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690)
제690화. 찾아온 계절 (18)
“컷!”
한주애 감독은 컷 사인을 냈지만, 곧바로 재촬영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모니터를 보며 카메라 감독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고개를 들었다.
“나은 씨, 우주랑 눈 마주치는 장면부터 다시 갈게요.”
“네?”
그럼 그 전의 장면은?
의아해하는데, 한주애 감독이 말했다.
“엄마랑 대화하는 장면은 무척 좋았어요.”
그녀의 칭찬에 카메라 감독도 동의했다.
“주말 내내 세희 씨 촬영 구경한 보람이 있나 봐. 아니면 카메라가 익숙해졌나? 아무튼 나은이 잘했어.”
“가, 감사합니다.”
일단 감사 인사는 하지만 속은 미묘했다.
한예지한테 집중도 못 했는데, 잘했다고….
뒷걸음질 치다가 운 좋게 얻어걸린 기분이라 석연치 않았다. 그러나 찝찝함을 붙잡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서, 연나은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세희 이모가 봐준 게 효과가 있나 봐.’
진세희는 그녀의 촬영을 따라다니며 열의를 보이는 연나은을 좋게 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빌 때마다 그녀의 연기 상대가 되어 주기까지 했다.
너무 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싶어 안절부절못하자 하는 말이.
– 주애 언니 때문에 너도 많이 놀랐을 거 아니야. 대뜸 이도현이라니. 언니도 참 짓궂어. 나도 가끔 긴장하는데, 너는 어떻겠어.
– 아….
– 그러니 나라도 너를 봐줘야지 않겠니? 비슷한 처지인 사람끼리 돕고 살아야지.
물론 비슷한 처지라는 건 진세희가 좋게 말해준 거였다. 연극계에서 탄탄한 입지를 지닌 그녀와 연나은은 같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심정인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우리만치 위로가 되었다.
그때였다.
“무슨 생각 했어요?”
“네?”
연나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대를 보았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이는 이도현이었다.
희고 잘생긴 얼굴.
스크린에서나 보던 얼굴이 눈앞에 있는 게 아직도 적응되질 않았다. 외모도 외모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로움이 있었다.
그 탓에 가까이 있어도 ‘내 앞에 사람이 있네’ 느낌보다는, ‘스크린이 움직이잖아?’ 같은 멍청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 뭐라고 말씀, 아니 말했어?”
“무슨 생각 했는지 물어봤어요.”
너무 넋 놓고 있었나?
연나은이 멋쩍게 말했다.
“미안, 집중할게.”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와, 속눈썹 진짜 길구나.
무슨 재생 속도를 0.5로 맞춰놓은 거 같다. 혼자만 특수한 영화 효과를 받는 것도 같았다.
“왜 사과해요?”
“다른 생각 해서….”
“언제요?”
“방금.”
도현은 아, 하고 탄식했다.
“제가 오해하게 말했네요. 괜찮아요. 촬영을 복기하면 좋긴 하겠지만,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죠. 카메라도 안 켜져 있는데요.”
“그, 그래?”
별말 아니었지만, 도현의 입에서 나오니 뜻밖이었다.
소년은 촬영장에 온 후로 내내 촬영밖에 모르는 것처럼 굴었기 때문이었다.
그 입에서 나오는 관용적인 말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제가 물어본 건 아까 연기할 때였어요.”
“연기할 때?”
무심코 되묻자 도현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와 직면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덫에 걸린 거 같은….
“네. 저랑 눈 마주쳤을 때.”
“…….”
“무슨 생각 했어요?”
연나은은 간신히 말을 쥐어짜 냈다.
“생각, 이라니….”
그러나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웃으며 물러나지도 않았다.
연나은은 그가 어떻게든 대답을 받아내리란 걸 느꼈다.
“…지문을 생각했어.”
“지문?”
“응. 대본대로 연기하려고, 지문을 떠올렸던 거 같아.”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은 아니네요.”
연나은은 어색하게 웃으며 ‘거짓말을 왜 하겠어’라고 대꾸하려 했다.
“전부 말한 것도 아니고요.”
“어?”
“‘연나은이 아니라 한예지인데.’”
일순, 연나은이 굳었다.
그녀는 한 박자 늦게 그 말뜻을 온전히 이해했다. 그리고 심장이 발치까지 떨어지는 감각을 맛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했죠?”
도현은 촬영장에서 늘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람의 호감을 사기 쉬운 미소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연나은은 그 미소가 전혀 친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지문을 생각한 거 같은데, 효과는 있었어요?”
도현은 그의 생각에 한 치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 누군가 자신의 뇌를 읽어 그에게 대본집으로 건네주기라도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제가 보기엔 아니던데.”
그는 그런 말을 여상히도 했다.
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를 쿡쿡 찔렀다.
연나은은 주춤거리며 소년에게서 두 걸음 물러났다.
도현은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하지만 연나은을 놓아준 건 아니었다. 소년은 연나은이 도망칠 수 있는 거리가 고작 두 걸음이라는 걸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많이 부족하지만….”
“네, 그렇죠.”
선선히 나온 동의에 연나은은 말문이 턱 막혔다.
흰 낯에선 악의를 한 줌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위안이 되진 않았다. 악의는 없었지만, 다른 감정도 읽어내기 어려웠으므로.
“그래서요?”
말을 잃게 한 당사자가 대답을 재촉했다.
