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09)
토니상(2)
이안은 그동안 많은 시상식에 초청됐다.
칸이나 그래미 어워드처럼 하나의 거대한 축제 같은 곳이 있는가 하면 여러 조합에서 비교적 작은 규모로 치러지는 시상식도 있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어봤다.
‘다른 4대 대중문화 시상식에 비하면 작은 편이야.’
시상식이 열리는 극장은 1600석 규모.
뮤지컬 프로듀서라면 침을 질질 흘리며 바랄 극장이나, 다른 시상식에 비하면 아담한 편이다.
연기되기 전 예정된 장소가 6천석 규모의 뮤직홀인 걸 생각하면 당연한 느낌이다.
‘그래도 나쁘지 않네.’
100년이 넘는 역사가 곳곳에 묻어 있는 극장은 브로드웨이가 다시 문을 연다는 선언을 하기 적합한 장소였고, 시상식에 참여하는 사람 대다수는 기대와 흥분이 가득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직장이 사라졌던 사람들이 다시 대중 앞에 서는 시기이니 축제 분위기인 건 당연했다.
“다들 잘 지낸 것처럼 보이는군!”
“연락이 없어서 죽은 줄 알았다네, 이 친구야! 재개장 준비 때문에 바쁘다며?”
“하하핫, 나만 그렇겠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화기애애하게 대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이안은 원래라면 이런 분위기에 끼지 못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정신없이 일에 치여 살았으니 브로드웨이 관계자들과 동병상련을 느낄 이유도 없고, 또다시 브로드웨이 작품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재개장도 큰 의미도 없잖는가.
각자 품고 있는 이번 토니상의 의미가 다르니 겉도는 게 당연했는데.
“이안 프라이스! 이렇게 만나게 되니 참 반갑군! 나는 프로듀서 일을 하는…”
“프라이스 씨! 오디오북 때 고마웠어요!”
실상은 무수한 악수 세례를 받았다.
남의 가족 모임에 참여한 것처럼 뻘쭘하게 있는 것보단 이렇게 반겨주는 게 더 좋긴 하다.
‘배우들이나 제작자들이 반겨주는 건 이해가 되긴 해.’
배우는 오디오북으로 좋은 관계를 맺지 않았나. 직접 혜택을 받은 건 수백 명 정도로 전체 브로드웨이 배우에 비하면 일부였으나.
이곳 업계가 생각보다 좁아서 한두 다리 건너면 ‘같이 작품 한 사이’, ‘같은 대학 동문’ 등 얼추 아는 사이다. 성격이 심각하게 꼬이지 않는 이상 호감은 기본으로 깔고 갈 수밖에 없다.
‘거기에 브로드웨이에서 밥그릇 싸움을 할 사이도 아니고. 오히려 다른 곳으로 진출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관계지.’
배우들이 반기는 건 이해가 갔다. 제작자? ‘또 여기서 작품 활동은 안 하려나?’라며 먹잇감을 보는 시선이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극장주들은 왜 저런 시선을 보내지?’
극장주들은 브로드웨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사람들이다. 토니상 관리위원회 임명부터 시작해서 여러 방면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이고.
그런 이들이 마치 ‘우린 너에 대해 잘 알고 있지.’ 같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니 이안은 절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상한 사람들 보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새삼스러울 게 전혀 없었다.
“시상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자리에 착석해주시지 바랍니다.”
고민할 시간도 없고.
이안이 자리에 앉자 7 Confessions of Love의 제작자와 연출가인 마이클과 제시카가 놀리듯 말했다.
“인기가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인사할 틈도 없던데.”
“이안 좀 소개해달라고 귀찮게 구는 것보단 낫지 않아요? 조금 쓸쓸해도 참을 만하잖아요.”
“며칠 전에 만나서 인사했잖아요. 재개장 준비까지 도와줬더니 이렇게 나올 거에요?”
저번 흥행의 힘입어 이번에는 장기공연을 목표로 준비 중인 7 Confessions of Love였다. 얼마 안 남은 개장에 앞서 노래까지 불러주며 도와주기까지 했고.
억울하다는 반응에 마이클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네 노래를 듣고 더 걱정하더라. 할 거면 적당히 잘해야지. 무슨 산골에 처박혀서 노래 연습만 했니? 전보다 더 잘해진 것 같아.”
말은 저렇게 약한 소리를 해도 연습하는 걸 봤을 때는 걱정할 게 전혀 없어 보였다.
원래도 7 Confessions of Love는 장기공연에 성공할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기도 했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카메라가 돌아가며 토니상 시상식이 시작됐다.
방송에 송출되는 시상식은 보통 사전 수상과 생방송 수상이 분리되어 있다.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나와서 수상소감을 말하는 걸 시청자들이 기다리는 건 아니잖는가.
시청률을 위해 관심 없는 분야는 사전 수상으로 먼저 수여를 하고, 중요한 상과 공연으로 생방송을 채우는 게 보통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시상식은 특이하긴 하지.’
모든 수상 과정이 스트리밍 사이트로 공개되는 중이니까. 물론 주요 수상이 이뤄지는 2시간은 TV로도 생중계가 될 예정이라도 독특한 방식이다.
토니상 시상식이 다른 시상식에 비해 수상이 부문이 적은 것도 있고, 브로드웨이를 구성하는 모든 관계자가 주목받을 수 있도록 신경 쓴 것이기도 했다.
“좋네요.”
“그렇지?”
조명상, 음향상, 의상상 등.
평소라면 생중계에서 제외되며 소외감을 느끼던 숨은 주역들도 오늘은 주인공이 되어 대중 앞에 나서고 있다. 그들의 노고를 아는 만큼 기꺼운 마음으로 손뼉을 쳤다.
