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636)
제636화. 홈커밍 위크 (15)
네이선이 정지했다.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버벅대다가 간신히 입술을 뗐다.
“…….”
그러나 흘러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네이선은 너무 당황하면 목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기쁜 깨달음은 아니었다.
그런 네이선 대신에 낸시가 나섰다.
“하, 하던 걸 이어서 하라고 했잖아. 그건 뭐야?”
맞아, 그랬지!
얼이 나가 있던 부원들이 정신을 차렸다. 기대와 불안이 담긴 시선이 도현을 향했다.
도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너희끼리 투표하는 것까지 내가 뭐라 할 수는 없잖아.”
맞는…. 맞는 말이긴 한데.
어째서인지 억울해지는 기분이었다.
부원들의 얼굴에 대롱대롱 매달린 억울함에 도현이 짧게 웃었다.
“대답했으니까 이제 가도 돼? 바쁠 텐데 내가 방해되는 거 같아서.”
와장창.
어디선가 투명하고 얇은 것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희망이었다.
낸시는 아연한 낯으로 하얀 소년을 보았다.
그녀는 연극 진행을 찬성하는 오른편에 서 있었다.
그곳에 가서 설 때까지만 해도 도현의 거절은 예상에 없었다.
어떻게 그토록 확신했는지 의아한 한편, 마음 한구석으론 납득했다. 그간 소년은 무척 친절했으니까.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게 될 정도로.
다른 부원들도 비슷했겠지.
그런데 도현이 선을 그었다.
속에서 치솟는 건 당황뿐만이 아니었다. 낸시는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드는 서운함을 인식했다.
동시에 창피해졌다.
‘저 애는 이걸 다 알고 있었을까?’
이 속내가 낱낱이 꿰뚫리고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타박타박.
셀린은 왼쪽으로 향했다.
자연히 오른쪽에 서 있던 낸시와 마주 보는 구도가 되었다.
낸시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옆에 네이선을 비롯한 세 명의 부원이 있었고, 셀린의 옆에도 세 명의 부원이 있었다.
이렇게 되면….
낸시의 생각을 읽은 듯 셀린이 말했다.
“우리 투표는 무효야. 애초에 순서가 틀리기도 했고, 제대로 했더라도 결국 동점이 나왔을 테니까.”
부원들은 반박하지 못했다.
네이선과 낸시도 고개를 떨궜다.
반기기는 어려운 결과였지만,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막무가내로 조른다고 해서 들어줄 거 같지도 않고.
도현은 더는 자신을 붙잡을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희고 단정한 얼굴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그러나 미안함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들어줄 수 없었던 일인데.’
그런 안타까움이었다.
그들이 바라는 게 어려운 일이라서는 아니었다.
물론 어렵긴 하다. 다만 ‘어려움’과 ‘불가능’은 달랐다.
도현은 이들의 부탁을 어렵다고는 여기지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처음부터 들어줄 수 없던 이유는….
‘당사자가 아니잖아.’
도현은 배우에게 배역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았다.
그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체가 없다고 해서 가치가 흐려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실체를 파악하고 형체를 그려내기 위해 몰두하게 된다.
그렇게 몰두하다 보면, 더는 얼굴에 덮어쓰는 가면 따위가 아니게 된다. 그건 이제 나를 구성하는 일부분이었다.
그래서 연극부의 간절함과 좌절을 알아도 들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무의미한 행위였다고 말해줄 필요까지는 없었다. 눈을 한번 깜빡이는 것으로 안타까움을 지워낸 도현이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얘기가 끝난 거 같네. 그러면 일이 잘 해결되길 바랄….”
– 쾅!
도현의 말은 완성되지 못했다.
휘둥그레진 눈 여러 쌍이 거칠게 열린 문 너머로 향했다. 복도에서 쏟아진 빛이 역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빛을 등진 사람은….
‘어?’
‘내 눈이 맛이 갔나?’
