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13)
Beautiful World(2)
촬영장을 저택으로 고른 건 분명 최선이었다.
훌륭한 관광지를 여럿 다니며 눈이 높아진 스타들이 반년 가까이 얌전히 지냈을 정도로 주변 풍경은 아름답고.
마음껏 촬영에 맞게 저택을 마개조 해도 집주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집주인이 촬영이라면 아름다운 저택을 흉가로 만들어도 OK를 외칠 인간이니까.
결국 모두가 동의할 정도로 완벽한 촬영 현장이지만…
‘눈치 빠른 사슴들이 파수꾼을 자처할 줄은 몰랐지.’
큰 문제는 없었다.
이안이 없는 걸 확인한 사슴무리가 단물 빠진 껌을 뱉듯 관심도 주지 않고 떠나서 왠지 모르게 스태프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 빼곤 괜찮았다.
뭐, 냄새를 맡은 건 확실한 듯 저택 주변을 사슴들이 서성거린다는 보고가 들어오긴 하는데.
‘거긴 그런 게 일상이니까.’
오죽하면 저택 관리인이 동물원에 취직한 것 같다는 말을 했을까.
이 약간의 트러블을 제외하면 Beautiful World 촬영 준비는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일단 가장 중요한 캐스팅이 완료됐고.
“벤이 왜 여기 있어요?”
“왜긴. 캐스팅됐으니까 여기 있지. 어때, 깜짝 선물은 벤 로버츠였습니다.”
“…거부되나요?”
“구두 계약을 받은 상태라서 안 된답니다.”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은 벤은 조율 중인 출연 계약서를 흔들었다. AI 기업의 대표이자, 악역인 리암 길모어로 캐스팅됐다는 증거였다.
오디션 목록에 없던 그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공범이 없다면 이뤄지지 않을 일이고, 누군지 알아맞히는 건 너무 쉬웠다.
“올리버가 도와줬죠?”
“문제가 너무 쉬웠나?”
든든한 동업자인 올리버는 벤이 주연으로 나온 Sucker punch의 감독이었다. 둘이 친분도 두터우니 최종 오디션에 갑자기 사람 하나 추가하는 건 일도 아니다.
벤은 혹시 오해하지 않도록 말을 덧붙였다.
“깜짝 놀라게 비밀로 해달라고 했지만, 딱 거기까지야. 캐스팅은 정정당당하게 뽑혔거든.”
“그랬겠죠.”
그건 의심하지 않는다.
고준혁 감독이 인맥과 인기를 앞세운 압박으로 캐스팅을 할 사람도 아니고, 벤은 화려한 사생활을 자랑할 때도 연기에 대한 열정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러니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렇게 안 했을 거다.
‘벤 정도면 원래 최종 오디션까진 다이렉트지.’
보고 누락이 끝인데, 어차피 준혁에게 최종 오디션을 완전히 맡긴 만큼 알았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다만.
“뭐하러 숨겼어요? 그냥 오디션 본다고 하면 됐죠.”
“야, 내가 오디션 봤다는 걸 너한테 말해봐. 데미안, 그 녀석이 분명 달라붙었을 거라니까. 출연 계약서를 보면 엄청 분해할 걸.”
펄쩍 뛰며 부러워할 데미안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트리던 벤은 미소를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출연한다고 하면 최대한 막으려고 할 거였잖아. 좋은 작품을 소개해주든, 이상 논리를 들먹이든. 뭐라도 했겠지. 아니야?”
…귀신인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헛웃음을 터트리는 이안의 머리를 벤은 거칠게 털었다.
“연말에 딥페이크 보면서 혼자 열심히 머리를 굴렸잖아. 샬럿도 따로 만나고. 그러고 보니 네가 급하게 제작하는 작품도 주제가 AI네? 뭔가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눈치챘지.”
“이상하다. 벤이 그렇게 똑똑할 리가 없는데.”
“야, 혼날래?”
장난스레 으름장을 놓은 벤은 어깨를 으쓱였다.
“뭘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물밑에서 열심히 움직이는 걸 보면 꽤 시끌벅적한 일 아니야? 우리에게도 쉽게 말 못 할 정도로. 무슨 일인지 굳이 들을 생각은 없어.”
“궁금하면 말해줄 수 있는데요?”
“됐어. 들어봐야 머리만 아프지. 간단하게 생각하자고. 나는 배우야. 좋은 작품이 있으니 연기를 한다. 이거면 되지. 어차피 흥행을 위해선 괜찮은 배우 하나쯤은 더 필요하잖아?”
겸손한 말이다.
긴 세월 그가 쌓아놓은 인기를 생각하면 출연료로 제작비를 한 움큼 떼어줘도 흥행에는 큰 도움이 될 거다.
‘벤 정도면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도 큰 타격을 보지도 않을 테고.’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말릴 수가 있나.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참여했다는 걸 느낀 이안은 고개를 가볍게 내저으며 말했다.
“좋아요. 잘 부탁해요.”
“좋아! 빨리 계약서에 사인하고 데미안이나 놀려야겠네.”
계약 조율은 원만하게 이뤄졌고.
-야! 그것 좀 놀렸다고 이러기 있냐?!
-안! 빨리 가서 쪼아!
-꾸에에엑!
공작새 무리에 쫓기는 벤의 영상이 데미안의 SNS에 올라왔다.
둘의 두터운 우정을 확인할 수 있는 영상이었다.
아무튼, 캐스팅이 완료되고 2월 말에 진행된 대본리딩도 일사천리로 마무리됐다.
믿고 고용하는 캐스팅 디렉터, 아델리아의 선택을 받은 배우들은 실력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니 당연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일정이 끝나고 약간의 숨 고르기가 지나고 본격적인 촬영 일정이 시작됐다.
첫 번째 촬영지인 저택으로 갈 날이 됐다는 뜻이다.
“오랜만이네.”
우거진 숲을 뚫고 길게 이어진 길.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인간의 흔적을 따라 쭉 가니 눈에 익은 풍경들이 보였다.
슬슬 자가격리를 하겠다고 신세를 진 공터가 보일 때였다. 아마 사유지라고 길을 막지 않았다면 성지순례를 하러 올 관광객이 많지 않았을까.
아직도 드루이드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으…
덜컹!
길을 따라가던 차가 천천히 멈춰섰다.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됐다.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니.
공터에는 통행세를 걷는 산적처럼 사슴무리가 진을 치고 있었고, 길을 막고 불시검문을 하던 사슴 중 하나가 쪼르르 달려왔다.
-끼잉!
성체다.
주홍 몸체에 꽃이 피듯 새하얀 점을 수놓은 사슴은 묘하게 익숙했다. 반가운 기색으로 창문을 핥는 걸 보니 확신이 들었다.
덜컹 문을 연 이안은 다리에 얼굴을 비비는 녀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줬다.
“잘 지내고 있었구나.”
-낑!
새끼 때처럼 울음소리를 낸 사슴은 예전에 껌딱지처럼 안 떨어졌던 그 녀석이 확실했다.
건강하게 잘 자랐다는 생각에 반가워하던 이안은 고개를 들고 흠칫 놀랐다. 어느새 사슴 무리가 주변에 잔뜩 모여들었다.
곤란하다. 도저히 차들이 지나갈 수가 없다.
한숨을 쉰 이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먼저 들어가요. 상대 좀 하다가 들어갈게요.”
발걸음을 옮겨 사슴무리를 우르르 이끄는 이안의 희생을 보며 스태프들은 감탄했다.
“역시 본업이 드루이드라니까.”
