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76)
Welcome to Broadway(1)
인파에서 벗어나 걸음을 멈춘 이안은 몸을 돌렸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에디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잘 따라왔다.
“아니, 난… 왜? 그냥 칠면조 사려고 나온 건데.”
뭐, 자신이 왜 여기 있나 이해가 안 가는 모습이긴 하지만 말이다.
빨리 정신을 차려서 안 따라왔으면 곤란할 뻔했다.
‘에디에 대해 아는 거라곤 이름밖에 없으니까.’
하필 이름까지 흔한 편이라 이번에 놓쳤으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였을 터였다.
이안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면 손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끌고 왔네요. 이안 프라이스입니다.”
“…에디 리입니다.”
에디는 인사를 하면서도 어색한 표정은 숨기지 못했다.
아무렇지 않게 대하기엔 상대가 너무 유명인인 탓이다. 이렇게 통성명하는 것부터 현실감이 없달까.
‘주말마다 브로드웨이로 놀러 온다는 건 듣긴 했는데.’
이안을 보겠다며 주말에 브로드웨이를 떠도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꽤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 이렇게 직접 만나는 건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상대를 향해 이안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꽤 잘 뛰시던데요. 종종 뛰시나 봐요?”
“어, 그냥 어쩌다 한 번요.”
이 대답에 이안은 자신이 알던 그와 지금의 상대가 다르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달리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
게을렀다기보단 숨 가쁘게 달린 날이 까마득할 정도로 삶에 지친 인간이란 뜻이다.
이리저리 뛰며 세상을 만끽하던 어린 시절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그저 살아가는 어른이었으니.
알던 모습은 아니라도 회색빛 칙칙한 인간일 때보다 지금이 훨씬 나았다.
‘문제는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냐는 건데.’
과거 연이 있는 사람을 통해 보이는 환상이 에디를 통해 보였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분명 닉처럼 깊은 인연은 아니었어도 그의 충고는 삶의 방향에 큰 영향을 준 건 확실했으니 말이다.
이안은 생각을 정리하며 아까 본 환상을 떠올려 봤다.
노래를 부르는 노인과 그를 나무라는 에디.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섣불리 판단할 순 없어도 노인의 노래는 판단할 수 있다.
‘좁은 방에서 쓸쓸히 부르며 끝나긴 아쉬운 노래였어. 마침 나한테 필요한 노래이기도 했고.’
7 Confessions of Love.
자신의 노인 역할을 해줄 배우가 없어 포기한 공연을 바로 떠올리게 한 노래였으니 말이다.
어떻게 노인과 만날 수 있을까.
천천히 친해지며 자연스럽게 만나? 그러기엔 시간이 없다. 어떡하면 좋을까 싶을 때.
“야, 이안.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니까 그 짧은 시간을 못 기다려?”
“진짜 혼자 두면 안 된다니까.”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도로시와 다니엘이 보였다.
이안은 태연하게 손을 흔들었다.
“왔어? 용케 바로 찾았네?”
“기다리라는 곳이 시끄럽길래 또 뭔 사고를 쳤나 싶어 서둘렀지. 근데 옆에는 누구야?”
둘의 시선을 받은 에디는 몸을 움찔했다.
이안만큼은 아니어도 연예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봤을 정도로 둘도 나름 유명한 배우다.
갑자기 유명인 셋 사이에 껴 정신을 못 차리는 그를 이안이 소개해줬다.
“에디 리라고 해. 어쩌다 보니 조금 실수를 해서 말이야.”
“후… 죄송합니다. 나쁜 애는 아니에요.”
…아니, 그렇게까지 잘못한 건 아닌데.
진지한 다니엘의 사과에 조금 당황했으나 차라리 잘됐다.
“미안해요. 사과하는 의미에서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할게요.”
“밥이요?”
잠시 흥미를 보였던 에디는 고개를 흔들었다.
“별 것도 아닌 일인데 그렇게 신경 써주실 것 없어요. 그리고 집에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요.”
가족이란 말에 이안은 눈을 반짝였다.
“가족이요? 누가 계시는데요.”
“부모님하고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그건 왜…?”
할아버지라. 환상 속에서 본 노인일 가능성이 크다.
빙빙 돌아갈 필요가 없으니 잘 됐다.
“그럼 가족들도 함께하는 건 어때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추수감사절에 가족에게 좋은 추억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이안에겐 고작 한 끼에 불과할지 몰라도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에겐 평생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될 가능성이 크다.
잠시 고민한 에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번 연락해볼게요.”
에디가 가족들에게 통화를 거는 사이 도로시가 이안에게 다가왔다.
“혹시 때렸어?”
“때리긴 누굴 때려.”
“아니, 뭘 했길래 식사까지 사주려나 해서 말이야.”
다니엘도 동의했다.
