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05)
악역(2)
하인리히의 법칙.
대형 사고 전에 수십 번의 가벼운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가 나타난다는 통계학적 법칙이다.
‘우리 식대로 표현하면 개연성이라고 할 수 있지.’
팔랑팔랑 대본이 넘어갔다.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그런 사건이 벌어지는 계기들이 보였다. 완성도 높은 작품이란 이런 개연성을 놓치지 않는 법이다.
‘그에 비하면 인생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지.’
그래도 이번 사건은 나름대로 개연성이 있었다.
환상으로 알아낸 정보를 요약하자면.
“아웃사이더 제작을 응원하는 소규모 퍼리 팬덤 모임에 몰래 참여한 레아가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거지.”
이러한데.
팬 사이트 수용소에 털 날리고 있는 인간들만 해도 아웃사이더가 얼마나 큰 기대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으니, 응원 모임이 열릴 만했다.
‘레아가 거기에 간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렇지 않아도 그녀에게 자신이 퍼리 팬덤이라는 걸 밝히기 전에 홍보 활동을 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나.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몰라도 이거다 싶었겠지.
근데 왜 자신에겐 비밀로 했냐고?
‘당연하지. 아직 팬데믹 시기이고, 촬영 중인데 저런 모임을 나간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반응했겠어.’
바로 오드리에게 전화를 걸어 ‘허허허, 오드리. 요즘 네 제자가 촬영 기간에 딴 일을 할 정도로 훌륭하게 컸더구나. 네 스승보다 낫다.’라고 말했을 거다.
그때부턴 휴식일인 주말이 사라지는 대신 더욱 훌륭한 배우로 거듭날 수 있겠지.
대학 시절 대학원까지 권유받았다는 레아가 이걸 눈치 못 챘을 리가 없다.
“바보 같기는 나중에 괜찮은 자리를 마련해준다니까.”
그녀에게 듣기론 한 번도 그런 모임에 나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런 오프라인 모임에 나가는 건 그만한 용기가 있어야 하는 일이니까.
자신과 대화하며 용기를 얻었다는 뜻인데, 힘들게 용기 낸 결과가 그러했다니 참 씁쓸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쓰레기 같은 가해자들이 문제인 거지, 레아의 잘못은 아니지.’
이안이 대본을 말아 테이블을 통통 두들기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을 때, 어슬렁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이, 꼬맹이. 종이뭉치로 때린다고 사람이 아프겠냐. 응?”
“아, 왔어요? 이것도 잘 때리면 아파요.”
“퍽이나.”
브레이커.
처음 인연을 맺고 거의 10년 가까이 경호를 맡아주고 있는 스컬 택틱스의 사장이었다. 웃을 때마다 길쭉하게 그어진 흉터가 꿈틀거리는 꼴이 사뭇 위협적이었다.
‘외모만 보면 갱이 따로 없지.’
뒤따라온 다른 경호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작은 가게를 통으로 대여했으니 망정이지 영업 방해로 신고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직접 만나는 건 오랜만이네.”
“바빠서 어쩔 수 없었어요.”
“뭐, 그건 알고 있긴 했지.”
외모만 보면 머리를 굴리는 것보단 폭력으로 해결할 것처럼 보이지만, 무식하게 행동해선 경호 업체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다.
불곰 같은 외형에 여우 같은 머리가 들어 있는 브레이커는 여러 정보에도 빠삭했다.
‘이 녀석 정보는 그냥 TV를 틀어도 지겹게 나왔지만.’
건방졌던 꼬맹이가 이렇게까지 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것도 인생의 재미였다.
“그래서 정확히 무슨 일인데?”
“경호원을 부르는 일은 뻔하죠. 경호 업무에요.”
이안은 옆에 있는 종이를 쓱 밀었다.
나름대로 조사한 정보였다.
‘생각보다 정보를 찾는 건 쉬웠지.’
아웃사이더 응원 퍼리 모임이며, 레아가 정보를 입수했다는 걸 생각하면 어디서 모임 정보가 어디서 나왔는지 예측하는 건 쉬웠다.
