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81)
폐막과 개막(2)
시간이 흐르면서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우선 5월에 접어들면서 기말고사에 허덕이던 학생들이 ‘도비는 자유에요!’를 외치며 학기를 종료했다는 점이다.
아쉬운 마음을 뚝뚝 흘리는 친구들과 한동안 이별을 선언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언제 복학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입학할 때와 달리 자퇴보단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졸업을 할 생각이었다. 그만큼 1년 동안 한 대학 생활은 즐거웠으니까.
물론 휴학 사실에 가장 아쉬워한 건 역시 TDM 학과였다. 특별 강의를 들은 학생의 실력이 눈에 띄게 늘어난 탓이다.
이안은 정말 뼈를 깎는 심정으로 기숙사에 열심히 모았던 대본들을 전부 기부했다.
물론 학생들은 ‘아니, 뭘 이런 걸 다?!’,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풀 필요는 없는데?!’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흥미롭게 대본을 훑는 교수들을 봐선 저 수북한 종이 뭉치는 내년에 과제로 재탄생할 가능성이 컸으니까.
아무튼, 겨울이 몹시 추웠던 하버드의 생활은 잠시 끝이 났고 자연스럽게 시험공연도 함께 막을 내렸다.
그동안 공연을 하며 충분히 수정, 보완이 완료되었을뿐더러.
-보스턴에서 시험공연 중인 7 Confessions of Love. 연일 매진.
더는 시험공연으로 흥행 여부를 판단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아직도 이안의 인기 탓인지 아니면 작품이 우수한 덕분인지 흥행 요인은 긴가민가했다. 물론 냉정하게 평가해줄 비평가와 기자가 시험공연에 오긴 했는데.
-화제의 작품 7 Confessions of Love은 어떤 작품인가.
기본적인 원칙도 안 지키고 욕심에 이런 기사를 쓴 기자가 팬미팅 소식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Fianist들에게 두들겨 맞은 이후로는 따로 평가를 들먹이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오프닝 나잇 전까진 엠바고 유지되는 게 맞긴 하지.’
프리뷰가 끝나는 마지막 날이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 중 하나였다.
관계자, 셀럽 등을 초청해 공연하는 날이기도 하고 엠바고가 일제히 풀리는 날이다.
“말도 마라. 다음 날 아침이면 일제히 리뷰 기사가 실리거든? 진짜 엄청 설레면서도 무섭다니까.”
“처음 겪을 때는 신문을 쌓아놓고 볼 생각도 못 했지. 솔직히 본 다음에 괜히 봤다고 후회했지만 말이야.”
배우들만 아니라 제작자인 마이클과 연출가인 제시카까지 대답하며 진저리를 쳤을 정도였다.
비평가에게 난도질당하고 공연이 꼬꾸라지는 꼴을 보고 경험하는 건 흔한 일이니까.
이안에게도 낯선 일은 아니다. 그동안 배우로 살면서 온갖 날 선 평가를 다 받아봤으니 말이다.
아무튼, 프리뷰부턴 브로드웨이에서 진행하니 이안은 자연스럽게 뉴욕에 거주지를 잡았고.
“방학 동안 같이 좀 지내자.”
“이안, 이 방은 내가 지내도 되지? 집이 넓어서 좋네. 샬럿 씨가 빌려준 집이라고 했던가?”
야생의 다니엘과 도로시가 튀어나왔다.
“같이 지내는 건 상관없는데 너희는 집에 안 가?”
“야, 너랑 방학 동안 같이 지낼 수도 있다니까. 아빠가 그냥 방학 동안 들어오지 말라더라.”
이건 다니엘 답변이고.
“너 혼자 지낸다니까 불안해하는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솔직히 같은 생각이기도 하고.”
“내가 뭐?”
비록 노숙 생활이 태반이지만 홀로 살아온 세월이 훨씬 길다. 지붕 있는 멀쩡한 집도 있는데 못 지낼 게 뭐 있는가.
물론 도로시는 동의하지 못하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밥은 대충 때울 게 뻔하고 옷은 후줄근하게 입고 다닐 거 아니야. 너랑 우리가 함께 지낸 게 한두 해냐. 걱정 마, 적당히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면 잡아도 갈 테니까.”
툴툴대며 말하긴 했으나 걱정하는 마음은 여실히 느껴졌고 방긋 웃으며 물었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노래 한 곡 불러줄까?”
“야, 너 죽는다?! 부르기만 해봐.”
티격태격하긴 했어도 반갑긴 했다. 좁은 기숙사에서 한동안 옹기종기 지낸 탓인지 혼자 있는 게 적막하다고 느껴졌으니까.
‘옛날이라면 상상도 못 할 생각이긴 하네.’
언제부터 이렇게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게 당연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다.
고작 집에 둘이 추가됐을 뿐인데 덕분에 매일 같이 집이 시끌벅적했다. 가끔은 네이선도 놀러 오기도 했고.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사이 I’m okay의 흥행 결과가 어느 정도 나왔다. 무난하게 북미에서만 1억 4천만 달러 이상을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제작비가 7천만 달러가 안 됐으니 흥행은 성공이다. 독립영화 느낌이 묻어나는 만큼 손익분기점도 제대로 못 넘길 수도 있었으니까.
‘평론가들 평가도 좋으니 아카데미나 골든 글로브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해볼 만하고.’
모든 게 순조로웠다.
-이안! 이아아앙!
평균보다 빨리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비비안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고.
데미안을 보내준 영상을 보며 이안은 작게 웃었다. 토실토실한 볼살과 작은 손을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귀여웠으니까.
아쉬운 점이라면 에반과 달리 함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어서 마마, 빠빠를 먼저 말했다는 것 정도?
