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28)
자녀는 부모의 거울(2)
회의를 얼추 마무리 지은 이안은 가볍게 숨을 돌리며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관리된 짧은 수염이 손가락을 간지럽히며 훑고 지나갔다.
화면에 반사된 얼굴은 일부러 기른 수염만 없다면 지난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별달리 변하지 않았다.
강제 태닝으로 선크림의 필요성을 몸으로 증명한 노숙자 시절이 없던 탓인지, 아니면 바뀐 육체 탓인지 몰라도 수염만 없다면 20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
다른 연예인들이 피부 관리에 쓰는 비용을 생각하면 불합리할 정도고 한국에선 뱀파이어 연예인 중 하나로 분류될 정도지만.
‘배우로는 마냥 좋게 생각할 건 아니지.’
나이가 있는 역할을 하기 힘드니 말이다. 이 나이 먹고 하이틴이나 청춘 로맨스 같은 거만 찍기는 그렇지 않은가.
그나마 수염과 약간의 분장까지 더하면 제법 나이든 역할도 맡을 수 있었다.
-이상하다, 이안아. 우리 같이 늙어가는 사이 아니었니?
└우린 이안이 사고 칠 때마다 늙어가서 그런 거 아닐까?
└혹시 내 탈모의 원인도?!
└응, 그건 아니야. 유전이 원인이야.
└제기랄!
팬 사이트에 올라오는 이런 하소연도 줄어들었고.
가볍게 몸을 풀고 있자니 화상 회의에서 남아 있던 사람이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그 작품을 만든다고?
새하얀 정장과 아저씨처럼 볼록 나온 뱃살.
미국 연예계를 대표하는 괴짜 에이전트인 닉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만들 결심이 섰어요.”
-좋아하시겠네. 아닌가? 엄청 부끄러워 하면서 싫어하시려나.
“아마 엄청 부끄러워하실걸요.”
이안은 작고 낡은 수첩을 조심히 집어 들었다. 소피아 프라이스라는 이름이 또박또박 겉에 적혀 있었다.
세월은 조이와 리오처럼 사랑스러운 인연을 만들어주기도 했으나 잔인하게 이별을 선고하기도 하였다.
‘할머니.’
유품이 된 낡은 수첩을 펼치자, 가족과 주변 지인의 생일과 전화번호가 하나하나 적혀 있었다.
요즘엔 핸드폰으로 다 확인할 수 있다고 해도 이렇게 보는 게 더 편하다며 고집스럽게 적은 흔적이다.
가장 마지막 부분, 조이와 리오의 생년월일을 적으며 행복한 미소를 짓던 얼굴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종이를 넘기자, 종종 해주던 음식의 요리법부터 자신이 나오는 시상식 생방송 시간을 적은 것들이 보였다.
스펠링이 틀린 글자들을 눈으로 훑어가던 이안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칫했다.
-사람들이 목소리를 마음대로 낼 수 없는 병이 있다면 어떨까.
-남들보다 말을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이 TV 속 정치인처럼 권력자가 되지 않을까.
창작자들이 흔히 쓰는 아이디어 노트에서나 볼 수 있는 문장들이 보였다.
유품을 정리하면서 펼쳐보지 않았다면 소피아가 이런 글을 적었다는 건 꿈에도 알지 못했을 거다.
이안이 뭘 보고 있는지 눈치챈 닉이 말을 이었다.
-손자가 방안 가득 대본을 쌓아놓는 건 물론이고 틈날 때마다 집착하듯 읽었으니 소피아 씨도 궁금했겠지. 그리고 손자와 대화할 때도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을 테고.
“그렇겠죠?”
그러고 보면 소피아가 방안의 대본을 한 번 봐도 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뒤로는 읽은 대본 이야기를 종종 꺼내곤 했고.
침침한 눈 때문에 돋보기안경을 쓰며 낯선 글자를 사전까지 펼쳐놓고 보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고작 손자가 좋아하는 주제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라기엔 과한 노력.
