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658)
제658화. 파도와 같이 (6)
희운은 눈을 깜빡였다.
이도현이 왜 여기 있지.
사고 회로에 버퍼링이 걸렸다. 희운은 천천히 상대를 살폈다. 다시 보아도 이도현이었다.
“하, 한국 온 거야?”
당황해서 헛소리가 나왔다.
여기가 한국이지, 어디겠어!
속으로 아우성치며 도현의 표정을 확인했다. 다행히 비웃음은 없었다. 다만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고요했다.
속에서 일던 아우성이 뚝 멎었다.
당황에 굳어 있던 뇌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며, 희운의 얼굴이 점차 딱딱해졌다.
쪽지. 음반.
두 단어가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았다. 뭘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도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어디 가던 중이야? 집?”
“그, 연습실 가려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목소리가 졸아들었다. 도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약해 둔 거지? 가자.”
너무 자연스럽게 말해서 순간 약속을 잡아뒀었나, 헷갈렸다. 당연히 그런 적은 없었다. 애초에 한국에 온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무슨….
희운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방금까지는 연습실에서 복습할 생각으로 꽉 차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계획 따위는 휘발된 지 오래였다.
“개인 연습 하려던 거 아니야?”
“그건 맞는데….”
“계획했으면 해야지. 내가 도와줄게. 봐주는 사람 있으면 좋잖아.”
“아니, 그보단….”
그보단 음반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다고, 그리 말하려던 희운은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그보단?”
“…아니야. 도와주겠다고?”
“응.”
희운은 마음을 달리했다.
천천히 생각해 보니 함께 연습실에 가는 게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앞으로 세 시간은 혼자만 쓸 수 있는 공간이고, 또 방음도 잘 되니까.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당한 공간이었다.
결론을 내린 희운은 꽤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같이 가자.”
희운은 몰랐다.
정말 세 시간 동안 탈탈 털리면서 연기 연습만 하게 될 줄은.
* * *
마룻바닥에 늘어진 희운은 영혼이 반쯤 나간 얼굴로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이게 아니었는데.’
그가 생각했던 재회는 조금 더 심각하고, 진지한 분위기였다. 물론 스파르타 코칭도 어찌 보면 심각하고 진지하긴 하지만. 아무튼 이런 상황은 아니었다.
하도 황당해서 그런가?
도현이 교환 학생으로 떠나 있는 동안 느꼈던 조바심과 혼란이 지금만큼은 쏙 들어갔다.
“일어나. 한 번만 더 해보자.”
희운이 진저리 쳤다.
“예약 시간 5분밖에 안 남았어!”
세 시간 동안이나 사람을 수건 쥐어짜듯이 짰으면서 더 하려고 하다니? 희게 질린 낯으로 황급히 말했다.
“다음 예약자도 써야 하잖아. 이제 정리하고 나가야 해.”
“아.”
도현은 아쉽다는 듯 탄식하더니 느릿하게 수긍했다. 희운은 왠지 눈물이 흐를 것 같아서 아련히 천장 조명을 올려다봤다.
그러다 도현의 질문에 정신을 차렸다.
“이다음 일정은?”
“…없어.”
“그래? 일단 정리하고 나가자.”
희운은 물먹은 솜이불처럼 바닥에 늘어트렸던 몸을 주섬주섬 일으켰다. 대본을 챙기고, 다 마신 물통을 버리는 과정에서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그 기묘한 분위기는 연습실을 나오고서도 이어졌다.
침묵이 깨지는 순간은 다른 사람을 마주칠 때뿐이었다.
“어, 도현 씨!”
도현은 새솔의 아이돌 같은 존재였다. 물론 저 애가 어디서 안 그럴까 싶긴 하지만…. 새솔에서 도현이 받는 호감과 호의는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부럽진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까마득한 상대였다. 그러니 부러움보다는….
동경이나 선망이겠지.
희운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누구나 선망의 대상과 나란히 걸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그 ‘나란히’가 정말 물리적인 의미더라도.
그렇게 걷다 보니, 한적한 돌계단 앞에 다다랐다. 언젠가 그와 대화를 나눈 적 있는 곳이었다.
도현은 두어 계단 내려간 후에 자연스럽게 멈춰 서서 고개를 들었다. 희운의 심장이 덜컥거렸다.
아까는 연습만 시킨다고 속으로 온갖 불평불만을 했으면서 지금은 다시 연습실에 가고 싶어졌다. 이중적인 마음이었다.
그리고 도현의 입이 열렸다.
“들어봤어?”
단순한 물음이었다. 무엇을 칭하는 건지도 명확하지 않은. 하지만 무슨 말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희운은 흔들리는 눈으로 도현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H야?”
조금 떨어진 도로에서 자동차가 지나는 소음이 들렸다. 그 외엔 바람이 만들어낸 작은 소리뿐이었다. 인적이 드문 돌계단엔 그들밖에 없었다.
“응, 내가 H야.”
진짜로 도현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한바탕 난리 날 이야기였다. 그래서 본인이 직접 시인한 걸 들었음에도 어리벙벙했다.
“그거 나한테 말해줘도 돼?”
“말하고 다닐 거야?”
“뭐? 아니, 그런 건 안 해!”
다급한 부정에 도현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상관없잖아. 그리고 말하고 다니고 싶으면 그래도 돼.”
된다고? 희운이 콧잔등을 찡긋했다.
