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31)
131. AP 시험
이안은 벨라에게 별다른 악감정은 없었다.
고작 20대 초반의 치기 어린 행동에 불쾌함을 느끼기엔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녹록지 않았다.
대본 목록을 보낸 것도 그냥 추천도서를 알려주는 것에 가까웠고.
오히려 지금 와선 호감이었다. 그냥 하는 척만 해도 될 일인데 꼬박꼬박 독후감을 써서 보내왔으니까.
‘아주 훌륭한 학생이구만. 노력하는 열의가 있어.’
뿌듯한 마음에 ‘이건 프랑스 대본이니 원문과 비교해보는 것도 좋다.’ ‘당시 시대 상황을 조금 더 살펴보면 대본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을 거다.’ 같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주는 피드백까지 재깍재깍 받아들여 보완하기까지 하니 역시 가르치는데 소질이 있다며 뿌듯해하며 더 많은 걸 알려줬는데…
설마 ‘교수님, 진도가 너무 빨라요.’라는 말도 차마 못 하고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야생의 대학원생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괜찮아요?”
“아하하, 괜찮아요. 경솔하게 내기한 제 잘못인 걸요. 이것 봐요. 여기서 벌써 이만큼이나 읽었다고요.”
…망가졌나?
대본을 팔랑거리며 웃는 꼴을 봐선 그렇게 보였다.
근데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었다.
“저도 그 내기는 들었는데. 기간이 없는 내기였잖아요. 천천히 하면 되죠.”
벨라는 처연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새로운 숙제를 던져주면서 기대한다고 압박을 주는데 어떻게 천천히 해요.”
압박이 아니고 그냥 칭찬이었는데?
이안은 벨라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았다.
‘그야말로 모든 교수가 꿈꾸는 최고의 인재네.’
채찍질을 안 해도 알아서 갈려 나가니 얼마나 소중하게 보일까. 진짜 교수라면 박사 과정까지 다이렉트로 끌고 갈 게 뻔했다.
이안에게 벨라를 소개해준 오드리는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은 사람이지?”
“응, 성실하네.”
파티장에서도 과제를 소화하다니. 고작 성실하다는 말로 끝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오드리에겐 내가 제이 안이라는 말을 안 했던가.’
따돌리려고 한 게 아니라 각자 촬영과 스케줄 때문에 바빠서 깜빡했다. 다른 애들은 굳이 말 안 해줘도 ‘대본 빌런? 이거 너지?’라며 바로 눈치챈 탓도 있고.
아무튼, 흥미롭긴 했다. 회귀 전에는 견원지간이던 둘이 이렇게 친해지게 되다니. 이게 전부 대본 덕분이다.
“이렇게 된 거 오드리랑 친하게 지내주세요. 배우 생활을 한 기간이 짧아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얼마 안 되거든요.”
“굳이 부탁 안 하셔도 돼요. 저야말로 신세 져야 할 처지거든요. 대본 해석에 도움도 줬고요.”
도움이 되는 게 당연했다. 스파르타 교육을 먼저 받은 직속 선배니까.
그래, 이렇게 훈훈하게 끝나면 될 일인데.
“음? 대본 해석은 나보다 이안이 더 잘해. 나도 얘한테 배운 거거든.”
“정말?”
“응, 한 번 부탁해봐. 엄청 도움이 될 테니까.”
벨라의 눈은 희망으로 초롱초롱 빛났고 오드리는 포교에 성공했다는 듯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피곤해졌다.
***
누차 말하는 이야기지만 할리우드에서 인맥은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오드리와 더불어 오랫동안 톱스타 위치를 지키는 벨라와 친분을 다져두는 건 좋은 투자였다.
‘특히 지금처럼 제작자 일에 한 발 걸친다면 더욱 그렇지.’
작품만 좋다면 독립 영화도 기꺼이 참여하는 성격이니 말이다.
거기다가 그녀에게 당장 도움을 구할 것도 있었다.
손익을 생각했을 때 대본 해석을 도와주는 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물론 평소처럼 놀러 왔다가 벨라를 발견한 애들은 기겁했지만.
“…이안, 너 미쳤어?”
“새삼스럽게 뭘 그래. 얜 원래 미쳤잖아.”
도로시와 다니엘은 속삭이며 이안을 툭툭 쳤다.
“아직 모르는 거 맞지?”
“모르지.”
알면 저렇게 있지 않겠지.
평안한 이안의 답변에 트라우마가 올라온 다니엘은 몸을 뒤로 쭉 뺐다.
“나는 이번엔 모르는 일이야. 갑자기 바쁜 일이 생각났네. 이만 돌아가…”
“어딜 가. 맞을래?”
도로시가 주먹을 들자 다니엘은 한숨을 내쉬며 앉았다.
주짓수로도 패배한 이상 도로시랑 물리력으로 싸워선 안 됐다.
“그래서 이게 무슨 상황이야.”
어떻게 요약하면 좋을까.
“박사 과정을 밟은 오드리와 석사 과정을 밟는 벨라가 대본의 즐거움을 깨닫는 중이지.”
“넌.”
“교수.”
