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55)
155. 베네치아 영화제
이안의 삶에서 할아버지란 존재는 없었다.
아무리 과거로 돌아와도 미국 땅을 밟기도 전에 사고로 돌아가신 분과 인연이 닿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기껏해야 사진이나 가족들이 이야기해주는 옛이야기로 어떤 분인지 들었을 뿐이다.
‘회귀 전에는 항상 아쉽게 생각했었지.’
좋은 분인 것도 있지만, 만약 계셨다면 가족을 잃는 끔찍한 경험을 안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탓이다.
‘그러고 보니 사건을 막는데 할아버지의 유품인 총을 사용했으니 도움을 받은 건 맞나.’
재차 벌어질 뻔한 비극을 막은 단 한 방의 총성.
어쩌면 그건 할아버지가 남긴 선물인 것 같았다.
아무튼,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할아버지란 존재를 느끼게 해준 건 감독님들이었다.
일정이 바쁠 때도 꾸준히 연락하는 이유였다.
-정말 귀신이니 그런 이야기를 보내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애석하게도 지금의 게빈처럼 항상 기뻐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택배로 보낸 쪽지대로 세수는 했고?
“했는데 별 효과는 없는 거 같은데요. 그래 봐야 소금물이잖아요.”
-다음에는 목욕이라도 시켜야겠구나. 랜든, 그놈이 멀쩡한 애를 망쳐… 아니지. 넌 처음부터 이랬었지.
어렸을 때 함께 공포물을 보던 추억을 떠올렸는지 게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하, 그때도 참 재밌었는데. 그렇죠? 나중에 추억을 되살려 볼까요?”
-됐다, 이 녀석아. 이젠 잃을 것도 없어.
게빈은 겁쟁이라고 자서전까지 쓴 마당 목이 터지도록 소리 지를 생각은 없었다.
-촬영은 할 만하고?
“제가 언제 촬영하면서 힘들다고 한 적 있나요.”
-흠, 그것도 그렇긴 하지.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간단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은 게빈은 통화를 끝낼 때쯤 돼서 물었다.
-촬영은 한동안 그곳에서 하니?
“왔다 갔다 하긴 할 텐데 한동안은 그럴걸요. 그건 왜요?”
-이상한 게 튀어나온다고 했으니 내가 보낸 물건을 요긴하게 썼으면 좋겠구나.
이안은 택배로 함께 온 십자가나 성경 같은 걸 봤다.
무당도 퇴마한 마당에 굳이 이런 게 필요할까 싶긴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있지 않은가.
“고마워요. 잘 쓸게요.”
-그래, 나중에 건강한 모습으로 오렴.
이안은 그렇게 일이 끝난 줄 알았다.
“이안 군, 미국에서 택배가 왔던데요.”
며칠 뒤 또 다른 택배가 오기 전까지.
‘…감독님 이름으로 또 택배가 왔다고? 수상한데.’
취급 주의 스티커가 붙어 더 수상했다. 그렇다고 안 열어볼 수도 없고.
안전한 촬영장이니 걱정 말고 쉬라며 마커스를 서울로 돌려보낸 게 아쉽게 느껴졌다.
마음을 굳게 먹은 이안은 상자를 열어봤고 다시 급하게 닫았다.
내용물을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한국은 세관 검사를 안 하나?”
이 망할 공작새 인형들이 어떻게 통과됐지?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데미안과 손을 잡다니. 누가 감독님을 이렇게 타락시켰는지 모르겠다.
참 말세였다.
***
이안이 깜짝 선물이라면서 공작새 인형들을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나눠주는 사소한 일이 있긴 했으나 촬영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우리 남편이 진짜 자기 애인지 의심하는 거 같아. 유전자 검사를 한다고 하면 어떡하지?!”
긴 출장 사이에 태어난 아기인 만큼 의심받는 게 당연했고 선영의 말에 진영은 바로 친부에게 달려갔다.
“너, 이 자식. 잘 만났다. 감히 우리 누나를 임신시키고 튀어?!”
“아아악! 머리! 머리 빠져!”
