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01)
진심(2)
익명성은 강력한 도구다.
내부고발이나 폭로에서 고발자를 지키기는 역할을 하니 말이다. 익명성은 없는 사회는 자정작용을 잃어버린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는 것처럼 인터넷상에서 원래라면 쉽게 하지 못하는 노골적인 속내를 보이는 문제가 있었다.
‘큰 문제지. 쓸 때는 좋았을지 몰라도 정체가 들통나면 그만큼 큰 후폭풍이 찾아오니까.’
이안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빨간 머리통을 봤다.
움직임이 없다. 시체인 듯하다.
부검해볼 것도 없이 사인(死因)은 수치사라고 할 수 있다.
“걱정 마요. 약속한 것처럼 제목만 볼 테니까.”
움찔.
다행히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듯 레아의 몸이 한 차례 꿈틀거렸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I’m 퍼리 팬덤!’을 온 세상에 외치는 것보다 팬 사이트에 쓴 글을 한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게 더 쉬운 일 아니겠는가.
“빠, 빨리 끝내주세요. 제발.”
…음, 아닌가.
간절히 손을 파닥거리며 ‘이 또한 지나가리다.’를 외치는 모습은 힘겨워 보였다. 정말 싫다고 했다면 억지로 볼 생각까진 없었는데, 머리를 긁적인 이안은 빠르게 레아가 쓴 글을 확인했다.
‘음?’
가장 첫 번째 글을 확인하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레아가 자신을 소개할 때 퍼리 팬덤이고 팬 사이트에서도 활동하는 팬이라는 말을 했다. 당연히 아웃사이더 제작을 발표하며 유입된 퍼리라고 생각했는데.
‘선후가 뒤바뀌었네.’
가입된 날짜부터가 몇 년 전이고, 첫 글은 ‘Holy Love를 보고 이안과 오드리의 팬이 됐어요! 둘이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요?!’였다.
“Holy Love를 재밌게 봤나 봐요?”
“…네에.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에요.”
그러고 보니 배우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그녀가 배우가 되는 데 Holy Love가 큰 역할을 차지한 것 같았다. 미래에는 없던 레아라는 배우가 튀어나온 것도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됐고.
‘퍼리 이전에 내 팬이었구나.’
선후 차이가 뭐가 중요하냐고 할 수 있지만, 큰 차이가 있다.
현재 팬 사이트에 들어온 퍼리 팬덤은 아웃사이더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어온 이들이다. 만약 드라마가 크게 실패한다면 팬은커녕 헤이터로 돌아설지도 몰랐다.
그런 이들과 자신의 팬으로 먼저 시작한 그녀는 명백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진즉에 말해주시지. 오드리가 들었으면 좋아했을 텐데요.”
이안을 통해 배우라는 꿈을 이뤄나갔던 것처럼 자신 을 바라보며 배우가 된 레아를 봤다면 오드리는 크게 기뻐했을 거다.
아쉬움을 담아 말하자, 레아는 작게 말했다.
“미안해서요. 제가 아니었으면 이 역할은 원래 데이 씨가 했을 거잖아요.”
“배역에 정해진 주인이 어디 있나요. 있다면 오디션도 열지 않았을 거예요. 나중에 같이 한 번 만나요. 아마 반겨줄 거예요.”
“…정말요?”
“그럼요.”
새빨개진 얼굴로 살짝 고개를 드는 그녀를 향해 살포시 웃어준 이안은 다른 글들을 봤다.
-끼야아악! 팬미팅 500석이라고?! 이아아안, 이게 무슨 소리야!
-팬미팅 티켓 구해요! 제발요! 왜 돈을 준다는데 티켓이 없어!
-하? 본업이 가수라니! 누가 봐도 배우죠! 배운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인데.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배운 사람은 다르다. 왠지 호감도가 올라가는 느낌이다.
바쁜 와중에도 열심히 활동했는지 어차피 내용 볼 엄두도 안 날 정도로 글이 많았다.
빠르게 글을 눈으로 훑다 보니 어느덧 최근 글까지 왔다.
-이안은 신이야! 이런 드라마를 만들어주다니!
-퍼리 캐릭터, 복슬복슬 너무 귀여워.
-내가 여주인공이면 좋겠다. 왜 저런 퍼리가 현실엔 없죠?
이 정도 봤으면 된 거 같다.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빨갛게 변한 게 조금만 더 있으면 고열로 쓰러질 거 같았다.