“교주가 아니고?”
이안이 이상한 일을 저지른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생각할 건 없긴 했다.
이상한 설명이지만 대충 어떤 상황인지 눈치챈 도로시는 조심히 의견을 내놨다.
“그냥 밝히는 게 어때? 알려진 성격이라면 네 정체를 떠벌리진 않을 텐데. 불안하면 비밀계약서라도 쓰면 되고.”
“그게 좋을까?”
이안이 솔깃한 표정을 지을 때 벨라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안! 덕분에 이번엔 제대로 쓴 거 같아. 이 정도면 제이 안도 아무 말 없이 칭찬해주겠지?! 응?”
“그럼요.”
교수에게 칭찬받을 생각을 하며 들뜬 벨라를 본 도로시는 이안의 옷을 붙잡았다.
“아니야. 역시 일단 숨기는 게 좋겠어.”
“그렇지?”
도로시는 다니엘이 어떤 마음으로 라이의 정체를 숨겼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차마 저 앞에 ‘짜잔, 제이 안의 정체는 이안 프라이스였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인정머리가 없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
“어떻게 할 거야.”
“일단 최대한 숨기면서 친해져야지. 저렇게 보여도 친한 사람에게 매몰차게 굴 성격은 아니거든.”
제이 안의 이름으로 제작 중인 영화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곗거리도 있다.
화내긴 해도 봐주겠지.
“난 모르겠다. 알아서 해. 어휴, 이럴 때 레이첼이라도 있어야 마음에 위안이 될 텐데.”
토끼처럼 눈치 보고 있어야 할 레이첼이 없었다.
라이가 아닌 본인 이름을 내걸고 앨범을 준비하는 탓이었다. 가수로서 이미지를 지워야 하는 이안과 달리 그녀는 라이의 이름이 대중들에게 잊히기 전에 앨범을 내야 했으니까.
‘잘 되고 있나 모르겠네.’
홀로서기를 하는 첫걸음이 중요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이미 여러 번 능력을 입증했으니 아마 잘 할 거다.
도로시가 레이첼의 빈자리를 느끼는 사이 벨라는 이안에게 다가왔다.
피곤함에 찌든 모습은 여전했으나 과제 하나를 끝내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물론 앞으로 읽어야 할 대본이 200개가 넘지만.’
굳이 냉정한 현실을 일깨워주진 않았다.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
“언제든 부탁하러 와도 돼요. 대본 읽는 걸 좋아하거든요. 제가 아니라더라도 오드리랑 같이해도 좋고요.”
“그럼 나야 좋긴 한데. 미안하잖아.”
미안할 거 없었다. 안 그래도 부탁할 게 있었으니까.
“그럼 나중에 사람 좀 소개해주실 수 있어요?”
“소개? 누구?”
“예전에 출연하셨던 퍼펙트 라이프의 감독님이요.”
벨라는 ‘아.’하는 짧은 음성을 내뱉었다.
그녀로선 모를 수 없는 작품이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그녀를 할리우드로 이끌어준 영화였으니까.
“마르코 디아즈 감독님 말하는 거지?”
“네.”
라틴계 미국인 감독으로 이미 퍼펙트 라이프로 주목할만한 신인 감독으로 여겨지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고작 그 정도지.’
하지만 내후년에 나올 영화로 여러 시상식에서 상을 타며 단번에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감독이었다.
중요한 건 그 작품의 주연이 아시아계라는 점이다. 상을 타기로 마음먹은 만큼 놓치기 아쉬운 작품이고.
나중에 캐스팅에 유리하도록 친분을 쌓아놓으려고 했는데 도통 인연이 닿지 않았다.
이안의 물음에 벨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찾는지 알 수 있을까?”
“퍼펙트 라이프를 재밌게 봤거든요. 좋은 감독님인 것 같아서 미리 안면을 터놓으려고요.”
“그래?”
이상한 배우를 소개해주는 것도 아니고 이안이면 오히려 마르코가 부탁해야 할 인맥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아마 힘들걸.”
“왜요?”
“저번에 안부 연락을 드렸는데 이젠 감독 일을 안 하신다고 하시더라.”
“…네?”
“밴드를 하시겠다던데.”
음, 그렇구만.
역시 이 세상엔 정신 나간 사람이 수두룩했다.
***
과거로 돌아온 이안은 어떤 변화가 생겨도 놀랄 이유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멀쩡하게 감독 일을 하던 사람이 헛바람이 들어서 밴드를 한다고 설쳐도 이상할 게 없다는 이야기다.
“일단 어쩔 수 없지.”
굳이 달려가서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알아서 정신을 차릴 수도 있고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거기다가 마르코 감독이 아니더라도 일정이 바빴다.
이안은 오스틴과 함께 미팅에 들어간 상태였다.
“스케줄을 길게 뺏진 않을 겁니다. 3월에 보름 정도만 내주시면 됩니다.”
영화 프로듀서의 제안에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그때면 invisible children 촬영은 마무리됐을 때였다. Holy Love 촬영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바로 전이고.
‘시간 하고 출연료는 괜찮은데.’