바로 팬 사이트 수용소다.
“퍼리 팬덤 모임. 규모는 대략 서른 명 남짓이냐?”
“소규모 모임이니까요. 저희 작품 주연이 프로듀서인 저도 모르게 거길 참여한다고 하더군요. 놀랍게도 경호원 한 명도 대동하지 않고요.”
“그렇군.”
고작 이런 모임에 경호원을 데려갈 필요가 있냐? 브레이커는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당장 얼마 전에도 아시아인 혐오 범죄에 대한 뉴스가 나왔었다.
‘인간의 악의 앞에선 상식은 무의미하게 변하곤 하지.’
잡힐 걱정도 안 하는지 그냥 길을 가는 사람을 아시아인이라고 무차별 폭행을 한다. 분명 일반적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많다.
‘다만, 이상하긴 해.’
경호원으로 살다 보면 ‘에이,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라며 행동하다가 문제가 되는 일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보통 그런 사람은 이안처럼 곱게 자라온 사람들이고.
하지만 이안의 냉소적인 시선은 마치 그런 일을 자주 경험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의 삶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태도지만.
‘상관없나.’
경호원으로서 이런 의뢰주가 훨씬 편했다. 다른 경호원들도 이안을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고.
“그래서 어쩌려고? 가서 그냥 지켜주면 되나.”
“그냥 그렇게 하면 재미없잖아요. 남들 모르게 모임에 참여하는 레아를 몰래 촬영해볼까 해요.”
이안은 ‘짜잔!’이라며 장난스럽게 가게에 설치된 카메라를 가리켰다.
몰래 홍보 나온 레아를 몰래카메라로 찍겠다. ‘방송하는 놈들이 원래 이렇긴 하지.’라며 혀를 끌끌 차며 브레이커가 남 일처럼 생각할 때.
불길한 느낌에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전화로 이상한 말을 하지 않았냐?”
“하하하, 몰래카메라인데 경호원인 걸 들키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준비해왔습니다.”
통!
테이블 위로 이안은 준비한 물건을 올렸다.
동물 인형탈이었다. 브레이커는 니코틴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아니지?”
“스컬 택틱스 장비 관리자의 도움으로 머리 사이즈까지 확인했으니까 쓰는 데 불편하진 않을… 아앗! 던지지 마요! 그거 하나에 2천 달러가 넘는다고요!”
폴짝 뛰어 집어던진 토끼탈을 휙하고 낚아채는 이안을 보며 브레이커는 마른세수했다.
저런 운동신경으로 그냥 운동이나 하면 좋았을 것을.
‘미치겠군.’
인형 머리 하나에 수백만 원이 넘는 세상이 미친 건지, 그런 걸 자신에게 씌우려는 이안이 미친 건지 모르겠다.
아니면 둘 다 거나.
괜히 오랜만에 이안도 만날 겸 자신이 직접 의뢰를 하겠다고 말했다.
“자, 갑시다!”
애석하게도 언제나 후회는 늦었다.
불량토끼가 된 브레이커는 이를 바득 갈았다.
***
이안은 모임 장소를 훑어봤다.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작은 도넛 가게였다.
‘모임 주최자가 저기 가게 사장이라고 했나.’
이미 퍼슈트라고 부르는 인형탈을 뒤집어쓴 사람들이 꽤 모여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흥미롭게 바라보곤 했다.
이안과 현장을 촬영하는 카메라맨들의 위치를 조정했다.
단순히 사건을 막기 위해서라면 이렇게까지 할 것도 없었다. 그냥 레아가 이곳에 가지 못하게 막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건 하책이야.’
레아를 대신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볼 수 있다. 어찌 됐든 이곳에 모인 사람은 아웃사이더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모인 사람들이니 그런 꼴을 보긴 싫었다.
또한, 경호원 없이 움직이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레아가 느끼도록 할 필요도 있었다. 지금 하는 촬영은 범죄의 증거 영상이자, 얼마나 위험했는지 곱씹게 만드는 교육 영상이기도 했다.
“레아는요?”
“저기 있습니다.”