…아니야. 그리고 사진 찍지 마.
연신 감탄하며 사진을 찍는 스태프들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끼잉?
모르겠다. 홍보할 때 도움이 되겠지, 뭐.
***
능력의 온, 오프 기능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촬영에 방해될 일은 없으니 말이다.
“와, 피부 진짜 좋네요.”
분장팀의 스태프가 감탄하며 빠르게 손을 놀렸다. 좋은 피부 덕분인지 약간 앳돼 보이던 이안의 얼굴이 손이 스칠 때마다 초췌한 얼굴로 변해갔다.
얼굴에는 음영이 졌고 눈가에는 피로함이 쌓였다. 검은 머리카락은 일부 염색해 새치처럼 보이는 흰머리를 만들어냈다.
긴 시간을 들여 파릇파릇한 얼굴을 세파에 찌든 얼굴이 됐다.
“어때요?”
“훌륭하네요.”
제대로 빨래도 안 한 듯한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아웃사이더 촬영을 하면서 힘들게 만든 근육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도망치듯 숲 속 저택에 틀어박힌 주인공, 안소니 역을 위해 일부러 근육을 뺏으니 말이다.
“왔어?”
촬영장이 된 저택에서 준혁은 분장을 마친 이안을 반겼다.
“분장팀이 멀쩡한 얼굴을 망쳐서 죄책감을 느낄 만하네.”
“작품에 어울린다는 뜻으로 알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피폐한 분장을 한 이안은 오히려 퇴폐미가 느껴질 정도였다.
설정이 유명 배우이니 과하게 망가진 모습보단 나을지도 모른다.
준혁은 이안을 보며 물었다.
“어때? 네가 말한 대로라면 꽤 시끌벅적한 시간을 보내야 할 텐데 말이야.”
“두근거리네요. 첫 촬영은 언제나 이런 느낌이거든요.”
정말 즐겁다는 듯이 해사하게 웃은 이안은 살포시 발을 디뎠다.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수천, 수만 번을 반복한 일이지만, 언제나 설렘이 느껴졌다. 이 세상에서 배우 일이 가장 즐겁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였고.
“그럼 빨리 촬영을 하죠.”
다른 이야기는 불필요하다.
당장이라도 연기를 하고 싶어하는 모습에 준혁은 가볍게 웃었다.
노련한 제작의 모습도, 촬영장을 시작부터 떠들썩하게 만든 드루이드 같은 모습도, 제법 흥미로운 모습이었으나.
가장 이안이 빛이 나는 모습은 카메라 앞에 설 때였다.
잠시 후 카메라가 돌아가며 Beautiful World 첫 촬영이 시작됐다.
슬레이트 소리와 함께 이안의 눈동자가 차갑게 죽었고 당당하게 펴진 어깨가 축 늘어졌다.
뛰어난 배우들과 여럿 촬영한 스태프들도 속으로 감탄사를 흘렸다.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 속도도 놀랍지만, 감정의 깊이가 남달랐다.
벼랑 끝에 선 위태로운 느낌과 처참하고 슬픈 울분이 응어리진 게 표정과 사소한 행동에서 묻어나왔다.
대본리딩을 보긴 했으나, 그때는 장난이라는 것처럼 절망의 무게감이 보는 사람까지 짓누르는 느낌이다.
주변의 감탄을 이안은 가볍게 흘려넘겼다.
‘어쩌면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기가 이런 연기겠지.’
배우의 연기에는 경험과 관찰이 큰 역할을 한다. 그런 면에서 이안의 삶은 절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마약으로, 투자 실패로, 배신으로 등 다양한 문제로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들이 노숙자고, 한 번 바닥으로 떨어진 인생은 다시 날아오르기 힘들었다.
어떻게든 약을 끊어보겠다고 밤새 몸을 벅벅 긁으며 신음하던 이는 어느 날 보면 다시 약에 취해 길거리에서 비틀거리고 있고.
다시 살아가기 위해 일거리를 찾고 발버둥 치던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높아 보이는 일반인의 삶에 태반이 모든 걸 내려놓는다.
이안은 그들을 가까이서 봤기에 한심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배우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칠 때마다 수많은 절망에 부딪혔으니까.
‘그리고 저번 환상을 통해 이런 삶을 다시 되짚었어.’
아, 저 사람은 저러하다 홀연히 사라졌지.
이때 굉장히 힘들었는데.
토니상 수상 후 보인 환상은 이런 인생을 다시 되짚게 했다. 회귀 후 행복한 일상에 애써 묻어놓은 기억들이었다. 그때 기억에 파묻힐까 걱정한 탓일지도 모른다.
분명 생각처럼 다시 보기 힘든 기억이었다. 지나간 일이라도 포장하긴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이고.
‘그래도 눈을 감기보단 일단 담아냈지.’
마음에 난 상처가 덧날 때까지 내버려 둘 수밖에 없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어떤 아픔도 잊을 수 있게 하는 사람들이 옆에 있으니 말이다.
올바른 선택이었다.
굴곡진 인생을 산 노인처럼 한층 더 깊이감을 더한 연기는 처음부터 촬영장을 압도했으니까.
“어렸을 때도 괴물 같았는데. 지금은 더하네.”
“그러게요.”
“욕심이 아주 가득해.”
준혁은 고개를 갸웃하는 스태프에게 말을 이었다.
“마치 내가 이렇게까지 연기가 되는데 너희가 아무것도 안 줄 수 있어? 라고 묻는 거 같잖아.”
I’m okay 때는 오스카 후보에도 못 들었다고 했나. 아직 어린 나이인 만큼 선정을 꺼렸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근데 이번 작품을 보고도 평가를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AI로 망쳐진 인생과 절망에 빠진 안소니의 삶이 밀도 높게 그려졌다.
스스로 격리된 저택에 낯선 방문객들이 찾아온 것을 시작으로 영화의 분위기는 서서히 달라졌다.
안소니의 삶을 빼앗은 AI 기업에 배신당한 프로그래머, 딥 페이크를 활용한 포르노로 괴롭힘을 당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딸을 둔 전직 경찰 아빠.
자신의 얼굴이 아닌 유명 배우의 얼굴로 연기를 해야 하는 무명 배우, AI 사용에 불만을 느끼다 쫓겨난 전직 프로듀서.
AI로 삶이 바뀐 네 명의 사람이 찾아왔다.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보다 복수하는 게 어때?”
“복수?”
“그래.”
낯선 방문자들에게도 흥미를 보이지 않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아직은 미약한 흥미.
“리암, 그 작자는 이런 기술로 자신들은 피해를 볼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하지 않나.”
“실제로 피해를 보기 힘들기도 하지.”
“본인들 얼굴에는 락이 걸려 있으니까?”
돈을 지불하면 얼굴이 남용되는 걸 막아주겠다. AI 기업들의 새로운 장사 수단이며 자신들을 보호하는 수단이었다.
“그 락을 풀 수 있다면요.”
프로그래머는 자신의 노트북을 톡톡 두들겼다.
“어때요. 함께 할 생각이 있어요?”
“…내가 뭘 하길 바라는데.”
이젠 몸을 일으켜 묻는 안소니에게 대답했다.
“연기하는 거요. 당신이 그들이 되어줬으면 좋겠어요. 우리를 도와줄 만한 뛰어난 배우는 당신이 제격이더라고요.”
수많은 가짜로 몰락한 배우에게 가짜가 되어달라라.
안소니는 이 아이러니함에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뻗었다.
“재밌겠네.”
“그렇죠?”
다섯 명의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Beautiful World의 서장이었다.
