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63)
163. 용기
한국에선 핏줄을 이유로 배우 생활 초창기 때부터 큰 관심을 보여왔으나, 이안은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은 확고했다.
이건 한국에 갖는 호감과 별개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수십 년 동안 미국인으로 살아온 기억이 있는데 인제 와서 ‘우리가 남이가!’라고 말해봤자 크게 와닿지 않았다.
이런 생각과 별개로 이 뿌리라는 건 바꿀 수 없는 피부색처럼 집요한 것 같다.
‘태몽까지 꾸는 걸 보면 말이야.’
서양은 물론이고 주변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한국만의 문화인 태명과 달리 태몽은 그래도 다른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문화다.
석가모니만 해도 여섯 상아를 가진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태몽으로 유명하고.
다만 저런 비범한 인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 태몽에 대해 일반적인 믿음이 퍼진 나라는 흔치 않고 그 중 대표적인 곳이 한국이었다.
‘하기야. 딱히 놀랄 일도 아닌가. 고사까지 하는 마당에 태몽 정도야…’
에반 때도 안 꾼 태몽을 꾼 이유가 대부 자리를 받은 탓이라면 이해도 가고.
-하하하, 재밌는 태몽이야.
남수가 웃음을 터트리자 안부 전화 겸 태몽 이야기를 꺼냈던 이안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그런 꿈을 꿨다고 말해줬니?
“말해줬죠.”
이걸 말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데미안에게 말해줬다.
믿든 안 믿든 아이와 관련된 일인데 부모에게 말을 해주는 게 당연한 일이니까.
돌아온 반응? 뻔했다.
“엄청 좋아하던데요.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요.”
…진짜 산타인지 사탄인지 모르겠지만 남의 선물을 왜 자신에게 맡겨놓는지 모르겠다.
이러다 조만간 루돌프 역할까지 해달라고 하겠다.
-좋아했다니 다행이네. 음… 공작새라. 보통 새가 나오는 꿈은 여아를 상징한다고 하긴 하는데. 수컷 공작새들이라 알 수가 없구나. 수탉 같은 건 남아를 상징하거든.
“성별이 뭐가 중요한가요. 그냥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됐죠.”
어찌 됐든 아이가 태어나는 건 축복이다. 삭막한 노숙자 쉘터에서도 아이들은 언제나 희망처럼 자리했을 정도였다.
비록 흉측한 외모 탓에 이안은 멀리서 바라보며 만족할 수밖에 없었지만.
어떤 아이가 태어날까 생각하며 작게 미소지었을 때 남수가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선 첫째 딸은 아빠를 닮는다는 말이…
“그건 안 돼요!”
…남아가 태어나길 바라야 하는 건가.
이안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
2018년 새해가 시작됐고.
-이안! 검사해봤는데 딸이래!
이안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새해 인사를 받았다.
이미 결정된 DNA가 인제 와서 빌어봤자 바뀔 리 없으니 그저 외모만 닮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데미안이 성격은 이상해도 외모는 멀쩡하니 말이다.
아무튼, 연말 연휴도 끝이 나고 미뤘던 일들이 진행됐다.
휴식 기간을 가진 여러 작품처럼 KOP 촬영도 재개됐고 드디어 이사도 했다.
넓은 마당 중심에 큰 본채와 두 개의 별채를 낀 저택이었고 작은 별채 하나는 경호 인력에 배분됐다.
“드디어 지하실 생활도 끝이네요?”
“나름 안락했습니다. 오히려 떠나려니까 아쉬울 정도죠.”
마커스의 농담에 이안은 작게 웃었다.
이전 집의 지하실은 넓은 편이었고 상주하는 경호원을 위해 이래저래 편의시설을 마련해줬지만 그래도 답답하긴 했을 거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받은 경호원들은 높은 담을 중심으로 CCTV와 방범 센서 같은 걸 설치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레오랑 크림이도 좋아 보이고.’