수상 중간중간마다 장기공연에 성공한 작품의 짤막한 공연이 시상식의 흥을 돋웠다.
어느덧 시간은 2시간가량 지났고, 주요 수상 부문이 시상되기 시작했다.
-연극 부문 여우 조연상 수상자를 공개하겠습니다.
-연극 부문 남우 주연상 수상자를 공개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입에서 하나둘씩 수상자가 나왔고,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 왔다.
-뮤지컬 부문 남우주연상입니다.
이안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느꼈다.
단순히 후보로 불렸기에 모이는 시선이 아니다. 다들 어렴풋이 결과를 예상하기 때문이지.
-축하합니다. 수상자는 7 Confessions of Love의 이안 프라이스입니다!
이견이 없는 수상 결과.
그만큼 브로드웨이에 이안이 있는 기간은 짧았어도 남긴 발자취는 두터웠다. 무대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끊김 없는 박수 소리를 들으며 무대에 올랐다.
“축하합니다.”
발표자는 메달이 들어간 트로피를 내밀었다. 니켈 도금이 된 메달에는 사람의 얼굴과 가면이 함께 보였다.
흉측한 화상을 가면처럼 쓰고 다녔던 회귀 전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함께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주는 트로피를 움켜쥐었고.
새하얀 세계가 시선을 가렸다.
‘또 인가.’
수차례 경험한 일이다. 놀라지 않고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리자, 시야가 돌아왔다.
낡은 가구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이 보였다. 익숙한 공간이었다. 베벌리힐스로 이사하기 전 살았던 집이니 말이다.
“이안.”
지금보다 젊은 부모님의 웃는 모습과 함께 세월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낮았던 시야는 더 낮아지고, 학년도 점점 내려갔다. 한층 어려진 자신은 부모님을 붙잡고 물었다.
“엄마, 난 왜 다르게 생겼어?”
“으응?”
어린 아들을 보며 난처한 미소를 짓는 부모님이 보였다.
이 모습을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떠올랐다. 이날 이후로 한 번도 이런 질문을 부모님에게 하지 않았다.
다만, 놀리기 위해 다가온 친구에게 처음으로 입양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더 과거로 돌아갔다.
‘행복해 보이네.’
부모가 된다는 낯선 경험에 실수를 연발하면서도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할머니인 소피아가 남편을 잃었다는 슬픔에 빠져 이안을 외면함에도 애정은 더욱 깊어졌다.
좋은 기억력에도 없는 모습.
가슴을 간지럽히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안은 한국행 비행기로 들어온 자신을 부모님이 품에 안는 걸 보고 의지를 담아 말했다.
‘그만. 이 이상은 필요 없어.’
거꾸로 돌아가던 세상이 멈췄다.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어땠을까. 아마 계속 과거로 넘어갔을 테고, 진짜 부모님을 봤을 수도 있다. 왜 자신을 보육원에 보냈을까. 너무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의문을 풀 생각은 없어.’
자신을 품에 안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부모님을 봤으면 됐다.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키워왔는지 충분히 느꼈으니 말이다.
눈을 깜빡이자, 세상이 다시 바뀌었다.
벽에 락카로 낙서가 되어 있는 낙후된 길. 약에 취한 사람들은 제 몸도 못 가누고 비틀거리고 있었고, 멀찍이 떨어져 마스크를 쓰고 걸어가는 사람이 보였다.
‘원래 이맘때쯤에는 이렇게 지냈었지?’
흉측한 외모를 가진 자신과 마약 중독자는 비슷한 취급을 받았으니까. 이안은 그때를 돌이키다가 가볍게 웃었다.
자업자득일 수도 있다. 한참을 마약 중독자를 보다가 벌떡 일어나서 그들을 따라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좀비 엑스트라를 한창 준비할 때였지. 좀비랑 비슷한 느낌이긴 했어.’
연기 연습을 한다고 그 옆에서 중독자를 따라 하다니. 약쟁이랑 비슷한 취급을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누가 봐도 제정신으로 보이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미쳐 있는 게 맞았다.
배우에 계속 도전했다. 멸시를 받으며 수 없이 실패하며 계속 문을 두들겼고 연기에 도움이 된다면 닥치는 대로 시도했다.
이안은 자신의 삶을 차분히 주시했다.
배우를 도전하는 아집, 조금씩 나아가는 성취.
괜찮았던 인연도, 행복한 기억도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같은 인생에서 전부 뒤처졌다.
이안은 기억 속에서 잊힌 삶의 부스러기를 조심스럽게 담아냈다.
나중에 연기에 도움이 될 감정으로, 경제적 이득을 볼 수 있는 정보도 굳이 따지지 않고 품어냈다.
이득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삶을 다시 가슴에 담아냈다. 마치 유리 파편을 맨손으로 끌어안는 일과 같았다.
흉터로 남은 상처를 다시 헤집는 아픔이 돼도, 바보 같은 행동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껴도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배우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는 시기가 되자, 더는 불가능하다는 듯이 뿌옇게 변하던 세상은 점점 비틀렸다.
짝짝짝-
“하하하, 수상에 너무 감격하신 것 같군요! 이렇게 멍하니 있다니 말이죠.”
사회자의 농담에 정신을 차린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한낱 꿈과 같은 시간이 지나고 현실로 돌아왔다는 걸 깨닫고는 마이크 앞에 섰다.
변화에 예민한 사람들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달라진 거 같은데.’
‘분위기가 조금 묘해진 거 같아.’
정확히 똑 부러지게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눈이 깊어진 것 같다.’, ‘묘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 같다.’ 등 추상적이고 미묘한 차이였다. 다만, 확실한 건 있다.
