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77)
Welcome to Broadway(2)
평생 꿈꾸던 기회를 받은 스티븐만큼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 건 에디일 것이다.
할리우드 스타를 만난 것부터 이룰 수 없는 꿈을 꾼다고 생각한 할아버지가 오디션 권유를 받은 것까지 고작 반나절 사이에 이뤄졌으니까.
“동정심으로 이런 제안을 한 겁니까?”
그러니 복잡한 얼굴로 한다는 게 고작 이런 말이지.
이안은 두 친구를 보며 물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굳이 답할 필요가 있어? 할 대답이 뻔한데.”
“네가 잘도 그랬겠다.”
단호한 둘의 대답에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들었죠? 다른 것도 아니고 배역을 동정심으로 권유할 성격은 아니에요.”
긴 세월 배우 활동을 하며 동정심으로 배역을 얻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 얼굴로 배우라고?’ 코웃음을 들어도 당당히 배우로 소개할 수 있었던 이유였고.
‘그런 내가 무슨 동정심으로 움직이겠어.’
기회를 준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저 그럴만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죠.”
“…실력.”
“익숙함은 가끔은 눈을 가리죠. 리의 잘못은 아니에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니까요.”
방금 빠져나온 집을 바라봤다. 예민한 귀로 창문 너머 노인의 노래가 소리가 들려왔다.
세월이란 녹을 닦아내기 위한 노력은 이미 시작됐다는 뜻이다.
“지금은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럼 다음에 보죠.”
몸을 돌린 이안은 기다리는 친구들과 나란히 걸으며 외투를 잘 여몄다.
언제 폭염으로 고통을 줬냐는 듯이 겨울을 앞둔 뉴욕 거리는 추웠다.
따뜻한 LA가 그리운 날씨였다.
***
연휴를 코앞에 둔 주말, 오스틴으로선 갑자기 날벼락 맞은 느낌이었을 거다.
후보 밖으로 뒀던 7 Confessions of Love의 오디션을 갑자기 보겠다고 한 것도 모자라서 뜬금없이 경력도 없는 노인의 오디션까지 부탁했으니 말이다.
-괜찮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이런 거죠.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속으론 한숨을 내쉬지 않았을까. ‘기왕이면 다음에는 여유를 두고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말을 덧붙인 걸 보면.
어찌 됐든 그는 유능했다. 뉴욕에서 LA로 향하는 여섯 시간 남짓한 비행시간 동안 어느 정도 제작자와 어느 정도 협의를 끝내놓을 정도로.
‘스티븐의 오디션도 일단 동의를 받았네.’
예상한 답변이다. 낙하산으로 꽂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오디션 기회를 달라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니까.
이 소식을 바로 스티븐에게 알려줬다.
-고맙네. 마음 같아선 업고 다니고 싶을 정도야. 아니지, 진짜 업어줄 수도 있어. 나름 다리가 세 개니 말이야.
…뭐지, 암살자인가.
‘지팡이 짚은 노인에게 업힌 이안 프라이스.’ 이런 기사가 뜰 걸 상상하니 끔찍했다.
“제발 마음만으로 끝내주세요. 아무튼, 곧 지정 배역의 노래와 대사를 보내줄 테니 그걸 준비하면 돼요. 다만 연휴 바로 다음이 오디션이라 준비 시간은 꽤 빠듯할 텐데 괜찮겠어요?”
-그런 불평을 하는 것도 배부른 소리란 것 정도는 알지. 최대한 후회 없이 준비하겠네.
“그럼 그때 봬요.”
통화를 끝낸 이안은 가볍게 마른세수를 했다.
오디션을 준비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스티븐은 훌륭하게 준비했는데 정작 자신이 떨어지는 촌극을 일으킬 마음은 전혀 없으니까.
‘결국은 연습이지.’
연휴를 연습에 사용한다고 해서 아쉽진 않았다. 지금 얻은 기회가 많은 사람이 간절히 바라던 바였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안이 불만 없다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뜻은 아니다.
