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620)
#제620화. 어느 여름, 밤 (20)
[경계. 마사로 접근 중. 동쪽 방향 200m.]벌떡!
에린이 쿠키를 주다 말고 발작하듯 일어나자 레이나가 앞발을 들어 올렸다. 툭 떨어진 쿠키가 발굽에 눌려 부스러졌다.
“미, 미안. 레이나.”
평소라면 목덜미도 쓸어주고 온갖 달콤한 말을 쏟아 냈겠지만, 오늘은 여유가 없었다.
에린은 사과의 말을 빠르게 뱉은 뒤 허둥지둥 우리를 빠져나갔다. 손으로는 타자를 누르는 걸 잊지 않았다.
[후문? 정문?] [후문. 천문대로 향하는 길목 이용 추천.]에린은 곧장 후문으로 향했다.
텅,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울리다가 사라졌다.
갑작스레 홀로 남은 레이나는 불만스레 발을 굴렀다.
매일 쿠키를 주고 빗질을 해주던 인간이 며칠 동안 코빼기도 안 보였던 것도 모자라, 오늘은 쿠키를 주다 말고 나갔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레이나가 배신감에 콧김을 뿜을 때.
새로운 기척이 들렸다.
레이나의 고개가 불쑥 올라갔다.
다시 돌아온 건가?
그러나 곧 까만 눈동자에 실망이 깃들었다.
뭐야, 뺀질한 인간이잖아.
흥미가 식은 레이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막 마사에 들어선 소년은 천천히 안을 둘러보았다.
꽈악, 주먹을 쥔 손등에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늘 우아한 낯을 하던 소년이 드물게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또.
또다시, 또!
아침에 없던 쿠키 부스러기가 말발굽 근처에 떨어져 있는 걸 보아 에린이 있었던 건 확실했다. 그런데 옷자락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기실, 아이덴이 학교에 돌아온 내내 이러했다.
매번 간발의 차이로 놓쳤다.
카페테리아에서 껍질만 남은 햄버거 포장지를 봤을 때도, 기숙사 정문에 서 있으면 후문으로, 후문에 서 있으면 정문으로 빠져나갔을 때도, 자주 지나가는 복도에 서서 기다렸는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다른 복도로 이동했을 때도.
그리고 지금, 쿠키 부스러기만 남은 마사에서도.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아니, 학교에는 있을 거야.’
어제 복도에서 에린을 기다릴 때.
원하던 이를 보지는 못했지만, 평소 에린과 친분이 있던 벡 우더슨을 마주쳤다. 그에게 자연스럽게 인사한 아이덴은 그의 입에서 에린의 근황이 흘러나오도록 유도했다.
단순한 편인 벡은 아이덴이 원하는 정보를 들려주었고, 아이덴은 에린이 여전히 학교에 있다는 걸 확인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주치지를 않는 건지.
누가 숨통을 쥔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아이덴은 평소 단정히 하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늘어트리고 단추도 두어 개 끌렀다. 그런데도 여전히 갑갑함이 목을 조였다.
아이덴은 눈을 감으며 벽에 기대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느라 엇갈린 거라면 종일 이곳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오늘도, 내일도, 그 이후로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에린만 온다면.
가는 숨결이 흘러나왔다.
눈을 감은 소년의 얼굴이 무척이나 파리했다. 눈가는 창백했고, 입술은 석상처럼 단단하게 다물려 있었다. 늘 온화한 봄바람같이 웃던 소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삭막했다.
아이덴은 후회하는 법이 없었다.
그가 배운 것은 후회하며 흘러가는 과거를 손에 쥐어보려고 애쓰는 일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최선의 수를 두는 기사였고, 실수는 또 다른 수를 찾아내는 기회에 불과했다.
그런데….
‘약혼하지 말았어야 했나.’
어리석다고 비웃었던 짓을 하고 있었다.
너무 멀리 흘러와 버린 지금은 단순히 약혼을 깨트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와 사업이 모두 그물처럼 촘촘하게 얽혀 있었다.
하지만, 약혼을 하기 전이었다면.
만약 그때 조부께 할 수 없다고 뜻을 밝혔더라면.
비록 가족은 그를 철없이 여기거나 한심하게 보았겠지만, 방법은 있었겠지. 릴리안과 나이대가 비슷하여 그가 선택된 거지만, 약혼하지 않은 사람이 자신뿐인 건 아니었으니.
아이덴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는 짙은 피로로 물든 눈가 주변을 문지르며 생각을 곱씹었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그런데 되돌릴 방법을 모르겠다고.
* * *
“아직도 거기 있어?”
“응.”
“하아.”
에린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녀는 무릎에 머리를 박고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다가, 고개를 빼꼼 들며 물었다.
“지금도?”
“응, 미동이 없는 걸 보니 계속 기다릴 모양인데.”
“미치겠네.”
에린이 중얼거릴 때였다.
“거기, 두 사람. 소곤소곤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거야?”
새침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로즈마리였다.
학기가 시작돼도 헤레이즈와 신시아는 돌아오지 않았다. 날씨 때문에 촬영이 몇 주 밀렸다는 거 같았다.
첫 시즌을 촬영할 때도 비 탓에 촬영이 미뤄진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도현은 금방 이해했다.
그들의 귀환이 늦어지면서 뒤로 밀린 건 도현의 촬영 일정뿐만이 아니었다. 약속했던 이끼를 위한 연주회와 로즈마리의 식사모 활동도 뒤로 밀렸다.
