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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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레이첼은 질끈 감은 눈을 파르르 떨었다.
가장 좋아하는 둘의 목소리가 들려와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실망한 얼굴을 볼까 봐 너무 무서웠다.
“당연히 저야 괜찮죠. 레이첼의 곡이 좋아서 뜬 거잖아요.”
아닌데.
녹음실에서 Any time을 들었을 때의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는 누구보다 그의 목소리가 특별하다는 걸 확신했다. 그러니 뒤이어진 대화를 믿을 수 없었다.
“곡만 칭찬한 게 아니라, 네 목소리를 칭찬하는 사람도 많잖니.”
“음… 사실 전 그 목소리를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놀란 레이첼은 눈을 떴다.
사라지지 않고 남은 목소리가 끈적이는 오물처럼 바닥에 질척거렸다. 정말로 싫어한다는 것처럼.
그녀는 바로 이안에게 물었다.
“말도 안 돼! 아름답고, 감미롭다고 다들 그렇게 말하잖아. 왜 싫어해? 얼마나 예쁜 목소리인데.”
“왜 싫어하냐고? 글쎄.”
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외모와 목소리는 조화를 이뤄야 한다. 아름다운 소년이 굵은 목소리를 내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괴물 같은 얼굴로 고운 미성을 내면 끔찍하게 느껴지지.’
목소리가 감미롭다고?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얼굴과 목소리의 부조화는 혐오감을 더해줄 따름이고 이안은 미성을 거칠고 단단한 목소리로 바꾸기 위해 십 년 가까운 기간을 노력했다.
본격적으로 대사가 있는 조연을 맡기 시작한 게 그때쯤이다.
입을 헹구면 피가 섞여 나오는 노력을 오랫동안 할 정도로 변성기 후 목소리를 싫어했던 이안은 목소리가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되레 낯설었다.
과거에도 이랬다면 긴 기간 동안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원망도 살짝 들었고.
“그럼 목소리를 바꾸려고 안 해도 될까?”
“당연하지!”
단호하게 대답한 레이첼은 떨리는 손을 몇 번 조물조물하더니 아일라를 올려봤다.
“…나 작곡을 계속할래.”
이 말에 아일라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딸과 눈높이를 맞췄다.
겁먹은 푸른 눈동자는 지금 한 말이 얼마나 큰 결심인지 여실히 알려줬고 딸을 사랑하는 엄마로서 한 번 더 확인해야 했다.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에게 노래를 들려주게 될 텐데. 정말 괜찮겠어?”
“안 괜찮아. 근데…”
더 많은 사람이 듣는다니 레이첼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전교생 앞에서 발표하는 것보다 더 두렵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이안을 힐끔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안이 바보 같은 소리를 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더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저런 멍청한 소리를 안 할 거 아니야.”
딸의 대답에 아일라는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어린 나이에 무너져내리는 재능은 지겹게 봤다. 혹시 자신의 딸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초조한 마음에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정말 잘 온 듯했다.
“그럼 빨리 가서 만들던 곡이나 계속 만들까? 시간도 너무 늦었고.”
“응!”
엄마와 손을 맞잡은 레이첼은 고개를 휙 돌렸다.
잘 가라며 손을 흔들고 있는 바보가 보였다.
“어쩐지 바보 이안이라는 책도 있더라니.”
이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나는 소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바보 이반이겠지. 도대체 누구보고 바보라는 거야.”
이안은 대본을 보기 위해 방으로 올라가면서 멀어지는 차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잘 해줬으면 좋겠네.’
이안은 목젖이 튀어나오지 않은 목을 한 번 매만졌다.
변성기 이후 목소리를 자신도 좋아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으니까.
***
새해가 시작되고 시청자들이 휴방기가 끝나길 손꼽아 기다리는 시기.
촬영이 본격적으로 재개될 시기였고 어제 invisible children 촬영장을 다녀온 이안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베벌리힐스 북서쪽.
산맥을 따라 구불거리는 길 좌우에는 고급 저택이 줄지어 있었다. 베벌리힐스와 더불어 부촌으로 꼽히는 벨 에어였다.
‘같은 부촌이어도 분위기가 다르긴 해.’
베벌리힐스는 호화 저택을 구경하기 위한 관광객으로 북적거린다면 바로 옆 벨 에어는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폐쇄적인 분위기였다.
