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701)
제701화. 나의 우주 (4)
“그….”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인적이 드문 거리에 정적이 흘렀다. 뒤편에 있는 빵집에서 주홍빛 불빛이 흘러나왔다.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종소리도 들렸다.
최민지는 긴장이 역력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두 손을 초조하게 말아 쥔 채 굳은 얼굴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당혹을 가렸다.
한설아가 둘이서만 보내려 했을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러나 막상 닥치니 상상보다 더 곤혹스러웠다.
좋아한다고? 나를?
지니가 전조도 없이 고백했을 때와는 다른 당혹감이었다. 그때는 정말 아무런 낌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라 경악이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건 고백보단 통지에 가까웠다.
– 난 장거리 연애에는 관심 없어. 국경을 넘는 거리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대답은 안 줘도 돼.
대답을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고백한 건 지니인데 차인 사람은 도현인 우습고도 이상한 상황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니는 도현을 두려움과 간절함이 섞인 눈으로 보지 않았다.
“…친구로서 좋아한다는 건 아니지?”
마지막 희망을 담아 물어보았다.
“응.”
최민지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짧게 긍정했다. 도현은 터져 나오려는 탄식을 삼켜냈다.
도현은 저런 풋풋한 감정을 느껴본 적 없다.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과장해서, 도율이랑 비슷하게 느껴지는 아이들에게 연애 감정을 품다니? 말도 안 됐다.
그래서 도현은 간과했다.
내가 그렇다고 해서 다른 애들도 그런 건 아닌데.
도현에게는 상상조차 도덕관념에 어긋난 일이라서, 또래 애가 자신을 그렇게 보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마음은 고마워.”
짧게 호흡한 도현이 말했다.
“나도 너를 좋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그건 친구로서의 감정이야.”
거절은 정해진 일이었다.
관건은, 최대한 상처받지 않게 거절하는 거였다. 도현은 혀 위에서 말을 여러 차례 고르다가 천천히 밖으로 꺼냈다.
“네가 괜찮다면, 앞으로도 친구로서 잘 지내고 싶어.”
잘 말한 걸까?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최민지의 얼굴을 살피는데, 그녀가 물었다.
“꼭 친구여야 해?”
“어?”
“나를 좋게 생각한다면서. 그러면… 내가 싫지 않다는 거잖아. 그렇지?”
아니라고 하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최민지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게 포장된 상자였다.
숨을 삼킨 최민지가 그것을 내밀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도현은 흔들리는 눈으로 상자와 최민지를 번갈아 보았다.
“나한테 주는 거야?”
“응.”
도현이 오늘 노래방에 온 건 즉흥적인 선택이었다. 최민지로선 그를 만날지, 안 만날지도 몰랐을 텐데 선물이라니.
조그만 선물이 무겁게 느껴졌다.
“미안. 받을 수 없어.”
선물 상자를 건넨 손이 잘게 흔들렸다. 그러다 선물이 떨어질 거 같아 아슬아슬한 눈으로 보는데, 최민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날 그런 식으로 좋아하지 않는 건 알아. 네가 나한테 관심 없는 것도 알고 있어.”
최민지가 도현에게 반한 건 그의 친절 때문이었다.
동시에 최민지는 알았다.
겉옷을 빌려달라고 해도, 어려운 문제를 선생님이 아닌 도현에게 물어보아도, 은근히 곁을 맴돌아도 도현은 친절을 베풀 뿐 신경 쓰지 않는다.
그건 친절을 가장한 무관심이다.
그러니까, 저렇게 상상도 못 했다는 얼굴을 하고 있겠지. 그녀의 행동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니까.
최민지는 눈에 힘을 주었다.
이 상황에서 우는 건 정말 꼴사나웠다. 그리고 좋아하는 남자애한테 못생겨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만나다 보면 좋아질 수도 있잖아.”
“민지야.”
“꼭 둘 다 좋아해야만 사귀는 건 아니래. 사귀다 보면 좋아지는 경우도 많댔어. 호, 혹시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말해서 부담스러운 거면, 천천히 시간을 두고….”
“잠깐만, 민지야.”
“왜?”
도현이 한 손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손에 반쯤 가려진 얼굴은 당혹을 담고 있었다.
“오해가 있는 거 같아.”
“…오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다시 고민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너를 이성적으로 보지 않는 것도 맞는데… 그냥, 나는 연애에 관심이 없어.”
연애라는 단어를 말할 때 혀를 깨물 뻔했다. 도현은 열다섯의 소녀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상황이 커다란 시련이었다.
“거짓말.”
최민지가 눈가를 찡그렸다.
“내가 싫은 거잖아.”
최민지는 도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를 거절하기 위해서 둘러대는 말로 생각했다.
거절도 도현답게 다정했지만, 그 다정한 말이 가슴께를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갔다.
도현은 당황했다.
왜 더 서러워하는 거지.
“…진짜야. 네가 아니라 다른 누구더라도 내 대답은 같을 거야. 그리고 너를 왜 싫어하겠어? 네가 얼마나 좋은 애인데. 너, 바닥에 쓰레기 있으면 항상 주워서 버리잖아.”
달래듯이 말이 나왔다.
그러자 최민지는 더더욱 서러운 얼굴로 내뱉었다.
“너 때문에 한 거야.”
“…나?”
“넌 매번 주워서 버리잖아. 그래서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어.”
“그, 그랬구나….”
도현은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때, 최민지가 물었다.
“정말, 연애에 관심 없어?”
“응? 응.”
“왜 없는데? …좋아한다던 애 때문이야?”
좋아한다던 애?
“아.”