***
찬 바람이 서서히 물러나고 완연한 봄이 되었을 때.
순조로운 촬영이 이어졌고.
-레아 드레이퍼, 자신은 퍼리 팬덤이다. 아웃사이더 홍보를 위한 만우절 농담.
만우절 농담으로 숨긴 진실에 심장이 철렁해진 사람들이 전화를 걸었다.
-정말 문제 없게 해줄 거라고 믿겠네.
드레이퍼리 가문이 될 순 없다.
간절함이 느껴지는 전화에 이안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아웃사이더 홍보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봄이었다.
내부 시사회
한 달가량 이어진 Beautiful World의 촬영은 순조로웠고, 고준혁은 촬영 영상을 살펴봤다.
이미 수차례 반복해서 본 이안의 연기를 유심히 바라봤다.
다른 스태프야, 편집할 때 못 해도 수십 번은 볼 영상을 뭘 그렇게 벌써 열심히 보느냐고 했지만.
‘잘 할 줄은 알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잘 소화해냈어.’
같은 영화를 N차 관람하는 관객이 된 것처럼 반복해서 볼수록 영상은 새롭게 다가왔다.
Beautiful World의 주인공 연기는 어렵다.
어지간한 배우라면 난처한 미소를 흘릴 정도로 말이다.
작품 초중반 주인공은 복수를 위해 안티 딥페이크 서비스로 보호받는 사회 고위층을 연기해야 했다.
설정상 딥페이크의 완성도를 위해선 외견과 목소리 변조를 입힐 배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렵지. 주연은 열댓 명의 인간을 연기해야 해. 그것도 그 사람의 행동과 억양 같은 걸 고스란히 따라 하면서.’
영화를 보는 사람이 진짜 똑같이 연기한다는 감탄사를 끌어내야 복수를 꿈꾸는 사람들이 힘들게 안소니를 찾아온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니 배우는 열댓 명의 특징을 분석할 수 있는 관찰력과 그걸 따라 할 표현력이 필요했다.
“이것뿐만이 아니지. 감정선이 짙은 주인공도 연기해야 하잖아.”
안소니는 절대 평면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초반에는 망가진 삶으로 절망하는 안소니는 자신의 복수로 곤경에 빠진 악역 리암을 보며 통쾌해하는 한편 저들과 다른 바 없지 않나 싶어 인간적 고뇌에 빠진다.
한 마디로 다양한 인물을 연기하면서 주인공의 감정 변화까지 연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배우를 찾는 건 진짜 어렵지.’
뛰어난 배우라도 한 방면에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지 않나.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낼 수 있는 육각형 배우면서 그 고점까지 높아야 하는 만큼 수많은 배우 중 안소니를 훌륭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는 한 줌이었다.
지난 촬영을 통해 준혁은 확신했다. 이안은 그 한 줌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흩뿌리는 배우였다.
기대한 것 이상의 연기를 보여줬으니 말이다.
“자자, 놓고 가는 물건 없이 잘 챙겨! 나중에 신세 진 관리인을 귀찮게 하지 말고.”
“잔소리는. 알고 있다고요.”
저택에서 촬영하는 분량이 끝나고 철수를 준비하는 스태프들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담겼다.
“여길 떠나네. 꽤 재밌었는데.”
“그러게 말이야.”
장소부터가 좋았다. 주변 풍경도 좋고 저택인 만큼 기본적인 시설도 좋았다.
지방 촬영하면 싸구려 모텔방을 전전하는 게 기본인 스태프로선 주변 인가도 없는 만큼 텐트를 치고 지낼 것도 각오한 상황에서 기대 이상의 생활이다.
‘뭐, 문제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주로 상습 출몰하는 사슴 녀석들이 문제였다.
밤에 몰래 저택에 침투하는 암살자 타입부터 밤에 소리를 지르는 고성방가 타입도 있었다. 촬영에 쓰는 케이블을 씹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
거기에 귀엽다고 다가가면 뭘 보냐는 듯이 꼬나보기 일쑤였다.
-끼잉!
“그래, 잘 지내고. 또 온다니까.”
…아주 이안 앞에서만 얌전하지.
머리를 비비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는 사슴들과 인사를 나눈 이안을 보며 스태프들은 촬영 전에 한 고사를 떠올렸다.
한국에선 촬영 때 보통 빠지지 않는 행사고, 이안도 작품마다 고사를 치르는 거로 유명하지 않나.
상을 차리고 고사를 시작하는 것까진 평범했는데.
“…너희가 여길 왜 왔냐.”
-끼잉?
어느새 우르르 몰려온 사슴무리가 고사에 참여하는 건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안이 절을 할 때는 따라 하듯 바닥에 앉는 녀석까지 있을 정도였다.
“드루이드가 아니라, 산신령이었나.”
한국 스태프 사이에서 새로운 별명이 생긴 순간이기도 했다.
나중에 홍보할 때 쓴다고 고이 영상을 모셔둔 상태였고, 아마 나중에 공개하면 반응이 쏠쏠할 만한 영상이었다.
작별 인사를 끝낸 촬영팀은 차에 올라탔다.
LA로 돌아갈 때였다.
***
LA 세트장에서 촬영이 시작되고 이안이 나오지 않는 분량 촬영이 시작되며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물론 Beautiful World 일정이 비었다는 뜻이지 아무런 일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우선 오스틴, 닉과 함께 팬미팅과 콘서트를 준비해야 했다.
다른 준비는 몰라도 대관은 서둘러야 하니 말이다. 자칫 여유를 부리다간 만 석 규모의 비교적 작은 장소를 선택할 수밖에 없고.
-이안이안아, 이번 콘서트는 만 석이라고?
└…우리 애가 착한 건 맞죠?
└착한데 사람 마음은 잘 몰라요.
└으아아악! 이아아안!
팬 사이트가 발칵 뒤집힐 게 뻔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결정한 게 팬 미팅은 저번처럼 다섯 개 대도시에서 한 번씩. 콘서트는 미국 서부와 동부에서 2주씩 총 8회 공연을 하는 것으로 잡았다.
대관과 함께 알려진 소식에 팬들이 환호하는 건 당연했다.
-설마 만우절 장난은 아니겠지?
└이미 지났다고, 이 자식아!
└???: 아, 만우절이 벌써 지났나요? 촬영 때문에 바빠서 몰랐네요.
└…아니라고. 이 자식아.
-이 속도로 늘어나면 내후에는 월드 투어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응, 팬미팅은 안 늘어났어.
└일 년에 8회가 최대일 거 같은데.
└제발 줄어들지만 마라. 응?
└???: 짜잔, 절대란 없군요.
-가수 팬들은 팬미팅에 안 오는 게 맞다고 본다. 너희는 콘서트가 있잖아.
└하? 누구 마음대로.
└속보) 퍼리 팬과 사이비들 대거 팬미팅 참석 시도.
└…내가 잘못 생각했다. 꼭 티케팅에 성공해라.
└너희도.
티켓팅도 멀었는데 벌써 팬 사이트는 축제 분위기였다. 물론 티켓팅이 끝나면 분위기가 장례식으로 바뀔 예정이지만.
거기에 아웃사이더 관련된 일정이 있었다.
우선 레아를 만나야 했다.
학생들이 만우절을 핑계로 ‘나 사실 널 좋아해’ 같은 고백을 하는 것처럼 장난스레 커밍아웃하며 드레이퍼 가문의 심장을 철렁하게 만든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부모님이 좋아하는 건 좋은데 제발 겉으로 티 안 나게 조심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어느새 정계 명문가의 망나니로 진화한 모습이다.