게이트를 통과해 쭉 언덕을 올라오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존 토마스 다이 스쿨(John Thomas Dye School)
베벌리힐스 엄마들이 선망하는 남녀 공학 사립 학교가 보였다.
“어머, 너무 예쁘다.”
새하얀 건물 외벽을 옅은 갈색 지붕이 세련되게 덮었다.
뒤로 얼핏 보이는 잘 관리던 언덕과 그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과 조화를 이루면서 마치 동화 속 풍경처럼 보였다.
촬영 카메라와 장비를 살피는 스태프들이 불청객으로 보일 정도로.
“오, 왔구나.”
배우 일정을 확인하는 세컨 조연출이 들고 있던 서류에 체크를 했다.
“따라오렴. 다른 애들은 이미 도착해 있단다.”
조연출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수업 중인지 애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길게 이어진 흰 복도와 창문에는 학생들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이 정갈하게 붙어 있었다.
대화 없이 걷는 게 심심했는지 조감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그 소식은 들었니? 촬영 중에 채워야 하는 수업 시간이 있잖니. 스튜디오 교원 대신에 이곳 선생님들이 맡아주신다고 했단다.”
“그래요? 신기하네요.”
할리우드랑 가까운 만큼 벨 에어도 영화나 TV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지역이다.
그만큼 촬영에 협조적이지만 선생님까지 동원해서 편의를 봐주는 건 조금 의외였다.
“네 덕분이 클걸? 학생 중에 널 좋아하는 애들이 많다네. 특히 유치원 애들한테.”
“어, 음. 그렇군요.”
초등학생도 버거운데 유치원생이라니.
당황하는 이안을 향해 조감독인 히죽 웃었다.
“팬 서비스는 제대로 해줘야 하는 거 알지?”
애들 앞에서 재롱이라도 부려야 하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이안은 한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촬영을 위해 내준 교실에선 아역 배우들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안! 빨리 와! 나랑 찍자.”
반갑다며 손을 붕붕 흔드는 래리는 이안을 끌고 카메라 앞에 섰고 카메라를 잡은 스태프가 말했다.
“세트장을 꾸밀 사진이야.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알지?”
“유진처럼 찍으란 이야기죠?”
이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새로운 촬영장에 왔다는 설렘이 지워졌다. 차분하게 내려앉는 심정을 느끼며 이곳까지 오며 봤던 세상을 회색빛으로 물들였다.
동화 같던 풍경은 어느덧 황량하게 변했고 이안은 감은 눈을 떴다.
흠칫.
“이안?”
아까까지만 해도 느껴지던 몽글몽글한 느낌이 사라졌다.
당황한 래리는 고개를 돌린 이안과 얼굴을 마주했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엔 일말의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쌀쌀맞은 걸 넘어 무가치한 걸 보는 듯한 시선.
“왜.”
찰칵!
짧은 한마디와 함께 폴라로이드 사진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스위치를 다시 켠 것처럼 이 소리와 함께 이안의 얼굴에서 생기가 감돌자 래리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으, 소름 끼쳐 죽는 줄 알았네. 무슨 감정을 그렇게 빨리 바꿔?”
“오래 연습하다 보면 돼.”
“얼마나?”
글쎄 한 이십 년? 안 될 수도 있고.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그리고 연기할 때 진짜 중요한 건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고 그걸 갈고 닦는 거거든.”
“그래?”
“연기 학원에 다닌다고 했으면 리 스트라스버그 기법이니, 스텔라 애들러 기법이니 하는 것도 배웠지?”
“응! 둘 다 배웠어.”
둘 다 메소드를 지향하지만 둘의 방향성은 달랐다.
배우가 펼치는 감정은 즉흥적이면 안 되고 기억된 감정을 연기해야 한다는 정서 기억법을 주장한 리 스트라스버그와 달리.
스텔라 애들러는 메소드는 과거의 감정에 기대지 않고 순수한 상상력의 연기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은 생전에 사이가 나빴을 정도로 의견이 달랐잖아. 그렇다고 수많은 명배우를 배출한 둘 중 하나가 틀린 건 아니야. 제각각 가치가 있었던 거지.”
계속 캐릭터에 몰입해야 하는 배우도, 손쉽게 몰입에 벗어날 수 있는 배우도 모두 가치가 있다.
결국엔 좋은 연기를 선보이는 게 중요하다.
이안의 결론에 래리가 대단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는 너는 제대로 연기를 배운 것도 아니잖아.”