순간 무슨 말인가 했다.
‘그게 있었지. 금발의 청순한 가상의 첫사랑….’
도현은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했다.
여기서 긍정하자니 상대의 진심에 거짓으로 답하는 거 같아 양심이 아팠고, 부정하자니 여지를 주는 것처럼 보일 거 같았다.
결국 침묵을 택하자, 최민지가 힘없이 말했다.
“그래, 그렇구나….”
앳된 얼굴에 체념이 피어났다.
최민지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호흡을 따라 어깨가 들썩였다.
말을 하기 전, 마지막 미련을 담아 도현의 얼굴을 보았다. 긴 모자챙 아래로 그림자가 져 있었지만, 그 낯에 그녀와 같은 애정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최민지는 끈질기게 수려한 얼굴을 훑었다. 그럴수록 도현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선명해졌다.
결국 최민지는 인정했다.
“…미안해. 부담 줘서.”
“나는 괜찮아. 사과하지 않아도 돼.”
“아니야. 나 때문에 많이 놀랐잖아. …그래도 이건 받아줘. 너한테 주고 싶어서 만든 거야.”
“아….”
“받아도 오해 안 해. 그냥, 크리스마스니까… 친구한테 선물 정도는 줄 수 있는 거잖아.”
어차피 정말 중요한 건 여전히 주머니에 있는 편지였다.
도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상자를 받았다.
“고마워. 잘 받을게.”
“응. 그리고 나 사실 집 이쪽 방향 아니야.”
“뭐?”
“반대쪽으로 가야 해.”
“아까는….”
“너랑 같이 가고 싶어서 거짓말한 거야.”
도현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최민지는 그런 도현을 스윽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이제 도현에게는 그녀의 정수리만 보였다.
“먼저 가. 너 가면 나도 갈게.”
“시간이 많이 늦었잖아. 데려다….”
무심코 말하던 도현이 입을 다물었다. 전이라면 그냥 데려다주었을 텐데, 지금은 그렇게 편하게 굴 수가 없었다.
“괜찮아. 평소에도 이 시간에 귀가하거든. 그때 학원 수업이 끝나서.”
“그래?”
“응, 그러니까 먼저 가.”
더 말해봤자 서로 곤란하리라 생각한 도현은 조심히 가라고 말한 후 먼저 등을 돌렸다.
그러다 못내 신경이 쓰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좋은 크리스마스 되길 바라.”
최민지의 눈이 커졌다.
곧 놀란 얼굴은 작은 미소로 바뀌었다.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
무척 미미한 미소였지만, 그래도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미소를 돌려준 도현은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거리를 벗어났다.
* * *
“잘 놀고 왔니?”
“네.”
도현은 그를 가볍게 안아주는 서혜나를 마주 안았다. 이젠 이런 포옹 정도는 어색하지 않았다.
“그래. 피곤하지? 얼른 쉬어. 내일 아침에 같이 트리 꾸미고, 오후에는 사진 찍으러 가려면 일찍 자야지.”
그녀가 들뜬 어조로 말했다.
원래 트리는 더 일찍 꾸미고 싶었지만, 도현이 촬영장에 가 있던 탓에 당일에 꾸미게 되었다.
“또, 우리 네 가족 첫 외식도 있으니까.”
소녀처럼 설레 하는 모습에 도현은 복잡한 마음도 잊고 웃음을 터트렸다.
“기대되네요. 얼른 자야겠어요.”
도현은 뒤늦게 나온 이장혁과도 포옹하고 잠든 아기에게 잘 자란 인사를 한 후에야 방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달칵.
샤워를 마치고 나온 도현은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걷어내다가 책상 앞으로 갔다.
조그만 상자를 손 위에서 굴리다가, 천천히 포장을 풀었다.
“…귀엽네.”
상자에 든 건 작은 여우 키 링이었다.
흰 여우는 꼬리가 세 개나 되었는데, 아마도 도현이 찍었던 드라마 때문인 거 같았다.
‘아홉 개가 아닌 건… 몸이 너무 작아서인가?’
도현은 여우 키 링을 든 손을 위로 올렸다. 이런 손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정말 파는 것처럼 잘 만들었다.
사용하진 못하겠지만.
“음….”
앞으로 어떡하지.
지니는, 어차피 자주 만나는 사이도 아니었고, 도현이 한국으로 가서 더 마주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최민지는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만나야 했다.
‘아무래도, 최대한 평소와 같아야겠지?’
도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열다섯.
확실히 이성에게 관심이 많을 나이다.
그래도 설마, 이런 일이 또 있지는 않겠지. 고개를 내저은 도현은 키 링을 한 곳에 잘 내려둔 후 침대로 향했다.
* * *
크리스마스 날.
아침부터 도현의 집은 활기에 차 있었다.
“여기에 리본 달까?”
“응, 예쁘다! 우리 도율이는 뭐가 좋아요? 유니콘? 루돌프?”
서혜나는 아기 앞에서 장식 두 개를 흔들다가, 아기가 손을 뻗은 장식을 골라 트리에 달았다.
“됐다! 이제 전구 두르자!”
도현은 바닥에 늘어진 기다란 꼬마전구를 들고 트리에 빙빙 감았다. 별생각 없었는데, 생각을 비우고 트리를 장식하는 게 꽤 재밌었다.
마지막은 꼭대기에 커다란 별을 달았다.
“완성!”
서혜나가 손뼉을 치자, 그 뜻을 이해한 건지 뭔지 아기가 꺄르륵 웃었다. 도현도 방긋방긋 웃는 아기를 보다가 픽 웃었다.
아침부터 제법 즐거운 크리스마스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