배우를 때려치우라는 압박을 주기는커녕 아무리 그래도 드레이퍼리는 안 된다! 라는 간절함이 담긴 연락을 받은 상태였다.
“퍼리 팬덤인 건 드러내지 않아야 해요. 알죠? 밝혀지면 진짜 잃을 게 없어지니 더 크게 압박할 게 뻔하거든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꼭 명심할게요.”
“대신 홍보 명목으로 퍼리 축제 같은 데 참석할 수 있도록 준비해드릴게요.”
“와! 진짜 고마워요!”
레아의 은밀한 취미를 홍보로 엮어 드레이퍼 가문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정은 아웃사이더의 내부 시사회였다.
공개 예정일로 잡은 11월까진 반년가량 남은 상태였고 편집도 어느 정도 마무리됐으니 슬슬 내부 시사회를 할 때니까.
여러모로 화제작인 아웃사이더인 만큼 모여든 사람도 꽤 많았다.
“이안, 오랜만이네요.”
“직접 만나는 건 오랜만이죠? 수잔.”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은 넷플러스의 콘텐츠를 담당하는 수잔은 아웃사이더의 제목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만들긴 만들었네요.”
“하하하, 허가를 내린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아요?”
주연 배우 이안, 감독으로 게빈과 랜든이며 각본은 아멜리아다.
퍼리 작품도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볼 수밖에 없는 구성을 들이밀고는 저런 말을 하다니 묘하게 얄미웠다.
‘제안서를 반려했어도 말이 나왔을걸. 좋은 기회를 왜 놓쳤냐고.’
게빈 감독만 해도 돈만으로 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런 감독을 쉽게 자기 작품에 참여시키는 이안이 말도 안 되는 인간인 거고.
A급 스타쯤 되면 인성이 개차반이지 않은 이상 꽤 화려한 인맥을 갖게 되지만, 중요한 건 얼마나 관계가 끈끈한지다.
그런 면에서 두 감독은 이안을 거의 손자처럼 여기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 오늘은 기대해도 괜찮죠?”
“글쎄요. 저도 편집이 끝난 영상은 오늘 처음 보는 거라서요. 그래도 적어도 실망하진 않을 걸요.”
원래 자기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수백 번 같은 장면을 편집하다 보면 아무리 감동적인 장면을 봐도 아무런 감상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여기에 ‘이 정도면 재밌지 않나?’ 같은 자리 합리화를 한 스푼 더하면.
괜한 자신감만 가득한 상태가 된다.
그렇기에 필요한 게 내부 시사회다.
작품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필요하다면 작품을 갈아엎다시피 해서 정상화시킬 수 있는 마지막 찬스 같은 거니까.
“그럼 한 번 보죠.”
아웃사이더 제작진과 넷플러스 관계자, 엠바고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기자와 평론가까지.
내부 시사회가 조용히 시작됐고.
‘…재밌네?’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아닌 만큼 작품을 가장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기자와 평론가는 놀랐다.
아웃사이더는 제작 전부터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중간중간 이안이 홍보를 하면서 관심이 끊기지 않도록 노련하게 행동했고, 퍼리 팬덤을 향한 폭행을 막는 거로 관심은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아무리 홍보를 잘해도 중요한 건 작품이고, 제작진은 이걸 절대 잊지 않은 듯했다.
인간과 수인이 처음 만나 벌이는 코미디 요소도 좋았고 후반으로 넘어갈수록 제작비를 갈아 넣은 액션 장면도 훌륭했다.
호불호가 갈릴 요소를 빼고 재미만 따졌을 때는 크게 흠잡을 곳이 없는 작품이다.
긴 상영이 끝나고 여러 칭찬이 쏟아지는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질문은 역시 하나였다.
“이거 시즌제인가요?”
6화짜리 드라마이며 끝은 인간과 수인이 더불어 살기 시작하는 모습이다. 인기만 있다면 확장성은 충분히 있는 상태였다.
마약 갱단에서 활약하는 적대적 수인 캐릭터 같은 걸 넣는 것처럼 말이다.
시선이 쏠렸다. 작품 완성도를 보고 흥행을 반쯤 확신한 수잔도 눈을 빛내니 이안은 머리를 재빠르게 굴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퍼리 드라마의 시즌 2? 일단 굳이 라는 생각이 먼저 튀어나왔지만.
“아직 성과도 안 나왔는데 시즌2 이야기는 시기상조 같네요. 결과를 보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입 밖으론 다른 말을 꺼냈다.
지극히 원론적인 말이나, 분명 시즌 2를 열어놓는 발언이다. 다들 동의를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시사회가 끝이 났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게빈이 물었다.
“진짜 시즌 2 생각이 있니?”
“아뇨. 별로 없는데요.”
아멜리아와 레아가 들었다면 왜?! 라며 펄쩍 뛰었을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어지간히 성공하지 않는 이상 굳이 만들 필요는 없죠. 제작하고 싶은 작품도 많거든요.”
“하긴 괜찮은 대본을 많이 구했다고 했지?”
“네.”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낼름 삼킨 대본이 한 둘이 아니다. 그것만 해도 한동안 제작사가 바쁠 예정이고.
나름 이쪽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게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벌써 딱 잘라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 가능성만 열어놨을 뿐이구나.”
“그렇죠.”
정확히는 Beautiful World 후에 밀려올 후폭풍을 대비하는 과정이다. 파업에 적극적으로 지지하면 넷플러스와 관계는 어느 정도 틀어질 수밖에 없다.
‘이때 시즌2를 엎어버리면 되겠지.’
자신과 사이가 나빠지면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인식을 안겨줄 수 있으면 된다. 그럼 너무 감정적으로 나오지 않을 테니까.
물론 시즌2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어느 정도 성공해야겠지만.
‘반응을 보니 꽤 괜찮게 성공할 거 같으니 그건 걱정 없어.’
작품을 퍼리 팬덤을 타겟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일반인도 즐길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쓴 보람이 있었다.
별다른 거부감도 안 보였고 오히려 수인을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다른 소수 집단을 상징하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꿈보다 해몽처럼 보여도 이상한 건 아니다.
PC 사상이 퍼지면서 불편함을 느끼는 시선이 늘어난 상황이고 자칫하면 ‘이거 인종차별 아닌가요?’ 같은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시대다.
이걸 회피하기 위해 게임 같은 곳에선 집시처럼 차별받은 이들을 수인으로 표현하곤 하니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역시 훌륭한 계획이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던 이안에게 게빈이 물었다.
“그러다 엄청 크게 성공하면 어떡하려고. 시즌 2 압박이 엄청 크게 들어올 텐데.”
“에이, 퍼리 작품인데 성공하면 얼마나 성공하겠어요.”
퍼리 팬덤의 힘과 이슈 몰이도 꽤 했었으니 1위 한 번을 찍고 적당히 순위가 흘러내리지 않을까?
으레 괜찮은 성과를 보인 작품들이 그러하니 딱 그 정도를 예상했다.
호평 속에 끝이 난 내부 시사회는.
-11월 공개 예정인 아웃사이더 내부 시사회에서 호평을 받아.
짧은 기사와 함께 여러 사람의 기대감을 끌어모았다.
전야제
Beautiful World 촬영도 어느덧 막바지에 도달했다.
자고로 촬영이란 무엇인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일이 빈번한 현장이다.
누군가 몇 번 콜록이더니 우르르 독감에 걸리는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고, 제발 0.8인분이라도 해줬으면 싶은 낙하산 스태프가 대형 사고를 치기도 한다.