“동네 사람들! 이 인간이 어떤 놈인 줄 아십니까?!”
“미안해. 미안하다고!”
“너 또 한 번 내 앞에 보이기만 해봐. 아주 그땐 가만 안 둬!”
화가 난 것처럼 한 움큼 쥐어뜯은 머리카락을 지퍼백에 챙기고 돌아온 진영은 남편인 서진에게 접근했다.
능청스럽게 술을 곁들여 대화를 나눈 그는 자신의 자식이 맞는지 의심된다는 말까지 들었고.
“뭘 망설입니까. 바로 유전자 검사를 해야죠. 사모님께서도 의심받는 것보다 그걸 더 원하실 걸요. 자, 용기 내서 한번 말해봐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선수를 쳐 서진의 신뢰를 얻은 진영은 DNA 검사를 보내는 머리카락까지 바꿔치기할 수 있었다.
당연히 돌아온 건 99.9% 친자.
이 일로 서진의 마음마저 얻은 진영은 지하실을 벗어나 활개를 쳤고 유진은 남의 아기가 된 시우를 보살피며 없다고 생각한 모성을 깨달았다.
모래성 같은 평화를 보여주던 저택의 분위기가 바뀐 건 서진이 선영을 대신해 아기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유진에게 끌리면서였다.
“누나를 좋아하는 거 같다고?”
“어떡하지?”
“잘됐네! 그냥 받아들여.”
“그럼 우리 사이는 어쩌고.”
“그냥 남매라고 밝히면 되지. 사정이 너무 힘들어서 속였다고 사과하면 그만이야. 그리고 언제까지 이 거지 같은 지하실에서 지낼 순 없잖아.”
여기 계속 살 거라며 열심히 붙였던 벽지를 거칠게 뜯어낸 진영은 유진에게 말했다.
“조카랑 함께 살고 싶다며. 나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우리도 사람처럼 살아보자.”
그게 비록 선영을 배신하는 일이라도.
망설인 끝에 시우를 떠올린 유진은 동의했고 다시 장면은 유쾌하게 흘러갔다.
이미 불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모르는 서진이 진영을 속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관객에게 웃음을 주기 충분했으니까.
중반을 넘긴 촬영장에는 평소와 달리 긴장감이 흘렀다.
지하실이 침수되는 장면 촬영을 앞둔 탓이다.
준혁은 이안의 어깨를 가볍게 주물러 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할 거 없어.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강우기를 멈출 거야. 여차하면 바로 구할 수 있게 장비도 다 준비해뒀고.”
“그럼 바로 촬영하면 될까요?”
“잘 부탁할게.”
어두컴컴한 계단을 타고 내려가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공간은 CG 처리를 위해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실내 촬영은 이미 남양주 세트장에서 하고 왔다.
그래 봐야 집에 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전이라서 이번이 진짜 침수 장면 촬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물 채워 넣겠습니다.”
살수차에서 쏟아져 나온 물이 계단 아래를 채웠고 적당한 수위까지 올라오자 강우기가 시원한 빗소리를 내며 물을 흩뿌렸다.
이안은 눈을 감고 지난 실내 촬영을 떠올렸다.
폭우에 깨어났으나 지하실로 모인 빗물 때문에 아무리 힘을 줘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머릿속에 지난 기억을 되새긴 이안은 슬레이트 소리에 눈을 떴다.
“빌어먹을! 왜 안 열려!”
쿵쿵 문을 두들기고 밀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급히 창밖을 내다보자 계단을 타고 콸콸 쏟아진 물이 문밖에서 넘실거렸다.
“아무도 없어요?! 누나! 사장님! 사모님! 가정부 아줌마!”
시끄러운 빗소리는 간절한 외침을 집어삼켰고 진영은 창문에 달린 방범창을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드라이버로 틈을 비틀어도 보고 프라이팬을 망치처럼 휘두르기도 했다.
언제 차오를지 모르는 비에 패닉에 빠져 발버둥을 치고 있을 때 정원을 비추는 조명 때문에 살짝 그림자가 비쳤다.
사람이다.
