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694)
제694화. 찾아온 계절 (22)
“무릎.”
툭, 지적하는 목소리에 허우주가 무릎을 들었다. 무릎을 기점으로 아래로 떨어져, 허벅지와 종아리가 기역 모양을 그렸다.
푸흡!
창문에 달라붙어 구경하던 여자아이들이 한 차례 더 웃음을 터트렸다. 원장은 그들과 달리 웃지 않았다. 대신 허우주의 발목을 잡고 들었다.
“무릎을 펴는 거야. 하나의 선처럼, 곧게. 가장 길게 뻗어져 나가도록.”
다리를 들어주던 손이 빠져나가자 몸이 휘청였다. 다리를 옆으로 들어 올린 별거 아닌 자세인데도 몸이 덜덜 떨렸다.
“자세 유지해.”
“윽!”
“팔 내려갔잖니. 팔꿈치를 들어야지. …아니.”
팔꿈치를 들라 하니 어깨를 비죽 들어 올린다. 다리는 어정쩡히 굽어 있고, 어깨와 팔꿈치는 위로 솟은 웃긴 모습이었다.
원장이 어이없는 숨을 흘렸다.
“넌 팔꿈치가 어깨에 달렸니?”
소년의 가슴팍에도 오지 않는 여자애들이 그를 흘깃거렸다. 킥킥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허우주는 기분이 팍 상했다.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원래는 초콜릿을 주려고 왔을 뿐이다. 그런데 왜 여자애들이나 하는 짓을 하는 걸까.
허공에서 부들거리던 다리가 힘을 잃고 추락했다. 쿵! 바닥과 부딪히며 제법 큰 소리가 났다. 허우주는 그대로 이 멍청한 곳을 나가버릴 심산이었다.
“음악을 들어.”
원장이 그의 어깨를 잡지 않았더라면.
가볍게 쥔 것뿐인데도 허우주는 멈칫했다. 원장은 그런 허우주의 몸을 천천히 돌렸다.
거울과 마주 보도록.
“정면을 보렴. 턱을 들어서 앞을 응시해. 도도하게.”
거울 속에는 소년이 있었다.
흰 면티에 검은색 반바지, 그리고 웃기지도 않은 살구색 발레 슈즈를 신은 소년이.
원장이 거울 속의 소년을 응시하며 말했다.
“척추 중간. 여기가 중심이야. 네 팔은 여기서부터 뻗어 나오는 거야. 백조의 날개처럼. 어깨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어깨를 가볍게 누르는 힘이 느껴졌다. 그다음엔 팔등이었다. 팔등과 팔꿈치를 위로 올려 위치를 잡아준 손은 마지막으로 손목을 잡았다.
“손목은 너무 처지지 않고, 그렇다고 힘이 들어가지도 않게. 그래야 손이 늘 자유로울 수 있어. 그래, 이렇게.”
거울 속의 소년은 한 손으로는 바르를 잡고, 한 손으로는 이마 위로 앙오를 한 상태였다.
“펼칠 땐, 척추 중심에서부터.”
이마 위로 올라갔던 팔은 둥글게 내려와, 마지막으로 배꼽 앞까지 미끄러졌다.
통통 튀는 음악 때문일까?
한 마리의 백조가 되어, 수면 위에서 날갯짓하는 기분이었다. 물방울이 붕 떴다가 가라앉는 것 같았다.
허우주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허우주의 눈에도 처음과 달리 제법 봐줄 만한 자세로 서 있는 소년이 보였다.
“잘하는구나.”
가벼운 칭찬이 흰 깃털처럼 떨어져, 소년의 어깨 위에 얹혔다.
* * *
허우주는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겉옷을 챙겼다. 사물함이 어딘지 몰라 무용실 한구석에 대충 던져두었던 옷이었다.
그것을 입고 무용실을 나오는데, 창문에 붙어 있던 여자아이들이 우르르 비켜섰다. 얼굴을 찡그린 허우주는 문득 한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
“…….”
내가 멍청하게 퍼덕이는 걸 봤을까?
봤겠지?
왜 이게 신경 쓰이는지 모르겠다.
허우주는 짧게 혀를 찬 후 소녀를 지나쳐 갔다. 한예지는 입을 열려 했지만, 무용실 앞문에서 나온 원장 선생님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수업은 어땠니?”
“그냥, 뭐.”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알 수 없는 태도였다. 미지근한 대답에 원장이 카운터로 가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주었다.
“학원에 등록할 거라면 여기 있는 전화번호로 연락하렴. 준비물이나 학원비도 적혀 있으니, 집에 가서 부모님께 드리면 될 거야.”
허우주는 흰 종이를 보다가 말했다.
“필요 없는데요.”
괜한 반항이었다. 왠지 발레에 관심이 없는 척을 하고 싶었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시선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원장은 동요하지 않았다.
“가져가서 버려도 돼. 네 마음대로 하렴. 이걸 부모님께 보여줄지, 아닐지는 오롯이 너의 선택이란다.”
“…….”
허우주는 그의 뜻을 존중해 주는 사람들에게 약했다. 늘 ‘안 돼’, ‘그거 아니야’와 같은 소리만 듣고 살아서 그런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건, 허우주는 결국 종이를 챙겼다. 종이는 다 녹은 초콜릿과 강범준에게서 뺏은 담뱃갑이 있는 주머니에 추가되었다.
* * *
“컷! 오케이!”
스태프들이 촬영장을 다시 세팅하는 동안 도현은 모니터 화면 앞으로 갔다. 옆에는 연나은도 함께였다.