“안녕하십니까. 이안 프라이스입니다. 이렇게 뜻깊은 상을 받게 되어 정말 영광이네요. 네, 시작은 상투적인 표현으로 해봤습니다.”
시선을 떼기 힘든 묘한 매력을 풍긴다는 것.
넓은 무대를 홀로 채우는 존재감을 느끼며 사람들은 수상소감에 귀를 기울였다.
***
토니상 시상식이 막을 내렸다.
저번보다 팍하고 깎인 시청률은 브로드웨이가 회복되려면 시간이 꽤 필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아쉬운 결과였다.
다만, 브로드웨이 재개장을 했다는 걸 알리기엔 충분했다.
-토니상 시상식과 함께 재개장을 알린 브로드웨이! 주목해야 할 토니상의 결과들.
-이안 프라이스 뮤지컬 부문 남우주연상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로 수상! EGT 달성도 이뤄. 이제 남은 건 오스카뿐!
-토니상 관리위원회, 이안의 수상은 다양성을 추구해나갈 브로드웨이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안의 수상 결과도 언론의 큰 관심을 받았다.
수상이 유력하다고 해도 시상식이 원래 까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 아닌가. 관심을 받을 만했다.
-우리 이안이 EGT 달성!
└진짜 오스카만 남았네? 빨리 영화를 잔뜩 찍어야겠다.
└배우 팬, 이 자식들아 수작 부리지 마. 월드 투어를 돌아야 한다니까?!
└월드 투어가 중요해? EGOT 달성을 해야지.
└퍼리 영화로 오스카를 타면 의미 깊지 않을까?
└아오, 이것들 또 튀어나왔네. 너흰 아웃사이더가 있으니 됐잖아!
-시상식 봤는데 수상하는 이안이 반짝반짝하더라.
└우리 아기도 옆에서 입을 벌리고 보던데?
└애들은 원래 이안을 좋아하긴 했잖아. 내가 봐선 이안의 자녀는 나중에 고생할걸. 친구를 아빠한테 다 뺏겨서 말이야.
└이안의 2세라니. 엄청 귀엽겠지?
└…자녀 이전에 애인이라도 있어야지. 바빠서 스캔들도 안 나는데 언제 2세를 볼 수 있겠어.
└근데 평소보다 더 애들이 좋아하는 거 같기도 했는데.
팬 사이트도 들뜬 분위기였다.
물론 이안은 이런 반응을 제대로 살피기도 힘들 정도로 바빴다. 사방에서 축하 연락이 엄청나게 이어졌으니 말이다.
그중에는 사업상, 친분상 따로 연락을 줘야 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니 어쩔 수 없다.
한참 연락을 주고받던 이안은 국제 전화를 받았다.
-이안, 잘 지냈지?
“그럼요, 감독님. 잘 지내셨죠?”
이미 두 편의 작품을 함께 한 고준혁 감독의 전화였다.
가볍게 축하 인사를 전한 준혁은 조심스럽게 입을 말문을 열었다.
-혹시 전에 칸에서 한 대화 기억하니?
“제가 배우상을 탔을 때 나눈 대화 말하는 거죠?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칸에서 이안이 배우상을 타는 바람에 그림자 가족은 원역사와 달리 각본상을 받는 거로 만족해야 했다.
그때 한 약속을 떠올리며 짙은 미소를 그렸다.
“어떤 작품이든 도와드리겠다고 했잖아요.”
-이번에 작품 제작에 들어가거든. 대본을 한 번 볼래? 그때 약속은 지금 안 지켜도 되니 너무 부담가지지 마.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거부해도 괜찮으니까. 알겠지?
출연을 강요하는 건 아니라고 수차례 말해 부담을 줄여준 준혁은 대본을 보내준다는 말과 함께 통화를 끊었고.
“왔다.”
기대와 걱정을 담아 조심스럽게 이메일을 확인했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Beautiful World(가제)
AI 발전과 인간의 갈등을 그린 SF 영화.
고준혁 감독을 세계 영화계에 제대로 각인시킨 작품이자, 이안이 기다리던 작품이 드디어 찾아 왔다.
풍랑의 중심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인류가 지금처럼 번영한 이유는 사막과 북극처럼 극한 환경에서도 어떻게든 적응해서 살아온 덕분이 컸다. 그리고 이건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팬데믹 때도 그랬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극복했으니까. 그리고 진행 중인 AI 발전도 마찬가지겠고.’
이안은 진지한 시선으로 Beautiful World라는 제목이 적힌 대본을 내려봤다.
-어땠니?
팬데믹으로 수요가 급속도로 늘어난 화상회의 프로그램에는 고준혁 감독의 얼굴이 보였다. 그랜드라인 때부터 연을 맺었으니 알고 지낸 지 정말 오래되긴 했다.
세월의 변화가 느껴지는 얼굴에는 긴장이 묻어 있었다. 캐스팅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이 영화 할리우드에서 제작한다고 했죠?”
-맞아. 한국은 SF의 불모지니까.
전 세계적인 인기를 갖은 별들의 전쟁 영화도 한국에선 큰 힘을 못 쓰지 않나. 영화뿐만 아니라 SF 문학도 90년대부터 번역되어 소개됐으나, 한정된 팬층만 있을 뿐이다.
최근에 조금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고 듣긴 했는데.
‘과학소설이 미국 같은 영미권에서 인기 장르인 걸 생각하면 아직 걸음마 단계지.’
역사도, 팬층도 비교할 수 없다.
할리우드를 선택한 건 괜찮은 선택이었다.
“일단 재밌게 봤어요. 미국에서도 흥행을 기대해 봐도 될 정도예요.”
-그러니? 사실 오래전부터 준비한 작품이었거든.