레아 매니저의 협조를 받아 그녀를 뒤쫓아 온 촬영해온 스태프는 만화 캐릭터 같은 고양이 탈을 쓴 사람을 가리켰다.
다른 참가자들과 떨어져 가게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런 모임이 어색한 것도 있고, 감염 문제도 있으니 조심하고 있는 거려나.’
1차 백신을 맞긴 했으나 감염될 위험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래도 홍보 증거를 남기겠다고 혼자서 열심히 가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저러니 타겟이 되지.’
뭉쳐 있는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홀로 떨어져 있다. 무리에서 떨어진 초식동물이 사냥당하는 것처럼 범죄자들의 목표가 되기 쉬운 상태였다.
이안은 카메라를 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자, 그럼 쓸쓸하게 있는 우리 주인공이 절 알아볼 수 있을지 한 번 확인해볼까요?”
멋들어진 정장을 입은 이안은 늑대 인형탈과 특별히 제작된 마스크까지 착용했다.
‘수상할 정도로 마스크를 좋아하는 스타.’라는 별명답게 인형탈에 마스크까지 착용한 건 꽤 웃기게 보였다.
꼬리와 발바닥 손바닥까지 착용한 이안은 가게를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런 이안은 따가운 시선이 꽂히는 걸 느꼈다.
주변인의 시선이 아니었다.
“오, 잘 어울려요.”
“…닥쳐.”
의뢰주놈 때문에 인형탈을 뒤집어쓴 경호원들이었다.
다섯 명의 불량토끼들을 장난스럽게 손을 흔든 이안은 레아를 향해 슬그머니 다가가며 목을 가다듬었다.
“안 들어가고 뭐 하세요?”
“네?”
평소 목소리도, 라이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성우 때의 경험을 살려 살짝 변조를 가미한 목소리는 오랜 팬인 레아도 쉽게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아… 조금 있다가 들어가려고요.”
“음? 그런가요.”
고개를 주억거린 이안은 짓궂게 물었다.
“그나저나 목소리가 참 좋으시네요. 주인공인 레아 드레이퍼랑 목소리가 비슷해요. 제가 그분 팬이거든요.”
“그, 그런가요. 아하하하, 처음 듣는 말이네요?!”
당황했다지만, 어색한 연기를 선보이다니.
‘감점 1점.’
무자비한 이안의 생각을 모르는 레아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쪽은 안 들어가시나요?”
“사람이 너무 북적거리는 느낌이라 조금 있다가 들어가려고요. 그것보다 마스크 하나 드릴까요?”
주머니에서 인형탈에 쓸 수 있는 큼지막한 마스크를 꺼내며 묻자, 레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 괜찮아요.”
마스크를 거부하다니 감점을 부여하려던 이안은 경계 어린 시선을 보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호흡기를 막는 물건인데 처음 만난 낯선 사람이 주는 걸 덥석 받아 쓰지 않는 게 맞긴 했다.
마스크 말고도 대화하며 의심할 힌트들을 몇 개 던져봤지만, 레아는 눈앞의 상대를 눈치채지 못했다.
설마 여기에 이안이 왔을 거란 생각을 전혀 못하는 듯했다.
‘그것보다 아직 범인으로 보이는 녀석들은 안 다가오네.’
둘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 하며 브레이커와 잠시 경호 인력 배치와 관련된 말을 전하기 위해 몇 걸음 걸었을 때 달려오는 발걸음이 들렸다.
고개를 휙 돌리니 주먹을 치켜들고 달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왔냐.”
이안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큰맘 먹고 오프라인 모임에 처음 나온 레아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기껏 만들어놓고 입에 모셔놨던 인형탈을 밖에서 입는다는 건 큰 일탈 행위를 하는 것 같은 두근거림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이 마음도 잠시였다.
‘들어가도 될까.’
안에 들어가 무슨 대화를 나누면 좋지? 혹시 자신이 누군지 눈치채는 건 아닐까. 홍보 삼아 나왔다고 변명하면 될지도. 1차 백신을 맞았으니 코로나 감염은 안 되겠지?