“이아아안!”
“이안, 잘 지냈어? 뮤지컬 준비를 한다며. 노래라면 내가 조금 도와줄까?”
“레이첼, 얘는 쉬는 게 먼저야. 안 그래요, 감독님?”
“그래, 오디션 전에 목부터 상하겠구나.”
벤 가족과 게빈 감독님을 시작으로.
“꺄하!”
“자, 여기가 네 대부 집이란다.”
비비안을 앞세운 데미안 가족까지 찾아왔으니까.
방실방실 웃는 아기를 능숙하게 안아 든 이안은 북적거리는 집 안을 봤다.
가족들과 진즉에 초대받은 오드리를 포함한 손님들은 유쾌하게 대화를 나눴고, 예전엔 사람을 보면 경계부터 하던 레오는 크림이와 태평하게 누워있었다.
‘추수감사절은 원래 가족과 보내는 날이라고 했나.’
그랬기에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는 더욱 외로웠던 시기였다.
행인도 보기 힘든 빈 거리에 홀로 앉아 연기 연습을 하는 게 유일한 위안거리였으니.
“꺄아핫!”
활짝 웃으며 얼굴을 만지는 작은 손길에 이안은 무거운 추억에서 벗어났다.
아기가 만진 얼굴엔 이젠 화상 자국은 없다. 옛 기억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이안!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와서 칠면조나 조금 먹어 봐. 내가 아주 괜찮은 가게에서 주문했다고.”
데미안의 부름에 이안은 식탁으로 다가가며 농담을 던졌다.
“데미안, 그러고 보니 그거 알아요? 칠면조랑 공작새는 조금 먼 친척 관계쯤 될걸요. 그렇죠? 미아 씨.”
“그렇긴 하죠.”
미처 생각 못 했다는 듯이 데미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작새 애호가인 그가 어떻게 반응할까 싶었는데.
“오! 그럼 칠면조도 한 마리 키워볼까.”
…아니, 이걸 이렇게 받는다고?
“그동안 공작새 선물은 많이 줬으니까.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칠면조 캐릭터로 한 번 만들어볼게. 인형이 좋으려나.”
못생긴 거로 유명한 칠면조 인형을 받을 생각을 하니 어질어질하다.
“…차라리 공작새 인형으로 주세요.”
“역시 공작새가 좋지?!”
“그래요. 공작새가 낫죠.”
설마 이 말을 직접 입으로 하는 날이 올 줄은 미처 몰랐지만.
…제발 비비안이 아빠를 안 닮았으면 좋겠는데.
에반에 이은 또 한 번의 기적이 필요했다.
***
연휴는 빠르게 흘렀다.
백악관의 연례행사인 칠면조 사면식이나 350만여 명이 참여한 뉴욕 추수감사절 퍼레이드도 그저 기사로 흔적만 남았을 정도로.
날짜는 12월을 코앞에 뒀고 연말을 준비할 시기가 되어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건 브로드웨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7 Confessions of Love의 연출자인 제시카는 웨이브 진 머리를 동여매며 제작자인 마이클에게 단호히 말했다.
“이번 오디션은 무조건 제 결정에 따라주기로 한 거 잊지 마요.”
“그래도 되도록 좋게 봐줘. 프라이스의 연기는 너도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아무리 TV 드라마와 영화로 성과를 거둔 배우라고 해도 이안의 공연 경력은 없었다.
믿을만한 경력이 없는 대신 받은 게 노래와 연기 영상이었고, 그걸 본 제시카는 다른 브로드웨이 관계자들처럼 감탄했다.
‘특히 오페라의 유령 노래는 강렬했지.’
솔직히 영상을 보고 탐이 났던 건 사실이다.
“그래도 이 작품에선 힘들죠. 프라이스 군의 연기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작품 중간에 주인공 인종이 달라지는 게 말이 돼요?”
“환상 같은 거니까 개연성 문제는 없지 않을까.”
“개연성이 문제에요? 몰입은 바로 깨질 텐데.”