밝게 웃는 준혁의 대답에 몇몇 달라진 장면이 있긴 하나, 바뀐 미래에도 불구하고 같은 작품이 나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감독들이 오랫동안 작품을 묵히는 경우가 드문 건 아니니 이상한 일은 아니고.
‘재밌긴 확실히 재밌어.’
Beautiful World의 주인공은 무명 시절 생활고 때문에 AI 학습 연구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인기 스타였다.
하지만 이때 동의한 연구 계약서로 인해서 자신을 대신해 AI가 작품에 출연하고, 딥페이크로 범죄에 활용되는 등 큰 피해를 입게 되며 작품이 시작됐다.
‘복수하고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카타르시스와 인간 찬가를 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지.’
SF로 보면 신선한 내용은 아니지만, 장르적 재미와 의미가 훌륭한 작품이었다. 기다려온 보람이 느껴질 정도로.
다만, 각오를 다져야 할 작품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굉장히 출연하고 싶은 작품이에요.”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고맙구나.
기뻐하는 감독님을 보며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인생에선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다. 만약 지금 할 말을 아낀다면 작품 제작은 순조롭게 이뤄지고 감독님도 크게 고민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진행될 일을 숨기는 게 옳은가.’
앞이 가시밭길인 걸 알린다면 영화는 좌초될 수도 있다. 이제 제작이 진행되는 단계이니 포기한다고 해서 큰 손해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작품에 대한 욕심만 생각하면 입을 다무는 게 더 좋으나.
이안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네, 하지만 이 작품을 제작하실 생각이라면 각오를 하셔야 해요. 제가 아니라 감독님이요.”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겠니?
“감독님의 작품은 팬데믹 기간에 전염병 영화를 개봉하는 것과 비슷해요.”
큰 관심을 받을 수 있지만, 논란의 중심에 서며 불편하게 여길 사람이 다수 생길 수도 있다.
“감독님도 아시다시피 이번에 제가 많은 각본가와 인연을 맺은 걸 알고 계시죠?”
-알고 있단다.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이 바닥에 있는 사람이라면 유명한 일이거든.
“요즘 각본가 사이에서 도는 이야기가 심상치 않아요. 불만이 조금씩 누적되는 상황이랄까요. 이러다 파업이 일어날 수 있는 상태죠.”
-파업?
미국 작가 조합의 파업.
회귀 전 미래에선 2023년에 파업이 일어났다. 16년 만에 파업이고, 배우 조합까지 파업에 동참하면서 1960년 이후로 두 조합이 동시에 파업하는 대규모 사건이었다.
이 여파로 할리우드의 모든 작품이 전면 중단됐고, 이 파업으로 거의 8조에 달하는 경제적 손실이 있었다고 추산될 정도로.
‘그리고 다른 미래와 달리 바뀌지 않는 흐름이야.’
단순히 미래 지식으로 내린 판단이 아니라, 주변 동향을 충분히 살피고 내린 결론이었다.
원인 자체가 개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시스템적인 문제 때문이다.
“네, 파업이요. OTT 시장이 커지면서 작품은 스트리밍이 보편적으로 변하고 있죠. 산업 구조가 바뀌기 시작하면서 보상 체계가 달라졌거든요. 작가의 일은 더 많은데, 보상은 더 적어지는 구조가 됐죠.”
불만이 꾸역꾸역 쌓이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제작사들이 AI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감독님도 작품 제작에서 가장 비용이 큰 게 뭔지 아시잖아요.”
-인건비지.
“맞아요.”
장비와 세트장을 구성하는 것보다 수백 명의 인원을 유지하는데 더 많은 돈이 드는 게 당연하다.
제작사는 사업자니 인건비를 최대한 줄이려고 고민을 거듭했고, 그 결론이 AI였다.
‘제작사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작가들에겐 당장 돈을 조금 더 받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정말 미래가 달린 일이야.’
여유롭기 미루고 있을 일도 아니다. AI 기술이 더 발전해 작가 역할 대다수를 대체할 수 있게 된다면 파업을 해봤자 효과가 없을 테니까.
AI가 실질적인 위협으로 떠오른 반면,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지금이 파업할 가장 적절한 시기였다.
‘누군가는 기계를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에 빗대어 시대에 역행하는 행동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했지.’
글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긴 하지만, 적응하는 동안 피해가 없을까?
산업혁명으로 인류가 풍요로워졌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거기에 쉽게 동의하지 못할 거다.
초기를 보면 관련 법이 전혀 없어 노동자는 열악했다. 그 이전 시대보다 노동 시간은 30% 늘었고, 만 7세가 넘은 어린애들이 공장에서 학대를 받으며 일하다 요절하는 예도 많았다.
어른? 16시간 노동에, 잠도 의자에 앉아 로프에 기댄 채 자야 했다.
긴 세월 수많은 희생과 반발 그리고 타협 속에서 이뤄진 지금의 모습을 보고 ‘산업혁명으로 우리가 이렇게 풍요롭게 살잖아.’라고 가볍게 말할 수 있을까.
‘그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 가는 과정이지. 지금까지 인류가 그랬던 것처럼.’
곧 다가올 파업에 대한 이안의 평가였다.
이안의 설명을 들은 준혁은 깊게 고민에 빠졌다. 만약 설명한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어떻게 될까?
-제작사들이 우리 작품을 굉장히 불편하게 보겠군.
“제작사뿐일까요. 배급사를 잘못 고르면 그쪽에서 이상한 수작을 부릴 수도 있어요. 스크린 수를 확 줄이는 방식으로요.”
‘에이, 설마 이익을 포기하고 그럴까?’ 싶겠지만, 할리우드 업계를 얕보는 행동이다.
‘실제로 Beautiful World도 개봉 스크린이 적었지.’
