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653)
제653화. 파도와 같이 (1)
온갖 감정이 노도처럼 밀려왔다.
그중 가장 강렬한 것을 꼽자면 거대한 수치심이었다. 도현의 귀와 목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미쳤지. 정신이 나갔지!
평소에 하지 않던 날것의 비난이 속수무책으로 쏟아졌다.
휴는 그런 도현을 아주 흥미롭게 보았다. 바르르 떠는 소년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가 퍼렇게 물들었다가 붉게 달아올랐다가 하면서도 표정은 무덤덤했다.
말없이 얼굴색만 바꾸는 도현을 구경하던 휴가 보란 듯이 고개를 꺾으며 오른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 어깨야. 누구를 끌고 오느라.”
“…….”
“나도 참, 너무 친절해서 문제라니까. 혼자 있고 싶다는 애인데 거기에 두고 올걸.”
이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도드라진 만큼 목덜미는 더욱 붉어졌다. 콕 찌르면 펑 하고 터질 거 같은 모습이었다.
“아, 아니다. 나도 좀 잘못했지.”
도현의 낯에 불안함이 들어찼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내 룸메이트가 작년 일을 말 안 해준 걸로 그렇게 서러워할 줄은 몰랐지 뭐야. 친절한 룸메이트에서 ‘친절한’을 떼어야 하나.”
도현의 손이 움찔했다.
“아아, 생각해 보니까 그건 안 되겠다. 곧 ‘룸메이트’도 없어지는데 거기서 ‘친절한’도 사라지면 또 누가 서러워할 거 아니야. 그렇지?”
천연덕스레 묻는 말에 도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루만, 시간을 하루만 되감고 싶었다.
…아니지. 이왕 되감을 거면 8년 전으로…. 그럼 형도 볼 수 있고 이런 수치스러운 기억도 사라질 텐데.
잠깐 행복한 상상을 하던 도현은 금방 현실로 돌아왔다. 시간은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섭리였다.
현실 도피에도 실패한 도현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휴의 반대 방향에 있는 벽만 철천지원수처럼 노려보았다.
휴는 그런 도현을 보며 진심으로 우습고 즐거웠다.
매번 애늙은이처럼 딱딱하게 굴던 룸메이트가 누르면 푹 하고 들어갈 거 같은 무른 속내를 가졌을지 누가 알았을까?
휴는 역시 사람이 좋았다.
알면 알수록 새롭고 재밌는 건 사람밖에 없었다.
“작년 일은 정말 별거 아니라서 말 안 한 거야. 켐프인지 캠프인지는 이미 학교에 없기도 하고. 그때 레슬리 자식이랑 친했어도 지금은 아니니까 의미 없지.”
친절한 척 설명해 주고 있지만, 속지 않았다. 그의 의도는 도현을 살살 놀리는 거였다.
후우. 도현은 심호흡했다.
진정하자.
지금 중요한 건 수치심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아니다. 생각하지 마.
더 생각하면 끝도 없을 거 같아 주먹을 쥐었다 펴는 것으로 꾹꾹 욱여넣은 도현이 표정을 가다듬곤 입술을 뗐다.
“나를 본 사람이 있어?”
뜬금없는 질문에 멈칫한 휴가 되물었다.
“너 취한 모습?”
“…응.”
“흐음. 그 자리에 있던 로즈마리랑 신시아는 너도 알겠고. 그 외엔….”
도현은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영화 개봉을 몇 개월 앞둔 시점이다. 행동거지를 단정히 해도 모자랄 판에, 술을 마셨다. 그것도 독한 위스키를, 학교에서!
도현의 기억상 수치스러운 것 빼고는 큰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던 것 같지만, 모를 일이었다. 기억 중간중간이 해진 양말처럼 휑하니 뚫려 있었다.
일부러 말꼬리를 늘리던 휴는 지진이 난 검은 눈동자를 보다가 실실 웃었다. 도현의 원망스러운 시선이 그를 향했다.
휴는 과장되게 눈물을 닦는 척하며 말했다.