희망을 찾은 좁은 방범창 틈으로 손가락을 쑤셔 넣으며 외쳤다.
“살려줘요! 살려달라고요!”
간절히 외치던 진영은 그림자가 휙하고 사라지자 미친 듯이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구해달라고! 죽게 생겼다니까! 사람이 죽게 생겼다고!”
진짜 떠났다.
분노에 휩싸인 진영은 프라이팬으로 미친 듯이 방범창을 두들겼고 녹이 슬어 있던 방범창이 콰득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낑낑거리며 방범창을 뜯어낸 진영은 서둘러 창문을 넘었고 첨벙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지친 몸으로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라온 그는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인기척이라곤 하나도 없는 저택.
자신이 죽도록 내버려 둔 사람은 이미 떠난 뒤였고 그는 이를 까득 물었다.
지독한 분노로 물든 눈은 대사로 없이도 그가 무슨 생각하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진영은 휘적휘적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컷!”
준혁의 촬영 종료를 알렸다. 숨죽이며 촬영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미쳤다.’
‘이걸 NG 한 번 안 내고 끝내버리네.’
놀람으로 시작해 두려움과 희망을 지나 분노까지.
막힘 없이 표현하는 감정은 보는 사람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어때요? 괜찮게 촬영됐나요.”
웃으며 묻는 말에 준혁은 말할 것도 없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시계를 힐끔 보니 예정 촬영 시간이 한참 남았다. 쉽지 않은 장면인 만큼 시간을 넉넉히 잡은 탓인데.
“자자! 빨리 현장 정리하고 일찍 철수합시다!”
스태프들이 환호성을 지르자 가볍게 웃은 그는 고생했다며 이안을 돌려보냈고 촬영 장면을 재생했다.
‘편집을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어떻게 하면 스크린의 저 연기를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을까.
이번 촬영분과 지난 실내 촬영을 번갈아 가며 살피던 준혁은 잠시 멈칫했다.
“어?”
“무슨 일 있나요?”
다가온 촬영 감독에게 준혁은 빠르게 손짓했다.
“이것 좀 보시죠.”
왜 두 촬영분을 번갈아 보던 그는 준혁처럼 놀란 눈을 했다.
“이게 돼요?”
“…그러게 말입니다.”
준혁은 헛웃음을 지었다.
***
몇 개월간 온갖 꼴을 다 보며 촬영하다 보면 다른 배우에 대해 알기 싫어도 알게 된다.
덕분에 세 배우도 이안에 대한 호기심은 어느 정도 사라졌다. 대신 그 빈자리를 놀라움이 채워서 그렇지.
“이안이 대단한 건 익히 알고 있긴 했는데 말이야.”
드라마와 다른 영화에 비해 그림자 가족의 촬영 환경은 좋아도 촬영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도 쉽지 않다.
분명 그럴 텐데 이안은 그 평범한 범주 안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일 중독이라고 해야 할까.’
재밌다며 다른 대본들을 쌓아놓고 읽는 건 그렇다 치자. 취미라는데 뭘 어떡하겠는가.
그나마 이건 이해하는데 틈틈이 소화하는 다른 일은 보통이 아니었다.
“어디에서 방영권 계약이 들어왔다고요? 아, 거기요. 조건은요.”
프로듀서로서 Holy Love의 계약 업무를 소화하는 걸 시작으로.
그림자 가족 이후 예정된 「The King Of Prison」 촬영을 위해 제작진과 긴밀한 업무 이야기를 나눴고.
팬미팅 준비까지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물론.
“네, 주는 굿즈로 담요도 추가했어요. 예쁘게 뽑혔더라고요.”
그렇게 팬들이 말렸건만 기어코 팬미팅 선물을 추가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서.
-근데 이번에 계약 맺은 곳이 천 석보다 많거든? 어떻게 할까.
“에이, 아무리 그래도 무대도 잘 안 보이는 시야제한석은 빼야죠.”
조금이라도 늘어날 수 있는 좌석을 지워버렸다.