배급사의 변명은 흥행이 확실하지 않아서 스크린을 적게 잡았다고 했는데, 당시 제작사들의 반응을 봐선 쉽게 믿기 힘든 변명이었다.
-말 그대로 가시밭길이겠어.
“어떻게 하실래요?”
준혁은 깊게 숨을 내쉬었고, 굳은 표정으로 결론을 말했다.
-그래도 만들 생각이란다. 감독의 수명을 깎더라도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작품을 어떻게 안 만들 수 있겠니.
긴장되는 건 사실인 듯 물을 한 모금 마신 그는 말을 이었다.
-이안, 하지만 너는 이 작품을 포기했으면 좋겠구나.
“네?”
-너와 나는 상황이 달라. 할리우드에서 밉보인다고 해도 나는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면 그만이야. 여차하면 대학 강의라도 뛰면 될 테고. 하지만, 넌 계속 할리우드에서 활동해야 하잖니.
준혁의 얼굴에는 진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눈앞의 배우가 얼마나 자기 일을 사랑하는지 두 작품을 함께 하며 확실히 느낀 그였다.
‘제작사들과 척을 지면 배우 일에 지장이 갈 수밖에 없어.’
캐스팅 목록에서 지워버리며 보복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뭘 걱정하시는지 알겠는데요. 저는 제 마음에 든 작품을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이안은 Beautiful World 대본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완곡한 거절을 내뱉었다.
-하지만…
“에이, 감독님. 제가 아무 생각 없이 이 작품에 참여한다고 했겠어요? 가진 거라곤 연기력밖에 없던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의 저를 똑같이 생각하면 곤란하죠.”
제작사가 캐스팅을 안 해준다고?
응, 직접 제작하면 그만이야.
‘이러려고 돈을 벌지. 뭐하러 벌겠어.’
두둑한 지갑은 블록버스터 영화를 자비로 만들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상책은 아니지만, 할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아니면 한동안 다른 활동을 해도 된다.
‘월드 투어 타령을 그렇게 하니 가수 활동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이번에 쌓은 인맥으로 다시 브로드웨이 작품 활동을 해도 되겠지. 위튜브 콘텐츠를 만드는 것도 괜찮겠네.’
워낙 뻗어놓은 분야가 많아서 적당히 일을 소화하다 보면 2, 3년 정도는 훌쩍 지나간다.
제작사들이 단합해서 이를 꽉 깨물고 캐스팅을 안 하려고 해도 자신이 잘 나가면 슬그머니 손을 내미는 곳들이 생길 거다.
돈 앞에서 감정 상한 것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닐 테니까.
“거기에 제 인맥이 그렇게 좁지 않거든요.”
다양한 업계와 심지어 정계까지 뻗은 인맥은 적어도 ‘아, 잘못 건드리면 피곤하겠는데?’ 정도는 될 수준이다.
‘그리고 더럽게 싸우는 건 나도 자신 있어.’
노숙자로 길바닥에서 긴 세월 살아남은 독종이다. 제작사를 위한 찬사가 담긴 디스곡을 연달아 내며 철저하게 언더독 싸움을 해줄 자신이 있었다.
이안의 설명을 들은 준혁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런 걸 방법이라고 말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란다.
“농담 아니고 진짜 할 거예요.”
아니, 진심이라니까 이젠 눈물까지 흘리면서 웃는다.
겨우 진정한 준혁은 눈물을 닦았다. 아무 생각 없이 이 작품에 참여하려고 한 건 아님을 잘 알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만약. 만약에 정말 이번 일로 배우 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떡할 거니.
…배우 활동을 못 하게 된다라.
그럴 가능성은 정말 제로에 가까울 정도지만, 자신이 회귀한 것처럼 세상일이란 모르는 법이다.
‘정말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지만, 배우를 못 한다. 라.’
검은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날부터 제 꿈은 대통령입니다.”
-뭐? 으하하하핫!
…아니, 농담 아닌데 왜 또 웃어.
미국 내 출생이라는 조건 때문에 대통령이 못 된다면 주지사 정도는 노려볼 수 있지 않나.
이안은 이젠 뒤로 넘어가려는 준혁을 보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수명이 늘어날 정도로 한참을 웃던 준혁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번 작품도 잘 부탁한다.
“네, 저도 잘 부탁할게요.”
Beautiful World의 참여가 결정됐다.
***
Beautiful World의 제작을 앞두고 둘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제작은 최대한 빠르게 들어가는 게 좋아요. 2023년 5월 칸 출품을 목표로 잡죠.”
-너무 빠듯한 거 아니야?
출품이 3월 중순까지인 걸 생각하면 기간은 1년 반 정도밖에 안 됐다.
후반 작업을 생각하면 촬영을 빨리 들어가야 하는데, 투자자 모집, 배우 캐스팅, 촬영 스케줄, 세트장 대여 등 할 게 산더미였다.
“그러니 Pryce’s Production도 제작에 참여할게요.”
-너희도?
“빠른 제작을 위한 지원을 생각하면 이게 더 낫거든요.”
역사만 짧을 뿐이지 이번에 확장하면서 주워 담은 인재들을 생각하면 질만큼은 다른 제작사에 밀리지 않는다.
“배급하고 투자는 필릭스 에드워즈의 회사로 하죠. 거기라면 믿을 수 있거든요.”
괴식가이자, 게빈, 아이작과 친구 사이인 필릭스라면 뒤통수 맞을 걱정은 없다.
‘메이저 5대 영화사에 비하면 한 끗발 밀리긴 해도 그래도 영업력은 준수해. 능력도 좋고.’
이미 그랜드라인으로 둘이 함께한 적이 있으니 준혁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안은 머리를 팽팽 굴려 빠르게 제작 과정에 들어갔고.