온갖 말이 머리를 둥둥 떠다니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들떴던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증거 사진을 남기면서도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고민하던 그녀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마스크를 쓴 늑대탈.
‘딱 보니까 이안 팬이구나.’
인형탈에 마스크까지 착용하다니. 이건 진성 이안 팬이 확실했다. 긴 팬 사이트 경력으로 내린 완벽한 판단이었다.
대화할수록 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대본을 보는 건 재밌죠. 보다 보면 알게 되는 재미가 있죠.”
“아, Say Goodbye에 나온 사슴들은 요즘도 그 저택에 출몰하곤 한다더라고요.”
일반 팬들도 잘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잠시 아는 사람한테 말 좀 하고 올게요.”
다른 지인도 있구나.
돌아오면 같이 들어가면 되겠다. 한 걸음 발을 디딜 수 있다는 생각에 미소를 짓던 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먹을 치켜들고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악의.
희열과 짜증이 뒤엉킨 상대의 표정에선 이유를 알 수 없는 혐오가 느껴졌다.
“뭔 병신 같은 걸 뒤집어쓰고 다녀?!”
퍼리 팬덤을 혐오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안다. 관련 행사에서 염소가스 테러가 발생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런 혐오 범죄의 피해자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팬덤이 기대하는 아웃사이더를 싫어하는 안티 퍼리 사람인가? 내가 누군인지 알고 하는 행동인가?
온갖 의문을 제대로 떠올리는 것보다 눈앞까지 주먹이 다가오는 게 빨랐다.
비명도 지를 수 없을 정도로 몸이 굳었고 그저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때.
삐꾸욱-!
괴상한 소리가 울리자 눈을 떴다.
방금까지 대화를 한 사람이 개의 젤리까지 들어간 장갑으로 주먹을 막은 게 보였다. 듬직하게 선 상대는 싸늘하게 말했다.
“작품에 넣지도 못할 삼류 악당이네.”
막힌 주먹에 당혹감을 느낀 남성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이 개자식이?”
“위험해요!”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뒤따라 왔다. 눈앞에 상대처럼 불순한 의도로 모인 이들.
그런 사람들을 앞두고 늑대탈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마스크는 방역용품이지 범죄자들 안면 가리개가 아니야. 이 새끼들아. 너희들 때문에 방역이 제대로 안 이뤄지는 거라고.”
…응?
묘하게 익숙한 말투에 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늑대탈은 손뼉을 쳤다.
“브레이커.”
삑삑!
육구가 부딪치며 묘한 소리가 울렸고 묵직한 발걸음들이 울렸다.
“이 병신들은 또 뭐야.”
“잡아 족치면 될까요?”
“카메라 앞이다. 그냥 제압만 해 제압만.”
귀가 쫑긋 솟은 토끼탈을 쓴 괴인들은 두툼하게 부푼 근육을 풀며 흉흉하게 풀며 다가왔다.
‘제발 법대로 하면 안 될까요?’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이들은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했다.
“우리 대화로 할까?”
“끄어어억!”
콰드득-
근육이 불끈하며 불량토끼들이 어깨를 쥐어짜자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멍한 레아를 향해 늑대탈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게 조심해야죠.”
달콤하게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운 음성.
하지만 레아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아까와 달리 너무나 익숙한 음성이었다.
“…혹시.”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애써 부정하지도 못하게 상대는 인형탈을 벗었다.
“레아, 주말은 잘 보내고 있었어요?”
환하게 웃는 이안을 보며 레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백마 탄 교수님이셨다.
학부모 상담
노숙자로 산다는 건 남들보다 범죄에 많이 노출된다는 뜻이다.
이안만 해도 몇 번 목숨이 위태로운 적이 있을 정도였다. 노숙자라서, 아시아계라서, 또는 얼굴이 흉측해서.
생각보다 범죄의 동기는 시답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것도 마찬가지지.’
이안은 경찰 조사로 드러난 범행 동기를 무심하게 훑어 넘겼다.
퍼리 팬덤이 혐오스러운 글을 인터넷에 올리는 게 범행 동기가 됐다고 했다. 아웃사이더가 잘 되는 것도 꼴 보기 싫었고.