그 꼴은 연출가로서 용납할 수 없다.
“그럼 이안이 발굴한 배우를 좋게 보면 되겠네.”
제시카는 손에 든 프로필을 거칠게 넘겼다.
없다고 봐도 괜찮을 정도인 무대 경력과 오른쪽 다리를 절어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는 특이 사항까지.
어디를 좋게 봐야할지 모르겠다.
“기본만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네요.”
그것도 못한다면 추천한 이안에게도 실망할 테니까.
“그리고 프라이스 측에서도 정확하게 평가해달라고 했다면서요.”
“후, 그랬지.”
그 말이 자신감의 표현이길 바랄 수밖에 없다. 이번 오디션을 위해 빌린 작은 공연장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이안과 지팡이를 든 노인을 포함한 일행이 보였다.
앞서 무슨 대화를 나눴든 간에 둘은 프로답게 아까 감정을 숨기고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프로듀서인 마이클 클리블랜드입니다. 이쪽은 연출가인 제시카 포스터죠.”
“이안 프라이스입니다. 편하게 이안이라고 불러주세요.”
“스티븐 리입니다. 이쪽은 제 손자인 에디 리이고요.”
가볍게 악수로 인사를 나눈 마이클은 이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안 군부터 먼저 시작할까요?”
어차피 이안이 오디션에서 떨어지면 스티븐을 볼 필요도 없다. 냉정하지만 그런 평가가 깔린 순서였다.
자칫하면 스티븐이 제 실력을 보일 기회조차 못 받을 수 있다는 부담감을 느낀 이안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할까요?”
“그럼 무대에 올라가 주세요.”
망설임 없이 무대에 오른 이안을 둘은 흥미롭게 봤다.
카메라 앞과 무대 위는 느낌이 다르니 어색한 모습을 보여줄 법도 한데 그런 모습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준비되는 대로 시작해주세요.”
어차피 앞선 모습은 부수적이고 결국은 얼마나 맡은 역할을 잘 소화할 지다.
‘실력이 조금 애매하면 주인공보단 조연을 제안해볼까.’
부담 없이 경력을 쌓기 좋다며 제안을 하면 괜찮을 거 같은…
“벌써 몇 번째 실패야. 꽃도 싫어, 반지도 싫어. 왜 날 만날 수 없다고 하는 걸까.”
생각을 멈춘 마이클은 놀란 눈을 했다.
무대극인 뮤지컬의 연기는 영화나 연극과는 다르다. 특히 지금까지 이안이 활약한 매체 연기에 비해 무대 연기는 발성, 톤, 움직임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기본기를 요구한다.
‘뭐, 기본기를 흠잡을 곳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어.’
기본기가 부족한 배우가 상을 받을 정도로 에미상과 칸 영화제가 허술한 곳은 아니니까.
다만 적절히 과장된 몸짓과 톤으로 풀어내는 연기는 뮤지컬에 딱 맞을뿐더러.
‘무슨 전달력이 이래.’
슬픈 감정을 품은 목소리가 귀에 맴도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감정 전달에 집중해서 대사 전달력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짧은 대사로도 실력을 가늠하긴 충분했고 흠잡을 곳이 전혀 없었다.
생각 이상의 실력이다.
둘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지만 이건 너무 이른 감탄이었다.
“그냥 포기하라고? 참 무책임한 충고네. 간절한 마음을 품어 본 적은 있니. 세상의 중심이 바뀐 느낌이지. 포기는 영원히 날 가두는 일이야. 일주일이 수천 번 반복돼도 난 이 자리겠지.”
대사에서 노래로 넘어가는 것도 어색하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노래는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하고.’
비슷한 오페라와 달리 뮤지컬의 노래는 록, 클래식, 재즈, 힙합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데 지금 부르는 곡은 팝이다.
이안이 가수로 활약한 장르인 만큼 매력적인 보이스는 무대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반주 없이 진행 중이기에 목소리의 힘을 여실히 느낀 마이클은 제시카에게 속삭였다.