저번에 말한 근미래 E 스포츠와 관련된 영화였다. 그냥 오디션 제안을 준 거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캐스팅에 진심일 줄은 몰랐다.
“한국계로 최종 보스입니다. 다른 배우들도 생각해봤지만 최강자에 어울리는 포스가 안 나더군요. 드라마에서 나오는 모습도 인상적으로 봤고요.”
“그런가요?”
“네, 거기다가 아시아권에서 가진 티켓파워도 생각했습니다.”
하긴 아시아와 미국 전체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아시아계 배우는 많지 않았다.
“많은 부분이 CG로 들어갈 테지만 스타일리쉬한 액션이 꽤 들어갈 겁니다. 예를 들어 칼을 사용하거나 그런 거 말입니다.”
“꽤 재밌겠네요.”
“아, 그리고 촬영 일정 중에 한국에서 찍는 것도 있습니다.”
이안의 촬영 일정이 보름인 걸 생각하면 한국 촬영까지 하는 건 꽤 빠듯할 텐데 한국까지 가서 촬영한다니 꽤 신기했다.
물론 한국에서 홍보 효과는 쏠쏠할 테지만.
‘시간이 되면 다른 사람 좀 만날까.’
그랜드라인을 함께 촬영한 고준혁 감독이나 원로배우인 남수처럼 그저 통화로 안부를 주고받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일정은 조금 늘려도 되니까 혹시 한국 촬영을 마지막에 잡아주실 수 있나요? 한국 지인들 좀 만나고 올 생각입니다.”
“그 정도는 조율할 수 있습니다.”
프로듀서는 환한 얼굴을 했다.
촬영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캐스팅을 확정 짓지 못한 이유가 이안 때문이다. 동의만 받을 수 있으면 그 정도 일정 조율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계약서는 조금 더 조율해야겠지만 결정을 내린 이상 어렵지 않았다.
이안은 남은 일을 오스틴에 맡기고 잠시 고민했다.
‘한국이라.’
가족 여행으로 한국을 간 뒤로 꽤 오랜만이다.
고향이라는 감정은 없지만 호감은 꽤 있었다. 망해가던 가게를 살린 것부터가 한국식 콘도그를 팔기 시작하면서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OTT 시대에 접어들면서 적은 제작비로 좋은 작품을 내는 한국이 더욱 주목받으니 한 번 눈도장을 찍어둘 필요도 있었고.
출연 계약서를 찍고 대본을 받았지만 당장 집중해야 하는 건 invisible children 촬영이었다.
연말이 지나고 본격적으로 촬영과 방영이 시작됐으니 말이다.
하수도를 통해 탈출하려는 두 무리와 사방에서 조여오는 좀비들은 숨 막힐 거 같은 압박감을 줬다.
피로 얼룩진 하수도 촬영 장면이 이어질수록 배우들은 녹초가 되어갔고.
그만큼 액션 연기가 많이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한 명을 보며 질린 눈을 해야 했다.
“…쟨 괴물이야.”
“진짜로요.”
마일즈의 말에 레오뿐만 다른 배우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분량이 많은 이안이 가장 멀쩡했으니까 이런 의견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혹시 스테로이드라도 하는 거 아니지?”
“제가 그런 걸 왜 해요. 보디빌더도 아니고.”
“아니면 우리 몰래 좋은 거라도 먹니.”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는 마일즈를 밀어냈다.
“저 공부하느라 바쁘니까 이상한 소리를 하지 마요. AP 시험도 봐야 한다고요.”
AP는 고등학생이 대학 과목을 선이수하는 제도를 말한다. AP 시험을 통해 학점을 인정해주는데 졸업을 위해서 학점을 따놔야 했다.
5월에 시험이 있는데 새로 촬영이 잡혔으니 지금이라도 서둘러야 했다.
‘빨리 조기 졸업을 하든가 해야지.’
혹시 대학을 갈지도 모르니 AP 시험도 준비하긴 하는데 진짜 만만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학교에 시험 본다고 미리 알려줘야 하나.’
조기 졸업을 목표라는 말도 안 했으니 미리 이야기해야겠다.
***
이안의 상담 요청을 받은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며 반겨줬다.
배우 활동을 하느라 학교에서 못 나오는 날이 많지만 학업이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래, 조기 졸업이 목표라고? 애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긴 했단다.”
“네, 그래서 AP 시험을 보려고요.”
“음, 수업 없이 봐도 괜찮겠니?”
꼭 AP 수업을 듣고 시험을 봐야 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결과가 나쁘면 그냥 시험비만 날릴 뿐이지만.
‘이안에겐 비용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니까.’
도전해보는 정신은 좋았다.
“그래서 어떤 과목을 볼 거니.”
“영어, 영문학, 중국어와 문화, 일본어와 문화.”
음 언어 능력이 뛰어난 이안이니 괜찮은 선택이다.
“화학이랑 생물학이랑 통계학이랑…”
“잠시만, 이안. 몇 개를 보려고…?”
“열 개요.”
이안의 대답에 선생님은 진지하게 물었다.
“그렇게 학교에 다니기 싫었니? 혹시 괴롭히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지?”
이상한 오해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