“…Beautiful World라는 영화 제작에 들어갈 거라고? 그것도 가능한 빨리?”
“네!”
…해맑게 대답하기 있니?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다고 했나. 올리버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장님 얼굴이라서 못 뱉는 거지.’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갑자기 긴급 프로젝트라니.
어질어질하지만, 의지는 굳건하니 어떡하나. 하겠다고 결론을 내렸으면 밑에 직원들은 따르는 수밖에.
“으아아악!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사장님, 우리 안 심심하다니까요!”
Pryce’s Production의 직원들은 갑자기 밀려드는 일거리에 팍팍 갈리기 시작했다.
‘누가 우리 이안이 한동안 휴식기라고 사기 쳤어! 누구야!’
‘이 인간이 휴식기를 가질 리가 없지. 근데 왜 하필 또 제작에 참여하냐고!’
연말 연휴를 맞이하기 전에 최대한 제작 준비를 해둔다.
진짜 정신 나간 계획에 불평을 토하고 싶어도 이안이 소화해내는 업무량이 훨씬 더 많으니 쭈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투자자 모집을 시작으로 Pryce’s Production의 움직임은 금방 업계로 퍼졌고.
-그랜드라인, 그림자 가족을 함께 한 고준혁 감독과 이안 프라이스가 또다시 함께 작품에 들어가나? Pryce’s Production 아직 묵묵부답.
거친 풍랑의 중심에 설 Beautiful World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두 번째 은퇴식
영화 제작의 가장 큰 난관이라고 할 수 있는 Beautiful World의 투자자 모집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제작 기간이 촉박하니 여차하면 직접 투자할 생각도 갖고 있었는데.
-내가 괜한 걱정이라고 말했잖니. 패키지 딜 구성이 훌륭한데 뭘 걱정하고 있어?
필릭스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투자자가 작품 투자를 할 때 뭘 가장 먼저 볼까? 영화 내용?
‘아니지. 투자받을 때, 기껏해야 시놉시스 정도만 나온 경우도 허다하니까. 전문가들도 맞추기 힘든 흥행 결과를 투자자가 확신하기도 힘들고.’
그러니 가장 중요하게 보는 건 감독과 배우가 결정된 패키지 딜(package deal)이 있느냐, 있다면 얼마나 구성이 잘 되어 있느냐였다.
흥행 실적이 있는 감독과 배우가 있다면 더욱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잖는가.
-뭐, 고준혁 감독은 조금 애매하긴 해. 두 번이나 칸 경쟁 부문으로 초청받고 상까지 받았지만, 할리우드에서 큰 성과를 거둔 감독이 아니니까. 그래도 한국 시장에선 확실히 큰 성과를 거둔 건 의미가 있잖아.
“한국의 흥행 결과는 꽤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하죠.”
세계 10대 영화시장이고, 한국에서 흥행한 작품은 글로벌 흥행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꾸준히 한국에서 흥행작을 만든 감독이라면 믿고 맡겨볼 만하다.
-솔직히 감독보다 투자자들이 주목한 건 너지만 말이야.
“그래요?”
-알 건 다 아는 녀석이 의뭉을 떨기는. 지금까지 네가 고른 작품 중에 실패한 게 없잖니.
아무리 잘 나가는 배우도 보통 커리어에 먹칠하는 아픈 손가락이 하나씩은 있는 법이다. 좋은 감독, 배우, 대본이 항상 흥행을 보증해주는 건 아닌 탓이다.
그렇기에 12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작품 활동을 하면서 망한 작품 하나 없는 이안의 경력은 더욱 특별했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제작에 참여한 작품도 전부 성공했고.’
투자자들이 볼 때는 ‘이안이 참여하는 작품= 최소한 본전치기가 가능한 작품’으로 판단이 된다는 뜻이다.
팬데믹으로 축소된 영화 산업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지갑을 여는 사람들이 나올 법했다.
-그나마 의외인 점은 개별 투자자가 많이 들어왔다는 것 정도가 되겠구나.
“개별 투자자가 많다고요? 그건 진짜 의외인데요.”
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환상의 나라로 어린이와 어른이의 현금을 갈퀴로 쓸어 담는 디즈너를 제외하면 같은 5대 영화사라도 자체적으로 작품에 투자하긴 힘들고, 투자자를 모집해야 한다.
이때 개별 투자를 하는 건 주식으로 치면 한 종목을 골라 투자하는 꼴이다. 말 그대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고.
‘요즘엔 진짜 개별 투자를 잘 안 하는 편인데.’
스타 감독, 배우, 프랜차이 혹은 인기 있는 원작 같은 안정적인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작품까지 흥행에 실패하는 일이 많았고.
투자자들은 수십 개의 작품으로 묶인 포트폴리오에 투자하는 슬레이트 파이낸싱을 선택해 안전한 분산 투자를 하는 편이었다.
-나도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월가에서 네 작품이라니 관심을 많이 가졌다더라. 정확히는 너한테 관심이 많다고 봐야지.
“인맥 쌓기인가요?”
-그래, 토니상 때문에 뉴욕에 갔을 때 월가쪽 사람과 만남을 피했다며.
피했다기보단 굳이 만날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나름 월가의 거물이라는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차라리 무명 배우들과 이야기를 하는 편이 훨씬 즐겁다.
-투자자로서 나서면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가 생길 테니까. 제법 호기심이 강하게 들었나 봐.
“그러게 말입니다.”
믿고 투자하는 이안 프라이스의 작품이니 손해 볼 일도 적은데, 인연도 쌓을 수 있다? 굳이 계산기를 두들겨보지 않더라도 남는 장사다.