“숨기는 거 아니었어?”
“맞는데. 네가 하고 싶다는데 내가 어쩌겠어.”
네가 왜 어쩔 수 없는데?
어이없는 얘기를 너무 당당하게 해서 말문이 막혔다. 희운이 조용해지자 도현이 침묵을 치웠다.
“더 궁금한 거 없어?”
희운은 둥둥, 무겁게 울리는 심장을 애써 외면했다.
– 바이올린은 언제 배운 거야?
– 조금 오래됐어. 영화를 찍기 위해 배우기 시작해서. 아, 물론 그때 배운 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법이 아니라 그럴듯하게 립싱크하는 법이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겠지?
영화를 찍기 위해서 배웠다기엔 [The Wanderer>에서 했던 연주는 너무 뛰어났다. 너무도. 아니면 혹시….
“그, [The Wanderer>에서 나왔던 달빛은 다른 사람이 연주한 거야?”
“아니. 내가 했어.”
그럼 거짓말이었겠네.
석연찮은 부분이 있긴 했지만, 다른 결론이 나오긴 어려웠다.
“더 궁금한 건?”
희운은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이젠 심장이 귀에서 뛰는 거 같기도 했다.
“…음반을 들었는데.”
“응.”
“잘하더라.”
“어, 고마워.”
바보 같은 대화가 오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희운의 신경은 온통 한곳에 쏠려 있었다. 그는 한참 주저하다가 말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있었거든.”
“…….”
“그래서 그냥, 신기했다고.”
희운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음반을 들으면서 몇 번이고 제 귀를 의심했다. 연주 스타일도 비슷하지만 다르고, 음색도 비슷하지만 다른데. 다 떠나서 애초에 다른 사람인데.
그런데 왜 자꾸.
자꾸, 형의 연주가 겹쳐서 들리는지.
희운은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그럴 리 없어. 접점도 없는 두 사람이잖아. 그냥, 내 귀가 잘못된 거겠지.’
그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물어봐도 괜찮을 질문을 정성스럽게 골라서 조심스레 꺼냈다.
“왜 나한테 음반을 준 거야?”
내내 궁금했던 문제기도 했다.
“왜 말해 주겠다고 했어? 대답이란 건 무슨 의미야?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
뒷말은 의도치 않았는데 멋대로 튀어나왔다. 희운은 더 이상한 말이 나오기 전에 입술을 앙다물었다.
“궁금한 게 그거야?”
“…응.”
사실 아니야.
다른 걸 묻고 싶어.
혹시 내 형을 아는지, 왜 네 연주를 듣는데 자꾸 형의 연주가 생각나는지.
…왜 네가 형과 비슷해 보이는 건지.
‘나 정말 미쳤나.’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동갑인데 이런 생각이라니? 자괴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때,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희운은 뻣뻣하게 굳었다. 혹시 내가 생각을 그대로 말한 건 아니겠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만큼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너는 나랑 달랐으면 했어.”
…다행히 그러진 않은 거 같은데.
“무슨 소리야?”
“이렇게 속으로 삼키고…. 그러지 않았으면 했는데.”
그런데 도현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상상한 너는 이렇지 않았거든. 유복한 환경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렇게 누군가의 애정은 아쉽지 않을 정도로 부족한 거 없이. 그럴 줄 알았는데 왜 나랑 닮아서.”
흘리듯, 가벼운 어조였다.
“형한테 들은 너는 그랬어. 정말 그렇게 사랑스러워서, 그래서 네가 싫었어. 네 존재 때문에 나는 일 순위가 될 수 없었거든. 어떻게 해도 그것만은 안 되더라.”
“난,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네 형 말이야.”
숨이 멎었다.
잠깐 시간이 정지한 것도 같았다.
그러나 하늘거리는 바람도, 그에 맞춰 살랑이는 검은 머리칼도, 그 위로 드리운 구름의 그림자도. 한순간도 멈춘 적 없이 흐르고 있었다.
“있었잖아, 형. 좋아했다며.”
어쩐지 그 말은 애원처럼 들리기도 했다.
희운은 더듬더듬 말했다.
“네가 어떻게 알아?”
“들었으니까.”
“어떻게?”
도현이 시선을 내렸다.
“…같은 병원에 있었어. 처음 마주친 건 공원이었고…. 그리고 내가 병실로 찾아갔어. 그때 네 얘기를 들었어.”
그는 느릿하게 말했다. 한 문장 한 문장 온 신경을 기울이는 것처럼, 단조로운 문장들을 꾹꾹 눌러 담듯이.
“다음에, 내 바이올린을 보여줄게. 지금은 없는데….”
“왜 보여주는데?”
“…형이 준 거라서.”
너무 잘게 부서진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차마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 맞춰졌다.
기시감이 들던 연주.
그리고 이중적이던 도현의 태도.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왔다.
“같이 있었어?”
두서없이 나온 소리에 도현이 시선을 맞춰왔다. 희운의 말을 이해하려는 듯이 눈가를 찡그린 도현이 입을 열었다.
“병원에서라면….”
아니다. 그게 궁금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둘이 아는지, 왜 그걸 지금까지 비밀로 했는지, 바이올린은 형에게서 배운 건지.
그런 수많은 의문보다 더, 더 알고 싶은 건….
“형이 죽을 때, 그때 혼자가 아니었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