부원들은 잠시간 제 눈을 의심했다.
마찬가지로 제 눈을 의심하던 셀린은 금방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었다.
“저… 병원에 얌전히 있어야 할 애가 왜 여기 있어!”
“…부장.”
상대가 침착하게 셀린을 불렀다.
알치였다.
“…야! 잡히면 죽는다고 했지!”
뒤이어 피어스와 소피아도 도착했다. 그들은 달려온 것인지 숨을 헉헉거리고 있었다. 알치는 그들을 피해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앞에는 셀린이 있었다.
“알치 갤러거! 내가 병원 가랬지!”
“알, 후, 알아요.”
“알아? 아는데 여길 와?”
셀린은 진심으로 분노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알치가 결국 병원에 가라는 말을 무시하고 무대에 서겠다며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린 셀린이 으름장을 놓았다.
“이런다고 무대에 올라가게 해줄 거 같아? 당장 병원 가. 아니면 여기로 구급차 불러줘?”
“이거 가지고 무슨 구급…. 아니, 됐어요.”
알치는 셀린 쪽을 외면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머릿속엔 공연장에 오기 전의 과정이 재생되었다.
– 그건 좀, 너무 낙관적인 생각 아닌가?
그 말을 들었을 때.
뒤통수를 거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낙관적이라고. 그러니까, 걔가 무대에 올라갈 리는 없다고.
…무대가 기어코 취소된다고?
마지막 생각에 닿은 순간, 알치는 더듬더듬 말했다.
– 가, 가야겠어요.
– 많이 아파? 그러니까 병원부터 가자니까. 아무튼 빨리 가자. 앞에 차가 도착했다고 하니까….
피어스가 부축이 필요하냐는 둥 헛소리를 지껄였다. 알치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예고도 없이 튀어 나갔다.
설마 벌써 가진 않았겠지?
– 야, 야! 아악! 저 미친놈!
한 박자 늦게 상황을 파악한 피어스가 욕을 쏟아부으며 따라왔다.
하지만 상황을 설명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 잡히면 죽는다, 이 새끼야!
알치는 조금 더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리고 마주했다.
창백해져서 땀을 줄줄 흘리는 자신과 달리 땀 한 방울 나지 않은 단정한 소년을.
알치는 울렁이는 속을 붙잡고 그에게 다가갔다.
얄미웠다.
알치가 몇 달간 연습했던 걸 단숨에 파악해 버리는 게. 그가 연기를 하면 다른 부원들이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게.
…알치 자신까지도.
그만큼은 할 수 있어야 작년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눈앞에 높은 산이 있는 걸 봐버린 이상 느긋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을 채찍질했고, 결과적으론 제일 멍청한 짓이 되었다.
따라가려고 하면 안 되었던 걸까?
그런 의문이 뇌리에 피어났다.
그러면서도 알치는 도현의 바로 앞까지 가서 섰다.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다른 부원들과는 달리 그리 놀란 기색도 아니었다.
알치는 입을 열었고.
“우욱.”
그대로 틀어막았다.
도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
싸한 긴장감이 공연장에 내려앉았다.
얇은 고무줄을 늘인 거 같은 긴장 어린 침묵이 깨진 건.
“…웁!”
알치가 두 번째로 구역질 소리를 냈을 때였다.
“…미친!”
“야, 야. 누가 봉지 가져와!”
“아악, 거기선 안 돼! 토할 거면 차라리 피어스한테 해!”
“방금 어떤 새끼야!”
아수라장 속에서 부원들의 각기 다른 외침이 울려 퍼졌다.
* * *
도현은 주춤주춤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부원들의 처절한 노력으로 안전히 화장실로 배송되었던 알치가 푸르죽죽한 낯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좀 괜찮아?”
“…어.”
알치는 도통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도현은 그 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병원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 전에 해야 할 게 있어.”
도현은 관객석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알치 뒤에 선 부원들을 훑어보았다.