“어떻게 할 거야?”
“…머리 아프니까 말 시키지 마요.”
연출가로 볼 때 캐스팅하기엔 걱정되는 요소가 많았다.
연기, 노래, 춤을 제대로 어우러지게 할 수 있는지,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2시간가량 공연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지 등.
걱정되는 걸 늘어놓자면 한참이겠지만.
‘욕심이 나긴 해.’
아직 머릿속으로만 구현된 작품에서 이안이 활약하면 어떨가. 이 생각이 머리를 둥둥 떠다녔다.
“다음 배우가 잘 해주길 바랄 수밖에 없겠네요.”
…못 할 거라면 차라리 미련이 안 남을 정도로 못 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제시카는 남은 연기를 홀린 듯이 바라봤다.
지정된 대사와 노래를 전부 끝낸 이안은 두 평가자에게 물었다.
“다 끝났는데 어땠나요.”
“훌륭했습니다. 연습을 엄청 많이 하신 것 같네요?”
“많이 했죠.”
회귀 전에도 연습한 시간이 꽤 될뿐더러 브로드웨이 도전을 결심하고 나서도 틈틈이 연습했다.
적어도 무대에 오르기 부끄러운 수준은 아니라고 자부할 정도로.
다행히 둘도 비슷하게 평가한 듯했다.
무대에서 내려온 이안은 스티븐에게 다가갔다.
지팡이를 잡은 손에는 힘이 강하게 들어간 게 보였다. 미련이라 부르는 꿈을 이룰 기회가 찾아왔는데 긴장이 안 되는 게 이상한 일이다.
이해는 되나 이대로 올라가서 좋을 건 없고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농담을 던졌다.
“무대까지 오르는 게 힘드시면 업어드릴까요? 참고로 저랑 친한 다른 감독님도 못 누려본 호사랍니다.”
장난스러운 이안의 말에 스티븐은 웃음을 터트렸다.
“무대도 혼자 못 오르는 배우를 누가 뽑아주겠나. 나는 괜찮으니 에디 좀 부탁하지. 나보다 더 긴장한 것 같거든.”
“여긴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이안은 에디 옆에 앉아 무대에 오른 노인을 바라봤다.
마지막에 나오는 그의 대사는 얼마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스티븐에게 연출자가 요구한 건 노래였다.
‘쉽지는 않아.’
만날 수 없다며 고백을 거절한 여인과 묘한 의미가 숨어 있는 노래와 대사가 반전이라는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이다.
맡은 게 한 곡이라도 무게감이 달랐다.
걱정과 기대의 시선을 담담히 받은 그의 입이 열렸다.
“야속한 꿈을 꾸었소. 그대가 나오는 꿈이었지. 내 시간을 가져간 그대여. 꽃을 보며, 볼품없는 반지를 끼며 웃던 미소가 떠오르는 밤이오.”
표정과 손짓 그리고 서글픔을 품은 목소리.
쓸쓸함과 슬픔을 머금은 노래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이어지는 노래를 듣던 이안은 슬쩍 고개를 돌려 에디를 봤다.
완전히 노래에 빠져든 그는 익숙함에 가려진 가치를 이제야 느끼는 듯했다.
“나는 내일도 그대가 나오는 꿈을 꾸리다. 그 야속한 꿈을.”
노래가 끝이 났다.
최선을 다하고 서 있는 그를 향해 제시카가 일어나 손뼉을 쳤다.
“Welcome to Broadway. 무대로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정말입니까?”
“물론이죠. 도대체 프라이스 군은 이런 배우를 어떻게 찾았는지 모르겠네요.”
“우리 캐스팅 디렉터보다 나은 거 같은데.”
확답을 받은 노인은 고개를 돌려 어느새 다가온 이안과 에디를 봤다.
“합격이라네.”
“들었어요. 축하해요.”
“…축하해요.”
둘에게 축하 인사를 듣고 나서야 노인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젊은 시절 그때처럼.
