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688)
제688화. 찾아온 계절 (16)
이글이글 끓던 눈동자에 차차 빛이 들어찼다. 희운은 주저앉은 상태 그대로 고개만 들어 방긋 웃었다. 그 뒤로 복실한 꼬리가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혼자 할 때보다 훨씬 재밌어!”
실제로 뺨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도현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바로 따라왔어.’
그간 도현이 희운의 연기를 봐준 적은 꽤 많았다. 그리고 초반의 희운은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상황에 몰입하기 어려워했다.
따라오려고 노력하는 거 같긴 했지만, 그런 마음과 달리 집중력이 흔들리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나 조금 전엔 달랐다.
첫 시작이 워낙 과격한 터라 놀라긴 했어도 그다음 순간 바로 배역에 몰입했다. 그 눈빛이 바뀌는 순간, 도현은 등 뒤를 타고 흐르는 미약한 떨림을 느꼈다.
도현은 진지한 눈으로 희운을 내려 보았다.
이 정도면 천재 아닌가?
그때, 희운이 감탄했다.
“너 진짜 대단하다. 눈앞에 차신우가 있는 줄 알았어.”
도현은 대본을 한번 쓱 보는 것으로 캐릭터를 파악하고 그것을 적용해 연기했다. 희운은 그게 너무 신기했다.
심지어, 그간 자신이 한 연기 중에서 방금 것이 제일 좋았다. 도현의 연기가 그의 감정과 반응을 이끌어줬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머릿속에 아직 이론으로만 존재하던 차인호의 심정을 보다 더, 그러니까 진짜 나의 감정처럼 이해하게 되었다.
차인호는 선악으로 나누자면 악인에 가깝다. 당연했다. 무리를 주동해 같은 반 친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놈이 아닌가. 현실이었으면 당장 소년원에 보내야 한다.
하지만 희운은 차인호를 이해해야 했다. 그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젠 알 것 같다.
차인호는 차신우를 동경한다.
그리고 그만큼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품고 있으며, 이런 애증에 가까운 감정은 소년을 인정 욕구에 허덕이도록 만들었다.
비록 그게 좋지 않은 방식으로 표출되었지만. 차인호는 용서할 수 없는 가해자지만.
모순되게도, 동시에 인정과 애정에 결핍된 외톨이다.
희운은 약간 흥분하여 말했다.
“나 차인호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한 거 같아.”
신나서 주절거리던 희운은 문득 도현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시선을 올리니 손으로 입가를 가린 도현이 보였다. 어깨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큼, 아니. 괜찮아.”
도현은 헛기침을 뱉은 후 손을 내렸다. 훤히 드러난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어서 희운은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다.
“다시 해볼까?”
도현의 말에 곧장 고개를 끄덕이려던 희운은 일순 멈칫했다. 그가 주저하고 있자 도현이 물었다.
“왜?”
“그게… 나만 도움받는 거 같아서.”
“난 괜찮은데.”
“내가 신경 쓰여. 그, 물론 넌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거 아는데….”
왜 또 자신감을 잃을까.
객관적으로 희운은 상당히 잘난 편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스스로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소속사 탓이겠지.’
옆에서 계속 자존감을 깎아냈으니 스스로 잘난 것을 모르고 저렇게 움츠러드는 것이다.
도현은 분노를 삼키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도현은 한 번도 그 소속사를 용서한 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그 소속사와 매니저가 죄를 돌려받게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 때가 일렀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일단, 오디션부터 합격해야 해.’
하나씩.
제힘으로 성취해 가다 보면 희운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하고 또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인지.
그리고….
“나도 네 도움 필요한데.”
희운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픽 웃었다.
대충 해석하자면 ‘에이, 거짓말’ 정도였다.
“진짜야. 그거 때문에 계속 고민하고 있어. 아직 뚜렷한 해결 방법을 못 찾아서.”
긴가민가하던 희운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다음으로 차오른 건 호기심이었다.
“뭔데?”
“영화 촬영 중에….”
도현은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상대 배우가 자신을 너무 어려워하며 연기에도 그 영향을 받고 있고, 또 자신의 배역을 거부하는 중인데 무의식에서 일어난 일이라 본인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희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거 심각한 일이네.”
“그렇지?”
“응. 네 영화잖아. 상대 배우가 따라주지 못하면….”
검은 눈이 크게 떠졌다.
그 반응에 덩달아 놀란 희운이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
“아니….”
도현은 드물게 말꼬리를 흐렸다.
이 얘기를 들려줄 때, 도현은 희운이 연나은을 안타까워하리라고 생각했다.
워낙 공감 능력이 탁월하기도 하고, 또 [왕의 길> 때 도현과 비교당하며 압박감을 느껴본 경험이 있어서였다. 그래서 비슷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연나은을 안타까워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희운이 걱정한 건 도현이었다.
연나은이 아니라.
이번에는 희운이 아닌 도현의 뺨에 생기가 돌았다. 도현은 입꼬리를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이게 효도받은 기분인가?”
“뭐?”
귀를 의심하는데 도현이 말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떤지 듣고 싶었어. 내가 어떻게 해야 상황이 좋아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시침을 뚝 떼는 태도에 희운은 헷갈렸다. 잘못 들은 건가?
도현은 희운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해?”
“…다음 주에 다시 촬영하러 가는 거지?”
“응.”
생각보다 촉박했다. 아까의 이상한 문장은 긴급한 사안에 밀려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희운은 제 일인 것처럼 심각하게 고민했다.
“으으, 촉박하네. 그런데 감독님이 그 배우를 선택한 이유가 뭐야?”
“나한테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거든. 그래서인 거 같아.”
“아, 작중 배역이랑 상황이 같아서구나.”
“그렇지.”
잠시 생각하던 희운이 입을 열었다.
