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00)
2번째 노숙자
이안은 테라스를 통해 창밖을 봤다.
지중해 연안의 휴양도시인 칸은 LA처럼 따뜻한 날씨였고 영화제가 개최됐다는 건 해변을 따라 길게 뻗은 크루아제트 거리만 봐도 알 수 있다.
“뭘 그렇게 보냐.”
“이른 아침부터 정장하고 드레스 입고 서두르는 사람들이요.”
벤은 익숙하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내려봤다.
“바빠 보이긴 하네. 기자 시사회 가는 거잖아.”
영화제 메인 상영관인 뤼미에르 극장은 2300석 규모다.
영화, 영화제 관계자와 셀럽들만 해도 그 수가 많으니 첫 시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자는 한 줌이다.
대부분 기자와 평론가는 아침부터 빡빡한 칸의 드레스코드에 맞춰 입고 저렇게 기자 시사에 서둘러 가야 했다.
“오늘 새벽에 그쪽 영화팀이 왔다며. 홍보 때문에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면 저런 모습은 지겹게 볼걸. 언제 찾아온다고 하든?”
“곧 올걸요.”
아무리 초청받았다고 해도 12일이나 되는 칸 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는 사람은 일부였다.
‘영화제에서 호텔을 지원해주는 것도 길어봐야 3박 4일이고.’
대체로 시사회 전후로 입국해서 시차 적응은 사치라고 생각될 정도로 빡빡한 공식 일정을 소화하다 가는 편이다.
이건 그랜드라인도 마찬가지였고.
“오늘 다른 사람들 뭐해요?”
“두 감독님은 시차 적응한다고 오전까진 쉰다는데. 공작새는 어제 한 팬서비스 어쩌고 하면서 갑자기 인터뷰가 잡혔다고 하고.”
“팬서비스요? 그거 사기 아니에요?”
버리기 아까워 나눠준 인형이 팬서비스로 둔갑했지만 벤은 어깨를 으쓱였다.
“호텔에서 자기가 키우는 공작새랑 영상통화 하는 것보단 낫잖아. 너도 그 꼴을 봤지?”
“봤죠.”
공작새 옆에서 힘들어 보이는 데미안의 비서도 같이 보였고.
“그럼 벤은요?”
“나? 한동안 못 만난 지인들 좀 만나러 돌아다녀야 해. 귀찮지만 가봐야 하는 자리도 있고. 아마 다른 셋도 마찬가지일걸.”
영화제도 파티처럼 비즈니스의 연장선이다. 아무리 이안 때문에 일찍 왔다고 해서 낭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벤은 이안의 옷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옷은 멀쩡하게 잘 입었네. 홍보하다가 힘들면 적당히 말하고 빠져. 꾀병이라도 부리던가.”
“그래도 돼요?”
“내 영화도 아닌데 뭔 상관이야.”
이 인간이?
미간을 찌푸리자 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농담이야. 다른 사람하고 달리 공식 일정이 2개나 되는데 무리하지 말란 뜻이야. 그리고 골골거리면 바로 비행기 태워서 미국으로 보내라고 하더라.”
“누가요?”
“누구겠냐. 샬럿이지.”
헛웃음이 나왔다. 언제부터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둘이 죽이 잘 맞을 줄 알았으면 자선 파티에서 로티에게 붙잡혔을 때 안 도와줄 걸 그랬네요.”
“다 널 위해서인데 치사하게 굴래? 이래서 애들이 문제야. 어른 마음을 몰라준단 말이지.”
벤과 티격태격하는 사이 시간이 꽤 지났나 보다.
기다린 손님이 찾아온 걸 보면.
“이안, 잘 지냈니?”
문 앞에 선 노인은 주름을 곱게 접으며 인자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그랜드 라인을 함께 촬영한 한국의 원로 배우인 남수였고 이안은 반가운 기색으로 인사했다.
“저야 잘 지냈죠! 근데 어쩐 일로 직접 오셨어요? 다른 사람을 시키시지.”
“같은 호텔 방도 못 찾아올 정도로 늙었으려고. 흐음, 이쪽은 벤 로버츠 씨구나.”
남수를 알진 못하지만 눈치껏 같은 배우라는 걸 안 벤은 남수와 악수했다.
“벤 로버츠입니다.”
“박남수요.”
딱 이 정도로 인사가 끝났으면 깔끔하고 좋았을 텐데.
벤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알아서 잘 해줄 테지만 낮에는 더울 수 있으니까 물은 잘 챙겨줘야 합니다. 지친 것처럼 보이면 휴식 시간도 갖게 해줘야 하고 예정보다 늦을 거 같으면 연락해주셔야 합니다. 알겠죠?”
“음…이안? 뭐라고 하는 거니.”
못 알아들어서 참 다행이다.
이안은 푼수 같은 소리를 하는 벤을 방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
“그냥 무시해요. 이상한 사람이거든요.”
“야! 뭔가 방금 기분 나빴는데.”
한국어로 말했는데 눈치는 빠르다.
나름 할리우드 스타인데 남들이 볼세라 문을 꽉 닫은 이안은 남수의 손을 잡았다.
