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38)
138. 시작점(1)
Holy Love의 스토리 편집자인 제나는 작가들이 쓴 대본을 확인했다.
스토리 편집자는 작가 그룹을 담당하는 중간 수준의 작가였고, 주된 일은 대본 초안을 피드백해 대본 품질을 높이고 드라마 러닝타임에 맞게 대본을 조정하는 등이었다.
제나는 대본을 깐깐한 눈으로 살폈다. 프로 의식도 있으나 주된 이유는 이안 때문이다.
‘아주 귀신이 따로 없어. 누가 보면 각본가로 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굴러먹은 사람인 줄 알 정도야.’
대본 한 장에 1분이라는 기본 양식에서 벗어날 때마다 칼같이 지적이 들어오고.
토론 내용을 제대로 반영 안 하고 ‘이쯤 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면 바로 다음 토론에서 뚝배기를 깨버렸다.
쇼러너도 없고, 원작자는 초짜에 아역 배우 겸 제작자가 대본을 최종 판단 내린다는 말에 쉽게 생각하고 들어온 사람들은 호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만 보면 작가방(writer’s room)의 분위기가 삭막할 거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안이 합리적인 지적만 했고 작가들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능숙하게 운영한 탓이다.
‘보조 작가를 배려해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보조 작가는 각본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초기에 맡는 직책이고 작문 과정을 도왔다.
주 업무는 회의에 참석해 나온 아이디어가 손실되지 않도록 모든 내용을 기록하고 이걸 정리해 작가에게 보내주는 역할이고.
이안은 이들이 그냥 잡무만 하지 않도록 회의 때 생각한 스토리, 대사 같은 걸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해줬다.
이런 초짜 같지 않은 배려는 보조 작가뿐만 아니라 작가방의 모든 인원에게 적용됐다.
‘작가방의 분위기는 원래 쇼러너를 따라가는 법이니까.’
제나는 딱딱하거나, 자유분방하거나 심지어 정치질로 정글 같은 곳까지 다양하게 경험해봤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곳 중 이곳의 분위기는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좋았다.
이 분위기를 고작 미성년자가 만들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고.
시간을 살핀 제나는 문을 열었다.
사무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고 한숨을 내뱉었다.
“…곳곳에 쌓아놓은 대본만 빼면 참 좋은 제작자인데 말이야.”
수정이 끝난 대본을 파기하지 않는 건 둘째치고 왜 다른 작품의 대본들이 계속 쌓여가는지 모르겠다.
물론 이유를 듣긴 했다.
-하하하, 일하다가 힘들면 기분 전환 삼아 보라고요. 좋죠?
…그게 미친 소리라서 그렇지.
상사가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때는 일단 웃으며 동의했지만 알기론 저 대본을 보는 사람은 이안 말곤 없었다.
“아마 힘들 걸요. 집에서도 저러거든요.”
“아, 에이든.”
여동생에게 줄 간식을 챙겨가는 에이든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이젠 굳이 사무실까지 올 필요 없지 않아? 기껏해야 상황에 맞게 수정 작업만 남았는데 말이야.”
“여동생이 이곳에서 작업하는 걸 좋아해서요.”
그가 여동생을 얼마나 각별하게 챙기는지 봐온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소설 준비는 잘 돼?”
“꾸준히 글을 써야 해서 뭐라도 일단 쓰는 거죠.”
“왜?”
이미 몇 차례 소설로 성공한 남매 작가인데 글을 쓰라고 압박을 줄 사람도…
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향했다. 이안의 사무실이었다.
“주기적으로 집에 강도가 찾아와요.”
“힘들겠다.”
“덕분에 열심히 쓰죠. 우리 글을 제일 좋아해 주는 사람이거든요.”
대화를 이어가려던 제나는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상대를 보고 흠칫 놀랐다.
들어온 사람은 이안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에이, 없는 자리에서 험담 좀 했다고 화내거나 하진 않아요.”
“험담이라뇨. 그럴 리가요.”
아쉬움을 약간 토로했을 뿐 험담은 아니다.
제나는 진땀을 빼며 이안을 살폈다.
“학교에 다녀오셨나 봐요?”
“네, 평일이니까요.”
일할 때는 이 바닥에서 수십 년은 구른 사람 같았는데 학교를 다녀왔다니 조금 평범한 고등학생 같아 보였다.
에이든은 이안을 반기며 물었다.
“오늘 AP 시험 보는 날이잖아. 어땠어?”
“그냥 풀만 하던데요. 남은 8과목만 잘 치면 돼요.”
…역시 평범한 건 아닌가?
누가 들으면 AP 시험이 아니라 쪽지 시험이라도 보고 온 줄 알겠다.
‘그래, 신경 쓰면 지는 거지.’
이안은 시계를 힐끔 봤다.
“회의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네요.”
“앞당길까요?”
“굳이요? 저도 조금 쉬어야죠.”
하긴 시험을 보고 왔으니 힘들 법도 했다. 이제야 좀 상식에 걸맞는…
“뭘 볼까나. 한 시간이면 꽤 볼 수 있겠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한 손 가득 대본을 챙기는 이안을 보며 둘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누가 빌보드 정상에 올랐던 가수가 아니랄까 봐 이 와중에 콧노래는 듣기 좋아서 더 기분이 이상했다.