노인의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산타
7 Confessions of Love의 주인공을 담당할 두 배우가 정해졌다.
마이클과 제시카는 계약부터 시작해서 리허설을 포함한 일정을 맞춰보는 것까지 두 배우와 논의할 게 산더미였다.
하지만 둘이 먼저 물어본 건.
“그래서 둘이 어떤 사이입니까?”
바로 이거였다.
이안의 캐스팅이 알려지면 이 작품에 관심도 커질 테고 거의 경력이 없는 스티븐이 캐스팅된 건 금방 알려질 게 뻔했다.
미리 관계를 알아야 그때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
진지한 질문에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사이냐고 물어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는데요. 열흘도 안 됐죠?”
“그렇지.”
…열흘이라고? 오디션 계약을 주고받은 게 8일 전이다.
이상함을 눈치챈 둘에게 방긋 웃었다.
“만나고 바로 다음 날에 연락한 거예요. 길거리에서 사람을 착각해서 에디를 붙잡았거든요. 어쩌다 보니 에디 가족과 밥도 먹게 되고 오디션 권유도 하게 됐죠. 맞죠?”
“그렇지. 그러고 보니 에디 덕분에 이런 기회를 얻게 됐구나. 고맙다.”
“…제가 뭘 했다고요.”
할아버지가 헛된 꿈을 꾼다고 항상 생각해온 에디는 칭찬에 기뻐할 수 없었다. 오히려 동정심으로 돕냐고 물었던 과거가 생각나 미안함과 부끄러움만 들었다.
고개를 푹 숙인 그의 어깨를 이안은 가볍게 두들겨 줬다.
“맞는 말이에요. 리가 없었다면 우리 둘이 만날 일도 없었고 전 이 뮤지컬에 참여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셋의 대화를 들으며 마이클은 헛웃음을 지었다.
굳이 거짓말할 이유가 없으니 저 말이 사실이라면 우연히 만난 노인에게 오디션 기회를 줬다는 뜻이다. 자칫하면 자신의 평판이 깎일 것도 각오하고 말이다.
‘여러모로 독특하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온갖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스타들에 비하면 나아도 절대 평범한 성격은 아니다.
제시카를 힐끔 봤다. 연출가니 꽤 고생할지도 모르겠다.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지만.
제작자인 그는 다른 걸 생각해야 했다.
‘일단 극적인 이야기야. 알려지면 홍보에 큰 도움이 되겠어.’
사실 이안이 출연만으로 표 판매 걱정은 덜해도 되는 게 맞다. 씁쓸한 일이지만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 유명 스타를 내세우는 게 훨씬 티켓 판매에 도움이 되니까.
그래도 이게 제작자 일을 소홀히 할 이유는 아니다.
물론 이안의 팬들이 알았다면 ‘이 자식아, 괜히 경쟁자를 늘리지 말라고!’라며 소리쳤을 생각이었지만.
“자, 일단 스케줄 논의부터 하죠! 내년 공연에 들어가려면 아주 바빠요.”
마이클의 외침과 함께 이안은 7 Confessions of Love에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
연휴 동안 비었던 하버드를 다시 학생들이 채웠다.
“이안, 연휴 잘 보냈어?!”
“그럼 잘 보냈지. 열심히 오디션 준비를 했거든.”
…그게 잘 지낸 건가.
아직 이안에게 익숙하지 않은 맥으로선 진담인지 아닌지 가늠을 못 했다.
오랫동안 이안으로 단련된 지인이라면 ‘그래, 좋았겠네.’라며 대충 공감해줬을 텐데 아쉽게도 맥에겐 그 정도 내공이 없었다.
“그래서 오디션에는 합격했어?”
“그럼 합격했지. 이거야.”
손에 든 대본을 흔들었다.
계약 전에 받은 대본보다 두툼했다. 빠진 내용이 없는 완벽한 대본이라는 뜻이고 작품명이 적힌 대본을 보니 확실히 이 작품에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지만 참을 게. 직접 공연에서 볼 거거든.”
“오려고?”