연나은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그녀도 안다. 그녀는 이 배역을 맡기에 부족한 사람이다. 그녀가 한예지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발레를 전공했기 때문에.
그것도 발레를 등지고 촬영장에 왔음을 생각하면 제법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나.
“…알아. 네 눈에 차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그래, 이해해.”
이해한다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다.
연나은은 촬영이 시작된 후로 늘 주눅 든 모습을 보였으나, 그건 낯선 환경과 낯선 상황이어서다. 그녀 자체는 프라이드가 낮은 사람이 아니었다.
상황이 맞물려 자취를 감추었던 자존심이 꿈틀했다.
그녀는 제법 도전적인 투로 말했다.
“그래도 내가 하려던 얘기는, 부족하지만 노력하겠다는 거였어.”
“노력이요.”
도현이 물었다.
“어떻게요?”
막상 직설적으로 질문하니 대답할 말이 궁했다.
노력은 할 건데, 그 노력의 형체가 분명하지 않았다. 사실 연나은도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새카만 눈동자가 차근차근 연나은을 살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나은은 독사 앞에 선 쥐처럼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콩쿠르 영상을 볼 때부터 느꼈는데, 표정과 동작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데 무척 능숙해요. 타고난 표현력도 있는 것 같고요. 카메라에 적응하지 못해서 어색해하는 건 있지만, 반복할수록 확실히 나아지고 있고, 집중만 제대로 하면 나쁘지 않아요.”
“…….”
하지만 대뜸 칭찬이 나올 줄은 몰랐다.
굳은 와중에도 도현을 조금 노려보던 연나은의 눈매가 어정쩡하게 풀렸다. 당혹스러움이 얼굴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괜히 공격 의사가 없는 사람한테 한껏 털을 부풀려 대한 느낌….
“그런데 그게 좋다는 건 아니라서요.”
…일 리가 없지.
아까부터 들었다가 놓았다가. 아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아지는 기분이었다.
더 분한 건 그녀가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다는 거였다.
만약, 발레였다면….
“노력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어떡할래요?”
“방향이 잘못됐다고?”
도현은 태연하게 말했다.
“가정해 보는 거예요. 만약 그렇다면요. 그러면 어떻게 할 거예요?”
이런 걸 묻는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상대가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답했다.
“옳은 방향으로 고쳐야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연나은은 그걸 조롱으로 알아들었다. 역시 이 애는 내가 탐탁지 않은 거다. 이렇게 이상한 시비를 걸 정도로.
그러나 곧 힘이 빠졌다.
‘하긴. 이상한 건 감독님이지.’
그녀도 생각하지 않았는가. 이런 정신머리로 무대에 서는 애를 보면 기분이 상할 거라고.
“…방향이 틀린 걸 알고도 고수할 만큼 바보는 아니야.”
약간 맥 빠진 목소리에 도현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게 끝이었다.
도현은 ‘잠시 쉬고 있어요’와 같은 말을 남긴 후 한주애 감독에게 가버렸다.
연나은은 커다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휩쓸려 버린 거 같고, 허탈하기도 한.
…그런데 대체 뭐였을까.
도현은 내내 그녀를 떠보듯이 굴었다. 정말 내가 싫어서 그런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눈빛엔 적의가 없었다….
그때였다.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나은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왜 철수하지?
당혹스러워 멀뚱히 서 있는데, 한주애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이리 오라는 듯이 손바닥을 흔들었다.
그녀의 옆에 도현이 있어 껄끄러웠지만, 안 갈 수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한주애 감독이 말했다.
“촬영 순서를 바꿀 거예요.”
“아. 그러면 제 촬영은….”
연나은의 표정이 흐려졌다. 아까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 때문에 촬영을 미루는 건가 싶었다.
그런 생각을 읽은 듯이 한주애 감독이 말했다.
“나은 씨 촬영을 미루는 건 아니에요. 지금 찍을 것도 나은 씨가 나오는 장면이거든요. 나은 씨, 바 워크랑 센터 순서는 외웠죠?”
“네? 네.”
“좋네요. 발레 수업 듣는 장면부터 찍을 거예요. 발레복은 치수 맞춰서 준비했으니, 스태프 따라가서 갈아입고 나와요.”
연나은은 반사적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강렬한 직감이 일었다. 이 일정 변경에 소년이 관여했으리라는.
눈이 마주치자 도현이 눈매를 휘었다.
정답이라는 것처럼.
“아! 나은이 여기 있었구나! 이거, 갈아입을 옷이야.”
“네….”
연나은은 옷을 받아 들고 분장실에 도착할 때까지도 조금 넋이 나가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머릿속엔 물음표만 가득했다.
그 혼란함이 깨진 건 발레 슈즈를 신었을 때였다.
부드러운 착화감이 발바닥에서 느껴졌다. 연나은은 흰 발레용 스타킹과 즐겨 신던 브랜드의 천 슈즈를 보았다.
고개를 돌리니 거울이 보였다.
머리카락은 아직 묶지 않았지만, 그것 외에는 모두 익숙한 모습이었다. 검은색 연습용 레오타드, 흰 스타킹, 천 슈즈.
“센터 순서 틀리진 않겠지?”
“여러 번 연습했는데… 카메라 앞은 처음이라 긴장되기는 한다.”
그녀와 같이 옷을 갈아입던 소녀들이 수다를 떨었다. 연나은은 그 대화에 끼지 못했다.
– 노력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어떡할래요?
왜일까.
쿵쿵,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