도현이 로즈마리에게 양해를 구해 온실의 클럽 활동 공간을 빌리게 된 것도 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아이덴을 피하려면 그가 모를 만한 곳에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아이덴이 에린의 동선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에린이 자주 가는 곳 중에서 ‘아이덴이 모를 만한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매번 기숙사 방 안에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었다. 본관에서 기숙사까지의 거리가 꽤 멀어,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마다 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식사모 활동 공간을 임시 아지트로 빌리게 된 것이다.
“별 얘기 아니었어.”
“흥. 시간 남으면 거기 있는 화분 분갈이나 해.”
“이 화분 말하는 거야?”
물론 조건이 있었다.
임시 식사모 부원으로 활동하는 것.
“거기 있는 아스파라거스 나누스랑 드라세나 마지나타 분갈이해 줘야 해. 요즘 성장이 더뎌서.”
도현은 화분을 유심히 살폈다. 줄줄이 늘어선 화분 중에 뭐가 아스파라거스고 뭐가 마지나타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도현의 손이 길을 잃고 방황하자 로즈마리가 말했다.
“파란색이랑 노란색 화분.”
“아.”
깨달음을 얻은 도현이 두 화분을 빼두었다.
그사이 에린은 벌써 분갈이용 흙과 세척 마사, 깔망과 모종삽을 가져온 채였다. 그녀는 교복에 흙이 묻는 걸 조금도 상관하지 않은 채 바닥에 앉아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흠, 흠.”
로즈마리가 흡족한 눈길로 에린을 보았다. 탐나는 일꾼을 발견한 자의 욕망이 눈동자에 어려 있었다.
얼굴에 호감이 가득하면서, 로즈마리는 아닌 척 새초롬히 말했다.
“큼, 꽤 재주가 있네.”
“…….”
“긴 뿌리는 조금 잘라내서…. 그, 그래. 알아서 잘하네.”
옆에서 로즈마리가 기웃거리든 말든 에린은 묵묵히 할 일만 했다. 누가 봐도 관심을 달라는 표정으로 어슬렁대는 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기색이었다.
도현은 두 사람을 보며 애매하게 웃었다.
‘신경이 온통 아이덴에게 쏠려 있으니….’
무반응인 에린에게 자꾸 말을 거는 로즈마리가 조금 안쓰러워 보여서, 도현은 그녀가 무안하지 않게 입을 열었다.
“로즈마리. 이거 이 정도면 넣으면 되는 거지?”
“응? 응. 딱 좋네.”
그 후로 그들은 한참 열중해서 분갈이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지구가 30° 정도 회전했을 즈음, 그들은 일을 모두 마치고 정리까지 깔끔하게 끝냈다. 온실 밖으로 나오자 하늘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에린은 도현을 쳐다보았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아이덴이 마사에 있다는 뜻이었다.
에린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다가, 곧 우울하게 시선을 떨궜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 * *
“너 요즘 핸드폰을 달고 사네.”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이었다.
테오도르가 도현을 보며 말했다.
“여자 친구 생겼어?”
“아니?”
“아니긴 뭘.”
도현의 대답을 가볍게 무시한 테오도르가 관심을 보였다.
“누구야? 우리 학교? 그런데 네가 친하게 지내는 여자애가 로즈마리랑 신시아 말고 또 있나?”
“아니라니까.”
“아, 걔도 있지. 에린 헤데튼.”
“테오도르.”
“생각해 보니 진짜 그러네. 걔는 너 말고 친하게 지내는 남자애도 없지 않아?”
도현이 대답하지 않아도 테오도르는 알아서 북도 치고 장구도 쳤다. 그는 도현이 보내는 열렬한 눈길을 눈치채지 못하고 입을 움직였다.
“에린이면 괜찮지. 성격이 독특하긴 해도 예뻐서 좋아하는 애들 많잖아. 승마 클럽 가입했던 놈 중 절반은 걔 때문이었을걸? 말 말고는 관심이 없어서 다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테오도르, 조용히 좀….”
“너도 걔 때문에 승마 클럽 들어간 거야?”
도현은 아찔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떴다.
‘…너무, 티 나게 노려보는 거 아닌가.’
조금 떨어진 곳.
골든이글 무리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이덴이 도현을 맹렬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도현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삼키며 부러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다 틀렸어. 걘 그냥 친구야.”
말하면서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자괴감이 일었다.
테오도르가 피식 웃었다.
“다들 처음엔 그렇게 말해. 근데 이성 사이에 순수한 친구 관계가 있다는 게 말이 돼?”
시선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진짜, 테오도르….”
앓는 소리를 내자 테오도르가 반문했다.
“뭐, 왜?”
“…아냐.”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에게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아이덴의 시선은 도현이 카페테리아를 나갈 때까지도 뒤통수를 따라붙었고, 도현은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현은 본의 아니게 연적 비슷한 무언가가 된 상황에 한탄하면서도, 이 일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얘기 좀 해.”
너나 할 것 없이 시선이 쏠렸다.
에린은 얼음 동상처럼 얼어붙어 상대를 보았다.
‘어떻게…?’
머릿속엔 그 단어만 둥둥 떠올랐다.
에린이 그간 아이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아이덴이 교실에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년마다 수업 시간이 달라서 수업이 끝나기 전에 아이덴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에린도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덴은 그러지 않았고, 에린도 그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계는 여태껏 비밀이었으니까.
그런데 아이덴이 교실 문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녀를 직시하면서.
아이덴 커티스와 에린 헤데튼.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교실에 있던 아이들은 물론, 복도를 지나가던 이들의 시선까지 모이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선 아이덴은 에린만 쳐다보았다.
에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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