“제가 글을 못 보게 차단이라도 해드릴까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확실하게 차단까지 해줬고 그제야 손부채질을 하며 얼굴의 열기를 식혔다.
고작 그 정도로 최애의 스타에게 팬심이 낱낱이 까발려진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않는 듯했지만 말이다.
이안은 장난스럽게 그녀를 떠봤다.
“그래서 어떻게 남들에게 퍼리 팬덤이라고 밝힐 수 있겠어요?”
“…이거랑은 달라요. 마음의 준비가 안 됐잖아요.”
과연 그래서 그럴까.
‘생각보다 쓴 글은 꽤 정상적이었어.’
팬 사이트에 올라오는 글을 생각하면 상위 10%에 들 정도다.
만약 대비할 시간을 주고 확인했다면 정말 문제가 될만한 글은 삭제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인터넷 글만 봐도 그녀의 성품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린 성격이야. 바르기도 하고.’
샬럿과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고 해도 그녀처럼 미친 듯이 폭주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거기에 당당하게 취향을 밝힌다고 한 것치곤 팬 사이트 수용소에 갇히는 다른 이들처럼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도 않았다.
‘가짜 광기인가.’
파티광 샬럿, 공작새 데미안, 엑소시스트 게빈, 괴식가 필릭스, 죽은 친구도 무덤을 박차고 일어나게 할 정도로 입이 말썽인 프레드까지.
많은 진짜 광기를 봐온 이안이 평가하기엔 그녀는 가짜 광기였다. 뒤늦은 사춘기를 앓고 있다고 보는 게 맞고.
“…혹시 기분 나쁜 글이라도 있었나요? 있었다면 죄송해요. 볼 수 있다는 걸 생각하고 조심히 썼어야 했는데.”
“아, 그런 거 아니에요. 제 팬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는걸요.”
“으으윽.”
콩!
이상하다. 좋은 말을 해줬는데 왜 머리를 또 박는 걸까.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보며 이안은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 밝히게 둬서는 좋을 게 없을 거 같은데.’
인터넷에 흑역사 사진을 올려놓는 것처럼 나중에 크게 후회할 거 같았다. 만약 가족과 이번 일로 멀어진다면 더욱.
하지만 지금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하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답보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퇴보를 뜻하니까.
이안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자신의 오랜 팬이고, 작품의 흥행을 위해서라도 그녀를 돕는 게 좋았다. 잘만 조절하면 그 외 부수입도 얻을 수 있고.
“드레이퍼 씨가 퍼리 팬덤이라는 건 천천히 밝히죠. 일종의 빌드업을 쌓는다고 할까요?”
“천천히요?”
“네, 일단 홍보인 것처럼 퍼리 행사에 참여하거나 관련 글을 올리는 건 어때요. 그편이 부담도 없잖아요.”
“그런 거 같아요. 전 좋아요.”
레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결심했다고 해도 심적 부담감이 꽤 컸을 텐데 그걸 조금 내려놓은 모습이었다.
‘빌드업이긴 하지. 그녀와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자기 생각과 달리 진짜 퍼리 팬덤이라서 그걸 밝힐 생각이라도 가족과 대화를 하고 난 뒤에 결정해야 했다.
대화도 없이 틀어진 관계는 정말 회복하기 힘들 테니 말이다.
“아, 촬영 들어가기 전에 오드리와 함께 자리를 만들어줄게요.”
“정말요?!”
레아는 눈을 반짝였다. 이것만 봐도 Holy Love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진짜 그녀에겐 그 드라마가 큰 영향을 줬는지도 모르겠네.’
Holy Love는 로맨스기도 하지만, 퀸카로 군림하던 여주인공이 몰락 후 모든 인간관계를 개선해나가는 성장 드라마기도 했다.
만약 이 드라마로 그녀가 바뀌었다면 자기 파괴적 행동을 하려는 이유가 여주인공 같은 성공을 기대하는 걸지도 몰랐다.
솔직히 이건 아니길 바란다.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고, 꼭 바닥으로 추락해야 성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안은 밝게 말했다.
“네, 라일라 역할에 대한 분석은 누구보다 깊게 했으니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정말 괜찮을까요? 분명 힘들게 분석한 내용일 텐데.”
“괜찮아요. 제가 아는 그녀라면 분명 도와줄 거예요.”
