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638)
제638화. 홈커밍 위크 (17)
와아아!
경기장을 둘러싼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험상궂은 인상의 소년, 레슬리는 단단한 펜싱 마스크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수준 낮은 위협에 상대가 어깨를 으쓱했다.
TBLS의 축제 중에서 명물로 불리는 행사는 유서 깊은 펜싱 클럽에서 주최하는 친선 대회였다.
선수들은 대부분 펜싱부원으로 구성되지만, 사전에 참가 신청을 하고 약간의 검증을 거치면 펜싱부 소속이 아닌 학교 학생은 물론, 외부인도 참여할 수 있었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제한은 나이였다.
학교에서 여는 축제이고 학생이 주최하는 만큼, 7학년에서 12학년 사이에 해당하는 이들만 참가할 수 있었다.
종목은 플뢰레, 에페, 사브르 개인전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지금 진행하는 경기는 사브르였다.
“살뤼(Salut)!”
펜싱 마스크를 쓴 레슬리가 손을 내밀었다. 본래는 칼을 무릎까지 내리는 게 정석이지만, 레슬리는 상대에게 그만큼 예의를 차려주고 싶지 않았다.
상대도 별다른 말 없이 칼을 들어 가드 부분을 내밀었다. 그렇게 간단한 인사가 오가고 그들은 각자 자리에 가서 섰다.
“앙 가르드(En Garde)!”
레슬리가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왼발은 옆으로 향하게 했다. 그 자세로 무릎을 구부린 후, 칼을 들어 올렸다.
“에뜨 쁘레(être prêt)?”
“위(oui)!”
준비되었냐는 심판의 질문에 인내심이 다 닳은 레슬리가 곧장 답했다.
“위(oui).”
상대는 대답도 느긋했는데, 레슬리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사실 레슬리는 상대가 곧장 대답했더라도 싫었을 것이다. 그냥 싫었다.
처음엔 배신감과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던 거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만 커졌다. 이제는 관성처럼 휴 모건을 꺾기 위해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유 같은 게 중요한가?
레슬리는 그저 눈앞의 상대, 휴 모건이 질질 짜는 걸 보고 싶을 뿐이었다.
휙, 심판이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알레(allez)!”
시작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두 사람이 달려들었다.
“우와아!”
거센 함성으로 귀가 다 먹먹했다.
헤레이즈 아이데는 눈 빼고 다 가리는 일회용 마스크를 쓴 채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는 레슬리와 휴가 경기를 치르기 전 이미 플뢰레 개인전을 치렀고, 지금은 쉬는 중이었다.
‘짐승 같네.’
보통 귀족 스포츠라고 인식하는 펜싱이었지만, 헤레이즈는 두 사람의 사브르 경기가 야만적이라고 평가했다.
팔락.
레슬리의 점수판이 넘어갔다.
에페와 플뢰레 개인전은 총 3라운드로 1라운드당 3분씩 진행되지만, 사브르는 달랐다.
사브르는 제한 시간 없이 1라운드에서 8점을 득점하면 2라운드로 넘어갔다.
어느새 6대 6 동점이 되었다.
먼저 점수를 딴 건 휴였다.
“휴! 휴 모건!”
휴와 친한 여자애들이 그를 응원했다. 그러나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잽싸게 달려든 레슬리가 1점을 따내며 다시 동점이 되었다.
헤레이즈는 고개를 흘긋 돌려 아이덴을 보았다. 클럽 부장으로서 심판 옆에 서 있는 그는 마스크를 한쪽 옆구리에 끼우고, 무심한 낯빛을 한 채였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는 건가.’
하긴.
레슬리가 골든 이글 멤버이긴 하지만 휴 모건은 펜싱부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레슬리는 부외자였다.
펜싱 클럽의 부장이기도 한 아이덴에겐 부원이 부외자에게 지는 것도, 골든 이글 멤버가 창피를 당하는 것도 모두 짜증 나는 일일 것이다.
차분한 표정 위, 은은하게 불쾌함이 감도는 갈색 눈동자가 그 증거였다.
‘요즘 심기도 별로 안 좋아 보이던데.’
저기서 짐승처럼 날뛰는 레슬리는 아이덴의 눈치를 어떻게 보려고 저러는 걸까?
“와아아!”
함성이 터져 나왔다.
헤레이즈는 결과를 확인했다.
1라운드에서 먼저 8점을 득점한 사람은 레슬리였다.
7대 8. 근소한 차이였다.
레슬리가 거칠게 마스크를 벗었다. 얼굴엔 의기양양함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휴도 마스크를 벗었다. 땀방울이 맺힌 머리카락과 호박색 눈이 보였다.
밀리는 상황에 초조하거나 조급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레슬리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당장이라도 다가가서 멱살을 잡을 기세였지만, 실제로 그러진 않았다.
‘그래. 쟤도 뇌가 있으니까.’
그랬다간 실격패였다.
헤레이즈는 휴가 그의 여자친구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관객석을 둘러보았다. 그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없네?”
경기를 보러 오겠다고 했던, 하얗고 까만 누군가가 없었다.
헤레이즈의 눈빛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어차피 그는 딱 첫판만 이기고 두 번째 경기부터는 내리 져서 일찍 탈락했으니 뭐, 안 오는 게 낫긴 하지만….
‘걔가 한 말을 어긴다고?’
그건 조금 의아할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레슬리와 휴가 시합하는 날이었다. 레슬리는 첫날부터 도현과 시비가 붙은 골든 이글이었고, 휴는 룸메이트였다.
그런데 안 온다고?