‘아니, 그게 너희 인생하고 무슨 상관인데.’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제 나름대로 변명이랍시고 어차피 인형탈을 뒤집어썼으니 맞아도 덜 아팠을 거라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범죄자들인데 뭘 바라겠는가.
얼굴을 가린 마스크로 뒤지게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뭐, 사법이 살아 있는 미국에서 사적제재를 할 순 없는 노릇이니.
-어떻게 처리할까요?
“용서는 없어요. 최대한 법대로 해주세요. 어차피 증거까지 확실하잖아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답게 범죄자들도 뭉치면 용기가 치솟는 법이지만.
‘대신 형량도 치솟는다는 것도 경험해야지.’
교도소에서 우리 경호원들만큼 무섭게 생긴 분들과 생활하다 보면 뼈저리게 알게 될 거다.
-안 그래도 드레이퍼 가문에서도 같은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그럴 만하죠.”
가족 관계가 삐걱거리고 있다고 해도 귀한 자식이다. 이안이 나서지 않았으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일이니 분노하는 게 당연하다.
오스틴에게 잘 부탁한다며 통화를 끝냈고.
“이안.”
“…네, 감독님.”
등뒤에서 들려오는 게빈의 목소리가 따갑다. ‘예쁜 두상이구나. 한 대 때려도 되겠니?’라는 말을 꾹꾹 참는 게 느껴졌다.
결국 가볍게 한숨을 푹 내쉰 그는 이안의 어깨를 툭 쳤다.
“이젠 사람 구한다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던 옛날 버릇을 좀 버릴 때가 되지 않았니. 네 건강은 너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잖아. 왜 위험하게 직접 나서서 걱정하게 만들까.”
“…별로 안 위험했어요.”
“그건 네 생각이고. 혹시 총이라도 들고 있었으면 어떡할뻔했니.”
그놈들이 총이나 칼을 품에서 꺼내서 쏘는 것보다 제대로 훈련받은 경호원들이 대응하는 게 더 빨랐을 테지만, 눈치 없이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죄송합니다.”
“후… 알면 됐다. 늙은이들 심장 떨어지게 무슨 일인지 원. 넌 보면 옛날부터 네 몸을 잘 안 챙기더구나.”
…그랬나.
나름대로 계산하고 행동해도 남들이 볼 때는 위험해 보이긴 했을 거다. 어색하게 웃어넘기자, 게빈은 혀를 끌끌 찼다.
하고 싶은 말을 더 늘어놔 봐야 잔소리가 되리라 생각한 그는 냉정하게 상황을 짚었다.
방금까지는 이안을 걱정하는 할아버지로서 하는 말이었다면 지금부터는 공동 프로듀서로서 하는 말이다.
“레아의 상태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괜찮아요. 그래도 이틀 정도 휴식을 주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촬영 일정을 조정해야겠구나. 그동안 촬영을 멈추는 건 어떻게 생각하니.”
“그랬다간 전체적인 일정이 망가지잖아요. 제가 촬영하는 일정으로 조정하면 되죠.”
주말에 일정 조정이라니. 출연이 예정된 배우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용할 소품도 조정해야 하고, 벌써 뜬금없는 주말 근무에 끼에엑 비명을 내지를 스태프들이 훤히 보였지만.
‘전체 일정이 늘어나는 것보단 낫지.’
일정이 늘어나면 장비, 소품, 세트장 대여 등 모든 게 재조정 들어가야 한다. 일거리로 따지면 이게 더 많다.
“당시 상황이 찍힌 영상이 돌고 있다고 들었는데 반응은 어떻지?”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신고 번호보다 카메라를 먼저 켜는 세상이 아닌가.
가게에서 퍼리들이 모여 있는 풍경이 펼쳐졌으니 구경꾼 중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번 사건을 찍은 사람의 영상은 벌써 이슈였다.
“아직 초기지만, 반응은 나쁘지 않아요. 다행히 큰 문제로 불거지진 않았잖아요.”