처음에는 낯선 환경에 어색해하던 둘이지만 금방 잔디밭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이전 집 문제도 순탄하게 끝이 났고.’
노숙자 생활을 해온 이안은 집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었지만 가족들은 달랐다.
딜런 부부가 처음으로 가진 집이고 입양 후 멀어졌던 소피아와 함께 살기 시작한 장소였다. 그곳에서 딜런의 사업이나 이안의 일 모두 잘 풀렸고.
애착이 생긴 곳이니 차마 팔진 못하고 어떻게 할까 고민했는데 입주 희망자가 있었다. 바로 오드리였다.
‘하긴 오드리에게도 추억의 장소였겠지.’
모든 걸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하려고 했던 그녀를 따뜻하게 맞이해 준 장소가 그곳이었다. 이안을 비롯한 아이들과 쌓아온 추억도 많았고.
베벌리힐스의 비싼 렌트값을 기꺼이 내겠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인기 여배우로 자리를 잡아가니 그렇게 부담되는 금액도 아니고 베벌리힐스라는 장소도 그녀에겐 나쁘지 않았다. 할리우드에 가깝고 인기 연예인이 사는 곳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니까.
이사까지 끝이 나고 KOP의 촬영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이안은 굿즈 제작을 위한 사업체도 세웠다.
“가진 사업체만 셋이네.”
물론 Holy Love의 제작사는 대부분 업무를 외주를 맡긴 탓에 고용된 직원은 한 명도 없이 드라마 저작권만 가진 페이퍼 컴페니 수준이었고.
제이 안의 이름으로 운영 중인 제작사는 ‘내가 이 회사 사장이요.’라고 말도 못 하는 상태였다.
‘나중에 제이 안의 정체를 밝히면 둘을 합치고 제대로 운영을 해야지.’
배우가 아니라 제작자로서 하는 일도 꽤 보람이 있었으니까.
아무튼, 껍데기만 있는 회사와 직접 가보지도 못한 제작사와 달리 굿즈 제작에는 제대로 된 사업체를 만들어야 했다.
직원도 고용하고 회사 사무실도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걸 위해 이안은 LA에 사무실을 계약하고 여섯 명의 직원도 따로 고용해야 했다.
바쁜 이안을 대신해 회사를 운영해줄 사람, 굿즈 생산을 맡길 업체들에 빠삭한 업계 베테랑, 재무를 담당해줄 직원. 이 셋은 헤드헌팅 업체를 이용해 찾았고.
굿즈 제작을 맡길 셋은.
“와! 이제야 직접 말을 할 수 있겠네요.”
“이게 진짜 소통이지. 진짜 팬미팅 때마다 한정판 굿즈를 내놓을 거예요?”
“진짜 팬이에요! 저번에 팬미팅 티켓팅에 성공하기까지 했다니까요.”
…Fianist 중에서 고용했다.
개성 넘치는 세 남녀의 인사를 받으며 이게 잘한 선택인지 순간 고민이 들었지만 가장 최선이었다.
고용 공고에 가장 좋은 퀄리티의 상품을 제안한 게 이 셋이고 팬들의 의견을 받아 좋은 굿즈를 만들어줄 수 있는 인재였다.
거기에 나름대로 경력도 있는 사람들이다.
‘면접을 봤을 때 느낌도 좋았고.’
이번에도 감이 맞았는지 아닌지는 일을 맡겨보고 결과물을 살피면 될 일이다.
“일단 다람쥐 옷부터 입혀볼까요. 저번에 팬아트가 꽤 화제였잖아요.”
“그거 좋죠. 어떤 동물 옷을 입혀볼지 팬사이트에 투표해보는 건 어때요?”
“당장 운영자에게 제안해볼게요.”
팬들이 얼마나 굿즈를 기다리는지 잘 아는 만큼 딱히 지시 내릴 것도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인터넷 투표라. 좋은 생각이네.’
소소하지만 팬들의 기다림을 달래줄 수 있는 이벤트가 될 테니까.
앞으로 굿즈 제작에 활용하면 좋을 거 같았다.