“없어, 없어. 나밖에 없어. 물론 비틀거리는 너를 부축해 가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진 않겠지만, 그날 워낙 난리였거든. 우리한테까지 신경 쓴 사람은 없을 거야.”
그 말을 듣자 비었던 기억 하나가 채워졌다.
그래, 달이 조금 더 기울었을 때.
만취한 건 테라스에 있던 비행 청소년뿐이 아니었다. 파티장 안에서도 취한 이들이 하나둘씩 속출했다. 그때부터는 난장판이었다.
누군가 술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치웠다면 그렇게까지 번지지는 않았겠지만….
하나같이 술이 있다는 걸 안 이후론 재밌는 장난거리를 발견한 것처럼 직접 마시거나 친구에게 음료수인 척 줘서 문제였다.
도현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청소년들이란….’
본인도 청소년이란 건 완벽히 잊어먹은 태도였다.
“신시아랑 로즈마리는?”
“잘 들어갔어. 네 배우 친구가 허브 잘 부축해서 데려가던데.”
휴는 신시아가 세 사람 중에서 제일 멀쩡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럼 잘 들어갔겠네. 그나마 다행이었다.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겨우 그것 가지고.”
도현이 그를 쳐다보자 휴가 어깨를 으쓱했다.
“파티에 술만 있으면 건전한 편이지.”
“…….”
그럼 또 뭐가 있어야 하는 걸까.
약간, 아주 약간 궁금하긴 해도 물어보지는 않기로 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일 거 같으니.
대신 도현은 힘없이 말했다.
“배우니까….”
“아, 그런 거면.”
이번엔 휴도 납득한 거 같았다.
이렇게 말해야만 이해한다는 점에서 이미 문제가 있지만, 도현은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
지금 가장 문제 많은 사람은 도현이었다.
우려되는 문제를 모두 해결하고 나자 남은 건 도현이 한 주사밖에 없었다. 도현은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역시 기절하고 싶다.
옆에서 키득거리던 휴가 그의 침대에 풀썩 앉으며 물었다.
“얼마나 마신 거야?”
“…몰라.”
신시아가 물인 척 준 술을 마신 순간.
– …….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그 독한 위스키를 한 모금도 아니고, 시원한 물을 마시듯 들이켜 버렸으니까.
속이 타는 듯 뜨거웠고, 그다음으로는 눈앞이 추상화처럼 이지러졌다.
– 르옌, 괜찮아?
도현이 정지해 있자 소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속에서 울컥, 무언가 치솟았다.
속여서 술을 건네준 것에 대한 배신감, 속상함. 퐁퐁 샘솟는 감정에 도현의 표정이 점점 흐트러졌다.
로즈마리가 술을 들고 도망친 순간부터 흐려졌던 마음이었다. 쌓이고 쌓이니 원망이 눈치 보며 스윽 발을 뻗었다.
하지만 도현은 친구를 원망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무리 취한 상태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이 감정을 돌릴 다른 게 필요했다.
그렇다고 속상함이 이상한 곳으로 튀어버리는 건 결단코 바라지 않았다. 도현의 눈에 술이 든 음료수병이 들어온 것은, 단순한 불운이었다.
‘저거 때문이야.’
술, 저 술.
겨우 저 술 때문에 그의 친구가 그를 속였다.
– 우악!
로즈마리의 손에서 강탈하듯 뺏어오며 안 굴러가는 뇌를 억지로 굴렸다. 이 원흉을 없애려면 어떡해야 하지?
그때 몽롱한 목소리가 운명처럼 스쳐 지나갔다.
– 마셔서 없애자.
아, 마셔서.
“…….”
또다시 기억의 한 조각을 찾았지만 별로 기쁘지 않았다. 도현은 괴롭게 머리를 싸맸다.
아니, 사고가 왜 그리로 튀지?
대체 왜?
도현의 가슴이 크게 들썩거렸다.
신시아와 로즈마리에게 부린 추태를 믿을 수가 없었다.
