은데.”
“사람을 가리더라고요.”
아이덴이 말없이 도현을 쳐다봤다. 도현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곧 한숨을 내쉬곤, ‘그래, 그런가 보네.’ 하고 등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본 건 조금 힘없어 보이는 등이었다.
도현은 그가 나간 문 쪽을 응시하다가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도현은 마지막 남은 방학을 꽤 조용하고, 나른하게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상황까지 조용하고 나른한 것은 아니었다.
“장, 이거 봤어?”
소파에 늘어져 있던 장은 동료가 내민 것을 흘깃 보았다. 그의 목과 팔에는 문신이 가득했고, 걸친 건 목이 늘어난 흰색 민소매였다.
그가 상대가 건넨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 손가락에도 문신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동료가 보여준 것은 한 인스타였다.
“뉴스에 나와서 봤더니, 그림이 나쁘지 않더라고.”
Cafe East Underground. 장은 천천히 그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영상도 한번 재생해 보았다. 그의 시선은 소년이 아닌, 소년이 그린 캔버스와 그 너머의 벽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게.”
가볍게 말한 장은 태블릿을 도로 돌려주고 제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치기 시작했다.
“뭐 하게, 장?”
내내 누워 있던 장이 몸을 일으켰다.
“이런 협업도 한 번쯤은 재밌을 거 같아서.”
그리고 그 시각.
어쩌다 보니 파리 풀풀 날리던 가게에서 이스트빌리지의 명물이 된 Cafe East Underground의 주인, 안토니는 깜짝 놀랐다.
그에게 연락한 이의 이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 바이어.
본래 ‘No one’의 크루원으로 유명해졌다가, 이후 크루에서 독립하면서 개인적인 명성을 쌓은 이. 유명한 스포츠 브랜드와도 종종 협업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젊은 그래피티 아티스트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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