셋이 열심히 굿즈 개발을 위해 아이디어를 모으는 모습을 보던 이안은 울리는 핸드폰을 봤다.
기다리던 아이작 감독님의 전화였다.
-이안, LA에 도착했단다. 시간 되니?
“물론이죠.”
이안은 활짝 웃었다.
정말 오랫동안 기다리던 대본을 드디어 볼 수 있게 됐다.
***
이안이 찾아간 식당에는 아이작 감독님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게빈과 더불어 오랫동안 친구였다는 필릭스도 함께 있었다.
반갑게 손을 흔든 그는 메뉴판을 내려보며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오랜만에 함께 식사하니 특별한 곳으로 초대하고 싶었는데 이 인간이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지 뭐니.”
“민트 초코 귀뚜라미 같은 건 네놈이나 먹어라. 왜 애에게 이상한 걸 먹이려고 하는지, 쯧.”
“애라니. 얘도 다 컸어. 먹는 것 정도는 마음대로 먹어도 된다고.”
티격태격하는 둘의 대화에 이안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걸 파는 곳이 있다니 신기하긴 하네요.”
“그렇지? 아주 특별한 곳이라니까.”
…너무 특별해서 장사가 될지 궁금했다.
필릭스의 괴식도 얼마든지 어울려줄 수 있는 이안이지만 돈 주고 사 먹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니까.
“밥맛 떨어지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자, 여기 있다. 네가 그렇게 기다리던 대본이다.”
“오! 진짜 오래 기다렸어요.”
“한 번 읽어보겠니.”
이안은 바로 대본을 펼치며 과거로 돌아오기 전 아이작의 은퇴작을 떠올렸다.
‘총기 난사와 관련된 이야기였지.’
아마 네이선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쿠퍼의 사건이 계기가 됐을 거다.
대본의 페이지를 넘긴 이안은 이 사건이 사라지며 은퇴작도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이 작품은 총기 난사의 트라우마를 가진 주인공이 아니었다.
“주인공은 이인증에 걸린 사람이네요.”
“그래.”
이인증은 스스로가 관찰자가 되는 느낌을 받는 증상을 말한다. 마치 몸과 마음이 분리된 것 같고 현실감을 상실하게 된다.
이렇게만 들으면 특이한 것 같지만 이인감 자체는 일상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심하게 피곤할 때 몸이 내 것 같지 않고 엄청난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지금 상황이 현실감 없는 것처럼 느껴지곤 하지 않은가.
‘물론 이런 일시적인 불안과 스트레스가 원인이 아니라 만성적으로 느껴지면 정신병으로 여겨지지.’
일종의 해리성 장애다.
불안과 우울함에 이어서 가장 일반적인 정신 증상이기도 하고.
“너도 내가 어떤 주제로 영화를 만드는지 알지?”
“불안과 외로움 맞죠?”
“그래.”
이안의 대답에 아이작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째서 그런 영화를 주로 만드는지 아니?”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지 않나요.”
“그래,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지.”
지금과 같은 인연이 없을 때도 이안은 아이작 감독의 팬이었다. 그런 만큼 여러 정보를 읽은 기억이 있으나 언제나 이 질문에는 답을 내주지 않았다.
심지어 은퇴작을 낸 후에도.
그랬던 그가 이렇게 이유를 말해주려고 할지 몰라 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랄 건 없단다. 안 말 한 건 부끄러워서 그랬으니까. 너도 알다시피 난 첫 영화부터 성공했단다. 평단에 엄청난 호평을 받았어.”
“명작이었죠.”
아이작은 유대인이었다. 모두에게 큰 상처를 준 2차 세계대전을 뼈저리게 느낀 민족 중 하나고.
그의 첫 작품은 이 세계대전 이후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의 불안과 외로움에 대해 담은 작품이었다.
‘놀라운 점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담은 게 아니란 점이지.’