‘누구처럼 그렇게 고집이 셌나 몰라.’
쓴웃음을 짓자니 닉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우리 할아버지도 내가 에이전트 회사에 들어갔다니까 그 회사와 계약한 연예인을 다 찾아보고 그랬다니까. 요즘 이 배우가 인기 많다는데 잘 보여야 한다는 둥 하면서 말이야. 정작 난 인턴이라 잡일만 할 뿐이었는데.
추억이란 이름으로 찾아온 그리움을 떠올리던 그는 분위기를 바꾸듯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소피아 씨도 설마 그냥 생각나는데도 끄적인 걸 가지고 네가 작품을 만들 거란 생각은 꿈에도 못했을 거야.
“나중에 만나게 되면 엄청 혼내실걸요. 이럴 줄 알았으면 수첩을 남기지 않고 왔을 거라면서 말이에요.”
-크게 혼나기 싫으면 잘 만들어야겠네?
“그래야죠.”
외딴 저택을 찾아온 이유도 이 때문이다.
소피아가 남긴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꽤 훌륭하다.
만약 성대가 극도로 약해지는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이라면 어떤 모습일까. 일반인은 평생 말할 기회가 한정되어 있으며 그 이상은 성대가 파괴되어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면.
분명 남들보다 말을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은 권력자가 될 것이다. 그 사람 말을 많이 들을 테니 세뇌가 되는 사람도 속출하겠고.
‘물론 이건 고작 기본 아이디어에 불과하니 작품으로 만들려면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설정을 덧붙여야겠지만.’
광적인 팬을 거느린 가수, 자신들처럼 바이러스에 어느 정도 면역인 자들을 견제하는 정치인, 믿고 따르면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다는 사이비 종교 등.
당장 생각나는 설정만 해도 한둘이 아니다.
‘시사점도 좋아. 사람들은 말이 가진 힘을 가볍게 여기곤 하니까. 고작 말 한마디로 사람이 죽고 사는 게 결정되는 순간도 있는데 말이야.’
이안은 펜으로 꾹꾹 눌러쓴 문장을 손으로 더듬었다. 이 뒤에 쓰인 글로 판단할 때 이런 생각을 한 건 2032년 대선에 개입했을 시기였다.
한 정치인의 말로 상처받았을 손자의 행보를 보면서 그녀는 이런 글을 쓰며 속앓이를 했을 게 뻔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창밖으로 약간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를 닉도 들은 듯했다.
-애들이 왔나 본데? 빨리 나가봐. 내가 널 붙잡고 있었다는 걸 알면 에반이 엄청 괴롭힌단 말이야.
“하하하, 에반이 투정을 좀 잘 부리긴 하죠.”
…투정?
투정이라는 귀여운 말로 포장할 수 없다는 건 오직 이안만 몰랐다. 닉은 자신의 중요 고객 중 하나의 비밀을 차마 밝히진 못하고 손을 휘저었다.
-됐고. 빨리 나가봐. 난 그 투정이 무서우니까.
“나중에 또 연락해요.”
프로그램을 종료한 이안은 소란스러움이 느껴지는 밖으로 나갔다.
방 밖으로 나오자, 빼꼼 고개를 내미는 얼굴이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파란 눈동자가 마침 잘 나왔다는 듯이 깜빡이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아빠.”
“응, 리오야. 에반과 비비가 왔니?”
고개를 주억거리는 리오를 안아 들자, 무뚝뚝해 보이던 얼굴에 분홍빛 홍조가 들었다.
장난스레 꺼끌꺼끌한 수염을 문지르자 아이는 손을 바동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장난을 치며 거실로 나가자 왁자지껄 시끄러운 사람들이 보였다.
“대부!”
“매형!”
반갑게 부르다 말고 기분 나쁘다는 듯이 살짝 째려보는 둘의 사이로 타닥타닥 뛰는 발소리가 들렸고.
“아빠!”