-아, 네 이름을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왜 데미안이 더 아쉬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흔든 이안은 핸드폰을 넣고 브로드웨이를 걸었다.
“여전히 사람이 많네.”
힘든 팬데믹 시기가 찾아올 걸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활기가 돌았다. 새로 막을 연 공연들도 보였고 지난번에 봤던 공연 간판이 사라진 곳도 있었다.
이렇게 빠르게 순환되는 것 자체가 브로드웨이가 호황이라는 걸 의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이 역대 최고 호황이긴 해.’
그러니 어떻게 일 년 후면 이 많은 공연장 문이 닫힐 걸 상상할 수 있을까.
쓴웃음을 짓고는 인파를 가로질러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간판에 보이는 시계 위로 떨어진 백합 한 송이 그리고 그 위에 적힌 7 Confessions of Love.
수많은 과정을 거친 끝에 드디어 작품이 브로드웨이에 입성했다는 뜻이다.
“안녕하세요.”
“오, 반갑습니다.”
한동안 신세 질 극장 직원들과 인사한 이안은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험공연 때보다 2배는 늘어난 천석 가까운 좌석. 대규모 뮤지컬로 불릴 수 있는 객석 규모였다.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톡톡 두들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안 군?”
“아, 제작자님.”
“말한 기념품들도 전부 도착했거든요. 와서 확인 좀 해봐요.”
마스크.
그게 도착했다는 말에 이안은 창고로 따라갔고 한가득 차 있는 짐을 볼 수 있었다.
말이 쉬워 마스크 수십만 장이지 대형 화물트럭으로 몇 대 분량이다.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한 MD 직원들도 고생 중이라고 했지.’
쌓아놓으면 은근히 부피가 나가는 게 마스크다.
계속 마스크로 새로운 굿즈를 요구하자 ‘그냥 포토 카드로 하면 안 될까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대답?
당연히 어림도 없는 소리다.
지금은 애물단지처럼 느껴져도 나중엔 없어서 못 구하는 게 마스크였다.
물론 이런 사정을 모르는 직원으론 답답할 수밖에 없을 거다.
“이러다 재고가 남는다니까요?”
그러니 이런 경고를 했겠지.
물건을 팔면서 재고만큼 무서운 건 없다. 생산비 들지, 창고비 들지. 괜히 블랙프라이데이 같은 할인으로 재고 처리를 하는 게 아니다.
직원은 나름대로 회심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마스크가 남는다고? 오히려 좋아.’
되팔 것도 아니니 재고가 감당 못 할 정도로 늘어나는 것만 아니면 된다. 그리고 걱정할 만큼 재고가 쌓이지도 않았고.
굿즈가 된 마스크를 끼워준다고 한 탓인지 앨범뿐만 아니라 다른 굿즈들도 꽤 많이 팔리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부터 나눠주면 되죠?”
상자를 뜯고 포장지가 잘 인쇄됐나 확인한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이건 저한테 맡기고 이제 공연 준비에 들어가요. 공연 전까지 아마 정신없을 테니까요.”
프리뷰 첫날부터 만석이다. 시험공연과 달리 본 공연보다 가격을 적게 책정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후 공연은 말할 것도 없다. 줄지어 매진됐고 현장에서 살 수 있는 티켓을 노리는 사람도 잔뜩이다. 기대하고 찾아왔을 사람을 실망하게 할 순 없다.
무대 뒤로 향하는 이안의 얼굴에는 굳은 의지가 묻어났다.
***
“무슨 티켓 구하기가 이렇게 힘든지 원.”
비평가라는 직업이 아니었으면 티켓을 못 구했을 거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히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입장을 기다리며 포스터와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였다.
‘연령대가 참 다양하네.’
뮤지컬을 보는 평균 연령은 40대다.
그걸 생각하면 기껏해야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전부 이안 때문이겠지.’
이안은 꽤 많은 팬덤을 자랑하는 스타였고 흥행력은 보스턴에서 이미 입증된 상태였다. 남은 건 얼마나 무대 위에서도 훌륭한 능력을 선보이는지였다.
행동이 빠른 동료 중에는 이미 보스턴까지 갔다온 이들도 있었다. 비록 어땠냐는 질문에 ‘직접 봐. 그게 가장 나아.’라는 답변만 받았지만.
‘얼마나 잘하길래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한번 보자고.’
자신은 신문에 올릴 비평을 쓰기 위해 이곳에 왔으니 말이다.
“티켓 확인했습니다. 여기 기념품 받아가세요.”
“감사합니다.”
히스는 두 개의 마스크를 받아 객석에 앉았다.
비닐 포장지에 포스터와 무대 인사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공연을 봤지만 이런 기념품을 받는 건 처음이다.
다른 사람도 신기한 건 마찬가지인지 촬영을 하는 사람들이 꽤 보였다.
공연 시간이 되자 모든 사람은 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침이 밝았네. 오늘은 참 운이 좋은 날이야. 알람보다 먼저 떠진 눈, 도착과 함께 켜진 신호등. 이보다 완벽할 순 없지. 그녀에게 고백하기엔 말이야.”
경쾌한 노랫소리는 귀에 탁 틀어박힌 것처럼 들렸고 단번에 모든 관객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아니, 노래만 특별한 게 아니야.’
분명 혼자 움직이는데도 무대가 전혀 넓게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스타성인가.’
관객의 시선과 눈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걸 보면 그런 생각밖에 안 들었다. 하지만 이런 감상은 곧 감탄으로 이어졌다.
뮤지컬은 1인극이 아니다. 수많은 배우가 하모니를 이루는 공연이고 주변을 들러리로 만드는 유독 튀는 배우는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불협화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릴리에게 고백을 도와달라고?”