특정 민족이 아닌 최대한 보편적인 감정으로 담으려고 했다. 오죽하면 이전 나치 병사의 이야기까지 카메라에 담아냈을까.
“내가 봐온 세상이었어. 참혹한 전쟁은 경험하지 못했으나 부모님은 물론이고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았거든. 그때 카메라에 담은 건 사실 남의 감정이었지. 하지만 성공 후엔 작품에 담긴 감정이 내 것이 되었단다.”
진한 감정이 담긴 숨을 내뱉은 아이작은 맑은 눈을 한 이안을 바라봤다.
어디서도 쉽게 털어놓지 못한 말이 아직 한참 어린아이에겐 훌훌 흘러나왔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큰 성공은 불안을 안겨줬고 환호하는 인파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꼈지. 어쩌면 수많은 제안을 뿌리치고 뉴욕에 남은 것도 불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몰락으로 이어질까 그랬을지도 모른단다.”
이 말에 이안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진짜 그게 두려웠다면 계속 작품을 만드시지 않았겠죠.”
“…그렇게 생각하니?”
“물론이요.”
이안은 확신했다. 그에겐 확실히 용기가 있다.
‘게빈이 영화 하나로 몰락한 모습을 보고도 할리우드에서 은퇴작을 만들었으니까.’
비록 그게 손자인 네이선을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용기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일말의 의심도 없는 말에 아이작은 작게 웃었다.
“아무튼, 필릭스, 게빈. 이 둘과 친해지게 된 것도 이렇게 품은 마음 때문이란다. 일종의 겁쟁이 클럽이랄까. 이 친구만 해도 지금은 이렇게 당당하게 굴지만 옛날엔 괴상한 입맛을 숨기려고 고생이었거든.”
“내가 말하지 않았나. 밝히면 후련하다고. 게빈도 그렇고 자네도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구는지 원.”
“자네 입맛은 그냥 숨기는 게 나았어.”
필릭스에게 핀잔을 주며 아이작은 활짝 웃었다.
주름진 얼굴에는 홀가분한 마음이 묻어났다.
이안은 손에 쥔 대본을 내려봤다.
몸이 자신 것 같지 않고 친한 가족도 남처럼 느껴진다. 여느 감독님의 작품처럼 주인공은 불안과 외로움을 깊게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 작들과는 달라.’
인간적 고민에 휩싸였던 이전 작품과 달리 이 작품은 유쾌했다.
현실감이 없다는 이유로 주인공은 맨정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을 과감하게 실행했다.
자신을 못살게 구는 윗사람에게 엿 먹이고 위험한 도전에 성공하며 오히려 주변에서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는 이야기였다.
‘불안과 외로움에 매몰되지 말고 용기를 내라.’
아이작 감독이 은퇴작으로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안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주인공은 제거죠?”
“안 하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고.”
“나중에 말 바꾸시면 안 돼요.”
대본을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
아이작 감독님과 중요한 시간을 보내고 이안은 팬사이트에 들어갔다.
처음 있는 굿즈 제작 투표. 그게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중간 평가를 위해서였고.
“잠시만.”
수많은 동물 중 유독 우뚝 치솟은 그래프가 보였다.
개와 고양이 같은 메이저 동물을 이기고 압도적인 1위를 한 동물은 다시 봐도 바뀌지 않았다.
“…왜 공작새가 1위야.”
이안은 글을 내렸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데미안과 재스퍼가 추천한 공작새에 투표하시오!
-공작새에 투표하는 툴을 배포 중입니다. 해킹 툴x
-데미안 SNS에 이안과 에반이 공작새 잠옷을 입고 찍은 건 꼭 보고 투표해요!
선동과 날조과 판을 치는 투표.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북한 지도자를 뽑고, 가장 많은 투표를 받은 마켓 지점에 가수를 보내주는 이벤트에 곰 퇴치제를 파는 가장 외딴 지점을 뽑는 등.
이안은 인터넷 투표는 정글과 같다는 걸 뒤늦게 기억해냈다.
출산 선물을 미리 주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