해맑게 웃으며 뛰어오는 조이가 보였…
“나 얘 키우면 안 될까? 응?”
-삐요오…
길고양이도 아니고 독수리를 키우자고 내미는 딸을 보며 이안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을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잡았니?”
“응? 옆으로 날아가길래 그냥 잡았는데.”
…그게 그냥 잡히는 거니.
드루이드 2세인 딸이 이대로 괜찮은지 이안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
조이 프라이스.
살면서 자녀를 갖는다는 상상을 못 하던 이안에겐 크나큰 기쁨으로 찾아온 아이.
그런 아이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생각보다 금방 깨달았다.
조짐이 전혀 없던 건 아니다.
틈만 나면 아이 옆에서 크림이와 레오가 뒹굴뒹굴하곤 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때까진 그저 자신과 비슷한 냄새가 나서 그런가 싶었는데.
-이안, 혹시 새를 데려온 적이 있어?
업무차 밖에 나와 있을 때 걸려온 레이첼의 전화.
새라는 말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긴 했다.
“혹시 데미안이 공작새라도 데려다 놨어? 정말 포기를 모른다니까.”
‘공작새 한 마리 키우실?’이라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데미안이 결국 성공했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레이첼이 보내준 영상에는 어디서 들어온 지 모를 작은 새와 폴짝폴짝 뛰며 놀고 있는 조이의 모습이 보였으니까.
영상 속 모습이 귀엽긴 했으나 절로 ‘…뉘쉰지?’라는 말이 나오는 낯선 손님이 찍혀 있었다.
그 뒤로 방앗간도 아니거늘 종종 찾아오는 새들 덕분에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아, 별의별 것이 다 유전이 되는구나.’
봉건제 귀족도 아니고 드루이드를 세습직으로 갖고 태어난 아이를 키우는 건 확실히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이번처럼 동물을 키워도 되냐면서 데려오는 건 그나마 양반일 정도로.
“조이, 손 깨끗이 씻어. 야생동물을 만지는 게 얼마나 안 좋은 줄 알아?”
“…삐요는 안 더러웠어.”
“눈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니까? 오늘 자기 전에 꼭 깨끗이 씻고.”
조이가 손을 씻는 걸 옆에서 감시하는 리오를 보고 있자니 과일을 깎은 그릇이 테이블에 놓였다.
화사하게 피어났던 소녀에서 벗어나 성숙하고 단아한 미를 드러내는 레이첼이 이안의 옆에 살포시 앉으며 말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더라. 먹을 것 좀 주고 날려 보냈어.”
“말괄량이처럼 보이긴 해도 아프지 않게 조심하긴 하잖아”
아이들이 힘 조절을 잘못해서 동물을 괴롭히는 경우는 흔히 발생하는데 조이는 살면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아마 지금까지 동물에게 공격당한 적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일 거다. 아무리 동물이 호감을 느낀다고 해도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나오는 공격성까지 없애주는 건 아니니까.
‘그나마 리오는 평범해서 다행이지.’
물론 정말 평범하다는 건 아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영어, 한국어,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하는 아이가 평범하진 않으니까.
레이첼처럼 소리를 색으로 보는 공감각까지 있기도 했고.
‘그래도 조이에 비하면 평범하다고 볼 수 있지.’
남들보다 똑똑하고 공감각이 있는 건 상식선의 일이잖는가.
물론 인생 자체에 비현실적인 일투성이인 사람이 할 생각은 아니지만, 가뜩이나 유명 스타를 부모로 둔 아이라서 과한 대중의 관심을 받는 아이들인데 특별함이 독이 될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히힛! 깨끗하지? 향기도 나지?!”
“응, 됐어.”
그래도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순간 들었던 걱정도 사그라지는 걸 느꼈다.
레이첼 옆에서 조잘거리며 오늘 있었던 일을 떠드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거둔 이안은 에반과 비비안을 봤다.
“비비, 혼자 오는데 힘들진 않았니?”