확고한 믿음이 담긴 말에 그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기대와 설렘을 담은 표정이었다.
***
어느덧 시간은 3월로 접어들었다.
봄이 왔으나 이안에겐 일정이 뒤엉킨 골치 아픈 시기였다. 아웃사이더 촬영과 그래미 어워드 공연이 함께 있는 달이니 말이다.
-촬영 준비는 크게 신경 안 써도 된단다. 한동안 일정이 바쁘잖니.
“죄송해요.”
-뭘 이 정도로. 네가 워낙 해놓은 일이 많아서 최종 점검하는 수준이야. 이것도 못 한다고 하면 아이작을 따라 은퇴를 해야지.
게빈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촬영일이 하루 늦어질 때마다 큰 손해가 되니 모든 일정은 톱니바퀴처럼 깔끔하게 돌아가야 했다. 이걸 위한 최종 점검은 당연히 소홀할 수 없는 일이고.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나마 공동 프로듀서라서 한 명이 잠시 손을 놓고 있어도 별문제가 없다는 건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게빈이 없었다면 그래미 운영진에 밉보이는 일이 있더라도 공연을 맡지 않았을 거다.
촬영 전 직접 몸을 움직여 확인하는 과정은 경력이 긴 게빈답게 깔끔하게 소화해냈고, 속도도 굉장히 빨랐고.
최종 의사결정권자인 프로듀서가 각각 감독과 배우를 겸직하며 무슨 일이든 현장에서 빠르게 결정해줄 수 있다는 장점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아무튼, 시간 여유가 생긴 덕분에 다른 일에 조금 더 신경을 쓸 수 있었다.
일단 악당 역할을 위해 몸을 만드는 것도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됐다.
“완벽하네요!”
트레이너는 이안의 몸을 보며 감탄했다.
처음 운동을 할 때도 몸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지금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다. 몸에 힘을 줬을 때 쫙 갈라지는 잔근육들은 평소 이안에게 부족했던 거친 남성미를 더해줬으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프라이스 씨만 하겠습니까. 그리고 하는 대로 근육이 잘 붙어서 오히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마음 같아선 보디빌더로 납치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농담 반, 진담 반에 이안은 그냥 웃어넘기며 거울 속 모습을 봤다.
1인 2역으로 맡은 사냥꾼 태너는 수인과 견줘도 위압감을 줄 수 있어야 했고, 이 정도 몸에 분장까지 생각한 대로 그림이 나올 거 같았다.
“몸을 유지하시려면 중간중간 운동은 소홀히 하시면 안 됩니다. 만약 혼자 힘들다고 생각하시면 얼마든지 연락하시고요.”
식단과 부위별 운동 스케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은 끝에 이안은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몸만들기를 끝으로 촬영 준비도 끝이 났고 코앞으로 다가온 그래미 어워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에이전트인 닉의 연락도 이 때문이었다.
-엘리엇 씨가 분위기를 살폈는데 후보로 오른 둘 중 하나는 받을 가능성이 꽤 있다더라.
“그래요?”
-응, 투표할 때 네가 이번에 상을 안 받으면 또 앨범을 잔뜩 낼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던데.
가요계에서 2020년 이안은 협상이 안 되는 테러범과 마찬가지였다.
무더기로 앨범을 뿌리지 않나, 갑자기 엄청난 이슈를 끌며 빌보드 1위를 차지했으니 말이다.
언론에서 하도 EGOT에 대해 떠들었으니 ‘제발 상 하나 줄 테니 돌아오지 마.’라는 생각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뭐, 반쯤은 농담이겠지만. 편곡 버전에 다양한 가수들과 공동 작업을 한 것도 좋게 본다고 하더라. 제대로 가수로 활동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얼마든지 다른 가수들과도 협업할 수 있다는 의미니까.
“그런 의미로 한 건 아니었어요.”
-네 의도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렇게 받아들였다는 게 중요하지.
나쁠 건 없지 않냐는 말에 이안은 선선히 동의했다.
-아무튼, 3월 1일부터 토니상 투표도 진행 중이잖아. 어쩌면 그래미를 수상하면 토니상 수상에도 유리할 수 있어. 언론에서 EGT 달성에 더 큰 관심을 보일 테니까.
“뭐, 제가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나요.”
-그렇긴 하지. 그것보다 무대 준비는 어떻게 됐어?