“혼자는 안 되겠거든.”
“후, 잘 들어. 내가 그녀에 대해 알려줄 테니 말이야. 그녀는 자기 이름 같은 백합을 좋아하지. 어쩌면 반지도 좋을지도 몰라. 비싼 건 필요 없어.”
“비싼 건 필요 없어.”
자연스럽게 존재감을 죽이며 앙상블을 이뤄냈다.
완벽한 완급 조절이다. 분명 무대 경험이 별로 없다고 알고 있는데 아주 노련했다.
히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저걸 보고 이번이 첫 뮤지컬이라고 생각하겠어.’
괜히 자신이 에미상과 칸에서 상을 받은 게 아니란 걸 여실히 드러냈고 이건 작품이 뒤로 갈수록 그러했다.
뮤지컬은 여느 무대보다 화려한 편이다.
색색 조명과 다채로운 무대 배경, 다양한 무대 장치 그리고 춤과 노래로 만드는 멋진 볼거리. 하지만 이런 것들은 섬세한 연기를 가려버리기 쉬웠다.
‘분명 그럴 텐데.’
하루가 반복될수록 이안이 연기하는 로버트는 몸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손을 떨고, 가쁜 숨을 내쉬고, 시력이 떨어졌다. 차곡차곡 쌓이는 문제점들은 이안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왜 저렇게까지 할까.”
“그냥 포기하면 될 텐데.”
안타까움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어렴풋이 들렸다.
‘맞는 말이야. 연기는 대단하지만 상황이 이해되진 않는데.’
감탄의 연속이었으나 처음으로 속으로 빨간 글씨를 썼다. 가감 없이 평가하는 게 자기 일이니 말이다.
“크흠, 큼.”
공연을 집중해서 보던 히스는 기침이 나오자 한숨을 내쉬었다.
환절기여서 그런지 아무래도 살짝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품에 넣어놨던 마스크를 꺼냈다.
‘이걸 쓰면 조금 주변에 방해가 안 되려나.’
아마 그래서 이런 기념품을 준비한 듯했다. 아무 맥락 없이 준비했을 리가 없잖는가.
히스는 마스크를 꼈고, 그와 비슷하게 기침하던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마스크를 꼈다.
‘불편하긴 해도 예의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데.’
흐뭇한 미소를 지은 그는 공연에 집중했다.
하나둘씩 문제가 생기던 로버트가 제목처럼 일곱 번째 고백에 실패했을 때 관객들은 놀란 눈을 했다.
이안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노인이 쓸쓸하게 노래를 불렀다.
“야속한 꿈을 꾸었소. 그대가 나오는 꿈이었지. 내 시간을 가져간 그대여.”
지금까지 모든 복선이 짜 맞춰지는 순간.
짜릿함과 함께 꿈에서 떠난 사랑을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아련하게 파고들었다.
마지막에 긴 여운을 남긴 뮤지컬이 노인의 노랫소리가 함께 끝을 맺었다.
무대 인사와 함께 박수가 터져나오는 건 당연했다.
“흠잡을 곳이 없네.”
근래에 본 뮤지컬 중에서 가장 괜찮았다. 어떻게 비평을 쓸지 고민하며 천천히 공연장을 나서자 이안이 보였다.
아무래도 배웅을 하러 나온…
“기침하셔서 마스크를 쓰셨어요? 아니, 잘 하긴 했는데. 일단 이것부터 하나 더 가져가요. 거기 신사분도 여기 와서 하나 더 가져가고요.”
…왜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머니에 마스크가 하나 더 생겼고.
“어허, 잘 챙겨둬요.”
앞에는 연쇄 소매넣기범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세상은 너무 넓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
기념품이란 말에 소중하게 챙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스크? 궁금한데 한 번 뜯어볼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다.
‘기침 때문에 사용하는 건 아깝지만, 이해할 수 있지.’
아무튼, 마스크 귀한 줄 모르고 낭비하는 모습을 보니 속이 답답했고 해결책은 간단했다.
“기념품은 공연이 끝나고 퇴장할 때 주는 게 어떨까요?”
“응? 왜.”
비교할 것도 없이 우르르 퇴장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보단 티켓 검사와 함께 나눠주는 게 더 편하다.
그렇다고 괜찮은 핑계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게 더 여운에 남지 않을까요?”
틀린 말은 아니다.
공연 전에 포장지에 프린트된 무대 인사 사진을 봐도 ‘이런 배우들이 나오는구나.’ 딱 이 정도 감상밖에 주지 못할 테니까.
이 요청에 제작자인 마이클은 흔쾌히 동의했다. 의도에 공감했다기보단.
‘기념품도 내 돈으로 준비했는데 당연히 이 정도는 들어줘야지.’
공연 초기부터 주인공의 마음을 긁어놔서 좋은 건 없기도 하고.
아무튼, 마스크는 퇴장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줬고 공연의 여운이 남아 있을 때 받은 탓인지 받고 나서 반응도 좋았다.
‘물론 이렇게 해도 마스크를 낭비하는 사람은 있겠지.’
그것까지 신경 써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오지랖 넓은 성격은 아닐뿐더러.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보고 왔다.
└와… 계속 매진이던데.
└응, 다른 뮤지컬이야. 망할, 어떻게 된 게 일주일 동안 현장 추첨이 안 돼?!
└몸소 작년에 현장 추첨을 돌리던 이안 프라이스, 과연 당신은 어디까지 보셨던 겁니까.
└기행이 아니라 선행체험이었냐고!
-진짜 보고 왔다. 뮤지컬 쩔더라. (영롱한 마스크 사진)
└…운영자! 운영자, 이 자식 쳐내!