“당연하지. 네 공연이라면 본다고 할 사람이 많을걸.”
보러 와준다니 고마운 말이다.
웃으며 화답한 이안은 7 Confessions of Love 대본은 손으로 쓸었다. 사실 엄청 하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장기 공연에 성공할 정도로 좋은 작품인 탓도 있지만, 내용이 와닿는 탓이다.
‘작품 속 좋아하는 여성은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 나에게는 그게 연기였고.’
의미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주인공에 공감한 건 스티븐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리움과 미련으로 옛 시절에 사로잡혀 살아왔으니 말이다.
‘재밌네. 나는 젊은 시절 주인공에게, 스티븐은 노인 시절 주인공에게 공감하다니.’
몰입할 때 도움이 되긴 할 거 같다.
뒤늦게 온 그레디까지 포함해서 연휴 동안 일을 이야기하고 있자니 맥이 깜빡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네가 하던 강의가 끝난다고 다들 엄청 아쉬워하더라.”
“진짜?”
“할 때는 힘들었어도 끝낼 때가 되니 아쉬움이 드나 봐.”
이안의 수업이 실전 압축으로 똘똘 뭉친 스파르타 교육이긴 했어도 그만큼 체감 효과는 컸다.
물론 벌써 저런 소리를 하는 건 연휴를 쉬었다고 추억으로 미화된 탓이 컸지만.
“다들 만족했다니 다행이네. 2학년 때는 휴학할 예정이라 강의를 못 하거든.”
“휴학이라니. 혹시 이 뮤지컬 때문이야?”
“응, 뮤지컬 때문도 있지. 새 학기 때는 공연이 오픈한 시기일 테니까.”
마이클하고는 9월 중순부터 3개월가량 공연하기 계약을 맺었으니 학교에 다니면서 공연하는 건 무리다.
‘거기에 펜데믹 문제도 있지. 할머니의 감염도 막아야 하고 피해를 막기 위해 나도 최대한 할 수 있는 선에서 노력해봐야지.’
그래 봐야 초창기 예방 홍보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겠지만.
괜찮은 대본이 있으면 넷플러스 같은 OTT와 계약을 맺고 그 기간 작품 제작 준비에 들어갈 수도 있고.
아무튼 휴학을 한다고 해도 여러모로 바쁘다는 뜻이다.
아쉬움에 고개를 끄덕인 맥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조심히 물어봤다.
“실례되는 건 아는데 혹시 이런 뮤지컬로 배우들은 얼마나 버는지 알 수 있어? 아, 물론 부담된다면 말 안 해도 되고.”
“글쎄, 상상하는 것보다 그렇게 많이 받진 않아. 영화랑 달리 객석 수가 정해져 있잖아.”
브로드웨이 배우 수익은 보장을 받지만 대충 추정은 가능하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받은 배우가 보너스를 포함해 대략 주당 2억 정도였다.
정말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 같은 경우는 1억 초중반 대 정도까지 받고.
‘나도 매진 회차 보너스를 최대한 받으면 10만 달러 전후였지?’
유명 할리우드 스타들이 영화 한 편에 수십에서 수백억까지 받는 걸 생각하면 엄청 큰 금액은 아니다.
“대신 브로드웨이는 최저임금이 잘 되어 있거든. 아주 작은 역할만 나와도 주급으로 2천 달러는 보장받을 수 있거든. 이것 때문에 누구 한 명이 큰돈을 받을 수 없는 거기도 하고.”
한 달이면 천만 원 남짓이다.
많아 보여도 노조 회비, 소속사 수수료, 레슨비, 살인적인 뉴욕 물가를 생각하면 넉넉하진 않다. 다만 공연에 참여하고 있다면 생계를 걱정할 수준은 아니란 게 중요하다.
이게 미국 브로드웨이 배우 노조의 힘이고.
‘어차피 돈이 목표였으면 미래 기억으로 마구잡이로 돈을 벌었겠지.’