연예계 이슈란 건 참 이상해서 명백한 피해자도 이미지 타격을 크게 입곤 한다.
‘만약 진짜 레아가 폭행을 당했다면 제작진에선 뭘 했냐는 둥. 온갖 똥파리들이 달라붙어 헛소리를 늘어놨겠지.’
이런 건 노이즈 마케팅도 안 됐다. 그냥 이슈로 인한 타격이지.
근데 이번에는 우연처럼 보이더라도 사건을 깔끔하게 막았다. 나온 그림도 예뻤고.
“다행이구나. 일단 기자들 대응은 홍보팀하고 내가 하도록 하마.”
“알겠어요. 아, 그리고 저희가 찍은 영상은 공개하는 게 어떨까요? 어차피 사건 영상도 돌고 있겠다 숨길 이유가 없을 거 같은데요.”
두 주연이 엮였고, 목격자도 많으니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길 수도 없다.
차라리 직접 나서 사건을 조금이라도 유쾌하게 풀어내고 직접 이슈의 방향성을 조절하는 게 더 낫다.
“그건 네가 홍보팀하고 협의해서 진행하면 되겠다. 어차피 네 위튜브에 올릴 생각이잖니.”
“네, 그렇게 할게요.”
해야 할 일에 비해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둘은 재빠르게 업무 분담과 함께 뒷수습에 들어갔고, 사건을 담은 영상도 인력을 갈아 넣어 빠르게 편집되었다.
그동안 퍼리 습격으로 이름 지어진 사건은 빠르게 관심을 끌어모았다.
***
촬영 기간은 이안이 가장 바쁠 때지만, 반대로 팬 사이트는 보통 한적했다.
소위 굴릴 떡밥이 없는 시기이니 말이다. 기껏해야 배우 팬들이 이번 작품이 기대된다는 글을 남기는 것 정도가 다였다.
일종의 휴식기.
툭하면 디도스 공격이라도 받는 것처럼 폭주하는 트래픽에 고생하는 운영자들도 한숨을 돌리는 시기였는데.
-야, 이안이 폭행 사건하고 연루됐다는데?!
└깜짝이야. 똑바로 말해! 폭행을 막은 거지!
└뭐야? 무슨 일인데?!
└영상 링크 올려줄 게.
소문에 빠른 사람들이 링크를 올려줄 때쯤 기자들도 관련 기사를 내놓기 시작했다.
-안티 퍼리의 폭행을 막은 이안 프라이스. 피해자는 아웃사이더 여주인공인 레아 드레이퍼?!
-아웃사이더를 응원하는 그날 퍼리 모임에서 일어난 폭행 사건. 두 할리우드 배우가 엮여 있어.
제목 낚시까지 곁들인 기사들은 빠르게 관심을 모았고, 영상도 빠르게 확산했다.
영상은 화질도 떨어지고 구도도 엉망이다. 하지만,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충분했다.
가게에 모인 참가자들을 찍던 영상은 소란을 느끼고 재빨리 카메라를 돌렸고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이 선명하게 찍혔다.
그걸 잡은 늑대탈 또한.
갑작스러운 폭행 사건에 주변이 소란스럽게 변했다.
대형 마트에서 대놓고 물건을 훔쳐가는 절도 사건이 일상처럼 자리 잡은 미국이라도 눈앞에 폭행을 가볍게 볼 순 없었다.
범죄자의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온다면 더욱.
-위험해!
불똥이 튈까 아이를 감싸고 몸을 피하는 부모, 말려야 하나 발을 구르는 사람, 절도도 안전을 위해 지켜보는 경비를 혹시나 하고 부르는 사람 등.
아수라장이 된 상황은 생각보다 빠르게 정리됐다.
스테로이드인지 돌연변이인지 모르겠지만, 범인들보다 머리통이 하나는 더 큰 근육 토끼탈들이 우르르 달려왔으니 말이다.
‘너희가 총을 꺼내는 것보다 우리가 골절상을 만드는 게 더 빠르다.’라고 주장하는 듯한 불량 토끼는 범죄자들을 순식간에 제압했고.