“문제없어요. 그래미 운영진도 보고 만족하면서 돌아갔거든요.”
다른 가수에 비해 무대 경험이 적은 이안이라서 걱정됐는지 도와줄 게 있냐면서 찾아왔었다. 물론 감탄만 하고 돌아갔지만.
변변찮은 무대장치도 없는 연습실에서도 꽤 볼만했다는 뜻이다.
-역시 잘할 거라고 믿었지. 기대하고 있을 게.
닉과 통화를 끝낸 이안은 손을 뻗었다.
푸드득-
익숙하다는 듯이 비둘기가 내려앉았고, 쉬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연습하죠.”
“으아아악… 안 힘들어요?!”
“안무가님보다 더 독하다니까. 인간의 마음이 없는 게 확실해.”
…어허, 모함하다니.
“추가 근무를 하실래요? 추가근무비 여유는 얼마든지 있는데 말이죠.”
“빨리하죠!”
“남은 연습 시간이 별로 없네요. 어서 안 일어나고 뭐 해?!”
태도가 싹 변한 안무팀을 보며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다.
***
이안은 레아에게 걸린 전화를 받았다.
-이안 씨.
작게 속삭이며 부르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늘 오드리랑 만나기로 한 날 아니에요? 무슨 일 있어요?”
-지금 만났거든요. 말씀해주신 것처럼 도와준다고 했는데 뭔가 이상해요. 분석한 내용을 설명해주겠다면서 다른 대본들을 가져오고 있어요. 그리고 동물행동학 서적도 갑자기 가져오고요. 이걸 분석해야 한데요.
-드레이퍼 씨. 도와달라면서요. 해야 할 게 많아요. 빨리 와요.
-히끅.
첫 번째 제자가 이제 밑에 대학원생을 둘 때가 되긴 했지.
뿌듯한 마음으로 말했다.
“힘내세요! 나중에 저도 도와…”
뚝!
갑자기 통화가 끊겼다. 아무래도 과제 중에 통화하는 게 걸렸나 보다.
“좋을 때지.”
암, 그렇고말고.
고개를 주억거린 이안은 시상식에 갈 때 입을 옷을 확인하며 날짜를 봤다.
그래미 어워드가 다가왔다.
그래미 어워드
대학원생이란 무엇인가.
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든,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서든 혹은 교수라는 간악한 혓바닥에 속아 랩실의 노예로 전직을 했든 어찌 됐든 배움의 길을 선택한 자다.
이안의 교육은 이런 배움에 초점을 뒀다.
가르침에는 아낌이 없고, 연기에 도움이 된다면 대본을 벗어나 다른 지식까지 접목해서 알려준다.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도움을 받은 증명된 방식.
다만, 좋은 약은 쓴 것처럼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건 내기 한 번으로 대학원생으로 암흑 진화를 하게 된 벨모 씨는 후임을 위해 남긴 따뜻한 조언에 남아 있었다.
‘이안 밑에서 대학원생을 하더라도 석박사가 될 순 없다.’, 이건 졸업이라는 탈출구가 없다는 뜻이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걸 직접 체험하는 끔찍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능력을 증명할수록 과제가 늘어난다.’, ‘들어올 때와 달리 나갈 때는 자유가 아니다.’ 등등. 주옥같은 조언 말미에는.
“여자 이안이라고 할 수 있는 오드리에게도 위와 같은 조언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라는 말이 담겨 있었다.
이용약관처럼 무심하게 넘길 수 있는 말이 사실이라는 걸 경험한 사람이 생겼으니 그게 레아였다.
촬영 전 연기를 최종 조율하고, 서로의 실력을 점검하는 대본 리딩을 그녀가 피로에 찌든 얼굴로 참여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어디 몸 상태가 안 좋나.’
‘저래가지고 연기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배우들은 레아를 살짝 의심하는 눈으로 봤다.
물론 모인 이들 중 가장 어리고 많은 역할을 맡은 건 이안이지만, 연기력을 검증받을 시기는 한참 지났을뿐더러 프로듀서라는 막강한 권력까지 쥐고 있었다.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의료비도 비싼 미국에서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간덩이가 부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레아는 달랐다. 가장 중요한 여주인공 역할인데 경력은 짧았다. 다른 좋은 배우를 두고 왜 그녀를 뽑았는지 의문이었으나.
“우리가 남들의 이해를 받아야 해? 애초에 이해하려고 고민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잖아.”