이안에게 가장 큰 목표는 배우로 오랫동안 활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뮤지컬 참여가 배우 수명에 도움이 될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시계를 힐끔 봤다. 잠시 애들하고 떠드는 사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다.
“난 마지막 수업을 하러 가볼게.”
마지막 수업이라고 해봤자 인사에 가깝다. 기숙사를 빠져나와 이젠 익숙한 강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항상 무거운 자료와 함께 움직였는데 빈손으로 가려니 낯설었다.
이건 이안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세상에 빈손이야. 거기에 조교도 없어.”
“진짜 이 수업이 끝나긴 하는구나.”
아쉬우면서 다행이라는 오묘한 감정이 녹아든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이안은 방긋 웃었다.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아, 연휴 동안 열심히 한 과제는 두고 가요. 일주일 정도 정리해서 덩컨 교수님 사무실에 맡겨놓을 테니 그때 찾아가면 돼요.”
끝까지 과제를 챙기는 게 이안답달까.
몇 개월간 익숙해진 학생들은 가볍게 웃었다.
“좋아요. 덩컨 교수님이 특별히 허락해주신 수업이 여러분께 도움이 됐나 모르겠네요.”
“내년에도 해요?”
“아쉽게도 내년은 휴학이랍니다. 바빠요. 바빠.”
학생들은 아쉬움을 삼켰다. 클럽 신고식으로 사용할 계획부터 후배를 위한 강의 추천 같은 게 모두 휴짓조각이 됐으니 말이다.
‘하긴 엄청 유명한 스타긴 하지.’
‘반년만 더 들었으면 진짜 교수라고 생각할 뻔했네.’
바쁘다는 말에 이안이 어떤 사람인지 새삼 깨달았다.
“대신 궁금한 게 있으면 이메일 같은 거로 연락해요. 시간 날 때 답변할 테니까요. 아, 그리고 수업이 이대로 끝나서 아쉬운 학생이 있을 거예요. 그렇죠?”
얼떨결에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이자 이안은 방긋 웃으며 준비한 미끼를 던졌다.
“혹시 제이 안이라는 사람 알아요? 그 사람 이메일을 알려줄 테니 한 번 도움을 받아보는 것도 좋아요. 저랑 친한 벨라가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거든요.”
제이 안과 벨라.
둘의 이름이 나오자 학생들은 웅성거렸다. 연예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니 말이다.
다행히 학생들은 미끼에 흥미를 보였다.
‘벨라에게도 후배가 생길 때가 됐지.’
마침 이곳에 모인 학생들은 대학생이니 대학원생으로 진화하기 딱 좋았고.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은 이안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수업을 마무리 지었다.
“제이 안이라. 그 사람 영화 프로듀서로 꽤 유명하지 않아?”
“그럴걸.”
일단 규묘가 적은 독립 영화들을 제작하면서 한 번도 망한 영화가 없었다.
영화계 정보를 잘 아는 학생일수록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잘 알았다.
‘어차피 이메일 하나 보낸다고 문제 될 건 없지 않나.’
결국 호기심에 학생들은 제이 안에게 이메일 보내봤다.
가장 먼저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구상 중인데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냐는 질문을 보냈던 학생은 잠시 후 친구를 툭툭 쳤다.
“야! 답장 왔는데?”
“정말? 빨리 열어 봐.”
무슨 답을 줬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메일을 열었고.
-배경이 미국인가요? 80년대면 세계가 전체적으로 호황을 일단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 대본들을 추천할게요. 아, 그리고 음악도 빼놓을 순 없죠. 메탈을 중심으로 하는 록음악이 강세면서 현대식 댄스팝 같은 게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한 때기도 하죠. 그 당시 음악 분위기를 담은 작품도 알려줄…
…어라.
낯선 사람에게서 익숙한 교수의 향기가 묻어났다.
‘이안의 수업을 너무 많이 들었나.’
이런 착각까지 하고 말이다.
학생들은 열심히 답변으로 온 대본을 적었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예비 교수 수업 다음으로 사이비 교수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
연말이 훌쩍 다가왔다.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시작해서 한 달가량 되는 겨울방학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너무 어려운데?”