– 왜 이름은 안 불러?
그렇다고 굳이 떠오를 필요는 없어!
“근데 그렇게 서운….”
벌떡!
도현은 휴의 입이 열리기 무섭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맞은편에 놀란 얼굴이 보였다. 도현은 그것을 보지 못한 척 화장실로 향했다.
탁!
문을 닫는 소리가 다급했다.
잠시 후.
“푸하하하!”
문 너머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도현이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도망쳐 버렸다는 걸 깨달은 눈치였다. 도현은 샤워기를 제일 찬물로 틀며 웃음소리를 최대한 지워내려 노력했다.
쏴아아-
물소리에 다른 소리가 먹혀들었다. 도현은 물이 튀어 축축해진 옷을 떼어내며 거울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의 소년이 있었다.
* * *
도현은 최대한 느릿느릿 미적대다가 방의 인기척이 사라졌을 때가 되어서 밖으로 나왔다. 예상대로 휴는 나갔는지 방엔 아무도 없었다.
찬물이 머리카락에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아.”
도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찬물로 씻으며,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진정하고 나자 일이 어떻게 된 건지도 알 수 있었다.
‘본성이라고 했지.’
스위스에서 도현이 이상하게 행동했던 날.
덩어리님은 그게 도현의 본성이 나온 거라고 했다. 그때는 과도한 능력 사용으로 인한 부작용이었지만 이번엔 알코올로 인한 부작용이었다.
도현은 다짐했다.
‘술은 마시지 말자.’
앞으로 봉인이었다.
영원히.
그렇게 단단하게 결심하고 나서 차분히 방을 둘러보았다.
처음 왔을 때 도현의 자리는 휴가 올려놓은 몇 가지 잡동사니를 제외하고는 휑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물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때, 책상에 있는 핸드폰이 진동했다. 도현은 순간 뻣뻣하게 굳어 그걸 노려보았다.
신시아나 로즈마리는 아니겠지?
어쩐지 핸드폰을 확인하는 일이 무척 두려웠다. 그러나 덮어두고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라 뻣뻣하게 손을 뻗었다.
“아.”
발신자를 확인한 도현은 탄식했다.
안도에서 기인한 탄식이었다.
[아빠]발신자가 신시아도, 로즈마리도 아닌, 그의 부모님이었기 때문이었다. 도현은 참았던 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 도현아, 전화 가능해?
“네, 괜찮아요.”
괜히 마음이 들풀처럼 술렁였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부모님 몰래 술을 마신 비행 청소년이 되어버렸다. 죄를 짓고 몰래 숨긴 느낌이었다.
– 별건 아니고. 내일 비행기 타야 하는데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나 해서.
“아, 지금 짐 챙기려고 했어요.”
휴도, 신시아도, 로즈마리도.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내일 공항에 가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짐을 싸야 하니.
– 그래? 바쁠 때 전화했네.
“아니에요. 통화 끝나고 정리하면 돼요.”
그들은 조금 더 대화를 나누었다.
비행기에 탈 때 전화해 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가 끊겼다.
도현은 핸드폰을 도로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다시금 방을 훑었다. 그리고 여전히 거북한 속을 외면하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한참 동안 짐 정리를 했다.
원래 물건을 쌓아놓는 편이 아니라서 버릴 것은 많지 않았다. 굳이 한국까지 가져갈 필요는 없는 것들은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지정된 자리에 쓰레기를 버리고 나니 손이 가벼웠다. 도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호숫가로 향했다. 처음 이 학교에 왔을 때, 아빠와 헤어졌던 곳이었다.
여전히 호수는 그날처럼 화사했다. 부드럽게 흐르는 수면 위로 나무 사이를 파고든 햇살이 유리 조각처럼 반짝였다.
도현은 천천히 호숫가를 걸었다.
어느새 밤중에 몰래 호숫가에 왔을 때 지나쳤던 곳까지 다다랐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느려졌다.
“르옌?”
가장 피하고 싶었던 이가 풀숲에 앉아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