한 한국 스태프의 말로는.
“세상의 모든 억까란 억까는 전부 당하는 느낌이 들어야 진정한 경력직이라고 할 수 있지.”
이야, 이번 작품 잘 되겠는데? 개봉일만 기다리는 작품에 감탄하고 눈을 떠보니 8시 뉴스에 주연 배우가 나오는 걸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의 증언이었다.
뭐, 굳이 이런 대형 사고가 아니더라도 사람이 하는 일인 만큼 끝없는 버그처럼 자잘한 사건 사고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너무 순조로웠어.’
고사 효과를 덕 볼 필요도 없이 착착 돌아가는 촬영.
순조롭다고 좋아하기도 잠시지 이쯤 되면 불안감이 싹틀 수밖에 없다.
“그래요. 우린 이걸 폭풍전야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운수 좋은 날을 현실로 경험하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야.”
이안과 준혁은 머리를 맞대고 중얼거렸다.
옆에 스태프가 있었다면 재수 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했겠지만, 둘은 이미 예정된 미래를 알고 있지 않나.
-올해 연말 언어 모델의 결함 일부를 해결하기 위해 조만간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가 출시될 예정.
월가에서 뿌려지는 정보 중 무수한 활자 속에 파묻힌 내용이었다.
이안이 연예계를 뒤집어 놓다시피 하며 미래를 꼬아 놨다고 해도 ‘할리우드? 그건 모르겠고.’를 외치는 실리콘밸리는 역사대로 잘 돌아갔다.
기술 발전이 계기가 된 작가 파업도 멈추지 않는 시한폭탄처럼 머지않았다는 뜻이고, 얼마나 큰 게 오려고 촬영이 이렇게 순조롭나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일이 생기길 바라는 것도 웃기고.’
이안은 가볍게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봤다.
타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무서웠으면 어차피 배우 일을 하지도 못했을 거다.
Beautiful World의 대본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이 영화는 단순히 AI 기술이 나쁘다고 주장하려는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AI는 일종의 도구고, 이걸 악용하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명시절 찍은 스캔본을 활용한 영상으로 안소니는 온갖 유언비어에 시달렸다.
영상 속 그는 다른 배우와 불륜 포르노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고, 타인을 비방하기도 했고, 인종차별을 찬양하기도 했다.
‘근데 정말 사람들은 그 영상이 진실이라고 확신했을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런 영상을 찍을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영상을 근거로 그를 비방해왔다.
스타가 몰락하는 걸 바라는 인간의 악의가 모여 만든 참상이다.
인간은 정교한 딥페이크 영상으로 속는 게 아니다. 그저 속고 싶은 거지.
왜냐고?
‘그게 더 즐거우니까.’
구정물 같은 악의가 흘러내린다. 그리고 이건 언제나 대중 앞에 서는 스타들이 겪는 시선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가짜 정보를 퍼뜨리는 타블로이드와 시기 질투로 늘어놓는 욕설 그리고 사소한 사생활까지 들추는 파파라치 등.
스타로서 사는 건 마냥 즐거운 일이 아니다.
이성과 가벼운 대화도 스캔들로 포장되어 나오고 온갖 똥파리가 날아다니는 생활이니까.
이안은 안소니가 되어 그 악의를 흩뿌렸다.
“지금 누굴 적으로 돌리고 있는 줄 알아? 이 멍청한 놈들아!”
벤이 연기하는 악역 리암의 경고가 차갑게 꽂혔다. 그걸 듣는 이의 입가에는 조소가 맺혔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건 흔한 일이지. 왜 그렇게 성질을 내지?”
사회 고위층에겐 딥페이크 피해를 막아주는 서비스가 이제는 오히려 숨통을 조여왔다.
이런 서비스의 보호를 받는다는 걸 알기에 안소니 일행이 만든 영상은 사람들 사이에서 진짜로 받아들여졌다.
아니, 정확히는 악의를 내비칠 근거가 되어줬다.
“사람은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권력을 얻는다고 하지. 위에선 자는 밑에 있는 자를 쉽게 바라볼 수 있지만, 밑에 있는 자들은 위에 있는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런 면에서 이들이 제공한 서비스는 권력이다.
막대한 돈 혹은 여러 사회적 편의를 받는 대가로 딥페이크와 AI라는 진흙탕에서 뒹구는 사람들을 고고하게 내려봤을 사람들이 밑바닥으로 끌려 내려왔다.
Beautiful World라는 제목에 어울리지 않는 흐름이다.
전혀 아름답지 않은 세상 속에서 권력자들에게 밉보인 안소니는 배우가 아니라 이제는 범죄자가 되어 대중 앞에 서야 했다.
자신의 인생을 망친 리암은 경질됐고, 함께 했던 프로그래머는 계획에 쓴 성능 좋은 딥페이크 기술을 세상에 공개하고 모습을 감췄다.
누구나 쉽게 실제 영상과 구분하기 힘든 AI 영상을 만들 수 있었고, 수많은 사회문제가 일어날 때, 변화가 생겼다.
-안녕, 아빠.
창백한 안색과 모자로 감춘 민머리.
어린 나이에 시한부라는 운명을 맞이한 아이는 영상 속에서 활짝 웃었다.
-놀랐지. 간호사 누나랑 몰래 만들어 봤다? 들키면 혼날 거래. 그러니까 비밀이야. 알았지?
배시시 웃은 아이는 폴짝 침대에서 뛰어내려 병실 문을 열었다.
문을 나서는 아이 얼굴에는 핏기가 돌았고 벗어 던진 모자 안에는 개구쟁이 같은 곱슬머리가 자리했다.
평생 보지 못할 것만 같은 건강한 모습, 부모의 시야는 뿌옇게 흐려졌다.
-언제든 이렇게 건강한 내 모습을 볼 수 있대. 신기하지 않아? 나중에는 대화도 나눌 수 있고, 성장한 모습도 만들 수 있을 거래.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 병원을 나선 아이는 활짝 웃는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러니 만약 내가 없더라도 사랑하는 엄마, 아빠도 덜 외롭지 않을까…?
고통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 그리고 세상에는 태어날 때부터 조숙이라는 운명을 부여받은 아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더는 온기를 품지 못하는 아이가 남긴 선물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AI의 올바른 사용에 대한 논의가 커지고 자정작용을 위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기술을 악용하는 사람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최대한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논의가 시작되는 장면이 카메라에 담겼다.
세상은 원래 아름답지 않다. 투쟁과 생존의 역사였던 인간사에서 아름다운 세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다만, 희망이란 불씨가 살아있는 세상이라면 그래도 아름답다고 불러줄 수 있지 않을까.
더는 복수가 아니라 다시 한번 배우로 살아가기 위해 오디션장에 들어가는 안소니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카메라에 담겼고.
“컷! 수고하셨습니다!”
Beautiful World의 촬영이 끝이 났다.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 속에서 이안은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
3개월 반가량 이어진 촬영이 끝나자 어느덧 날씨는 여름을 앞두고 있었다.
촬영 마지막을 축하하는 파티의 후유증으로 스태프들이 골골거리는 시기에 이안은 준혁과 마주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하하하, 나는 그 이야기를 듣기는 너무 이른 거 아니니?”
“하긴 한동안 계속 고생하셔야 하긴 하죠.”
처음부터 칸 영화제 출품을 목표로 잡고 촬영에 들어간 작품이다. 내년 3월까지 편집을 마무리 지으려면 정말 정신이 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래도 준혁은 미소를 지었다.