‘역시 본업이 가수.’
제나는 이안이 알았으면 처음으로 화냈을 생각을 했다.
작업실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
2주가량 진행된 AP 시험을 마친 이안은 드디어 ‘도비는 자유에요.’를 외칠 수 있었다.
굳이 확인하진 않았지만 최고 등급인 5점은 충분히 나올 수준이었다.
학교는 이제 방학을 코앞으로 뒀고 드라마는 본격적인 촬영의 시작점인 대본 리딩을 앞뒀다.
‘두근거리네.’
긴 배우 생활이 무색할 정도로 과거로 돌아와 새로운 도전은 많이 했다. 그중에서 제작자 겸 배우로 활동하는 건 가장 특별한 경험이었다.
위튜브가 아니라 지상파에서 가장 시청률이 높은 황금시간대에 방영되는 드라마이니 말이다.
그런 이안에게 조언을 해주겠다고 이런저런 사람이 연락하고 찾아오는 건 이안이 그동안 올바른 삶의 궤적을 살아왔다는 걸 의미했다.
-둘의 역할을 같이 수행하려면 제작자일 때와 배우일 때를 명확하게 구분 지어야 해.
“구분 짓는다고요?”
-그래, 예를 들어서 급하게 촬영 예산을 줄여야 할 때가 오면 배우로선 싫겠지만 대본 수정을 해서라도 타협을 봐야 하지. 그게 제작자 역할이니까.
스노우레이크로 인연을 맺은 패트릭의 조언이었다.
그 외에도 배우와 제작자 역할을 함께 하며 시행착오를 겪었던 소중한 경험을 기꺼이 풀어줬다.
-아, 벤의 아들과 같이 공작새 잠옷을 입고 찍은 사진은 잘 봤어. 잘 어울리더라.
…이런 쓸데없는 칭찬만 뺐으면 더 좋았을 텐데.
괜히 데미안과 지인이 아니었다.
-야, 드라마 OST를 재스퍼에게 맡겼다며. 나한테 맡겼어야지. 제이로 쌓은 우리의 우정이 이것밖에 안 돼?
오랜만에 연락해서 괜한 경쟁의식을 불태우는 프레드의 전화도 있었고.
이 밖에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전화를 줬다. 쉬고 있는 게빈은 자주 찾아와서 조언을 해줬고.
이안은 대본 리딩을 앞두고 캐스팅 디렉터인 아델리아와 통화를 했다.
-오디션 영상은 다 확인했지? 일단 정해진 배역까지 전부 캐스팅은 끝났어.
“다 봤죠. 고마워요.”
-뭘 이게 내가 하는 일인데.
invisible children의 노아로 캐스팅할 때와 지금의 그녀는 경력과 직책부터 달랐다.
Holy Love 정도의 규모라면 그녀가 직접 할 게 아니라 밑에 있는 직원을 사용해도 될 일이다. 그녀가 직접 나선 건 지난 인연 덕분인데 안 고마울 수가 있나.
“다음에 만나면 밥이라도 살게요.”
-어머, 데이트 신청이니. 그때는 잘 차려입고 나가야겠네.
말은 저렇게 해도 이성적인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한 때 연인이었던 그녀의 이런 반응을 볼 때마다 새삼 인간관계가 많이 바뀐 게 실감이 났다.
통화를 끝낸 이안은 녹화된 배우들의 오디션 영상을 떠올려봤다.
‘몇 명은 조금 아쉽긴 하지만 역시 아델리아네. 전반적으로 다 괜찮아.’
다행이었다.
사실 복잡한 오디션 경쟁을 뚫고 합격한 배우도 파리 목숨에 가까웠다.
갑자기 에피소드를 다시 쓰면서 배역이 삭제될 수도 있고 현장에서 감독, 주연 배우, 캐스팅 디렉터 눈 밖에 나서 잘리는 경우도 허다했으니까.
흉측한 외모 탓에 이안은 저런 일을 수없이 겪었다.
그 절망감을 알기에 아무리 작은 배역이라도 되도록 기회를 앗아가고 싶진 않았다.
생각을 정리하고 이안은 밖으로 나갔다.
스태프들이 대본 리딩장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준비는 얼마나 됐어요?”
“배우들 자리는 준비가 끝났고 복사한 대본도 전부 자리에 놨습니다. 몇몇 배우님들은 이미 도착하셨고요.”
일찍 도착했다 싶어 안을 확인하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뭐야. 주연 겸 제작자라고 이제야 얼굴을 보여주는 거야?”
“야야, 조심해. 쟤랑 같이 촬영하면 이상한 일에 엮일 수 있다고.”
툴툴거리며 반기는 도로시와 그걸 말리는 다니엘 그리고 이안이 온 것도 모르고 대본에 푹 빠져 있는 여자 이안, 오드리까지.
역시나 이 셋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
“너무 부지런히 온 거 아니야? 적당히 늦어줘야 다른 배우들이 눈치를 안 보지.”