퉁명스럽게 말하는 다니엘 브라운이 보였다. 단정하게 꾸민 곱상한 외모엔 얼핏 보면 불만이 가득해 보였지만.
‘불안해한다고?’
애꿎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모습이 그렇게 보였다.
혹시 벌써 약에 손을 댔나 싶었지만.
‘그럴 리는 없나.’
중고등학생 파티에도 대마초가 돌아다니는 미국이라지만 보호자가 붙어 다니는 초등학생부턴 너무 빨랐다.
약쟁이처럼 눈동자가 흐리멍덩하지도 않고.
“나도 안 배운 건 아니야. 벤 로버츠에게 따로 배우곤 했거든.”
“우와, 벤 로버츠!”
설명하자면 귀찮고 대충 팔아먹기 쉬운 이름을 거론하니까 래리가 눈을 빛냈다.
“어떤 걸 가르쳐줬어?”
“그냥 이것저것. 되는대로 알려줬어.”
벤, 그 망할 인간을 떠올리며 이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얼마 전에 보지도 못하는 R등급 영화인 Sucker punch의 시사회에 초대하겠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영화는 못 보니 사진만 찍고 가라고?’
정강이를 두 번은 걷어차 줬어야 했는데.
벤 로버츠라는 말에 할 말이 없어졌는지 다니엘은 몸을 훽 돌리고 사라졌고 스태프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내밀었다.
“이야, 진짜 유진처럼 나왔네. 카메라에 잘 잡히는 위치에 붙여야겠다.”
“또 한 장 찍자! 응?”
새하얀 도화지에 떨어진 검은 잉크처럼 해맑게 웃는 아이들 사진 사이에 들어간다면 위화감을 줄법한 사진이다.
한 장 더 찍자는 래리 옆으로 새침한 얼굴의 소녀가 다가왔다.
“시끄러워, 래리. 다른 곳은 수업 중이잖니. 그리고 나도 한 장 찍어야 할 거 아니야.”
“왜?”
“왜긴! 드라마에서 우리 둘은 나름 커, 커플이잖아. 안 그래?”
하긴 배역을 생각하면 없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도로시까지 사진을 찍었고 스태프들은 분주하게 찍은 사진들로 교실을 꾸몄다.
대략 이십 분 남짓한 시간 만에 휑했던 공간은 평범한 초등학교 교실처럼 변했고 감독은 아역들을 불러 조언을 건넸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학교 다닐 때처럼 수업할 거니깐. 대신 평소 학교 수업보단 어렵겠지?”
두 학년 위의 수업을 배우는 영재학교만큼은 아니어도 배경이 되는 이 학교의 교육 수준은 높았다.
명문 사립 중학교로 진학시키는 학교이니 당연하지만.
당황하지 않게 미리 알린 감독은 이안을 돌아봤다.
이번 장면의 핵심은 유진이고 그만큼 힘든 장면을 소화해야 했다.
“주기율표를 외워왔니? 중간에 틀려도 좋단다. 다시 찍어도 되고 편집으로 해결해도 되니까.”
과학 시간에 앞으로 나가 주기율표를 적는 장면.
유진의 영리함을 부각하는 장면이고 이안은 자신 있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걱정 안 해도 좋아요. 완벽하게 준비해왔으니까요.”
자신감 있는 대답에 감독은 잘 부탁한다는 말만 남겼다.
단번에 적는 게 그림으론 가장 좋겠지만 여차하면 편집으로 해결하면 될 문제니까.
“그럼 촬영합시다!”
감독의 선언과 아역들은 전부 자리에 앉았고 카메라가 돌아갔다.
교탁 앞에 선 선생님 역할의 배우는 칠판에 원소라는 이름을 적었다.
“원소는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에요. 혹시 어떤 원소가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선생님의 질문에 짹짹거리며 대답하는 아이들 속에서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진?”
선생님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고 칠판 앞에 선 유진은 분필을 들었다.
H.
수소로 시작된 주기율표가 막힘 없이 나열됐고, 감독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없을 텐데, 잘 준비해왔네.’
대본에 적힌 20번까지 적는 모습에 기뻐하기도 잠시.
“…어?”
분필을 쥔 손이 멈추질 않았다.
21번인 Sc을 지나도 멈추지 않은 주기율표는 112번 Cn까지 칠판에 빽빽하게 적힌 이후에야 끝이 났다.
탁!
분필 내려놓는 소리에 촬영장에선 침묵이 흘렀다.
“…미친.”
다니엘이 침묵을 깨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