└운영자? 아아, 아직도 그 현장 추첨에 도전 중인 패배자를 말하는 건가?
└아니, 아직도 뮤지컬 기념품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설마. 나는 조만간 또 보러 갈 생각인데?
└n차 관람 멈춰!
적어도 팬들은 기념품으로 받은 마스크를 소중히 보관하는 듯하니까.
팬 사이트를 보며 극장에 거의 도착한 이안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극장 앞에서 티켓을 못 구하고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진짜 티켓 구하기 힘드네.”
“어떻게 현장 구매도 안 되냐.”
아멜리아를 돕고 예민해진 감각은 한탄 소리를 고스란히 잡아냈다.
‘팬들인가.’
이안은 아쉬움을 뚝뚝 흘리는 사람들을 모습을 봤다. 저렇게 있어 봐야 티켓이 생기는 건 아니다.
거기에 저들 중 태반은 뉴욕 인근에 거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행객일 가능성이 컸다. 주민이라면 나중에 또 도전하지 저렇게 아쉬워하며 발을 동동 구를 이유는 없으니까.
뿌듯함과 고마움이 들었다.
“때론 약간의 행운이 있는 것도 좋겠지.”
아쉬움을 달랠 소소한 행복 같은 거 말이다.
이안은 극장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공연 끝날 때까지 기다릴까? 공연 끝나면 극장 앞에서 얼굴을 비춘다고 했는데 말이야.”
“그럼 시간 좀 보냈다가 다시 오자.”
이안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여성들의 어깨를 톡톡 두들기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누굴 보려고요?”
“누구긴 누…”
헌팅인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던 사람은 모자를 살짝 들춘 얼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녕하세요?”
확실히 이안이다.
팬들이 닮은꼴과 본인을 구분 못 할 리가 없다. 머리가 현실을 받아들인 순간 입 밖으론 바로 하이톤의 비명이 나왔다.
“꺄아악! 이안, 진짜 이안이야!”
“이안이라고?!”
“만나서 반가워요.”
발을 동동구르며 좋아하는 팬들을 보며 웃은 이안은 시계를 힐끔 봤다.
마음 같아선 여유롭게 이야기도 나누고 사인도 해주고 싶지만.
‘시간이 별로 없네.’
공연 준비를 생각하면 빠듯한 시간이다. 아쉬움을 삼킨 이안은 가방을 열었다.
“저도 시간이 없어서요. 이거라도 하나씩 받으세요.”
포스터가 프린트된 마스크를 하나씩 나눠줬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아쉬움을 달랠 선물이자, 팬들에겐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엄청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나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한 종류는 나중에 공연을 보러왔을 때 기쁨으로 남겨둘게요. 괜찮죠?”
해맑게 웃는 이안을 보며 팬들은 혀를 내둘렀다.
‘여우야. 여우.’
요망하게 순식간에 사람들을 홀리고 떠나갔다. 이것만 봐도 온갖 말썽을 일으켜도 이안의 팬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를 새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날 이후 이안은 간간이 팬들을 보기 위해 나왔고.
-뮤지컬 거리 홍보에 나온 이안 프라이스.
기사를 본 팬들은 한숨을 쉬었다.
-누가 우리 애 좀 말려봐.
└???: 홍보하면 흥행에 도움이 되겠지?
└…우리 이안이 뭐든 열심히 하긴 하지.
└제발 얌전히 있었으면 좋겠다.
└네 수준을 생각하라고! 홍보를 왜 해!
오해가 생겼다.
둘 사이엔 일상이었다.
***
브로드웨이 작품들은 단순히 경쟁 관계라고 볼 수 없다.
공연 티켓은 절대 저렴하지 않고 여러 공연을 보기엔 부담된다. 그러니 엄청난 인기를 끄는 작품이 튀어나온다? 예매율이 뚝 떨어지는 걸 경험할지도 모른다.
‘얼핏 보면 한 파이를 나눠 먹는 모습처럼 보일 수 있지. 하지만 이건 단기적인 관점이야.’
훌륭한 작품은 전체 파이를 키운다.
브로드웨이로 더 많은 사람이 방문하고 성공을 꿈꾸며 많은 제작자와 투자자가 새로운 공연에 도전하게 되니 말이다.
매년 브로드웨이를 살찌울 수 있는 작품들을 사람들이 기다리는 이유였다.
그런 면에서 브로드웨이 입성 전부터 7 Confessions of Love는 많은 관계자에게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티켓 파워를 자랑하는 이안이 참여한 작품이 얼마나 성공 가도를 달릴지 기대가 됐으니까.
이 궁금증은 프리뷰가 시작되고 금방 해소됐다.
-7 Confessions of Love! 연일 매진 행렬.
-들썩이려는 암표에 ‘힘들더라도 암표 구매는 자제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팬들에게 부탁한 이안 프리아스.
엠바고가 걸려서 작품 평가는 올리지 못해도 누구나 확인 가능한 매진 행렬은 괜찮았다.
화제성이 있는 만큼 기자와 비평가들이 연일 공연을 방문했고 그만큼 불평도 쌓여갔다.
“프리뷰가 언제 끝나?!”
“진짜 매번 경험하는 일인데 답답하네.”
손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눈 딱 감고 원칙이고 뭐고 그냥 올리고 싶지만.
“하지 마라. 괜히 기사 올렸다가 이안이 실망했다며 앞으로 브로드웨이 작품 참여를 안 한다고 해봐라. 그거 감당할 수 있어?”
‘에이, 그렇게까지 하겠어.’라고 하기엔 가수 활동을 멈췄던 전적이 있다.