남자 화장실에 따라가지 못하고 공연장에 남아 있었던 여자 부원들은 걱정 어린 안색으로 알치를 보았다.
여전히 알치가 무대에 서고 싶어서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셀린이 입을 열려던 때였다.
“무대에 서달라고?”
알치를 비롯한 남자 부원들이 놀란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그들은 화장실에서 알치의 등을 두들겨주고 욕으로도 두들겨주며, 알치가 무리하여 돌아온 이유를 들은 참이었다.
하지만 공연장에 있던 도현은 몰랐을 텐데.
“…뭐? 그거 때문이라고?”
역시, 셀린은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나 도현은 담담했다.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
“…그래.”
“네 역할이잖아.”
“그것보다 연극부가 더 중요해.”
대답하면서 알치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토록 무대에 열중한 건 연기보단 부원들이 좋아서였다는 걸.
눈앞의 할리우드 배우는 무엇 때문에 연기하는지 몰라도 알치는 그랬다. 알치는 연극배우를 할 것도, 그 비슷한 일을 할 것도 아니었다.
소년은 외동아들이었고, 가업을 잇는 게 당연했다. 알치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불만 또한 없었다. 그게 알치가 그리는 미래였다.
학창 시절 속에서 스쳐 지나갈 클럽 활동에 이토록 진심이 되어버린 건 소년으로서도 의외였다.
“내가 왜 도와줘야 해?”
알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답했다.
“나도 네 도움을 구걸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피어스가 기함했다.
알치는 뒤통수가 뚫릴 거 같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갤러거야. 주요 신문사는 물론 잡지사, 방송사도 우리와 관련 있지. 나는 이 일을 이을 거야. 그리고 너는 앞으로 더 유명해질 테고.”
부장이나 부원들은 저 애의 호의를 바라는 거 같았지만, 알치는 아니었다. 알치는 처음부터 부탁할 생각이 없었다.
부탁할 이유가 없으니까.
갤러거는 커다란 언론 기업체를 굴리는 가문이었고, 알치는 단 한 순간도 그 가치를 잊은 적이 없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언론이 네 편이었으면 할 때가 올 거야. 그때 연락하면 한 번은 네 입맛대로 움직여 줄게.”
“어디까지 할 수 있는데?”
도현의 질문에 알치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너도 멍청한 소리를 하네.”
그는 미소를 지우고 도현을 쳐다보았다.
아픈 안색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부터 자부심을 교육받은 태가 났다.
“살인도 감추는 게 언론이야.”
“…….”
“물론 난 그런 건 별로 안 좋아해. 아무리 무대가 중요해도 이 정도 리스크는 수지타산이 안 맞기도 하고.”
알치가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르든, 살인만 아니면 한 번의 기회가 있다는 소리야.”
“…거래하자는 거야?”
“그럼 무슨 말로 들었는데?”
알치의 반문에 도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알치는 도현이 거절하리라 여기지 않는, 자신감 넘치는 눈빛이었다. 아픈 와중에도 그의 눈빛만큼은 명료했다.
도현은 헛웃음을 삼켰다.
소년은 눈치가 대단히 빠른 편이었고, 알치가 돌아온 순간부터 그의 목적 정도는 짐작했다. 표정을 읽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그리고 알치가 화장실에 있는 동안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하기도 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렇게 거래를 제안할 줄은 몰랐다.
정말, 이 학교 애들은 하나같이 범상치가 않았다.
그렇지만 알치의 제안이 매력적이란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현은 언론에 시달려 보았을뿐더러, 숨기고 싶은 게 꽤 많은 편이었으니까.
솔직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아이들이 울상을 지었다.
도현은 찡그리듯 웃으며 말했다.
“좋아.”
“!”
“하자, 거래.”
“그럼…!”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안색을 밝히던 알치가 도로 미간을 좁혔다.
“뭔데?”
“당장 병원 가.”
“…….”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