“자, 같이 도서관이나 가자. 오늘 새벽도 도서관 불은 환하구나.”
물론 그 전에 시험이란 고비가 있었지만 말이다.
앓는 소리를 내던 맥과 그레디였으나 그런데도 시험을 괜찮게 봤는지 표정은 밝았다.
“난 이번에 남미로 놀러 가기로 했는데 너희는?”
“글쎄 조금 더 고민해보고 결정하려고.”
어쩌면 그냥 놀 생각에 기쁜 걸지도 모르고.
짧은 추수감사절 연휴 때는 멀리 여행 가기 힘든 기간이지만 한 달가량 되는 겨울방학은 먼 해외도 놀러 갈 수 있었다. 들뜬 분위기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이안은?”
“크리스마스 연휴에 집에 있다가 뉴욕으로 놀러 갈 거야.”
“…뉴욕에서 뭐 하고 놀 건데.”
“리허설해야지. 방학 기간도 빠듯해.”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생활을 하면서 배우 활동을 하는 건 미친 짓 같았다.
“아니, 학교 때문에 1년 동안 활동을 쉰다고 했다며.”
“작품 준비는 예외로 봐야 하지 않을까.”
“후, 네가 예외라고 생각하면 그런 거겠지.”
차라리 힘들어 골골거리는 모습이라도 보여줬으면 건강 탓을 하며 막아보겠는데.
‘무슨 잔병치레는커녕 지친 기색도 없이 멀쩡하냐.’
하버드 학생 대다수가 엄청난 노력가지만 이안은 조금 수준을 달리하는 느낌이었다. 보통 사람이면 쓰러질까 걱정되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으니 말이다.
가끔은 같은 인간이 맞나 의심될 정도다.
친구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쯤 이안은 울리는 전화를 봤다.
연출가인 제시카였다.
-이안 군, 혹시 통화 가능해요?
“네, 가능해요.”
-특별한 건 아니고 확인차 연락했어요. 리허설 전에 되도록 혼자서 연습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해줘요. 알겠죠?
리허설 기간도 전부 돈이다. 인건비가 비싼 브로드웨이에서 빠듯하게 리허설 일정은 가져가는 건 당연했고.
다른 배우들이야 이런 일정에 익숙했지만, 첫 공연인 이안은 아닐 테니 이런 당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이죠.”
어차피 철저하게 준비하고 갈 생각인 이안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좋아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리고 마이클에게 들었는데 작품에 들어가는 걸 SNS에 올린다고 하셨죠?
“네, 그러기로 했어요.”
이안은 엄청난 인플루언서다. 기사로 홍보를 하는 것보다 더 효과가 클정도로.
-잘 부탁할게요.
“물론이죠.”
이안은 좋은 소식은 전할 마음에 기쁜 표정을 지었다.
***
크리스마스가 됐다.
즐거운 날에 이안의 SNS에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왔다는 알림이 울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여러분께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뮤지컬 7 Confessions of Love에 캐스팅되어 내년 9월에 여러분을 찾아뵐 거 같습니다. 공연은 3개월 간 진행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뜬소문이 아닌 이안 본인이 못 박은 오피셜.
-역시 뮤지컬인가!
└3개월이야. 좌석은 얼마나 되지?
└주6일 공연하면 십만 석은 넘을걸. 넉넉하나?
└그럴 리가 있냐! 이번엔 배우 팬들까지 달려들 텐데.
└n차 공연도 빼놓을 수 없고.
-그래도 팬미팅, 콘서트보단 낫겠지.
└이안을 믿어?
└???: 여러분의 편한 관람을 위해 불편한 좌석은 판매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닥쳐! 진짜 그러고도 남을 거 같잖아.
└괜찮아. 이번엔 이안이 주도하는 게 아니니까.
└아직 모른다. 언제나 긴장하고 있으라고.
어찌 됐든 팬들은 산타에게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근데 왜 선물은 선착순일까.’
이게 맞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