할리우드만큼 금전적 이득을 줄 수 없는 브로드웨이니 활동을 그냥 접어버린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브로드웨이에 발도 못 디딜걸.’
물론 비평가와 기자 인생을 걸고 나서려고 한 멍청이도 있었으나 편집부를 넘어서지 못했다.
굳이 불구덩이를 찍먹해볼 이유는 없으니까.
다만 그렇다고 엠바고가 끝날 때까지 손가락을 빨고 있을 이유는 없다.
올릴 수 있는 기삿거리를 찾기 위해 눈을 굴리던 기자들이 꽂힌 사람이 있었다.
“스티븐 리.”
세월만큼 짙은 감정선을 선보인 노래를 불렀으나 누구 하나 정체를 알지 못한 배우였다.
올라온 공연 후기에서 자주 언급될 정도이니 엠바고가 풀리면 이안 다음으로 관심을 받을 배우였고.
“빨리 어떤 사람인지 찾아봐! 느긋하게 있지 말고 말이야!”
처음엔 호기심으로 조사했던 기자들은 뒷사정이 풀려나올수록 눈을 반짝였다.
“사고로 젊은 시절 뮤지컬의 꿈을 접었다고? 하지만 미련을 못 버리고 계속 연습했고.”
장애가 있는 배우가 노년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이 스토리만으로도 관심을 받을 텐데 이 배우를 추천한 사람이 이안이었고.
“정말 그냥 우연히 알게 된 사이라고?”
“네, 노래 한 번 듣더니 바로 오디션 추천을 해줬다고 합니다.”
오디션을 보게 된 과정 자체가 영화 같았다.
주말 수많은 인파에서 이안이 오해를 한 사람이 하필 스티븐의 손자였고, 사과 의미로 한 식사 자리에서 부른 노래를 듣고 이안은 망설임 없이 오디션에 추천했다.
당사자에게 확인까지 받았으나 ‘이거 거짓말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운명적인 만남이다.
도저히 믿기 힘들어서 깊게 조사를 해봤으나.
“…이게 왜 진짜일까.”
아무리 조사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디션 전까지 접점은 전혀 없었으니까.
기적이라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인연이고 앞다투어 기자들은 이걸 기사로 내놨다.
-오해가 만든 기적. 7 Confessions of Love 두 배우의 만남.
-인생은 뮤지컬보다 더 극적이다. 우리는 그런 현실에서 살고 있다.
-7 Confessions of Love 제작자 마이클, “이안에게 감사한다. 그의 과감한 추천 덕분에 브로드웨이는 좋은 배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스타와 한 무명 배우의 기적 같은 인연.
사람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스토리였고 엄청난 관심으로 화답했다. 물론 이에 가장 크게 득을 본 건 스티븐이었다.
7 Confessions of Love은 이 이슈가 없어도 연일 매진 행렬이고, 이안은 이 일이 없더라도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으니까.
“인터뷰는 잘 다녀왔어요?”
“그래, 네 찬양을 기자가 질릴 때까지 늘어놓고 왔단다.”
스티븐은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마냥 농담은 아니지.’
이전 인터뷰에서도 어찌나 고마움과 칭찬을 늘어놨는지 민망할 정도였다. 수준만 비교하면 제이 안이 교주로 칭송받을 때와 비슷했다.
그만큼 고마움을 느낀다는 뜻이니 싫진 않았다.
스티븐은 자신이 인터뷰했던 기사를 내려봤다.
그저 미련한 노인에 불과했던 자신이 어느덧 배우로 불리고 있다. 지금이 한낱 꿈에 불과하더라도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행복했다.
“정말 고마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야.”
이안은 살짝 붉어진 눈시울에 미소를 지었다.
“너무 인사가 빠른 거 아니에요? 이제 프리뷰가 끝나는 걸요.”
일어나 주변을 쓱 둘러봤다. 길게만 느껴졌던 오프닝 나잇이 다가왔다.
알게 모르게 왔다 간 비평가들의 족쇄가 풀리며 평가가 쏟아질 테고. 어떤 날 선 평가가 들어갈까 걱정될 수밖에 없지만.
‘다들 표정이 괜찮네.’
불안보단 기대를 담은 얼굴들이 보였다.
연일 이어진 성공과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얻은 자신감을 얻은 덕분이다.
‘나도 기대가 되기도 하고.’
첫 무대인 자신을 보고 어떤 평가를 했을까. 오만하게 호평만 가득할 거란 생각은 안 해도 악평을 했을 리 없다는 자신감은 있었다.
그만큼 치열하게 준비해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동안 준비한 연기를 가감 없이 보여줄 생각이었다.
‘다들 왔겠지.’
가족들과 벤, 게빈부터 아멜리아, 에이든 남매까지. 귀빈을 초청하는 날답게 소중한 지인들을 초대했으니까.
기꺼이 뉴욕까지 넘어온 이들을 실망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스티븐 씨도 가족들을 초청했다면서요. 오늘 공연도 잘 해봐요.”
“물론이지.”
소중한 사람들이 보는 공연이 막을 올렸다.
***
이안이 처음 뮤지컬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 회의적인 반응은 꽤 많이 나왔다. 하지만 이안을 잘 아는 사람들은 걱정보단 코웃음을 쳤다.
“처음 하는 뮤지컬이니 힘들지 모른다고?”
연기로 단 한 번도 실망을 준 적 없는 이안이라면 처음이라도 잘 할 거라 믿었다.
분명 믿었는데…
“적당히 잘해야지!”
“칭찬은 말로 해요! 말로.”
벤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주자 툴툴거린 이안은 고개를 힐끔 돌렸다.