“시답잖은 소리는. 알아서 하겠지. 그것보다 여기로 와봐. 여기 수정된 대사 말이야…”
다니엘의 질문을 시작으로 도로시와 뒤늦게 이안을 확인한 오드리까지 합세해서 순식간에 대본을 분석하는 분위기로 들어갔다.
이안 집에서 흔히 벌어지는 풍경이지만.
“…이걸 들어가야 해. 말아야 해.”
대본을 가운데 두고 심각한 분위기로 대화를 주고받는 핵심 배우 넷 때문에 차마 들어오지 못한 조연 배우들이 입구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냥 들어가도 되지 않아요?’
‘그럼 먼저 들어갈래요?’
‘…그건 좀.’
괜히 총대 메기 싫다!
이들을 살려준 건 리딩이 시작할 때쯤 도착한 조슈아였다.
“왜 다들 이러고 있어? 이안! 네가 배우들 벌세웠니?!”
고개를 든 이안은 깜짝 놀랐다.
텅 빈 방 밖으로 사람들이 우글우글 서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배우들의 기강을 잡아버렸다.
Holy Love 제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
아일라는 레이첼이 노래하는 걸 냉정한 눈으로 바라봤다.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무드가 가득 담긴 팝 록이었다. 빌보드 1위까지 올랐던 라이의 곡과는 다른 느낌의 곡이지만.
‘실패하더라도 이렇게 가는 게 맞지.’
라이라는 거대한 그림자에서 벗어나 홀로 서려면 명확히 둘을 구분 지을 필요성이 있었다.
노래를 마친 레이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요?”
“말했잖아. 노래는 좋다고. 그래도 시선 처리와 동작은 많이 자연스러워졌네. 이 정도면 토크쇼에 나가도 민망한 소리는 안 듣겠다.”
“다행이다.”
레이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은 음악방송을 활용해 신곡을 홍보하지만 미국에는 그런 곳이 없다.
주로 콘서트 활동을 하고 TV 홍보는 토크쇼나 라디오를 활용한다. 라이브 무대도 거기서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제리 페레스의 토크쇼에 나간다고 했지?”
“네, 예전에 에미상 시상식 때 이안과 인연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전화로 이뤄진 사전 미팅 때 ‘같이 콘도그를 튀기며 토크쇼에 나오기로 약속했으면서 아직도 안 나온다.’라며 장난스럽게 제리가 투덜거린 건 덤이다.
“잘됐네. 제리의 토크쇼라면 괜찮지.”
조금 심심한 느낌은 있어도 짓궂은 질문을 던지거나 괜한 논란을 만들지 않는 진행자였다.
대외 활동이 아직 낯선 레이첼에겐 가장 적절한 토크쇼였다.
“이안에 대한 질문도 꽤 하겠네?”
“아무래도요. 사전 질문에도 꽤 물어봤어요.”
“혹시 연인이냐고 묻지는 않든?”
“…에?”
짓궂은 물음에 레이첼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아일라는 귀여운 모습에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뭘 그렇게 놀라. 둘이 연인이냐는 질문은 나도 많이 듣는걸. 사위 후보라고 대답하곤 했지.”
“엄마!”
“쉿! 가수는 목을 아껴야지. 곧 무대도 있는 애가.”
이 말에 입을 꾹 다물고 흘겨보는 딸의 머리를 아일라는 자상하게 쓸어줬다.
“아무리 이안이 대본을 연인처럼 사랑한다고 해도 그렇게 방심하다가 뺏길 수도 있다? 오드리는 물론이고 요즘엔 벨라인가 그 아이도 자주 들락날락한다며.”
“오드리랑 벨라요?”
레이첼은 둘을 떠올려봤다.
그 둘 중 한 명이 이안하고 연인이 된다고?
“절대 그럴 일 없을걸요.”
레이첼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새끼 오리처럼 이안을 졸졸 쫓아다니며 따라 하는 오드리는 연인보단 딸에 가까웠다.
나이를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어른스러운 이안과 은근히 허술한 면이 있는 그녀를 같이보면 그런 느낌이 들었다.
벨라는…
‘대학원생이 연애를 어떻게 해.’
아직도 과제에 파묻혀 지내는 그녀에겐 연애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
아일라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이안, 얘는 함께 뭘 하길래 이렇게 위기감을 안 줄 수 있을까. 그것도 참 능력이다.
그녀는 작전을 바꿨다.
“이안하고 닮은 애를 낳으면 엄청 귀엽지 않을까? 저번에 에반하고 같이 찍은 사진을 보니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더라.”
레이첼도 그 사진을 봤다.
같이 동물 잠옷을 입고 찍은 모습은 너무 귀여웠다.
잠시 이안을 닮은 아이를 떠올려봤다.
“…너무 많이 닮으면 안 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가 쌍으로 집 안을 대본으로 가득 채워놓는 모습밖에 상상이 안 갔다.
대본병은 유전병일 가능성이 컸다.
얼마 후 레이첼이란 가수의 시작을 알리는 앨범이 발매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