마치 실제로 상대가 있는 것처럼 애틋하고 간절한 연기는 그녀가 충분히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줬고.
거기에 한 가지 더 신기한 점은.
‘둘이 호흡이 잘 맞네.’
‘따로 연습이라도 했었나?’
이안이 주도권을 잡고 잘 리드하는 것은 사실이나, 잘 차려진 밥상을 엎지 않는 것도 능력이다. 호흡이 안 맞으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니까.
두 주연이 시작 전부터 잘 맞는다는 건 희소식이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잔뜩 들은 레아였으나, 대본 리딩을 끝낸 그녀는 긴장된 얼굴로 이안을 봤다.
팬심도, 프로듀서를 앞에 뒀기 때문도 아니었다.
“오드리에게 잘 배웠네요.”
“…그렇죠?!”
스승의 스승. 이안의 평가에 따라 촬영 전까지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살았다.’
촬영 전까지 시간이 없다며 속성으로 머릿속에 지식을 넣어주던 오드리의 과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본격적으로 촬영 전에 셋이 한 번 만나요.”
“…네?”
“저번에 통화할 때 저도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도와준다는 뜻인 줄은 몰랐지.
학생 한 명에 교수가 둘.
아무리 생각해도 그릇된 1+1 행사에 레아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팬으로서 이안이 어떤 사람인 줄 알면서도 전화를 건 자신이 끔찍하게 미워졌으나.
“아, 그래미 공연 촬영 때문에 먼저 가볼게요. 나중에 봬요.”
산뜻하게 미소를 짓고 사라지는 그를 보며 애써 좋게 생각했다.
“와, 개인 팬미팅이야.”
결국엔 참여 못 한 팬미팅보다 더한 기회였다.
‘물론 선물로 굿즈 대신 과제를 무더기로 받겠지만.’
…이것만 없었어도 더 행복했을 텐데.
두 이안에게 찍힌 레아는 한숨을 쉬었다.
***
회귀 전 이안은 긴 연예계 생활을 해왔으나, 가수들에게 꿈의 시상식인 그래미를 신경 써본 적은 없었다.
남의 집 잔치였으니 말이다.
-제63회 그래미 어워드, 오후 5시부터 방송 예정.
회귀할 때만 해도 이곳에 참여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방송으로 본 적도 몇 번 없는 그야말로 낯선 시상식이었으나, 그동안 참여한 시상식과 과정은 비슷했다.
‘허니, 지난 시상식에 입고 간 옷을 또 입겠다고? 우리 진지한 대화를 나눠볼까?’라며 진지한 협박을 하는 샬럿과 언더힐에 붙잡혀 새로 옷을 만들어야 했다.
다른 점은 팬데믹 시기를 상징하는 것처럼 옷에 어울리는 마스크까지 만들었다는 것 정도?
이안이 부드러운 재질의 마스크를 쓸어내릴 때 어깨를 톡톡 두들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본인 머리카락과 같은 금빛 자수가 새겨진 마스크를 낀 레이첼이 가볍게 한 바퀴를 돌며 물었다.
“나 어때?”
“예뻐.”
“그래? 다행이다.”
Say Goodbye 편곡자로서 그래미에 참여한 레이첼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는 곱게 눈을 휘었다.
말아 올린 금발을 톡톡 두들기며 부끄러움과 기쁨을 애써 숨기던 그녀는 이안을 올려봤다.
“너도 멋있어.”
“나도 알아.”
“음… 방금 그거 별로야. 아빠하고 비슷했어.”
이안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 얼굴 잘났다고 날뛰던 아일라 만남 전 시즌 벤이나, 팔불출로 진화한 후 시즌의 벤도 별로 닮고 싶진 않았다.
마스크 너머로도 느껴지는 감정에 레이첼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벤이 있으면 ‘내가 뭘!’이라고 외칠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공연 촬영은 어땠어?”
그래미 어워드가 생방송으로 진행된다고 해서 모든 게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시상식 중간중간 나오는 공연이 그랬다.
‘시상식 무대에서 실시간으로 공연하는 것과 사전에 찍은 영상을 재생하는 데는 퀄리티 차이가 확실히 있지.’
공간적 제약이 사라지며 더 화려한 무대를 꾸밀 수 있고, 공연 중 실수도 걱정할 필요 없다.
