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654)
제654화. 파도와 같이 (2)
초록색 덤불 앞에 쪼그려 앉은 소녀는 풍성한 머리카락을 등허리까지 늘어트리고 있었다. 뼈대가 가는 상체는 머리카락에 온통 가려졌다.
바람이 불자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파스슷, 풀잎이 서로 부대끼며 나는 소리도 울렸다.
“왜, 여기에….”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껏 당황한 도현과 달리 신시아는 태연했다.
“밤의 여인을 보러 왔어.”
“아….”
검은 눈동자가 소녀의 앞쪽으로 향했다. 어느 날 밤에 본 적 있던 식물이 거기 있었다.
“…낮에는 이렇게 생겼구나.”
밤에 보았을 땐 작은 별이 총총히 모여 있는 거 같았는데, 낮에는 꽤 평범했다. 그때만큼 강렬한 향기도 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신시아가 말했다.
“달이 빛날 때 활짝 핀 밤의 여인을 보면 누구나 빠져들 수밖에 없을 거야. 그만큼 예쁘니까. 하지만 난 태양 아래 있는 밤의 여인도 좋아.”
“왜?”
소녀가 손끝으로 꽃망울을 살살 문질렀다.
“꼭 수줍어하는 거 같아.”
도현은 식물에 감정을 이입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신시아의 말을 듣고 나서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적어도 그날 밤의 화려하고 강렬하던 모습과는 달랐다.
신시아가 읊조렸다.
“밤의 여인은 밤을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태양을 그리워하는 걸까.”
그러면서 끝이 살짝 오므라든 꽃을 멍하니 응시한다. 도현은 저게 대답을 바라는 건지 아닌지 고민하며 답했다.
“글쎄. 네가 생각한 게 맞지 않을까.”
“응.”
알았다는 건지, 아니면 그냥 한 말인지.
신시아는 무척 착하고 상냥한 소녀였지만 종종, 아니 사실 거의 항상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것에 감사했다.
‘어제 일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아.’
사실 어느 정도 짐작했다.
도현의 술주정이야, 휴나 로즈마리에겐 몇 개월 우려먹을 소재겠지만, 신시아는 그러지 않을 거 같았다.
신시아는 무척 무해한 인상을 지녔다. 그 탓에 사람들이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게 있었다.
패스파인더 삼인방 중에서 타인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이 그녀라는 사실이었다.
헤레이즈는, 오히려 셋 중에 제일 정이 많았다. 스스로 개인주의자라고 여기며 이런저런 계산을 하는 거 같긴 하지만, 어느 개인주의자가 그렇게 남에게 휘둘릴까?
라비니아를 보는 복잡한 눈빛만 봐도 그랬다. 골든이글에는 전략적으로 들어갔으면서, 결국 감정이 흔들려서 그녀와 어떤 미묘한 관계가 되어가고 있는 거 같고.
물론 도현은 헤레이즈의 모순된 면을 일깨워 줄 생각이 없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지.’
도현은 헤레이즈를 괜찮게 생각하고 있었다. 굳이 자신을 단호하게 밀어낼 거리를 제공할 필요는 없었다.
도현의 경우, 타인을 선별하는 편이었다. 아예 무관한 이라면 관심조차 보이지 않지만, 접점이 생기면 상대는 모르도록 은밀하게 잣대를 들이밀며 안으로 들일지 말지 간을 보았다.
결국 헤레이즈나 도현이나, 둘 다 타인에게 관심이 있으니 눈치를 보고 간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신시아는 달랐다.
그녀는 다가오면 다가오는 대로 받아주고, 멀어지면 멀어지는 대로 손을 흔들어줬다. 흘러가는 구름을 구경하는 사람이 저럴까?
도현과 헤레이즈가 신시아에게 특별한 취급을 받는 건 그들이 ‘르옌’과 ‘아서’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 본성이 서운해했지.’
도현은 떠오르는 생각에 침음을 삼켰다.
무척 수치스러운 것과 별개로 숨어 있던 감정을 직면하는 건 생경한 일이었다. 이렇게 강제적으로 깨닫는 건 원치 않았지만….
도현이 생각에 잠긴 사이 풀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렸다. 바람이 많이 부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이질적인 소리가 귀에 잡혔다.
도현은 자연스레 시선을 하늘로 올렸다.
검은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검, 독수리?”
홉뜬 눈이 하늘에 고정되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 보는 검독수리가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나무 위를 빠르게 지났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소년과 소녀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호수에서 검독수리를 만난 적이 없어서 방심하고 있었다. 직접 대면한 검독수리는 하늘의 제왕이라는 말에 걸맞았다.
눈이 저절로 날카로운 발톱으로 향했다.
동공이 흔들렸다.
‘최소 동맥 절단….’
어떡하지.
검독수리는 그들의 위를 떠나지 않고 빙빙 돌았다. 도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귀여운 멧새야 정수리에 앉든 어깨에 앉든 상관없지만, 검독수리는 말이 달랐다. 독수리를 훈련할 때 괜히 두꺼운 장갑을 끼는 게 아니었다.