“촬영이 잘 된 작품 편집할 때는 즐겁게 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너는 이번 촬영이 어땠니?”
“저야 촬영은 언제나 즐겁죠.”
이안은 이제는 추억이 될 Beautiful World의 대본에 손을 얹었다.
예상대로라면 훌륭한 성공을 할 작품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 영광에 한 손 거들기 위해 참여한 작품은 아니다.
‘배우란 뭘까?’
어느 직업이 안 그렇겠느냐마는 마냥 좋은 직업은 아니다.
큰돈을 버는 사람은 극히 일부고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직업이다. 그렇다고 노력이 항상 보답 받는 곳도 아니다.
누군가는 십수 년을 노력해도 무명인데, 다른 사람은 운 좋게 한 작품 만에 스타덤에 오르는 불공평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지금도 나도 남들이 보기엔 지극히 불합리한 존재겠지.’
조연으로 아역을 시작한 뒤로 승승장구한 것도 모자라서 다방면에서 활약하는 중이다. 이걸 보고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을 거다.
당장 팬 사이트가 아닌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면 온갖 악의적인 글이 넘쳐나고 있으니 말이다.
긴 세월을 도시의 길바닥에서 아득바득 노력해 올라온 세월이 없기 때문이다.
운이 좋다. 재능이 넘친다.
노력한 세월이 사라진 세계에서 자신의 듣는 평가를 보면 가끔 억울하기도 하고 괴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Beautiful World의 주인공은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게 해줬다.
인간의 악의로 물든 말은 지독하게 들었으며 딥페이크로 얼굴을 덮은 것처럼 자신도 얼굴을 숨기고 연기해야 하는 긴 세월이 있었다.
추억으로 미화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 힘겨운 시간이었다.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었어.’
인간의 선의로 만들어진 희미한 희망의 불씨는 언제나 있었으니까.
고작 이름을 외우고 인사를 해줬다고 다른 촬영에 추천해준 스태프부터 파쿠르를 알려준 마일즈, 얼굴이 아닌 연기력을 보고 찾아온 캐스팅 디렉터 아델리아.
심지어 굶주린 자신을 위해 부모님에게 받은 간식을 내줬던 아이까지.
끔찍하고 힘들기만 한 개 같은 인생이라고 표현하기엔 헨젤과 그레텔의 빵부스러기처럼 이어진 희망은 자신을 배우의 길까지 인도했다.
이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세월이지만, 이 영화를 보며 그때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에 참여할 가치는 충분했다.
그러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분명 제게 특별한 작품이 될 거에요”
“아마 나한테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
이안은 준혁에게 페르소나와 같은 배우다. 이렇게 훌륭한 배우를 마다할 감독이 얼마나 되겠냐만은.
벌써 3번의 영화를 함께 했지만, 다음을 자신할 수 없기도 했다.
‘너무 크게 성장해 함께 못 할 수도 있고, 작품이 마음에 안 든다며 거절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니 이 작품을 훌륭한 배우와 함께하는 마지막 작품인 것처럼 준비할 예정이었다.
촬영본이라는 뛰어난 원석을 세공하는 편집을 앞두고 준혁은 굳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최대한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도록 노력하도록 할게.”
“좋아요. 그럼 저는 제작사 대표로서 최대한 좋은 성과를 내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할게요.”
“그렇게 들으니 든든한걸.”
작품의 성공을 위해 둘은 굳게 손을 맞잡았다.
***
“성공을 위해선 역시 홍보는 화끈한 게 좋은 법이죠.”
음음, 이안은 자신의 내뱉은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고로 축제에서도 폭죽은 화려할수록 좋지 않은가.
“큰 흐름을 만들 생각이에요.”
“…큰 흐름?”
올리버는 ‘이놈이 또 뭘 하려고.’라는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지극히 불순한 시선에 이안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말이 거창해서 그렇지 눈덩이를 굴려보자는 뜻이에요. 11월이면 아웃사이더가 공개되잖아요. 이때 관심을 최대한 받아서 Beautiful World에 대한 기대감까지 연결해볼 생각이에요.”
“텀이 그렇게 길진 않으니 할 만할 거 같은데? 물론 아웃사이더가 성공한다는 전제가 붙어야겠지만.”
“그러니 홍보를 맡은 레아의 역할이 중요하죠.”
“…저요?”
응, 너요.
레아가 눈을 끔뻑였다. 이안이 개인 팬미팅을 해주겠다는 말에 제작사까지 온 그녀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에이, 너무 긴장할 것 없어요. 열심히 퍼리 행사를 뛰어주면 되거든요. 오히려 좋지 않아요?”
“…그렇긴 하죠?”
드레이퍼 가문이 들었다면 배신이라며 경악했을 소리를 이안은 태연하게 내뱉었다.
‘진짜 퍼리 팬덤인 것만 안 들키면 되지 않나?’
일단 든든한 코어 팬층을 끌어들이고 이 이슈로 관심을 불러일으킬 생각이다.
이슈가 되면 호기심에라도 찍어볼 사람들이 생길 테니 적절한 홍보만 덧붙여 주면 준수한 성과를 뽑아낼 수 있다.
“대신 경호원들은 꼭 대동하고 움직여야 해요. 물론 근접 경호를 맡은 사람은 저번처럼 인형탈을 씌울 테니 정체를 들킬 걱정은 안 해도 되고요.”
덕분에 이안의 경호업체인 스컬 택틱스에서 퍼리가 될 경호원들을 선발한다고 떠들썩한 상태였다.
거부하면 되지 않냐고? 거부하기엔 너무 큰 돈이었다.
“Beautiful World 홍보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건 천천히 준비하고 있어요. 알려드릴까요?”
“…나중에 알려주렴.”
계획대로라면 피날레는 Beautiful World다. 평범한 홍보 계획을 세웠을 리가 없다.
‘언더힐 양이 이안과 만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언더힐 가문의 명품 브랜드들이 이안과 광고 계약을 연장하거나 새로 맺는 중이다.
그냥 갱신할 때가 됐구나, 라며 대부분을 가볍게 넘길 일이지만, 앞선 정보가 있다면 이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보일 수밖에 없다.
누가 봐도 뭔가 미리 알고 준비하는 걸로 밖에 안 보였다.
‘그나마 손을 떼는 건 아니니 좋은 일이겠지.’
재계약을 서두르는 건 돈 냄새를 맡았다는 뜻이니까.
“그보다 축제 전야제가 어떻게 됐는지 한 번 볼까요?”
“전야제?”
“네.”
이안은 팬 사이트에 들어갔고.
-속보) 이안 프라이스, 팬미팅, 콘서트 티켓 30초 만에 매진.
└왜, 왜 내 통장에서 돈이 안 빠져나갔지?!
└입구 컷 당하셨군요! 하하하하, 사실 저도 그렇답니다.
└횟수가 늘어나면 뭐해! 팬도 더 늘어났는데!
└월드 스타, 이안 프라이스.
└팬 좀 그만 늘려, 이아아아안!
전야제인 줄 알았는데 장례식을 맞이한 팬들이 보였다.
팬미팅, 콘서트, 아웃사이더, Beautiful World로 이어지는 축제의 막이 올랐다.
팬미팅과 뮤지컬
이안의 팬덤인 Fianist.
이들에게 이안은 자랑이다. 굳이 팬심 없이 객관적으로 봐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스타다.
연기, 노래, 공부, 투자 뭐하나 빠지지 않을뿐더러 대외적 이미지도 좋다.
빌보드 차트를 듣고 우리 아이가 이런 노래를 듣는다고? 경악하는 부모님도 이안의 노래라고 하면 ‘그래, 차라리 이런 노래를 들으렴.’이라고 허락해줄 정도다.