“빨리 가죠.”
정신없는 칸 일정이 시작됐다.
***
전 세계에서 칸 영화제를 찾은 취재진은 수천 명이다.
이틀 동안 직접 만났을 때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직접 체감할 수 있었다.
‘인터뷰에 인터뷰, 또 인터뷰.’
각오한 그대로였다.
“아이고, 죽겠다.”
“괜찮으세요?”
“됐다. 나보단 너랑 감독이 더 고생이지.”
앓는 소리를 낸 남수는 준혁을 봤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떠든 탓에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중이다.
칸에 참여한 그랜드 라인의 배우는 주연 배우 둘에 이안과 남수였다.
‘배우 명단만 봐도 한국 마케팅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그게 아니면 조연인 우리 둘을 데려올 이유가 없으니까.’
남수는 말할 것도 없고 이안도 한국에서 티켓 파워가 있는 배우다. 그러니 한국 기자 인터뷰에선 주연 배우들이라면 몰라도 둘이 빠질 수 없다.
반대로 해외 인터뷰 때는 국내 활동을 위주로 해서 해외 인지도가 적은 남수는 쉬어도 상관없고.
‘나랑 감독님만 양쪽 다 참여해야 하지.’
영화에 관해 설명할 감독은 당연하고 두 작품으로 칸에 참여한 이안도 관심의 대상이니 마찬가지였다.
걱정하는 시선에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 멀쩡한데요.”
“젊은 게 좋긴 좋아. 일단 밥부터 먹자고.”
부럽다는 듯이 본 준혁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새하얀 천막으로 이뤄진 특설 임시 건물인 파빌리온을 나서자 각국의 깃발이 늘어선 파빌리온이 레드카펫을 따라 길게 펼쳐졌다.
해가 기울고 슬슬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자 더 분주해진 사람들을 피해 레스토랑에 도착한 이안은 식사를 하며 창밖을 봤다.
“저렇게 서 있으면 티켓을 받을 수 있어요?”
거리엔 정장과 드레스를 입은 여러 남녀가 티켓을 원한다는 팻말을 들고 서 있다.
영화제 기간 내내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미 두 번 칸에 참여한 적 있는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양도해주는 경우가 많지. 시사회에 참여할 수 없으면 무조건 취소하거나 양도해야 하니까. 운 좋으면 월드 프리미어 작품을 볼 수도 있다고.”
월드 프리미어는 영화를 처음 상영한다는 뜻이다. 영화제에서 초청작에 월드 프리미어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고.
그랜드 라인하고 에일리언 헌터2만 해도 칸에서 월드 프리미어를 한다.
“프랑스에선 저런 사람을 시네필이라고 부르더구나. 한국어로 치면 영화광이랄까. 저런 사람들이 있으니 영화가 이어질 수 있는 거지.”
“그렇긴 하죠.”
미래에도 우여곡절은 엄청나게 많았지만 그런대로 영화라는 매체는 버텨냈다.
흥미롭게 아래를 바라보던 이안은 순간 흠칫 놀랐다. 이상함을 느낀 남수가 물었다.
“왜 그러니?”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수롭지 않게 둘러대면서도 창문 너머를 뚫어지게 내려봤다.
팻말을 들고 돌아다니는 여자가 보였다.
‘차라리 로티가 튀어나온 거면 이렇게 안 놀랐을 텐데.’
당장 레스토랑 문을 열고 ‘허니! 기다렸지?’라고 외치며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긴 하니까.
근데 눈앞의 상대는 아니었다.
경호를 위해 따라다니던 브레이커는 몸을 일으켜 이안이 보는 방향을 봤고 짓궂게 웃었다.
“꼬맹이, 이제 꽤 컸나 보다? 여자에게 눈길을 주기도 하고.”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니긴. 뭐 예쁘긴 하네.”
예쁘기야 하겠지.
갈색 머리를 동여매고 목선을 드러낸 사람은 매혹적인 외모로 톱스타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니까.
‘2번째 홈리스, 오드리 데이.’
배우라는 꿈을 단단하게 심어준 3인 중 한 사람이다. 작은 차에서 생활하며 성공하게 된 그녀는 희망을 줬으니까.
그러고 보니 오스틴의 수첩에도 그녀의 이름이 나와 있었다. 카터의 꼬드김에 넘어가 안 좋은 방법으로 배역을 따냈을 거라고 추정되는 배우로 말이다.
그녀가 왜 여깄는지 몰랐다.
“관심이 있으면 한 번 가서 말이라도 걸어보던가.”
“아뇨, 됐어요.”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하고 짧게 대답했다.
붙잡아서 뭔 이야기를 하겠는가.
‘그래, 홈리스 생활을 한다고 칸에 못 올 것도 없지.’
돈을 열심히 모아서 배낭여행을 왔을 수도 있고.
가난하다고 여행을 다니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재미없긴.”
“가서 밥이나 마저 먹어요.”
투덜거리며 브레이커가 돌아가자 준혁은 전보다 생기 있는 얼굴로 농담을 던졌다.