만약 검독수리가 멧새처럼 도현에게 호감을 보인다면 신시아가 무척 무서운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도현은 조용히 검독수리를 주시했다. 과하게 긴장한 모습이 이상하게 비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검독수리가 비스듬히 활강하더니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았다. 거대한 날개가 한번 크게 펼쳐졌다가 접혔다.
맹금류의 날카로운 시선이 나무 아래에 있는 소년에게 꽂혔다. 도현은 저게 호감의 시선인지, 사냥감을 보는 시선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한 조류와 한 인간의 시선이 교차하며 침묵이 흐를 때.
“네 독수리야?”
한순간의 실수로 긴장감이 깨졌다.
도현이 아차 하며 나무 위를 보았다. 시선이 도로 닿았을 땐 이미 날개를 활짝 펼친 후였다.
“!”
그러나 피와 살점이 튀기는 슬래셔 무비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검독수리는 그들 머리 위를 지나쳐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하아.”
절로 숨이 튀어나왔다.
도현은 풀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탁 풀렸다.
‘골든이글, 골든이글. 말로만 들어봤지….’
저렇게 클 줄 누가 알았을까.
날개 한쪽을 잡고 세로로 들면 사람 키만 할 거 같았다.
신시아가 의아해했다.
“네 독수리 아니야?”
“아니야.”
“하지만, 르옌을 봤는걸.”
“내가 신기하게 생겼나 봐.”
“그런가?”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신시아라고 해도 조류의 미추 감각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검독수리가 야생성이 강한 개체라서 다행이다.’
조금이라도 사람의 손을 탄 개체, 그러니까 해변의 바다사자 같은 동물이었다면 서슴없이 도현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신시아는 트라우마가 생겼겠지.
“새를 무서워해?”
“아니. 그렇지만 저 새는 너무 크잖아.”
“르옌은 겁이 많구나.”
“…….”
해명하고 싶었지만, 딱히 해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도현은 입을 다물길 택했다.
“르옌도 겁이 많은데.”
도현이 멈칫했다.
이번엔 뉘앙스가 조금 달랐다.
신시아가 쪼그려 앉았다.
아까 밤의 여인을 구경하던 것처럼, 이번엔 풀숲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도현을 구경했다. 갑자기 구경 대상이 된 도현은 당혹스러워졌다.
“닮았어.”
도현은 그녀의 말을 따라가려 애썼다.
“르옌 누바라랑?”
“응.”
“르옌이 겁이 많아?”
“응.”
그런 면이 있긴 하지.
뜬금없는 주제였지만, 연기 이야기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사고가 그쪽으로 흘렀다. 이건 도현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타고난 것을.
그러나 도현의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부분도 있어.”
“…그렇겠지.”
그야 다른 사람이니까.
도현이 르옌과 아무리 닮았고 르옌이 아무리 도현과 비슷해도 같은 존재는 될 수 없었다. 배역에 몰입하는 것과 별개로 그 정도 구분은 할 줄 알았다.
‘진이랑 니키한테 호되게 배웠으니까.’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건 도현의 방식이 아니었다.
도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잠깐 산책을 하긴 했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슬슬 산책을 끝내고 돌아가야 했다.
신시아는 도현이 풀잎을 터는 걸 구경했다. 도현은 묘한 부담스러움을 느끼며 물었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신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먼저 갈게. 아직 정리가 덜 끝나서.”
“그래, 이따 봐. 도현.”
“응, 저녁에….”
도현의 말이 멎었다.
해를 등지고 서 있어서, 그의 그림자가 신시아의 위로 길게 드리웠다. 그늘이 있어서인지 신시아는 눈부셔하지 않고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도현은 귀를 의심했다.
내가 뭘 들은 거지?
“안 갈 거야?”
가만히 서 있는 게 이상했는지 신시아가 물었다. 도현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너 방금….”
신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왜?”
저렇게 나오니 할 말이 없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추궁하는 것도 이상했다. 전날에 해놓은 짓이 있어서 그러면 꼭, 이름으로 부르라고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 같을 테니까….
도현은 수치스러운 기억을 더 쌓고 싶지 않았다.
그 이상은 한도 초과였다.
머뭇거리던 도현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마지막으로 바짓단에 붙은 풀잎 한 개를 털어내고, 몸을 반듯하게 세웠다.
“진짜 갈게.”
“잘 가, 도현.”
“…….”
역시 제대로 들은 거 맞잖아.
확인을 받았음에도 도현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태연한 눈인사를 하고선 뒤로 돌았다. 어차피 인사는 이미 했으니까 굳이 더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자꾸만 발걸음이 빨라졌다.
도현은 호숫가를 벗어나고 나서야 멈춰 섰다. 그리고 손을 들어 제 목덜미를 감쌌다.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고개가 푹 꺾였다.
“아, 진짜….”
고개를 숙인 탓에 드러난 목덜미가 온통 빨갰다.
창피해 미치겠다.
그 망할 추태를 기억하고 있는 것도, 그 주정을 들어준 것도, 그 와중에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도 모두 다.
으으, 앓는 소리를 낸 도현은 연거푸 뺨을 문질렀다.
그렇게 한참을 진정하고 나서야 다시금 발을 뗄 수가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