자연히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헤레이즈는 팔에 걸치고 있던 겉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쓸데없이 넘쳐나는 연락들은 다 지워버리고. 무언가를 찾던 헤레이즈는 원하던 것을 발견했다.
역시나.
도현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헤레이즈는 고민할 것도 없이 문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헛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헤레이즈의 숨소리는 완전히 묻혔다. 짧은 휴식 시간이 끝나고 2라운드가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헤레이즈는 시합에 집중하지 않았다. 못 했다는 게 정확했다. 그는 핸드폰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헤레이즈, 미안해. 경기 보러 가지 못할 거 같아. 그리고 갑작스럽지만, 오늘 7시에 연극에 서게 됐어.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어서 생략할게. 아, 혹시 휴에게도 전해줄래? 문자를 보내긴 했는데, 아마 못 볼 거 같아서. 부탁할게.]“대체 뭔 짓을….”
탄식과 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것 또한 묻혔다. 휴가 시작과 동시에 무서운 기세로 득점했기 때문이었다.
열기를 띤 경기장 안.
헤레이즈의 청회색 눈동자만이 폭풍을 만난 풀잎처럼 흔들렸다.
* * *
“어, 뭐야? 언제 왔어?”
무대 위에서 도현과 대화하던 셀린이 피어스를 보고 반가이 얼굴을 밝혔다. 그에 공연장 안에 있던 다른 이들도 피어스의 귀환을 깨달았다.
“조금 전에.”
도도도, 달려온 네이선이 그를 붙잡았다.
“아, 알치는? 괜찮대?”
“열이 좀 나는데…. 그래도 괜찮아. 걘 워낙 성깔이 더럽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원래 성격 더러우면 잘 안 아파.”
그게 무슨 상관인데?
피어스는 네이선의 흔들리는 눈빛을 무시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무대 바로 아래에 섰다. 자연히 무대에 선 배우들을 올려다보는 구도가 되었다.
피어스는 곧장 물었다.
“대본은? 다 숙지했어?”
도현에 관한 것이었지만, 시선은 셀린을 향해 있었다. 셀린은 고민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기억력이 좋더라고.”
“어렴풋이 외운 거로는 안 돼.”
무대에서 대사를 틀리면 단순히 ‘대사를 잘못 말했다’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 배우가 수습해 주면 다행이지만, 상대 배우도 당황해 버리면….
‘그대로 멸망이지.’
도현에게 묻지 않고 셀린에게 물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도현은 영화배우였다.
실시간으로 관객 앞에서 연기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장면을 여러 번 끊어서, 촬영을 반복해 가며 연기하는 배우.
현장 예술인 연극과는 결이 달랐다.
그런 의미의 말이었고, 셀린은 쉬이 알아들었다. 하지만 얼굴에 걱정이나 불안은 없었다.
“응. 나도 알아. 그래도 괜찮아.”
“괜찮다고?”
“응. 도현은 좀….”
셀린은 무대에 오르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도현이 약속한 삼십 분 뒤에 돌아왔을 때.
– 셀린.
그녀의 쌍둥이, 네이선이 셀린의 옷자락을 잡았다.
– 그, 네가 만약을 대비하는 것도, 호흡을 걱정하는 것도 이해해. 하지만 한 가지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알려줘야 할 거 같아서.
– 뭔데?
– 도현은 기억력이 좋아.
네이선의 시선은 그녀를 비껴 있었다. 셀린은 네이선이 보는 게 도현의 손에 들린 대본임을 알아차렸다.
알치가 주고 간, 캐릭터 분석부터 동선, 감정 표현까지 치밀한 연구가 빼곡하게 기록된 대본.
– 다 외웠을 거야.
– 그걸 어떻게 확신해? 삼십 분은 너무 짧잖아.
네이선은 애매하게 웃었다.
– 그, 도현은 한 번 본 책은 다 기억해.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도 마찬가지야. 세 번 본 책은 목차와 페이지까지도 다 외우고 있어. 말했잖아. 도현은 전부 알고 있다고.
믿기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진실이었다.
셀린은 모호한 표정이 되었다.
‘대체 정체가 뭘까?’
연기력이 뛰어난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머리까지 그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사실 좀 얼떨떨했다.
‘이렇게 일이 잘 풀린다고?’
그런 심정이었다.
주연이 빠지게 생겼는데 마침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수상한 할리우드 배우가 근처에 있었다.
그런데 그 배우가 그들의 연극을 도와주어서 내용 대부분을 파악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대본을 한번 쓱 보는 것으로 무대에 설 수 있을 만큼 머리까지 좋다.
‘일 년 치 행운을 몰아다 썼나?’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너무 큰 행운이라서 덥썩 집어도 되는지 의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할 수 있어.’
놓치면 안 된다는 확신이 더 컸다.
셀린이 방긋 웃었다.
주어진 기회를 의심하느라 날리는 건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이 있는 게 아니겠는가?
“아무튼, 그 문제는 괜찮아.”
“…그래? 그럼 리허설은 언제 할 수 있어?”
“너 돌아왔으니까 지금.”
“그렇게 바로?”
“응. 괜찮지, 도현?”
어느새 셀린의 옆에 와서 서 있던 도현이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이 약간 벅찬 심장을 진정시키며 씩 웃었다.
“그럼 진짜 해보자, 리허설.”
부원들이 얼굴이 하나같이 결연해졌다.
도현은 뒤편에 달린 커다란 시계를 보았다. 그러다 시선을 내려 부원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눈빛으로 생각을 교환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공연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5시간.
그 안에 해내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