‘이번에 큰돈을 벌었다는 것보다 긴 기간 꾸준히 좋은 수익률을 거뒀다는 것에 관심이 생겼겠지.’
한 번에 잭팟을 터트리는 것보다 꾸준히 성과를 거두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월가 사람이라면 잘 알 테니.
그들로선 대화를 통해 견문을 넓힐 기회를 얻어도 좋고, 자본금과 인맥이 빵빵한 유명 연예인과 친분만 다져도 괜찮은 수익일 것이다.
“재밌네요. 돈을 만지는 사람들이라서 접근하는 방식도 확실히 달라요.”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지. 감독이라면 캐스팅 제안으로 접근했을 테고, 가수라면 음악 작업을 명목으로 다가가는 법이니까.
“친구 타령을 하며 접근했던 정치인은요?”
-그 인간들은 입이 가장 잘난 도구 아니겠니.
그렇긴 하지.
응당 가장 유용한 도구를 사용하곤 하는 법이니까.
“아무튼, 투자금 마련이 끝났다니 다행이네요. 우리 쪽도 순조로워요. 고용한 스태프로 세트장 구성하고 캐스팅 준비에 들어갔거든요.”
-아이고, 추가로 생긴 투자금을 빨리 넣어줘야겠구나. 그나저나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니? 조급하면 실수가 생기는 법인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일은 최대한 꼼꼼하게 하고 있어요.”
빨리와 꼼꼼하기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냐고?
‘사람을 갈아 넣으면 공존할 수 있지.’
아웃사이더 촬영이 끝나고 생긴 인력까지 재빨리 빨아들인 덕분에 그럭저럭 잘 굴러가는 중이다.
‘감독님들이 후반 작업도 순조롭다고 했으니 대략 2022년 말이면 아웃사이더는 넷플러스에 공개될 수 있겠지.’
원래도 아웃사이더 흥행은 꽤 중요했지만, 지금은 더 중요하게 됐다.
Beautiful World 때문에 지금까지 좋았던 넷플러스와는 불편한 사이가 될 가능성이 큰 탓이다.
매년 수백 개의 오리지널 작품을 만들어내는 넷플러스로선 작가 파업으로 피해를 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아웃사이더가 잘 되면 ‘어휴, 그때 좀 섭섭했습니다.’라며 넘어갈 수 있겠으나, 만약 결과가 시원찮다면? ‘그러게 퍼리 작품은 왜 찍어?!’라며 찍힐 수 있다.
넷플러스와 틀어진다고 큰 타격을 입진 않겠으나, 아쉽긴 할 거다.
‘뭐, 성공하면 그만이지. 작품은 다행히 재밌게 잘 뽑혔어.’
홍보만 잘하면 되는데, 우리 여주인공이 발 벗고 나서주기로 했으니 걱정 안 해도 좋았다.
자신은 약속한 대로 성이 드레이퍼리로 바뀌지 않도록 레아를 잘 컨트롤 하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저번에 네가 말한 이야기 있잖니. AI 관련된 부분 말이야.
작가 파업에 관련된 일은 극비에 해당했다. 많은 사람이 알아서 좋을 내용은 아니잖은가.
‘하지만 필릭스에겐 숨기면 안 되지.’
만약 예정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영화사를 운영 중인 그에게도 꽤 타격이 갈 일이니 말이다.
물론.
-주변에 알아보긴 했는데, 아직 AI로 작가를 대신하는 걸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곳은 없다고 하더구나. 너무 앞서서 걱정하는 거 아니니?
믿는 건 또 다른 일이다.
준혁이야, 자신이 할리우드 인맥이 훨씬 뛰어나다는 걸 잘 아니 믿어줬지만, 영화사를 운영하는 필릭스라면 저런 반응을 보일 법했다.
-음, 차라리 배우 딥페이크로 인한 걱정을 했다면 이해가 될 수준이란다. 너도 알다시피 그쪽 피해는 지금도 꾸준히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AI로 인한 작가 파업은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 수 있다.
‘불안감을 확 당기는 특정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말이야.’
2022년 말에 툭 하고 튀어나온 대화형 인공지능이 그 계기였다.
출시한 곳도 대중의 피드백을 수집할 겸 맛보기 버전을 내놔봤을 뿐이다. 설마 제대로 된 광고도 없는 채팅 프로그램이 이렇게 빵 뜰 줄은 정말 아무도 몰랐다.
‘생각보다 뛰어난 성능에 AI 시대가 생각보다 가깝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작가들의 불안감이 폭발할 줄은 더 몰랐겠지.’
세상일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믿기 힘드신가요?”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믿지 않았겠지만, 네가 한 말이잖니. 내가 보지 못한 무언가를 보고 그런 말을 했겠지.
화상회의가 나오는 화면에서 필릭스가 은은한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날 걱정해서 해준 말인데 어떻게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겠니.
그의 말이 이성적으론 옳지만, 진심 어린 충고가 쉽게 무시되는 일은 허다하게 벌어진다.
특히 지금처럼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는 말이라면 더욱.
최대한 믿고자 하는 노인의 노력 자체가 이안으로선 고마울 따름이었다.
“제 말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괜찮으시겠어요?”
-미국 제작사 연맹부터 시작해서 주변에서 귀찮은 소리를 꽤 듣겠지. 이권이 달린 일이니까.
알고 지냈던 친구, 지인이 압박을 줄 게 뻔했다. 평소 사이가 나빴던 이라면 배신이라며 노골적인 비난을 쏟아낼 수도 있고.
그걸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필릭스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 나이를 먹고 무서울 게 뭐 있겠어. 이번 기회에 은퇴나 하면 그만 아니겠니.
“…은퇴요?”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된단다. 영화 촬영이 그렇게 좋다는 아이작, 그 녀석도 은퇴했는데 직장인이 은퇴하는 게 무슨 대수라고.