누가 전직 파티광 아니랄까 봐 열심히 파티장을 누비는 샬럿이 보였다. 그녀가 보기 전에 적당히 머리를 복구시켜 놔야 했다.
‘허니! 누가 머리를 이렇게 하고 있으래?’라며 화내기 전에 말이다.
어설프게 머리를 만지고 있을 때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여성이 보였다.
“아멜리아.”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즐거웠어요.”
또렷하게 초점이 잡힌 눈.
각막 이식이 잘 이뤄졌다는 걸 뜻했다.
“눈은 어때 괜찮아?”
“괜찮아요.”
“의사 선생님이 거부 반응도 아직 별로 안 보인데. 아마 앞으로도 큰 걱정 안 해도 될 거라고 하더라.”
오빠인 에이든이 그녀보다 더 들뜨고 기쁜 기색이었다.
두 남매는 참 행복해 보였다.
‘결국에는 시력을 되찾긴 했네.’
이전 삶과 달리 오빠의 유산이 아닌 이름 모를 사람의 선물을 품게 됐다.
시력을 회복했다는 결과는 같을지라도 죄책감에 썩어가던 그녀의 미래와는 분명 달라질 거다.
이안은 진심을 담아 축하하며 물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냈어?”
“그냥 여러 가지를 봤어요. 아름다운 자연을 보기도 했고 참혹하고 슬픈 현실을 찾아보기도 했죠.”
쓴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그녀가 들은 세상은 따뜻한 편이었을 거다. 상상력의 토대가 될 많은 것을 에이든이 말해줬겠으나 어느 정도 걸러진 이야기를 했을 테니.
그녀는 세상에 첫발을 뗀 아이와 같았다.
지금 겪는 성장통이 그녀의 미래에는 도움이 되리라. 그리고 이 생각은 맞은 듯했다.
“…전에 시나리오가 필요하다고 하셨잖아요. 이거 한 번 봐주실 수 있나요.”
부끄럽다는 듯이 내민 종이뭉치.
그녀가 변화를 알 수 있는 증거에 기쁜 마음으로 첫 장을 넘겼…
-내 삶에는 언제나 동물들이 가득했다. 그러니 내가 두 발 달린 짐승이라고 할 수 있는 퍼리에 빠진 건 어쩌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퍼리?
쉽게 생각하면 변신한 늑대 인간과 비슷한 그것들?
“에이든?”
시선 피하지 말고, 이자식아.
눈을 뜬 아멜리아가 너무 넓은 세상을 경험했다.
머리가 아파 왔다.
제안
퍼리는 모피나 털을 뜻하는 펄(fur)에서 파생된 단어다. 사전적으론 털로 덮인 상태를 뜻하고.
‘서브컬처에선 의인화한 동물 캐릭터를 뜻하지.’
쉽게 설명하면 늑대인간이나 미녀와 야수의 야수 같은 외형이랄까.
수인 자체는 오래된 전설 같은 곳에서도 흔히 발견되니 이상하게 여길 것까진 없다. 그래,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아니, 아무리 그래도 퍼리가 평범한 건 아닐 텐데.
“에이든?”
눈총을 받은 에이든은 재빨리 변명했다.
“변명 같지만 이젠 내가 항상 붙어 있을 순 없잖아.”
그건 또 그렇긴 하다.
시력을 되찾은 아멜리아는 더는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 홀로서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생활이라는 게 생기는 것도 당연하고.
‘왜 하필 생긴 사생활이 이런 걸까.’
잠시 고민하던 이안은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멜리아는 구미호인 루의 팬픽도 썼었지.”
두 남매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Melted Moonlight였다. 생각해보면 이미 어느 정도 싹은 보였달까.
혼자 수긍하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구미호는 퍼리가 아니에요. 동물귀랑 꼬리가 붙었다고 끝이 아니거든요. 물론 전 둘 다 좋아하지만요.”
“응, 그렇구나.”
그렇게까지 알고 싶진 않았지만.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사적인 감정은 최대한 털어내고 시나리오를 봤다.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 늘어나는 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왜 자신은 멀쩡한데 주변에 개성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지 이해할 순 없어도 지금 중요한 건 시나리오였다.
이안은 파티장 외각으로 가서 빠르게 글을 읽어봤다.
“장르는 어반 판타지네.”
간략하게 설명하면 현대 도시 배경에 특이현상을 숨기는 원칙인 마스커레이드 설정을 포함한 판타지 장르를 뜻한다.
가면무도회를 뜻하는 마스커레이드라는 용어는 낯설지 몰라도 종종 나오는 설정이다.
마법 학교에서 영웅으로 자라는 소년이 나오는 시리즈에서도 마법의 존재를 알게 된 일반인의 기억을 지우는 설정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퍼리를 좋아하는 여성이 우연히 숨겨진 세상의 존재를 알게 되고 벌어지는 이야기인가.’
설정 자체가 특별한 건 아니라도 재미는 확실히 있다.
한 가지 독특한 점이라면.
“사심이 아주 깊게 들어갔네?”
“아… 조금요?”
여주인공과 퍼리로 나오는 남주인공이 꽁냥거리는 모습이 시나리오에 자주 등장하는 걸 지적하자, 그녀는 민망하다는 듯이 배시시 웃었다.
이안은 시나리오를 내려봤다.
‘쉽지 않네.’
만약 그녀가 이걸 소설로 낸다고 했으면 한번 해보라고 했을 거다.
초판 발행 부수를 줄이는 거로 리스크를 줄이고 생각보다 단단한 퍼리 팬덤까지 동원하면 실패해도 큰 손해는 아닐 테니까.
“근데 이걸 영상화했을 때 성공할 수 있을까. 감이 잘 안 잡히네.”