“우린 신경 쓸 거 없이 다녀와도 되는데? 이후에 잡힌 인터뷰는 어차피 하나뿐이고.”
“아니,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이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닉처럼 원래 인연이 깊은 사람도 아니고 다니엘처럼 작품으로 엮인 상황도 아니다.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지금 저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야.’
인연이 있으면 마일즈나 다니엘처럼 엮일 일이 생길 거다. 지금 당장 중요한 일은 따로 있고.
“일단 영화제에 집중해야죠. 내일이 우리 시사회잖아요. 걱정은 안 되세요?”
“당연히 되지. 안 떨리면 그게 사람이니.”
칸 영화제에 몇 분간 기립박수가 터졌다. 이런 건 다 의미 없다. 그냥 관례상 하는 일이니까.
진짜는 시사회 이후 바로 쏟아져 나오는 평점이 중요했다.
‘순서도 상영 횟수도 나쁘지 않아.’
기대작일수록 늦게 시사회를 열고 상영 횟수도 많은 편인데 그랜드라인은 딱 중간 정도였다.
준혁이 경쟁부문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작품인데 이 정도면 만족할 만했다.
“이제 와서 편집까지 끝난 영화를 바꿀 순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고요. 흥행에 실패하면 필릭스가 속이 쓰리다면서 이상한 음식점에 절 끌고 다닐 걸요.”
“하하하, 너도 즐기던 거 아니었니?”
“먹을 수 있는 것과 맛있는 건 다르잖아요.”
괴식가에 붙잡혀 고생할지도 모른다고 약한 소리를 하자 준혁은 유쾌하게 동의를 했다.
“그래, 마무리까지 잘 해보자고.”
어느덧 인파 속으로 사라진 그녀를 이안은 애써 지웠다.
***
영화제는 낮과 밤 구분 없이 파티 분위기다.
호텔에 머무는 사람 태반이 영화제 관계자인 만큼 낮에는 텅 비었던 수영장은 밤이 되자 영화 이야기를 꽃피우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한 병에 수십만 원짜리 하는 샴페인이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으어어… 머리 아파.”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숙취에 시달리는 사람은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소파에 뒤엉켜 있는 벤과 데미안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정신없이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로렌조 디자이너가 만들어줬다고? 딱 지금 사이즈에 맞춰진 거라 아쉬운데.”
“그렇긴 하죠?”
핏이 살아 있는 정장에 나비 넥타이와 끈으로 된 구두를 신은 이안은 북적거리는 인파 사이에 섰다.
극장까지 길게 뻗은 레드카펫 좌우로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준혁은 이안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안, 화장실을 다녀왔지? 중간에 나오면 배우라도 다시 못 들어간다?”
“그런 말 안 하셔도 별로 긴장 안 했거든요.”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야. 그렇게 본인 영화도 못 본 배우도 있거든. 아무튼 긴장 안 했다니 다행이다.”
꽤 큰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아야 할 정도로 주변은 시끄러웠고 코에는 남녀의 향수가 지독하게 뒤엉킨 향기가 났다.
향기만 그런 게 아니다.
“아, 미안.”
“아니에요.”
레드카펫을 앞두고 바글바글 모인 사람들은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셔터를 한몸에 받기 위해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 때문에 눈을 함부로 두기도 애매했고.
답답함이 차오를 때쯤 안내원이 지시가 들렸고 준혁이 레드카펫을 밟았다.
찰칵!
정신없이 몰아치는 셔터에 맞춰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준혁이 나섰고 뒤이어 주연 배우가 나갔다.
차례를 기다리던 이안은 달콤한 향기와 함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몸을 흠칫했다.
“오늘 멋진데, 허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휙 돌리자, 입꼬리를 올린 여인이 보였다.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봐도 눈앞의 상대는 바뀌지 않았다.
“로티!”
“걱정했는데. 옷은 잘 챙겨입고 다니더라.”
“여긴 어떻게?!”
“일 때문에 왔지. 몰래 온 건 서프라이즈지만. 감독님도 그렇고 다들 잘 숨겨주던데?”
다 한패라는 뜻이다.
쿡쿡 웃은 그녀는 이안을 툭 밀었다.
“날 만나서 기뻐 보이는 건 좋은데 네 순서야. 빨리 가야지.”
당했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이안은 레드카펫을 밟았고 셔터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기자들은 사진을 찍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이가 아직 15살이랬나.”
“어려서 그런가 많이 놀랐나 본데. 풋풋한 느낌이 나서 좋긴 하지만.”
에미상 때처럼 이상한 오해를 받은 이안은 뒤에서 손을 작게 흔드는 샬럿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지 진짜 나오라고 하진 않았는데.’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처음 경험하는 칸에 놀란 이안 프라이스.
-15살 아역이 처음으로 경험한 세계적인 영화제.
이런 제목으로 나오는 기사를 피할 순 없었다.
이날 가뜩이나 정신없는 멤버에 샬럿이 추가됐다.
“이안! 내가 골라준 옷을 이 정도만 들고 왔다고? 다른 옷은 어디 갔어?!”
여행 가방에 대본을 숨겨오느라 여러 벌 빼놓고 온 걸 들킨 건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