흐려진 이안을 보며 위로하듯 웃은 그는 안경을 쓱쓱 닦아냈다.
한층 더 깊어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팬데믹 기간에 여러 생각이 많이 들었어. 나야 네가 여러모로 신경 써준 덕분에 무사히 지나갔지만, 알고 지낸 사람들이 제대로 인사도 못 받고 많이 떠났단다. 안타까운 일이지.
백신이 나오고, 바이러스의 치명률이 떨어지며 팬데믹이 어느 정도 진정 국면에 들어갔어도 사람들에게 남기고 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고, 친구들을 잃은 노인은 흔한 일이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인생이라면 최대한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니. 그래서 은퇴도 생각하고 있었단다. 네 말대로 된다면 마지막으로 화려한 불꽃을 피울 수 있을 테니 좋은 기회 아니겠니.
“정말 은퇴하실 생각이군요.”
말릴 여지도 없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하하하, 아이작을 보니 은퇴해도 죽는 건 아니더구나. 요즘 대학에 특별 강의도 다니고, 제 손자 녀석을 가르친다고 바쁜 걸 보니까 말이야.
“은퇴하시면 뭘 하시려고요?”
-뭘 당연한 걸 묻니.
그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미식 여행을 다녀야지.
…그래, 그럴 거 같긴 했다.
정확히는 미식이 아니라 괴식이지만.
-은퇴하면 가끔 만나서 밥이나 먹자꾸나. 설마 은퇴했다고 뒷방 늙은이 취급하며 안 만나주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러겠어요? 밥 먹는 게 뭐 어렵다고요.”
손사래를 치며 대답하던 이안은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내렸고, 언제 왔는지 꼬리를 살랑이는 레오와 크림이가 보였다.
-냐앙!
-멍!
사뿐히 뛰어올라 무릎에 자리 잡은 고양이와 앞발을 의자에 올린 개의 머리를 쓸어주며 깜빡한 사실을 떠올렸다.
“아, 되도록 냄새가 안 나는 음식으로 부탁해요. 이 두 녀석이 질색하거든요.”
-까다롭긴 하지만, 한 번 찾아보도록 하마. 같이 밥을 먹을 친구는 귀하거든.
찡끗 장난스레 윙크한 필릭스와 통화를 끝낸 이안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Beautiful World 제작의 윤곽이 완벽하게 잡혔다.
***
추수감사절과 함께 연말 분위기에 접어들었다.
연예계에선 팬데믹 시기라서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작년 연말과 달리 이곳저곳에서 파티가 열렸다.
제대로 된 연말 분위기로 들뜬 분위기가 흘렀을 때, 기사들이 흘러나왔다.
-Pryce’s Production, 한국의 고준혁 감독과 이안 프라이스가 함께 작품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혀.
-Beautiful World는 무슨 작품인가. AI와 관련된 SF 장르로 밝혀져. 상세한 내용은 비밀.
-투자자 모집은 끝났다. 내년 초를 목표로 잡고 준비 중인 Beautiful World!
온갖 흥미로운 뉴스가 많은 시기이니 새로운 작품이 하나 준비 중이라는 건 대중의 관심이 쏟아질 건 아니었다.
특히 고준혁 감독은 일반인에겐 낯선 이름이고, 이제 제작 준비에 들어간 작품이니 더욱.
하지만 관심을 둘 사람들은 있었다.
“어이, 벤! 이번에 프라이스가 들어가는 작품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나도 몰라, 이 자식아. 요즘엔 나한테 얼굴도 잘 못 비춘다고.”
“뭐야, 안 놀아준다고 삐졌냐?”
“닥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안의 작품이다. 제작되는 작품도 줄어든 상황이니 배우들과 에이전트들은 캐스팅 정보를 얻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고.
-…어라, 이안아. 새로운 영화에 들어간다고?
└월드 투어 해주기로 약속했잖니! 새로운 작품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뭐야. 우리 월드 투어 돌려줘요.
└응, 그런 거 없었어.
└캬! 이거지. 토니상까지 탔으니 오스카를 위해 달릴 때가 됐지!
└야, 울지 마. 그래도 콘서트 정도는 몇 번 열어주겠지.
└염병! 그거로 누구 코에 붙이라고!
-너무 추워. 가수 팬으로 살기엔 너무 힘든 세상이야.
└야, 너도 배우 팬 할 수 있어.
└꺼져! 너흰 퍼리 녀석하고 아웃사이더나 보라고!
└혹시 알아? 이번 영화에선 OST를 불러줄지.
└가수 팬들 빼고 다 나가줄래. 우리끼리의 시간이 필요하거든.
이안의 일정이 정해지자, 팬 사이트는 왁자지껄 시끄러워졌다.
분위기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네. 하긴 진짜 시작은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가 시작된 후부터라고 봐야할 테니까.”
딱 내년 이맘때쯤이다.
남들보다 1년 먼저 움직일 수 있다. 이 시간을 절대 낭비해선 안 됐다.
‘그러고 보니 벌써 은퇴식을 준비하는 건 두 번째네.’
아이작 감독님에 이어서 필릭스까지.
믿고 일을 맡겨줬으니 그에 보답하는 게 옳았고, 이번에도 최대한 화려한 불꽃을 피워주고 싶었다.
“그러면 내가 동원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더라. 역시 첫 번째는 영원한 비즈니스 파트너, 로티를 빼놓을 수 없겠지.”
샬럿이 들었다면 ‘멈춰, 이 자식아!’를 외쳤겠으나 애석하게도 여기엔 없었다.
이안은 콧노래를 부르며 쓱쓱 두 번째 은퇴식 계획을 세워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