두둑한 지갑만큼 치열한 교육열을 자랑하는 베벌리힐스의 사모님들도 클로이에게 어떻게 하면 이안처럼 아이를 키울 수 있을지 물을 정도인데 일반 부모라면 OK 사인을 내려주는 게 당연하다.
남들은 제가 좋아하는 스타가 바람이니, 마약이니 심각한 스캔들로 허덕일 때, Fianist들은 기껏해야.
-우리 이안은 연애를 언제 하려나.
└이안에게 관심 있다는 은근히 밝힌 연예인은 많았잖아.
└그럼 뭐하니. 반응도 안 하더라.
└(이번 분기 신상 대본을 받고 좋아하는 이안.gif) 내가 봤을 때 우리 애는 대본하고 결혼했다니까.
└…방 안에 가득한 대본부터 치워야 연애를 하든 하지.
└그게 될 거 같니? 차라리 내일부터 월드 투어를 도는 게 현실성 있지.
-피어스 외모로 슈트를 만들어봤다. 그야말로 이안과 하나가 되는 순간!
└멈춰! 이 망할 털북숭이들아!
└와, 진짜 잘 만들었네요. by 이안 프라이스.
└…이아아안! 좋아요를 왜 누르는 거야!
└운영자! 이안이 물들기 전에 빨리 격리해! 당장!
다른 팬들이 볼 때는 배부른 고민만 할 뿐이다.
Fianist들은 이안의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정확히는 이안의 팬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본인 걱정부터 해야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았다.
-으아아악! 티켓팅에 실패했다고?! 분명 좌석이 늘었다며!
└삐빅 정상입니다.
-티켓팅 고인물들은 뉴비를 위해 방을 빼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10년 차 이안 팬이다. 이번 티켓팅 실패했다. 질문받는다.
└응, 뉴비든 고인물이든 똑같아.
기본적으로 연례행사가 된 악명 높은 티켓팅이 있다. 숙련된 팬이라면 암표상과 비슷한 티켓팅 솜씨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면 말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뉴비 절단기로 불리는 악명 높은 티켓팅에 고통받는 팬들을 위해 이안도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었다.
“팬미팅은 기간상 횟수를 늘리긴 힘드니 규모를 전보다 키워주시고, 콘서트도 최대한 늘릴 수 있는 8회차로 가죠.”
분명 전보다 더 많은 팬이 참여할 수 있도록 규모를 키웠다.
다만 문제는.
[이번 티켓팅 실패의 원인을 분석해봤다.]-다들 알다시피 저번보다 이번이 더 힘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분석해봤습니다. 아래 표는 지난 2년 동안 팬 사이트의 트래픽 차이입니다. 네, 트래픽을 분석하면 팬덤이 최소 3배는 늘었다고 봐야 합니다.
거기에 팬데믹 때문에 2년 만에 열리는 일정인 만큼 전보다 더 많은 팬이 티켓팅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월드 투어는 언제 해주죠?
└마지막 줄을 보고 추천 박았다.
└3배가 뭐야. 훌쩍 넘을걸. 드루이드 이후로 해외 팬덤도 엄청 커진 거로 알아. 해외에서도 티켓팅에 많이 참여했고.
└어쩐지 Pryce’s MD에 들어가면 매진 상품이 엄청 많더라니…
└답은 월드 투어다. 이게 맞다.
└가수 팬놈들은 결론이 항상 왜 이 모양이야?
팬데믹 전만 해도 이안은 스타긴 했지만, 다른 유명 스타들에 비해서 인지도 엄청 높은 편은 아니었다.
얼굴을 알릴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인데, 다른 연예인들이 부득이하게 활동을 못 할 시기 이안은 오히려 시도 때도 없이 뉴스에서 얼굴을 비췄다.
“이안 프라이스에게 지난 2년은 추진력을 얻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죠.”
전문가의 평가처럼 이안은 날개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9월 팬미팅부터 연달아 진행될 이안의 행보에 사람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대중이 보기엔 그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대외 활동을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계속 쉼 없이 일을 한 이안으로선 억울할지 몰라도 당연한 반응이다.
배우는 대중과 작품으로 만난다.
1년 동안 쉴 틈도 없이 작품을 찍어봐야, 공개된 작품이 없다면 ‘혹시 이 배우 활동을 안 하나요?’라는 말을 듣는 게 이들이다.
아웃사이더와 Beautiful World 제작에 바빴어도 일정에 관심 있는 팬이 아니라면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이안 프라이스의 팬미팅, 콘서트 암표 값. 10배가 넘는 돈 주고도 못 구해!
그런 면에서 활동 재개와 함께 들려온 소식은 썩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안은 냉소를 지으며 테이블을 두들겼다.
“역시 이딴 식으로 나오네요.”
“그러게 말이야.”
티켓 재판매로 돈을 버는 암표상은 언제나 골칫덩어리다. 팬데믹 기간에 콘서트니 뭐니 일정이 다 박살 났던 만큼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에 돈독이 잔뜩 오른 상태였다.
물량을 꽉 쥐고 가격을 계속 높이고 있으니 말이다.
해결 방법을 에이전트인 닉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안 프라이스, 암표 문제에 칼을 빼 들었나. 팬미팅, 콘서트 실황 극장을 통해 공개 예정. 차후 영상 판매도 이뤄질 예정.
-문제가 됐던 이안 프라이스 암표 급락. ‘되도록 암표 구매는 자제해달라.’라는 이안의 요청도 한몫한 듯.
세상에는 명분이 중요하다.
극장에서 공연 실황을 하는 건 이미 여러 가수가 하는 돈벌이 수단이지만, 암표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다는 게 보기에는 더 좋았다.
부정적인 반응은 없었다.
-암표값이 무슨 코인인 줄 알았네. -70%를 찍네.
└암표상들 피눈물 흘리는 중.
└그러게 고점일 때 팔았어야지. 멍청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실황이라니! 이안은 신이야!
팬들이 암표상에게 좋은 마음이 있을 리가 없다.
‘저놈들만 아니었으면 티켓팅에 성공했을지도 모르는데’라는 슈뢰딩거의 티켓팅이 모두의 마음속에 하나씩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극장과 계약을 맺고, 촬영팀을 준비하는 건 닉의 영역이고 이안은 무대 준비를 위해 서둘러야 했다.
‘팬미팅과 콘서트는 달라.’
이안 본인이 봐도 어쩌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이 모였나 싶을 정도로 팬의 구성은 다양했다.
팬미팅은 온갖 종류의 인간들이 전부 모이는 용광로 같은 장소란 뜻이고, 이들 전부를 실망하지 않게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전처럼 선물로 만족하게 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니까.’
기념품처럼 나눠줄 굿즈가 없는 건 아니지만, 첫 팬미팅에 비하면 많은 종류를 준비할 수가 없다.
한 번에 최소 만오천 명이 모인다. 물 하나씩만 나눠주려고 해도 물로 된 탑을 쌓아야 할 정도인데, 선물을 준비하는 건 오죽하겠는가.
선물이 아니라 진심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우선 팬미팅에 참여하는 팬구성을 확인해야지.”
여유 부리며 준비할 시간이 없다. 생각 난 김에 바로 이안은 팬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투표) 팬미팅에 참여하는 팬 여러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습니다. (최대 2개 중복 선택 가능)
1. 배우 팬 2. 가수 팬 3. 뮤지컬 팬 4. 퍼리 팬 5. 사이비 팬 …
이안이 던진 떡밥에 팬미팅에 참여하는 팬들이 재빨리 투표했고 결과를 본 팬들은 경악했다.