가장 먼저 나선 늑대탈이 머리에 뒤집어쓴 탈을 벗자, 아까보다 더 큰 소란이 번졌다.
-이안?!
-진짜 이안 프라이스라고?! 왜 여기에.
…네가 여기서 왜 나와?
경악 섞인 반응과 함께 카메라에 이안의 목소리가 담겼다.
-레아, 주말은 잘 보내고 있었어요?
고양이탈을 쓴 사람이 레아라는 걸 알려주는 말.
이 말을 끝으로 영상이 끝났고, 팬 사이트는 시끌벅적해졌다.
-방금 영상 보고 왔는데, 혹시 촬영이었나?
└아니. 진짜 폭행범들이라는 데. 전부 경찰에 넘겼다고 들었어.
└제작진에서 성명문을 냈거든? 몰래 응원 모임에 참여한 레아를 놀라게 해주려고 이안이 몰래카메라를 찍고 있었다더라.
└몰래의 몰래인데 거기에 진짜 사건까지 엮였다고? 어지럽네.
-와, 멋지다. 내가 레아라면 반했을 거 같은데.
└글쎄. 마침 거기에 있었는데 반한 것보단 그냥 놀란 거 같던데. 창백한 얼굴로 딸꾹질을 엄청 했거든.
└폭행범들 때문이겠지. 그것보다 거기 있었다고? 또 다른 일 없었어?
└있었지. 놀란 퍼리들한테 가서 바로 대형 마스크를 나눠주며 누가 팬데믹 시기에 마스크도 안 쓰고 모임을 하냐고 혼내더라.
└네, 우리 이안이 확실합니다.
└…진짜 수상할 정도로 마스크에 진심인 녀석.
-그것보다 이안이 몸조심 좀 했으면 좋겠는데. 내년에 월드 투어를 돌아야 하는데 저러다가 다치면 어떡해.
└월드 투어? 그걸 할 시간에 대학 복학을 하지 않을까. 아니면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겠지.
└닥쳐! 월드 투어 해줄 거라고 약속했단 말이야!
└응, 네 꿈에서 들었겠지.
└어휴, 또 싸우네. 어쩔 수 없지. 우리 수용소를 양보해줄 게. 나름 안락하다고.
└꺼져!
폭행과 엮였다는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던 팬들은 안도하며 평소처럼 글을 쓰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잘 막았으니 다행이나, 자칫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폭행을 당할 뻔한 사건 아닌가.
거기에 원래 범행 대상인 퍼리 모임 참가자들도 전부 같은 팬덤 사람이다.
평소에는 퍼리들을 ‘갈! 어딜 털 뭉치가 사람과 겸상을 하는가!’라며 뿅망치로 때려서 수용소에 감금해 놓지만 같은 팬덤이라는 인식은 분명 있다.
일부 과격한 팬들 사이에서 불순한 의견이 흐르기까지 했다.
그런 면에서 며칠 지나지 않아 이안의 위튜브에 올라온 몰래카메라 영상은 시의적절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살벌한 외모를 가진 경호원들에게 토끼탈을 내미는 이안의 모습은 익살스러웠고.
-주인공인 레아 드레이퍼랑 목소리가 비슷해요. 제가 그분 팬이거든요.
-그, 그런가요. 아하하하.
레아인 걸 뻔히 알면서 놀리는 모습은 유쾌했다.
이런 분위기는 문제가 된 사건의 장면에서도 이어졌다.
-마스크는 방역용품이지 범죄자들 안면 가리개가 아니야. 이 새끼들아!
진심으로 정체를 가리는데 마스크를 쓰는 것에 분노한 외침에 이안의 팬들은 ‘아이고, 이안이안아.’라며 절로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누가 폭행범을 앞에 두고 저런 것에 분노하겠는가. 이안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조금 전 무슨 사건이 있었냐는 듯이 기어코 모임 참가자들 인형탈에 마스크까지 씌우는 거로 영상이 끝이 났다.
폭행 사건조차 몰래카메라의 한 장면처럼 가볍게 풀어간 영상이다.