다만 현장감은 떨어질 수 있는데 팬데믹 기간인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고민을 거듭하던 운영진은 모든 공연을 사전 촬영으로 결정했다.
“잘 촬영하긴 했어. 가벼운 사고가 있긴 했지만.”
“사고?”
“아, 별건 아니고 마지막에 옷이 뜯어졌거든. 그래서 옷을 수선하고 재촬영을 했지.”
7 Confessions of Love 스태프가 들었다면 ‘또?’라며 웃음을 터트렸을 거다. 뮤지컬 중에 옷을 빠르게 갈아입다가 여러 번 옷을 뜯어버린 전적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번에는 조금 억울해.’
드루이드라는 컨셉의 맞게 얇은 옷을 입었을뿐더러 촬영을 위해 근육을 늘리면서 미리 제작한 의상이 조금 안 맞은 문제도 있었다.
여러모로 부욱 옷이 찢어질만한 상황이었다는 뜻이다.
“아쉽다. 직접 봤으면 재밌었을 텐데.”
“아쉽기는.”
이마를 톡 친 이안은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시상식장으로 이동했다.
그래미에서 수여되는 상의 수가 많지만, 방송에서 발표하는 부문은 고작 10개밖에 안 됐다.
방송에 나오지 않는 나머지 74개의 상은 생방송 몇 시간 전에 사전 행사(Premiere Ceremony)에서 시상이 이뤄졌고.
‘시상식에 참여하는 대다수 아티스트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시간은 오히려 지금이겠지.’
자신들이 후보에 오른 대다수 부문 수상이 바로 이곳에서 이뤄지니 말이다.
팝, 록, R&B, 랩, 재즈, 컨트리 음악, 가스펠, 라틴, 클래식 등 수많은 음악 장르에서 한 해 동안 활약한 가수들이 수상 호명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후보로 오르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장소에서 수상의 영예를 누린 사람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수상 소감을 말했고, 축하하는 사람들 속에서 아쉬움을 애써 삼키는 한숨 소리가 파묻혔다.
관객으로서 시상식을 지켜보던 이안에게 사회자의 말이 들렸다.
-다음은 팝 듀오, 그룹 퍼포먼스 부문에 대한 시상이 있겠습니다.
…올 게 왔다.
이안은 고개를 돌렸고 옆에 앉은 레이첼과 눈이 마주쳤다.
푸른 눈동자가 머금은 걱정과 기대가 그녀 본인을 위한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을 때,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
-수상자는 Say Goodbye 편곡 버전 이안 프라이스 외 9인. 축하드립니다.
수상 발표와 함께 레이첼의 미소가 환하게 피어올랐고, 근처에 있는 테이블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편곡 버전에 참여한 가수들의 환호성이었다.
다른 가수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 이안은 마이크 앞에 섰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온 그래미 어워드였다. 기대는 실망을 낳으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조금 기대를 했나.’
가볍게 웃은 이안은 정면을 봤다. 부러움, 인정, 질시 등 온갖 감정을 담은 시선이 느껴졌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겐 그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고,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상이란 뜻이다. 이들을 위해 이안은 진지하게 수상 소감을 밝혔다.
“뜻밖의 상을 받게 됐습니다. 이곳에 모인 다른 분들의 도움 덕분이겠죠. 다들 감사합니다.”
여기까진 흔한 수상 소감이었으나.
“이 상은 지금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배우로서만이 아니라 가수로서도 더욱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빌보드 1위를 4번이나 한 사람이 더욱 좋은 모습으로 찾아오겠다고 당당히 밝혔다.
‘제발 적당히 해라. 응?!’
‘굳이 그럴 거 있니? 지금처럼만 해도 죽겠는데.’
재앙과도 같은 수상 소감이었다.
***
사전 행사가 끝이 나고 이안은 다른 가수들의 축하를 잔뜩 받았다.
그래미에서 그가 수상할 수 있을지는 다른 가수들도 관심 사항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유롭게 친분을 다지고 있을 시간은 애석하게도 없었다.
“생방송 시상식이 곧 시작됩니다! 빨리 움직여주세요!”
수많은 사람이 보는 생방송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말이다.
생방송 전에 뭉그적거리는 가수들을 시상식장으로 넣기 위해 스태프들은 목청을 높였고 이안도 안으로 들어갔다.
“꽤 앞이네.”