“그럼 그 감독님이 네 상대 배우에게 바라는 건 연기력이 아니네.”
제법 날카로운 지적에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맞아. 네 말대로야.”
“그런데 의도대로 안 되고 있고.”
“응.”
“그럼….”
내내 단호하게 얘기하던 희운이 망설였다. 도현이 괜찮으니 말해달라고 하자, 용기를 낸 희운이 의외의 문장을 뱉었다.
“난 그분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해.”
정말 의외였다.
도현은 자신이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되물었다.
“주제 파악을 못 한다고?”
“그, 그 정도까진….”
당황스러워하던 희운이 눈꼬리를 내렸다. 도현에게 한 말임에도, 연나은에게 미안한 감정이 든 모양이었다.
“주제 파악…보다는, 음, 너는 대단한 배우잖아.”
“그렇게 봐줘서 고마워.”
난데없이 상대를 칭찬한 게 된 희운이 뺨을 붉혔다. 그러나 도현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고 할 말을 이었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네 연기를 따라가는 건 무리거든. 감독님도 그걸 기대하는 게 아닐 테고. 그런데 그분은 너를 따라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거 아닐까?”
잘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물론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은 판타지가 아니고, 마음을 굳게 먹는다고 운 좋게 각성하는 일 따윈 없다.
불가능한 목표가 늘 부정적인 건 아니지만, 당장 촬영해야 하는 현재 상황에서는 긍정적으로 보기 어려웠다. 기대치가 높은 만큼 실망과 부담도 클 테니까.
생각을 정리한 희운이 차분하게 말했다.
“내 생각인데, 너만큼 잘해야 한다고 스스로 채찍질하는 거 같아. 게다가 원래 발레를 전공하던 분이라며. 무대에 설 때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카메라 앞에서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상과 현실의 괴리인가.”
설득력 있다.
고개를 끄덕인 도현이 말했다.
“그럼 이상을 부숴야겠네.”
희운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건, 너무 과격하지 않아?”
“내 영화잖아. 그러니 최대한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야지.”
희운의 말을 빌려 말한 도현은 생각에 잠겼다. 희운 덕분에 생각난 게 있었다.
무대의 버릇을 카메라 앞까지 가져왔다는 건 도현 또한 한 적 있는 생각이었다. 희운의 말까지 들으니 뭐가 문젠지 알 거 같았다.
연나은은 무대에서 내려왔음에도 여전히 무대 위에 있다.
그러니 이도 저도 아니고 어정쩡한 거다. 어정쩡함 속에 자신의 본심을 숨기니, 배역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그 상태에선 너를 연기하라는 말도 소용없고.
방법은 하나다.
깨트리고, 숨은 것을 꺼낸다.
거부감을 느껴도 상관없다. 그 또한 한예지의 일부가 될 것이다. 다만 숨기는 건 곤란했다. 발레를 향한 거부감, 애정과 증오, 미련과 갈망. 그게 뭐든 간에.
너무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연나은은 한예지로서 카메라 앞에 서기로 한 이상 모든 게 드러날 각오를 해야 했다.
도현이 유가 되었을 때처럼.
“고마워. 덕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네.”
도현은 상쾌하게 말했는데, 희운은 어쩐지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오지랖을 부릴 때가 아니란 듯 도현이 말했다.
“그럼 다시 오디션 준비하자. 아, 이거 오디션 날짜가 언제야?”
“1월 18일.”
“대략 한 달 정도 남았네. 생각보다 시간이 부족하겠는데….”
희운은 의아했다.
한 달이면 그렇게 부족한 시간은 아닌데.
“어쩔 수 없지. 오늘 최대한 많이 해보자. 늦게 들어가도 괜찮다고 했지?”
“아.”
같이 연습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거였구나.
희운은 뒤늦게 도현의 말뜻을 알아듣고 기대와 불안이 반반 섞인 표정을 지었다. 기대된다. 도현과 연기하다 보면 한계를 돌파한 거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었으니까.
그리고 걱정된다.
도현은 너무… 스파르타였다.
도현이 가만히 있는 희운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하얀 얼굴이 무구해 보였다.
“뭐 해? 일어나.”
“…응.”
희운은 빠르게 체념했다.
* * *
죽는 줄 알았어.
녹초가 된 희운은 한숨을 내쉬며 현관문을 열었다. 평소보다 무척 늦은 시간에 귀가했음에도 거실은 환했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향하니, 주방 식탁 앞에 앉은 인형이 보였다. 검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희운을 돌아보았다.
희운이 작게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늦었구나.”
손가락을 꿈질거리던 희운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바닥에 고정했던 고개를 들자 시선이 마주쳤다.
“소, 소속사에 있었어요.”
“그러니.”
“네. 오디션 준비 때문에….”
당혹감을 느끼며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때였다.
덤덤한 어조가 말을 잘라냈다.
“백합, 네가 둔 거니?”
“…아.”
봤구나.
하긴. 봤겠지. 일부러 엄마보다 먼저 간 거니까….
“…네. 제가 뒀어요.”
“그래.”
물을 건 다 물었다는 듯이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희운이 망연히 그 뒷모습을 좇을 때였다.
“그래도 열두 시는 너무 늦구나.”
여자는 한마디 한 후 방으로 들어갔다.
희운은 어안이 벙벙해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니까… 일찍 들어오란 거지?
“…….”
희운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쿵쿵 뛰는 심장을 뒤로하고 거실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했다. 정말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확실히 귀가가 많이 늦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오늘, 하나도 외롭지 않았어.
그리고 다른 상념이 들 틈이 없게 몰아붙이던 도현이 떠오른 순간, 희운은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악랄하다고 치를 떨었던 게, 사실은 상대가 숨기고자 한 배려가 아니었는가, 하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