물론 나쁜 생각이란 건 아니다. 밥 한 끼 사주는 게 부담되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기사화돼도 이미지에 도움이 되면 됐지 나쁠 건 없으니까.
‘다만 평소에 저런 성격이 아닌데.’
애들이 달라붙어 귀찮게 한다고 상대성이론이니 양자역학이니 공부하던 사람이다. 이렇게 사교적이진 않다는 뜻이다.
“그냥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변덕이랄까. 가볍게 생각해. 어차피 시간 여유는 있잖아?”
“뭐, 네 마음대로 해라.”
의문은 있으나 둘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어련히 잘 하겠지, 라는 신뢰는 있으니 말이다.
셋이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에디는 가족과 통화 연결이 됐다.
-에디? 칠면조는 샀니.
“아, 맞다. 사갈게. 그것보다 이안 프라이스 알지?”
-알지. 근데 왜?
“우연히 브로드웨이에서 만났거든? 우리 가족 밥 한 끼 사준다는데 어떡할까.”
이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에디의 엄마는 심각하게 물었다.
-너 약했니?
아주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
칠면조를 사러 나간 사람이 갑자기 전화해서 ‘할리우드 스타랑 같이 밥 먹을래?’ 이런 말을 하면 누가 믿을까.
정작 경험한 당사자도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릴 정도인데 전화로 소식을 들은 가족이 안 믿는 게 당연했다.
결국, 에디는 영상통화까지 동원해서 약쟁이가 아니란 걸 증명해야 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누추하지만 빨리 들어오세요.”
“어이쿠, 무겁게도 들고 왔네요.”
“갑자기 찾아오게 돼서 죄송합니다.”
에디의 부모님과 이안 일행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원래는 밖에서 만날 생각이었지만 결국 음식을 사서 에디의 집으로 찾아가는 형태가 됐다. 식당은 부담스럽다고 사양을 했으니 말이다.
‘꽤 따뜻한 집안이네.’
집은 좁은 편이다. 뉴욕의 집값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다만 오랫동안 살아간 흔적과 곳곳에 걸린 가족사진들은 따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안이 가볍게 집을 훑을 때 퉁! 하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지팡이를 짚는 노인이 나오는 소리였다.
“오! 진짜구나. 셋이 짜고 만우절 복수를 하는 줄 알았더니 말이다.”
“…만우절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요. 죽은 척은 왜 하는 거예요?”
“하하하, 그나마 건강할 때 할 수 있는 장난 아니겠니. 더 늙으면 나도 그런 장난은 못 치지. 실감 나는 연기였지?”
…만우절 때 저런 장난이라니.
우리 할머니는 안 그래서 다행이다는 생각이 절로 나오는 장난이었다.
능청스럽게 웃던 노인은 이안에게 손을 뻗었다.
“유쾌한 추억을 줘서 고맙네. 스티븐 리라네.”
“이안 프라이스입니다.”
다리를 절며 노인이 다가오자 이안은 황급히 먼저 나서 악수를 했다.
손을 맞잡은 노인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게까지 신경 쓸 건 없어. 수십 년을 이렇게 살았는데 몇 걸음 더 걷는 게 대수일까. 오히려 병원에서 산책 좀 하고 다니라고 하더군.”
…수십 년이라.
절로 쓴웃음이 베어 나왔다. 만약 젊은 시절 다쳤다면 무대에 제대로 못 오르는 게 당연했다.
지금도 아시아계가 무대에 서기 힘든 게 브로드웨이인데 수십 년 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거기에 다리까지 전다고?’
그런 배우를 뽑아줄 정도로 이곳은 상냥한 곳이 아니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꿈은 미련이라는 흔적이 되어 노인의 가슴에 남았을 테고, 매표소의 에디가 왜 그런 충고를 던졌는지도 알 것 같다.
‘날 통해 할아버지를 떠올렸나.’
같은 동양인이며 부위는 달라도 몸에 문제가 있는 건 똑같았다. 브로드웨이에 선택을 받기 힘들다는 것도 마찬가지고.
“다들 식사하세요.”
옛 기억을 떠올리던 이안은 걸음을 옮겼다.
평소에는 네 가족이 식사했을 공간에 셋이 추가됐다. 테이블도, 앉을 공간도 비좁았으나 그건 문제가 안 됐다.
“하하하, 그렇게 에디와 만나게 됐다고요?”
“설마 이름을 부를 줄은 몰랐거든요. 도망치느라 진땀을 좀 뺐죠.”
도란도란 앉은 사진을 찍고 에디와 만난 일로 유쾌하게 시작한 대화는 자연스럽게 브로드웨이 이야기로 흘러갔다.
에디를 만난 장소도 그곳이며 뉴욕 주민과 배우들이 나누기 좋은 대화 주제였으니 말이다.
“브로드웨이 표 추첨을 직접하러 다녔다고요?”