물론 이안의 기억에서 이런 소재로 성공한 작품이 있긴 했다.
‘먼 미래라서 그렇지.’
보수적인 할리우드에선 쉽게 도전하기 힘드니 말이다.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발걸음이 들려왔다.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
“방금 시나리오를 하나 받았거든요. 그거 때문에 그랬죠.”
“오, 후드 남매의 작품이야?”
유명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Melted Moonlight, Holy Love 이 두 작품으로 영상화까지 성공한 인물이다. 같은 업계 사람으로서 새로운 시나리오라는 말에 관심을 가질만했다.
문제는.
“어이, 벤. 뭘 그렇게 재밌게 보고 있어?”
“주인공이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에 모여 있었구나. 뭘 그렇게 보고 있니.”
“게빈 감독님은요?”
“저기 오고 있구나.”
속속 모이는 얼굴이 보통이 아니란 점이다.
전부 유명한 배우이자, 감독들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I love furry!라고 써놓은 듯한 작품을 보여주게 됐다.
아무리 이안을 통해 알고 지낸 사람이라고 해도 정신이 아찔해졌고.
“전 교정만 해줬어요. 전부 에이미가… 억!”
“오빠!”
혼자 도망치려던 에이든은 생에 처음으로 동생에게 맞았다.
‘저게 평범한 남매긴 하지.’
고개를 주억거린 애써 이쪽을 외면하고 파티장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7 Confessions of Love의 개막을 앞둔 오프닝 나잇이 시끌벅적하게 지나갔다.
***
뮤지컬 팬들은 새로운 뮤지컬이 프리뷰 기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흥미롭게 보는 편이다.
내용을 갈아엎고 주연배우를 교체하거나 사건 사고로 프리뷰 기간이 계속 늘어나는 등 온갖 일이 벌어지니 말이다.
이렇게 프리뷰 기간을 보낸 작품이 받은 평가를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특히 그 작품이 브로드웨이에 화제작이라면 더욱.
“드디어 나왔네. 7 Confessions of Love의 비평.”
사람들은 엠바고가 풀리자 쏟아지는 비평 기사를 주목했다.
-뛰어난 시나리오와 연출 그리고 더욱 훌륭한 배우들.
-작품적인 아쉬움은 몇 가지 있어도 이안의 연기력만큼은 인정받아야 했다.
-공연 기간이 정해진 7 Confessions of Love는 뮤지컬 팬이라면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작품이다. 물론 표를 구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 작품을 본다면 나와 똑같이 OST 앨범 발매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쏟아진 비평은 호평이 가득했다.
어떤 명작도 호평만 받을 순 없는 만큼 작품 전개와 연출에서 지적받은 부분은 있어도 적어도 이안의 연기와 노래에서 아쉬움을 평가한 비평가는 없었다.
거기에 이안 덕분에 발굴된 배우인 스티븐에 대한 호평도 더해졌고.
결과적으로 7 Confessions of Love는 개막 이후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평가만으로 한 번쯤 볼만한 작품인데 이안이 주연인 공연은 기간이 정해진 상태였다.
말 그대로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공연.’이라는 딱지까지 붙었으니 매진이 안 되는 게 이상했다.
-비평가 이놈들아, 눈치 좀 챙기라고! 너희 잘하는 거 있잖아.
└이래놓고 막상 악평하면 욕설을 잔뜩 날릴 거 아니야.
└눈이 옹이구멍이니 당연히 욕을 해야지.
└응, 그러니 호평이야. 만점이나 받아.
└콘서트랑 달리 매주 티켓팅이 있으니 죽을 거 같다. 시험이 끝나지 않는 기분이야.
└현장 티켓팅까지 포함하면 더 죽음이야. 팬질도 체력이더라.
-이안아, 연장 공연은 안 되겠니?
└요즘 이안의 자세면 부탁하면 들어줄걸.
└정말?
└물론! 대신 팬미팅이 사라지겠지.
└???: 너희의 팬미팅은 뮤지컬로 대체되었다.
└…기간도 겹치고 농담처럼 안 느껴지네.
-뮤지컬? 그것보단 팬미팅 아니냐.
└OST 한 곡이라도 들으면 쉽게 그런 평가를 못 할 텐데.
└무대에서 이안이 춤을 춘다니까? 너 그거 봤어? 봤냐고.
└애초에 둘 다 보면 되잖아. 선택 사항이 아닌데?
└그것도 티켓팅에 성공한 뒤 일이지만.
└왜 내 돈은 가져가질 않는 거야! 제발 가져가라고!
돌아가는 분위기만 봐도 남은 본 공연 기간 매진은 확실했고, 브로드웨이 관계자들은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공연은 처음이잖아. 주연급을 주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아?”
“본 공연은 3개월? 그게 평균이긴 한데 위험도에 비하면 너무 짧아.”
“티켓 파워가 확실하지 않잖아. 콘서트 팬하고 공연 팬들은 달라.”
이런 여러 이유로 이안 캐스팅을 보류했거나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게 엄청나게 후회될 정도로 성공했으니까.
물론 후회해도 늦은 상태였다. 7 Confessions of Love 폐막 이후 다음 공연을 노려보기 위해 에이전시에 연락을 해봤으나.
-한동안 브로드웨이 작품에 참여하실 생각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제안을 건네도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이제야 관계자들은 이안의 브로드웨이 도전이 정말 의외였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제작자까지 겸할 수 있는 배우였지.”
원래도 브로드웨이가 할리우드만큼 출연료를 줄 수 없는 구조였는데 제작자로 얻는 수익까지 생각하면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한동안이 다시는으로 바뀐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렇게 여러모로 브로드웨이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이안이었지만, 이런 걸 생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럼 퍼리는 돈이 될까. 한 번 토론해봅시다.”