“에이, 힘들 게 뭐 있어요. 오히려 혼자 오는 게 편한 걸요.”
원래 같으면 데미안 부부와 함께 왔을 텐데 바쁜 일정이 있어서 따로 와야 했다. 그건 먼저 온 에반도 마찬가지였고.
“이따가 게빈 감독님만 오면 오늘 올 사람은 다 오는 거겠네?”
“어! 게빈 할아버지가 와?!”
“응, 오신단다.”
“와아아!”
조이는 발을 동동 굴렀고 리오도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지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렸을 때부터 친가족처럼 챙겨줬으니 이렇게 반가워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그동안 뭐 하고 지냈는지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흘렀다.
에반은 이번에 오디션 제안이 들어온 작품 배역에 관해 물으며 이안의 교수로서 본능을 자극했고.
어린 나이부터 제작자로 활약한 비비안은 소개해줄 괜찮은 졸업생이 있는지 물어보며 점수를 따냈다.
물론.
‘경력이 몇인데 아직도 연기 지도를 받으려고 해?’
‘널린 게 사람인데 굳이 괜찮은 졸업생이 있냐고 묻는다고? 너무 수작이 뻔한 거 아니야?’
좋은 분위기를 연기하며 둘은 날 선 시선을 은밀하게 교류했지만 말이다.
둘의 신경전이 종료된 건 마지막 방문객이 도착했을 때였다.
“게빈!”
“오셨어요.”
“아이고, 못 본 사이에 또 이렇게 컸구나!”
“나 오늘 독수리를 잡았다! 조금만 일찍 왔으면 보여줄 수 있었는데!”
“하하하, 괜찮단다. 그런 건 네 아빠가 많이 보여줬어.”
…억울하다. 적어도 독수리를 잡은 적은 없다.
다른 동물에 치인 적은 많아도.
예전보다 주름진 얼굴, 그리고 다리를 지탱해줄 지팡이. 완전히 새하얗게 센 머리를 한 게빈은 두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줬다.
마치 어린 시절 이안과 함께 했던 그 시절처럼.
“이안아, 잘 지냈니?”
“물론이죠. 감독님도 잘 지내셨죠?”
“하하하, 은퇴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감독님이냐. 보다시피 나는 잘 지냈단다. 의사가 술을 못 마시게 하는 거 빼곤 말이야.”
장난스레 웃는 게빈과 이안은 가볍게 포옹을 나눴다.
거실에는 따스한 온기가 감돌았다.
***
탁!
서늘한 공기가 감도는 방 안에 들어온 아이는 불을 켰다.
거실에서 어른들이 떠드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아이는 작게 하품을 했다. 이리저리 뛰놀았던 조이는 침대에 폭 쓰러졌다.
“씻고 자라니까.”
“졸려어어… 나중에에.”
손을 휘젓는 걸 보며 한숨을 쉰 리오는 게빈이 준 선물을 두 개의 침대 사이에 있는 탁자에 놓고는 붙어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로 세수와 손발을 닦은 아이는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이미 조이는 고른 숨을 내쉬는 상황.
뒤따라 잠들려던 리오는 문득 들려오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눈을 슬그머니 떴다.
-끄으윽…
기괴하며 고통스러운 소리.
이건 거실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었고 고개를 슬쩍 돌리자. 칙칙한 색감이 뒤엉키며 한 가지 형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이안 프라이스. 도대체 어, 언제 가는 거냐.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는 기괴한 형상이 고개를 휙 돌렸다.
-혹시 알고 있니. 너무 무섭단다.
간절한 물음에 리오는 손을 옆으로 뻗었다. 게빈이 선물로 준 병이 잡혔고 귀찮다는 듯이 내용물을 뿌렸다.
“시끄러. 잠 좀 자자.”
-끼야아악!
비명과 함께 형체가 사라지자, 리오는 심드렁하게 성수 뚜껑을 닫고 잠에 빠져들었다.
평범한 일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