-…잠시만, 퍼리 팬이 왜 이렇게 많아?
└가짜로 투표한 거 아니야?
└싸게 풀린 암표를 샀다더라.
└…수상하게 돈 많은 인간 아니랄까 봐.
└거기에 재밌어 보인다고 퍼리에 투표한 사람들도 있더라.
원래 덕후라는 인종은 자신이 빠진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법이다.
아웃사이더가 내부 시사회에서 호평을 받으며 한껏 기대감에 부푼 이들은 기꺼이 이안의 팬미팅에도 지갑을 열었다.
거기에 장난삼아 투표한 사람들도 다수 있으니 4번 투표자가 우뚝 솟을 수 있었다.
그냥 재밌는 해프닝처럼 넘어갈 때, 누군가 의아하다는 듯이 글을 올렸다.
-근데 이런 투표는 갑자기 왜 한 거야?
…그러게?
그냥 순수하게 어떤 팬들이 올까 궁금해서 투표를 열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안인데.
‘등골이 오싹해진다.’
‘잠시만,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다년간 이안과 함께하며 본능적으로 새겨진 위기감지 능력이 경고를 보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온 힘을 모아 투표 결과를 뒤집어야…
-다들 투표에 관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투표는 팬미팅에 최대한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9월에 봬요!
└뭘 한다고? 이안! 잠시만, 야!
└가지 말고 우리 말 좀 들어 봐! 그 투표 조작된 거라니까?!
└우리가 잘못했어. 진짜야. 제발 돌아오라고.
민주주의 나라에서 투표는 소중한 권리다. 그걸 팬들에게 교훈으로 남긴 이안은 홀연히 사라졌고.
어느덧 9월이 됐다.
***
만오천 석 규모의 공연장 주변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팬미팅 티켓팅에 성공한 승리자이건만 그들의 표정은 묘했다. 이안을 볼 수 있다는 설렘이 가장 크긴 하지만.
‘진즉에 투표 이유를 알려줬어야지.’
투표 결과를 받고 홀연히 사라진 이안 때문에 가슴 한쪽에는 묘한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하필 처음 열리는 곳이 이곳 LA라서 더 그랬다.
앞선 공연이 있으면 미리 정보를 듣고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왔을 텐데 하필 첫 체험자였다.
-LA 친구들, 후기를 꼭 부탁해.
팬 사이트에는 얄미운 글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을 뿐이었고.
“입장하겠습니다! 줄을 이탈하지 말아주세요!”
공연 스태프의 외침과 함께 입장이 시작됐다.
티켓 확인과 함께 주어지는 작은 선물 봉투.
사람에 떠밀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조심히 열어봤다.
“아, 이것 때문에 물어봤구나.”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키링이었다. 늑대 탈을 뒤집어쓴 이안의 캐릭터와 뒤쪽에는 이안의 필기체로 보이는 아웃사이더라는 글씨가 보였다.
선물 겸 홍보라니. 이것도 참 이안다웠다.
‘괜히 긴장했네. 이 정도는 귀엽지.’
밑에는 노래를 부르는 이안이 그려진 담요나 연기를 하는 이안이 새겨진 텀블러와 감사 인사를 담은 편지와 함께 들어가 있었다.
티켓 가격에 비하면 큰 선물은 아니지만, 뭐라도 챙겨주기 위해 노력한 티가 나서 기쁜 마음이 들었다.
투표 결과가 굿즈로 나타났다고 생각한 팬들은 안심하며 팬미팅이 시작되는 걸 기다렸고 화면에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됐다.
“나온다.”
밑에 깔리는 스모그와 스피커에서 들리는 잔잔한 사랑 노래.
가수 팬이 아닌 다른 팬들까지 귓가에 부드럽게 스며드는 음악에 기대감을 잔뜩 품었고, 스모그 속에서 걸어 나오는 이안이…
“…어?”
“잠시만.”
체격과 느낌만 봐선 이안이 맞는 거 같은데 팬들은 확신할 수 없었다.
무대에 선 사람이 늑대탈을 쓴 사람이었으니까.
진짜 이안이 맞나? 이 의문은 금방 풀렸다.
-우리의 만남은 연기와 같았지. 우연처럼 닿게 된 인연은 사랑이라는 가죽을 뒤집어썼어.
감미롭게 번지는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이안이 확실했고, 그 순간 스모그를 뚫고 한 여인이 튀어나왔다.
불꽃과 같은 적발을 흩날리며 나온 여성은 부드럽게 이안의 손을 붙잡았다.
팬들은 바로 상대를 알아봤다.
‘레아 드레이퍼?’
바로 지금 펼쳐지는 게 뭔지 팬들은 깨달았다. 아웃사이더를 뮤지컬로 꾸며놓은 공연이다.
연기와 음악이 어우러지는 종합 예술.
배우 팬과 가수 팬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뮤지컬이 팬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무거운 탈을 쓰고도 흔들리지 않는 가창력과 함께 하는 댄서들과 잘 맞물려가는 춤사위.
이 공연을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했을까. 노래와 안무를 새로 만들어야 했을 테고, 엄청난 연습을 했을 거라는 게 뻔히 보였다.
브로드웨이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완성도 높은 뮤지컬.
“대단하다.”
그동안 이안이라는 인간이 쌓아 올린 노력의 결정체를 보는 듯했고, 그걸 자신들을 위해 준비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기쁜 마음이 샘솟았다.
6분가량 이어진 무대가 끝이 났을 때 엄청난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나오는 건 당연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안 프라이스입니다. 여기 함께 고생해준 배우는 레아 드레이퍼죠.”
“레아 드레이퍼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가볍게 손을 흔들며 팬들을 향해 인사한 둘은 스태프가 건네준 의자에 앉았다.
“다들 즐거웠나요? 여러분만 보기엔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으신가요? 혹시 괜찮다면 위튜브에 올려도 될까요. 아웃사이더 홍보도 해야해서 말이죠.”
능청스러운 이안의 말에 팬들은 괜찮다는 말을 크게 내뱉었다.
정말 자신들만 보기엔 아까운 공연이다. ‘우리 애가 이렇게 훌륭한 공연을 한다니까요?’라며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무대였고.
뿌듯한 마음으로 동의한 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흔쾌히 허락해주시니 고마워요. 자, 가벼운 토크를 진행하고 다음 무대로 진행할까요.”
…잠시만 이안아, 왜 탈을 안 벗니?
탈을 본드로 붙이기라도 했는지 벗을 생각을 안 하고 마이크를 잡고 일어나려고 한다.
-탈 안 벗어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묻는 팬의 말에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퍼리 팬의 비율이 24%로 더군요. 그래서 탈을 쓰고 그 정도 시간을 보내려고 했습니다만.”
팬미팅에서 얼굴을 안 보여주는 스타가 있다?
‘그게 왜 우리 애일까.’
너희의 한 표가 이렇게 소중하단다. 그걸 머릿속에 새겨주는 이안의 행보에 팬들은 곧장 아우성을 내질렀고.
“그렇게 싫다면 어쩔 수 없죠. 다음 팬미팅에서 계획대로 진행할 수밖에요.”
금방 고집을 꺾는 이안을 보며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은 샌프란이었나. 고생 많이 해라.’
팬들은 다음 타자의 명복을 빌어주었고.
팬미팅이 끝나고 토니상 수상자인 이안의 아웃사이더 뮤지컬 소식은 빠르게 번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