어젯밤 이후 달라진 점이 이것이었다. 연나은은 도현을 피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 안녕.
아침에 먼저 인사하기까지 했다.
잠을 설친 듯, 약간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그 얼굴 위로 지금의 신기해하는 얼굴이 겹쳤다.
“와… 진짜 발레 처음 배우는 애 같아.”
연나은이 감탄했다.
화면 속에서는 도현이 몸을 삐그덕삐그덕 움직이고 있었다. 도현은 그런 자신을 보다가 무심하게 말했다.
“열심히 관찰했거든요.”
“관찰?”
“발레 학원엔 늘 새로운 인원이 추가되니까요. 허락받고 그들의 수업에 참관했어요. 어떤 점이 어색하고 어려운지도 물어봤고요. …저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배운 지 꽤 됐으니까요.”
“아….”
그렇게까지 하는구나.
연나은은 다시 화면을 보았다.
아까까진 그냥 ‘역시 대단하다’라고 생각했는데,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현은 생각보다 더 철저했다. 그 철저한 준비만큼 한 장면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연기가 가능한 걸까?
나는 그런 애를 두고 따라갈 수 없다며 좌절한 거고?
“하하….”
– 전 알아서 잘하거든요.
그 재수 없는 발언 이후.
그녀의 속을 짓누르던 무거운 것이 사라졌다.
비관적으로 말하면 주제 파악이 되었다는 거고, 긍정적으로 보자면 자신의 위치를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 둘 다 같은 말인가?
아무튼.
“역시 대단하네.”
“그런가요?”
도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시선을 옮기더니 물었다.
“누나는 괜찮아요?”
“…….”
연나은은 침묵했다.
그녀는 더 이상 촬영이 시작될 때 ‘나는 한예지다’라고 스스로 세뇌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건 불가능하니까.
그냥 연나은으로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리고 그 감상은….
“아직은 모르겠어.”
도현이 수긍했다.
“촬영 초반이니까요.”
“일 년은 지난 기분인데….”
한탄처럼 한 말이었다. 약간은 한숨이 섞여 있었는데, 불현듯 도현이 눈을 빛냈다. 검은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광경은 퍽 인상적이고 보기 좋았다.
“일 년? 일 년 내내 촬영장에서 지내면 재밌겠네요.”
“그거 진심… 아니다.”
연나은은 질린 낯빛이 되었다.
‘연기 얘기할 때만 눈에 빛이 들어오는 거 같은데?’
좋아하는 친구들과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모습을 본 적 없는 연나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연기에 미친 소년은 연나은을 보며 눈매를 휘었다.
“나를 믿어요. 한예지가 아니라 연나은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게요.”
어떻게 그렇게 장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연나은은 압도됐다.
눈앞의 소년은 절대 빈말을 하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 어떻게든 말한 바를 이루리라는 점에서.
“다음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기대가 샘솟았다.
버린 줄 알았던 기대가.
동시에 연나은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전율했다.
…아, 이거.
다음 장면의 감정이구나.
* * *
타다닥!
한예지, 아니, 연나은은 건물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벌써 갔을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리고 뛰듯이 내려간 끝에, 건물 입구를 나서는 소년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잠깐만!”
그를 부른 건 반사적인 행위였다.
소년의 걸음이 멈췄다. 허우주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연나은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왜 따라 내려온 걸까?
첫 만남부터 별로였던 앤데.
스스로 이해할 수 없지만, 친구들이 키득거리던 소리나, 시선을 피하던 눈이 신경 쓰였다.
“뭔데?”
“그게….”
허우주의 뺨이 비죽였다.
“왜, 너도 웃겨?”
아니다. 비웃으려고 온 게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마룻바닥 위에 선 소년이 무슨 표정을 짓는지 봐버려서.
꿈을 꾸는 것 같은, 몽롱한….
그러나 머뭇거리는 사이 건물 벽을 걷어찬 허우주가 휙 떠나버렸다. 붙잡을 새도 없었다.
“아….”
연나은은 소년이 사라진 자리를 허탈하게 응시했다. 계단 위쪽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뛰쳐나간 연나은을 데리러 온 친구였다.
결국 연나은은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깜빡거리는 형광등 아래 반짝이던, 검은 눈이 잔상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기획팀장과 한주애 감독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들은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직은 확실치 않지만….
이 상태로라면.
도현의 연기는 늘 말할 것도 없고, 연나은까지도 저토록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면.
“…그 계획, 생각해 봐도 되지 않을까요?”
기획팀장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한주애 감독은 침묵했다. 그리고 한참 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촬영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일주일 동안 촬영 진도도 많이 진전되었다.
방에 틀어박힌 허우주가 초콜릿과 안내문을 보고 고민하는 장면, 그리고 홈스쿨링과 위 클래스에 집중하지 못하는 장면이 지나갔다.
물론 그리 평화로운 장면만 있는 건 아니었다.
허우주의 옷을 세탁하려던 허윤주는 담배를 발견한다. 그리고 허우주를 추궁하고 혼낸다.
허우주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허윤주는 믿지 못한다. 평소 허우주의 행실이 불량함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 불신에 화난 허우주는 집을 나간다.
그리하여 현재.
허윤주는 허우주가 박차고 나간 방에 막막하게 서 있었다. 어떻게 달랠지 감도 안 왔다.
허윤주가 마른 뺨을 쓸었다.
‘그렇게 혼내지 말걸.’
이야기를 듣지 않고 무작정 혼낸 걸 후회하는데, 문득 시야에 흰 종이가 들어왔다.
책상 구석에 놓인 것.
“…발레?”
그건, 발레 학원 안내문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