이런 토론의 중심에 앉아 있었으니까.
***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나리오가 하필 돈과 시간이 많은 백수들에게 노출된 탓에 열린 자리였다.
‘백수라기엔 그 면면이 화려한 게 탈이지만.’
벤, 데미안, 게빈, 아이작, 후드 남매.
그나마 다른 사람들은 놀고 오라며 내보내서 최대한 규모를 줄인 게 이 정도였다.
“이상한 제목 붙이지 마요. 이 시나리오를 영상화할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는 거잖아요.”
“비슷하지 않나?”
장난스럽게 웃는 벤에게 한숨을 내쉰 이안은 아멜리아를 보며 말했다.
“작품 제작에는 두 가지를 확인해야죠. 상업성이 있는가, 혹은 작품성이 있는가.”
명작이라고 불리는 건 둘 다 잡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이안은 시나리오를 펄럭 넘기며 물었다.
“우선 소재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애니메이션으로는 성공한 사례가 있잖아. 디즈너에서 나온 작품 말이야.”
동물이 인간처럼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작품으로 대박을 터트린 게 있긴 했다. 대표적인 퍼리 작품이기도 했고.
“미녀와 야수는?”
“그것도 성공 사례로 볼 수도 있죠.”
짐승 머리를 한 야수가 느끼한 왕자가 됐을 때 아쉽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물론 성공 사례만 있는 건 아니었다.
“얼마 전에 뮤지컬을 실사화 영화로 만들었다가 대차게 망한 것도 있잖아.”
고양이를 의인화한 뮤지컬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으나 영화화한 결과물은 끔찍했다.
‘불쾌한 골짜기의 극치였지. 기괴한 얼굴에 혐오감이 먼저 들었으니까.’
장르를 공포 영화로 분류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기괴한 괴물을 만드는 랜든 감독조차 예고편을 보고 패배 선언을 했을까.
성공작과 실패작을 비교하니 만약 영상화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만약 작품을 만든다면 캐릭터는 최대한 불쾌하지 않게 만들어야겠네요.”
“그렇지. 모델링에 대한 고민은 있어야겠지만 미녀와 야수 사례를 보면 불가능하진 않겠구나.”
쉽진 않으나 단순히 퍼리 팬덤이 아니라 대중성까지 끌어올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굳이 이런 소재를 사용할 가치가 있냐는 거죠.”
작품 제작이란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과정이다.
더 쉽게 상업성을 얻을 수 있는 소재를 두고 도전할 필요가 있는가. 이 질문에 아이작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름대로 이유는 보여줬다고 생각한단다. 예부터 의인화는 인간의 삶을 투영하는 소재였지. 미녀와 야수의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동화도 마찬가지 아니니.”
“첫날밤에나 신랑신부가 서로 얼굴을 보는 당시 프랑스 결혼 풍습을 의미한다는 해석이었죠?”
신부로선 낯선 신랑이 야수로 보이지만, 결혼 생활을 이어가며 서로 마음을 열면 남편을 왕자로 보이게 된다는 해석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인간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차별과 그걸 극복하는 과정을 판타지라는 소재를 통해 풀어내는 듯했더구나. 안 그러니?”
“…네.”
에이든이라는 필터 없이 보게 된 세상은 그녀로선 충격적이었을 거다.
그녀에겐 의미 없던 외모와 인종으로 인한 차별부터 세상에는 불필요한 악의가 가득했고, 그동안 봐온 세상은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그러니 더욱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작품에 숨은 의도도 괜찮고, 그녀의 성장에도 이 작품은 도움이 될 게 뻔했다.
잠시 고민하던 이안은 시나리오를 덮으며 말했다.
“생각해봤는데요. 제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는 거 같네요.”
“응?”
“진짜 고민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거든요.”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에게 이안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
“수잔.”
“응? 무슨 일이야.”
넷플러스에서 콘텐츠를 담당하는 수잔은 고개를 들었다.
“이안 프라이스에서 제안이 들어왔던데. 회의가 필요할 거 같아.”
“오, 그래?”
방긋 웃으며 일어났다.
OTT 업계 1위를 달리며 공격적으로 움직이는 넷플러스인 만큼 할 일이 많았으나 이안의 일이라면 없는 시간도 내놔야 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배우지.’
1개의 다큐, 2개의 드라마를 함께 하면서 좋은 성과를 안겨주기도 했고, Holy Love로 제작자 능력을 선보였으니 검토는 무조건 해야 했다.
회의실에 앉은 수잔에게 직원이 말했다.
“장르는 판타지 로맨스이고 시나리오 작가는 아멜리아 후드라고 적혀 있습니다.”
“후드 남매 작가구나. Melted Moonlight 이후 첫 작품이네. 주인공은 역시 이안이지.”
“네, 남자 주인공으로 직접 연기한다고 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연기 욕심이 엄청나게 많은 배우로 소문이 났으니 말이다. 그녀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원하는 게 있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남성적인 느낌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루도 좋긴 한데 남성미는 조금 떨어지는 캐릭터였으니까.”
수잔의 말에 직원은 살짝 어색한 미소로 답했다.
“이번엔 유약한 느낌이 없습니다. 오히려 야성적인 느낌이 나죠.”
“그래?”
흥미롭게 고개를 든 수잔은 정면에 뜬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짐승 머리를 한 남성 캐릭터가 남자 주인공이라며 떡하니 적혀 있었으니 말이다.
“야성적이죠?”
…너무 야성적인데.
짐승남을 바랐더니 짐승이 있었다.
이게 맞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