“원하는 공연이 있는데 정말 당첨이 안 되더라고요. 조금 진정되면 다시 도전해야죠.”
“뭘 좀 아시네요. 추첨으로 공연 보는 맛이 있죠. 그렇죠? 아버지.”
“그럼! 에디도 어렸을 때는 나랑 같이 추첨받으러 다니곤 했지.”
애초에 인기 많은 공연은 추첨 성공률이 낮으니 뉴욕 주민이라면 모를까 체류 기간이 정해진 관광객은 힘든 방식이다.
잠시 추억 이야기를 한 노인은 이안을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브로드웨이 작품에 들어간다는 소문이 있던데.”
“네, 아마 그럴 거 같아요.”
이 대답에 노인의 눈에는 묘한 감정이 스쳤다. 부러움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그런 감정이.
“무대에 서는 건 즐거운 일이지. 좋은 추억만 쌓고 갔으면 좋겠네.”
그저 덕담으로 넘길 수 있는 말을 이안은 놓치지 않았다.
“혹시 무대에 서보신 적이 있나요? 말씀하시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아서요.”
“으음… 부끄럽지만 젊은 시절 몇 번 무대에 오른 적이 있지. 그래 봐야 초라한 역할에 그쳤지만 말이야.”
“초라한 역할이 어디 있겠어요. 전부 공연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인데 말이죠.”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슬그머니 지어지는 미소.
이안은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당시 어떤 공연을 했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오디션을 보기 전에 도움이 될 거 같네요.”
“제대로 된 대사도 없었는데 무슨 도움이 될까 싶지만… 그때 부른 노래 정도는 들려줄 수 있지.”
“좋죠.”
“배우들 앞에서 부르려니 조금 민망하긴 하구만.”
겸연쩍게 웃은 그는 조용히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아~ 그대는 발을 내딛지 마시오.”
강한 두성이 노인에게서 흘러나왔다.
‘벨팅이네.’
뮤지컬에서 주로 쓰는 창법으로 악기와 코러스 소리를 뚫고 관객에게 정확히 목소리가 전달되는 게 특징이었다.
강렬하게 퍼지는 노래를 듣던 이안은 아쉬운 점을 느꼈다.
‘힘이 조금 떨어지고 불안정한 부분이 있어.’
나이 탓도 있고 연습을 드문드문한 티가 났다. 기술적으로 아쉽게 느껴지는 노래였으나.
“와…”
도로시가 감탄사를 낼 정도로 진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무대를 객석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한 배우의 긴 세월이 녹아들어 간 탓이다.
1분가량 짧게 노래를 한 노인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게 들었나 모르겠구나.”
“정말 좋았어요!”
“빈말이 아니라 또 듣고 싶을 정도인 걸요.”
칭찬을 들으며 기쁘게 웃는 노인을 보며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한 발자국 나서는 게 맞을까. 지금 내뱉는 말이 노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건 아닐지 망설이던 때 노인 뒤로 잡지 하나가 보였다.
환상 속에서 봤던 브로드웨이 공연 관련 잡지.
산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겉이 깨끗한 잡지를 보며 결정을 내린 이안은 입을 열었다.
“스티븐 씨. 만약 지금이라도 공연을 설 기회가 생긴다면 어떡하실래요?”
불편한 침묵.
그런 소리를 왜 하냐는 듯이 양옆에 둘은 옷을 잡아당겼고 에디의 얼굴은 불쾌함으로 물들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에디.”
에디를 말린 스티븐은 이안을 뚫어지게 봤다. 왜 이런 소리를 했는지 알아보기라도 하듯.
“농담이라면 멈췄으면 좋겠어. 늙은이의 심장이 빨리 뛰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거든.”
“농담은 아니에요. 제가 관심 있는 뮤지컬 중에 제 노인 역할을 맡을 배우가 필요하거든요. 아쉽게도 분량이 짧아요. 대신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하죠.”
“마지막을 장식한다, 라.”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제 손을 바라봤다.
주름지고 검버섯이 핀 손은 종막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을 보여줬다.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다면 하고 싶구나.”
하지만 이안를 바라보는 눈은 젊은 시절처럼 빛났다.
잿더미 아래 숨어 있던 마지막 불씨처럼.
“제가 줄 수 있는 건 기회뿐이에요. 제작자가 오디션을 보고 캐스팅을 거절할 수도 있고 제가 오디션에서 떨어져서 기회가 안 주어질 수도 있죠. 그래도 시도해보실래요?”
노인은 고개를 돌려 가족들을 봤다.
웃음이 나왔다. 가족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저 하고 싶다는 생각만 들뿐.
“도전은 무모한 젊은이와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노인의 특권이지. 안 그래?”
“잘 부탁드릴게요.”
“나야말로.”
둘은 손을 맞잡았다.
첫 인사와 달리 배우로서 나눈 악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