만약 팬들이 듣고 있었으면 ‘아니야! 그거라도 좋으니까 내놓으라고!’를 외쳤겠으나 이안은 단호했다.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서 팬미팅을 여는 건 아니잖아요. 계획대로 천 석으로 맞춰주세요. 알겠죠?”
-…어, 그래. 알겠다.
그래, 이안은 돈 때문에 팬미팅을 여는 게 아니었다.
‘이쯤 되면 팬들을 괴롭히려고 여는 거지.’
티켓팅을 하며 피투성이가 될 Fianist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었으나 실패한 닉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튼, 팬미팅에서 줄 선물과 콘텐츠 준비까지 전혀 소홀하지 않게 준비했다.
그 외에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영어를 쏟아내며 업무 지시를 내리는 것도 여러 번 봤고.
모든 업무를 능숙하게 소화하는 모습을 보고 누가 미성년자라고 생각하겠는가.
진짜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그래, 여기까진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지 솔직히 가늠이 잘 안 가는 것도 있으니까.
‘근데 이건 좀…’
도윤은 이안이 찍은 촬영 영상을 봤다.
“이건 조금 심하지 않아? 이걸 어떻게 해.”
실내 촬영 장면과 이번에 찍은 외부 촬영 장면을 동시에 재생했다.
-빌어먹을! 왜 안 열려!
동시에 울린 대사를 시작으로 화면 속 이안이 똑같이 움직였다.
방범창의 틈을 벌리기 위해 드라이버를 쑤시는 것부터 프라이팬으로 방범창을 내려치는 장면까지 시간과 위치가 똑같았다.
누가 보면 다른 장소에서 찍은 게 아니라 동시에 촬영한 줄 알겠다.
‘이 정도면 거의 서커스 아닌가?’
눈앞에 타이머를 들이밀어도 이렇게 하는 건 쉽지 않을 거 같았다.
선영은 다시 봐도 신기한 모습에 멀뚱멀뚱 있는 이안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글쎄요. 그냥 됐는데요.”
진짜 이안이 해줄 수 있는 답변은 이것뿐이었다.
물론 최대한 실내 촬영 때의 기억을 되살려 하긴 했다. 두 촬영분을 합쳤을 때 괴리감을 주면 안 되니까.
‘근데 이렇게 똑같이 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차피 편집으로 이리저리 매만져질 테니 완벽히 똑같이 할 필요도 없고.
아멜리아 덕분에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게 된 덕분인지 아니면 감각이 예민해진 덕분인지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어찌 됐든 나쁠 거 없으니 상관없으려나.
“이야, 이거 나중에 예능 같은데 나가면 꼭 이야기해야겠다.”
“아앗! 제가 말하려고 했는데!”
“먼저 말하는 사람이 임자겠네. 예능이나 한번 잡아볼까.”
티격태격하는 셋을 보며 가볍게 웃던 이안은 울리는 핸드폰을 봤다.
-올리버 워커.
제이 안과 관련된 업무일 테니 따로 빠져나와 전화를 받았다.
“네, 무슨 일이에요? 혹시…”
-그래!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디아즈 감독의 Minority Battle가 심사위원 대상으로 은사자상을 탔다.
“오! 잘됐네요.”
베네치아 영화제는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곳이다.
비록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은 아니라도 심사위원 대상은 은사자 감독상과 더불어 본상 중 최고 등급의 상이고.
“제이 안 이름으로 디아즈 감독님에게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전 따로 축하 연락을 줄 테니까요.”
-음, 그래. 그건 그렇고…
좋은 일인데 불안하게 말꼬리를 흐리나 모르겠다.
“뭔데요.”
-그냥 기사 제목을 보내줄게.
이안은 바로 온 올리버의 문자를 확인했다.
-베네치아 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디아즈 감독 ‘제이 안과 함께 한 각본 작업은 경이로웠다. 마치 내 생각을 전부 꿰뚫는 듯했다.’
-디아즈 감독. ‘제이 안은 나에게 신이나 마찬가지다. 영화제가 끝나면 그를 위한 곡을 쓸까 한다.’
…찬송가, 멈춰.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