범인들 얼굴을 ‘빌런1,’ 이런 식으로 장난스럽게 가리며 불필요하게 일이 번지는 건 원치 않는다는 의견을 간접적으로 내비치기도 했고.
-이안이 어련히 법적으로 잘 처리하겠지.
이런 분위기로 사건이 잘 정리됐다.
물론 이안은 이런 분위기를 살피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허니, 무슨 툭하면 사건하고 엮여?! 그냥 나하고 사업이나 할래?’
‘아이고, 이안! 에반 좀 말려봐라. 널 때리려는 범인들을 때려주겠다고… 아니, 네 나이엔 보호자랑 같이 움직여야 한다니까? 뭘 같이 때려주자고 해!’
‘이안, 공작새가 필요하면 말해. 우리 애들은 사람도 잘 때린다고.’
이런 걱정을 담은 전화도 잔뜩 받아야 했고, 스태프들과 함께 조율된 일정에 따라 촬영도 진행해야 했다.
원래도 프로듀서 겸 배우 그리고 여차할 때는 각본가 일까지 소화하며 가뜩이나 촬영 기간에는 바쁜데 일주일 동안은 정말 정신이 없었다.
무슨 만화 속 탐정도 아니고 여유가 있으면 사건과 엮이니 그런 틈도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달까.
그나마 기자들 대응은 주로 게빈이 맡아줘서 다행일 정도였다.
사건이 일주일을 넘어가자 할리우드의 흔한 불륜 소식에 관심이 쏠리며 이슈도 조금 가라앉았다.
오랜만에 위튜브 구독자가 눈에 띌 정도로 늘어나고, 아웃사이더가 재차 노이즈 마케팅이 되는 결과를 남기고 말이다.
“이안.”
“아, 레아. 오늘 촬영도 수고했어요.”
왕자님 대신 교수님에게 도움을 받은 레아는 ‘홍보 일정은 아무리 그래도 혼자 하는 거 아니다.’, ‘시간 여유가 아무래도 많은 거 같다.’ 등등
이안에게 잔소리를 잔뜩 듣고는 촬영장에 복귀했다. 다행히 사건에 큰 영향을 안 받은 듯하고.
가볍게 인사를 건넸는데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망설이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왜요. 따로 할 말이 있어요?”
“부모님이 이안을 한번 뵙고 싶다고 하시네요. 이번 일이 고맙다고 하셨거든요.”
단순히 고마움의 표시일까.
샬럿의 언더힐 가처럼 순수하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걸지도 모르겠으나, 그녀의 태도를 봐선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의심을 느낀 건지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깊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와 연을 맺게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그런가요?”
이안은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을 논하기엔 자신의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탐이 날 수 있는 인재다.
‘투자 일로 돈이 많다는 것도 알려졌고, 정치권에선 아직도 탐을 내고 있으니까 이런 관심을 보일 만하지.’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는 단점이 되지만, 이안 정도라면 오히려 장점으로 활용할 여지가 훨씬 컸다.
이번 일도 있으니 잘 엮어보겠다, 라.
“구원으로 엮는 러브 스토리는 너무 식상하네요.”
“그렇죠?”
농담을 던지자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서로 이성으로서 감정은 없다는 걸 알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우리 둘의 의견은 같은 거 같네요.”
“그럼 초청은 거부하는 거로 할까요?”
“뭐 만나는 게 어려운 거라고요. 이렇게 만나게 되는 거 저번에 이야기한 것부터 마무리 짓죠. 용기를 낼 생각은 여전히 있나요?”
이안의 물음에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학부모 상담을 앞둔 어느 날이었고.
***
드레이퍼 가문의 가족들이 모인 장소.
‘만나는 사람은 있냐?’라며 가볍게 운을 떼며 예상한 분위기를 잡자, 이안은 재빨리 선수를 쳤다.
“아, 맞다. 레아가 퍼리 팬덤인 걸 알고 조금 놀랐습니다.”
응, 말 잘못 하면 이제부터 여기는 드레이퍼리 가문이야.
이안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샬럿이 봤다면 ‘허니, 또 이러네.’라며 질색했을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