이안은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쓱 둘러봤다. 시상식에서 자리 배정은 허투루 하지 않는데, 가만히 있어도 카메라에 꽤 많이 잡힐 자리였다.
살피는 그의 옆으로 누군가 쓱 앉았다. 재스퍼였다.
“의외라고 할 것도 없지. 오늘 공연 무대도 있고 아직 시상하지 않은 팝 퍼포먼스 솔로 부문에도 후보에 올랐잖아. 거기에 네가 수상한 것도 기사로 나고 있을 테고.”
카메라에 여러 번 잡을 만하다는 뜻이다.
수상도 했고, 공연도 이미 사전에 촬영을 끝냈다. 남은 건 부담 없이 즐기면 될 뿐인 이안은 재스퍼가 잡담을 보내며 잠시 시간을 보냈고.
“자, 생방송 시작하겠습니다!”
스태프의 외침과 함께 자세를 바로 했다.
정면 화면에선 사회자의 오프닝이 재생됐고 이안은 박수로 시상식의 열기를 더했다. 그리고 기다리던 무대가 재생됐다.
수상자가 내려가자 익숙한 반주가 울려 퍼졌다.
이미 수상한 Say Goodbye 버전의 경쾌한 반주였고 검게 물든 화면이 바뀌며 녹색 빛으로 물든 무대와 댄서와 함께 선 이안이 보였다.
“와…”
넝마와 같은 로브를 입은 이안은 누추하게 보이기는커녕 몽환적으로 보였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무대에 녹아든 모습은 가수보단 배우로서의 모습이었고.
길게 뻗은 손 위로 비둘기 한 마리가 내려앉는 모습이 더욱 그러했다.
분위기만으로 시선을 사로잡은 이안의 입에서 Say Goodbye의 가사가 흘러나왔다.
몽환적인 분위기와 무대로 표현된 숲은 이별을 노래하는 가사와 어우러져 망자가 평화롭게 쉬는 수목장처럼 느껴졌고.
댄서와 함께 추는 화려한 춤은 하나의 의식처럼 보였다.
거칠어진 춤사위에 퉁겨지듯 날아간 하얀 비둘기는 순식간에 푸른색으로 물들어 돌아왔다.
비둘기 마술을 응용한 동작이었고 이안의 몸을 살짝 비틀자 찰나의 순간에 비둘기가 두 마리로 늘어났다.
‘하… 아주 이를 갈고 준비했구나.’
이래놓고 가수가 아니라고?
재스퍼는 헛웃음을 지었다.
안무, 무대, 노래.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다. 입이 찢어질 듯 웃는 그래미 운영자의 모습만 봐도 얼마나 훌륭한 공연인지 알 수 있다.
공연이 이어질수록 늘어난 비둘기는 어느새 이안과 댄서의 춤사위에 어우러지며 날개를 퍼덕였다.
드루이드라는 컨셉이 맞는 무대였고, 가수들조차 넋을 놓고 보는 공연은 어느덧 막바지에 치달았다.
피날레의 순간 이안과 댄서들은 로브들 벗어던졌고 이안의 펄럭인 로브는 여덟마리의 비둘기를 휘감고 땅에 내려앉았다.
이제 거의 끝이다.
공들인 공연을 지켜보던 이안은 눈을 깜빡였다.
뭔가 자신이 마지막에 본 영상과 달랐다. 편집이 들어간 것과는 다른 위화감. 왜 갑자기 이게 느껴졌나 싶었는데.
마지막으로 바닥에 내려놓은 로브를 이안은 힘차게 펄럭였다. 로브에 감춰진 비둘기들은 마술처럼 사라졌고 멋들어지게 로브를 입을 때.
부우욱-
“아…”
속에 입은 얇은 옷이 찢어졌다.
자신이 본 재촬영 본이 아니라 옷을 찢어버린 장면을 그대로 썼다는 걸 깨달았을 때 화면에는 드라마 촬영을 위해 힘들게 만든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잘 만든 조각처럼 꽉 짜인 근육과 함께 공연 영상이 막을 내렸고.
환호성을 쏟아내는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했다.
드루이드(물리)인가.
어쩐지 동물들이 잘 따르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
엄청난 이안의 공연에 대해 주고받던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팝 솔로 퍼포먼스 부문입니다. 축하합니다. 수상자는 Say Goodbye의 이안 프라이스 씨입니다.
Say Goodbye가 2관왕에 올랐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