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41)
────────────────────────────────────
────────────────────────────────────
첫 번째 앨범
오래된 앙숙 관계를 끝내는 의미로 영화 제작을 돕는다니. 기자들이 봤으면 감탄하며 손을 놀렸을 거다.
두 거장의 아름다운 화해라고.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렇겠지.’
의도는 좋다. 아니, 어쩌면 결과도 좋을 수 있다. 한 사람만 희생한다면.
“…말은 고마우나. 힘들게 도와줄 필요는 없네만.”
“부담가질 것 없네. 나이 먹을수록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거든. 그동안 자네의 험담을 한 사죄라고 생각하게나.”
이건 답이 없다. 저렇게까지 말했는데 거절하면 다시 한 판 붙자는 뜻이다.
이안이 글렀다며 속으로 혀를 찰 때 랜든이 화장실을 다녀온다면서 자리를 비웠다.
단둘이 남자, 게빈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어떡하면 좋겠니.”
“뭘 어떡해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건 감독님도 아시잖아요. 고맙다고 하고 받아야죠. 안 받는 게 더 수상한 거 알죠?”
“알아. 다들 이상하게 보겠지.”
돈을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순수한 호의를 거절당했다고 랜든이 떠들어봐라.
기자들 이전에 투자자랑 배급사에서 연락이 올 거다. 노망이 들었나 속으로 의심하면서 열심히 설득하겠지.
“그냥 받아들여요. 어쩌겠어요.”
“하아… 그래, 처음부터 거짓말한 내 잘못이지. 그리고 저 인간도 제 할 일이 있을 텐데, 오면 얼마나 오겠니.”
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고 돌아온 랜든은 답을 물었다.
“그래서 결정은 내렸나?”
“도와준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잘 부탁하네.”
“하하하, 내가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겠네. 걱정하지 말게나!”
호탕한 웃음을 들으며 이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랜든의 차기작은 계획조차 없다는 걸 숨겼는데 잘한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잘 하시지.’
니체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들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라고 했던가.
죽진 않을 테니 강해져서 돌아올 것이다.
***
문자가 왔다.
-살려주렴. 죽을 거 같단다. 매일 같이 그놈이 찾아오고 있어.
-지금도 밖에서 문을 두들기고 있단다. 감독이란 인간이 제 작품 준비를 해야지. 남의 작품에 이렇게 기웃거리는지 모르겠구나.
…그러고 보니 니체는 말년에 광증을 앓다가 죽었다고 했던가.
이러다가 강해지기 전에 정신과에 다니는 게 빠를 거 같았다.
안타까운 게빈의 문자를 애써 외면하고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Beverly Hills Moms 촬영 중이니 어쩔 수 없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스태프의 지시와 함께 카메라가 돌아갔고 복면을 쓴 살인범과 마주했다.
컨설턴트와 다른 학부모들을 죽인 살인범의 다음 타겟은 유진의 엄마인 안나였지만, 주인공인 클로에가 불륜을 숨기기 위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때마침 안나를 불렀다.
허탕을 치게 된 살인범이 만난 건 유진이었다.
소년의 팔을 칼로 그으며 살인범이 속삭였다.
“넌 나랑 똑같아. 우린 불쌍한 삶을 살고 있거든.”
지독한 피해의식으로 가득 찬 살인범이 그은 팔뚝에선 피가 주르륵 흘렀다.
유진은 두려움에 빠지기보단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며 물었다.
“내가 너랑 같다고?”
“그래, 너도 나처럼 망가져 있잖아. 네 행동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지.”
테이블 위에 수북하게 쌓인 책.
가혹할 정도로 많은 공부량을 범인은 손으로 대충 헤집어놨다.
“학창시절 내 별명은 괴물이었거든. 제대로 웃을 줄도 모르는 괴물.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왜 그런 줄 알려줄까?”
“왜 그런 건데.”
“다른 아이들이 감정을 배울 시간에 우리는 이 짓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 개 같은 인간들만 없었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지독한 원망을 내뱉은 범인은 칼을 유진에게 쥐여줬다.
“너도 나처럼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아? 한 번만 용기를 내면 돼. 그럼 평범한 사람처럼 될 수 있을 거야.”
피 묻은 칼날에 유진의 얼굴이 비쳤다.
날카로운 칼날을 보는 무심한 표정은 범인의 말대로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쓴 괴물처럼 느껴졌다.
가족조차 죽일 수 있는 비인간성.
“나도 평범해지고 싶어.”
“그렇지?”
무감정한 말투에 간절함이 느껴졌다. 작품 동안 처음으로 원하는 걸 말했기 때문이다.
뱀에게 속아 선악과에 손을 대는 하와처럼 칼을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타락할 거 같은 위태로운 분위기에서 유진이 입을 열었다.
“엄마는 내게 말했어. 너는 지옥에서 태어났다고.”
가정의 붕괴와 자살로 얼룩진 국가 부도의 날에 유진은 태어났다.
범인은 이 말에 차갑게 눈을 휘었다.
“그래, 널 악마 같다고 말했겠지. 나처럼 말이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나는 처음부터 평범했던 적이 없다는 뜻이지.”
지옥에서 태어났기에 인간성이 없는 거다. 평범하지 못한 유진을 위로하는 유일한 말이었다.
소년은 들고 있는 칼을 휘둘렀고 가볍게 피한 범인은 뒤로 훌쩍 물러났다.
“오늘 결정을 넌 반드시 후회할 거야.”
저주 같은 말을 남기고 범인이 사라지자 유진은 칼을 내팽개치고 시계를 봤다.
“문제 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 약속은 지켜야 하는데.”
약속을 어기는 건 나쁜 행동이라고 지겹게 들어왔다.
착한 아이가 될 순 없어도 나쁜 행동은 안 할 수 있지 않을까? 피가 흐르는 팔을 대충 동여맨 유진은 책을 펼쳤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아, 엄마 돌아왔… 꺄아아악! 유진아!”
안나의 비명과 함께 감독이 소리쳤다.
“좋았어! 역시 이안이야! 흠잡을 곳이 없네.”
감독의 선언과 함께 이안은 깊게 숨을 내뱉었다.
긴장과 함께 유진이 남긴 감정 찌꺼기가 흩어졌다.
범인이 처음으로 등장하며 유진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해소해주는 장면이었다.
중요한 장면인 만큼 밍밍하게 찍히면 그동안 쌓은 노력이 무의미해지니 걱정한 사람이 더러 있었는데.
“역시 이안을 걱정하는 건 괜한 일이라니까?”
“내가 계속 말했잖아. 잘 할 거라고.”
스태프들은 걱정을 홀가분하게 털어냈다.
컷 몇 개를 더 따는 걸 보던 스태프들 옆으로 키가 큰 남성이 다가왔다.
“이안은 아직도 촬영 중인가요?”
“아마 저 컷만 따면 끝날… 어?”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해주던 스태프는 상대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곳을 누추하게 만들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다.
술렁거리는 촬영장 분위기에 고개를 돌린 이안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널 집까지 모시러 왔지. 무슨 일이겠냐.”
스태프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역 혐오자로 악명 높은 벤이 보호자 역할까지 자처한다고?
‘물론 친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오랜 악명 때문에 할리우드 관계자 중에는 긴가민가한 사람이 많았다.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는 벤과 티격태격하는 이안의 행동을 보니 소문만이 아니라 진짜 친해 보였다.
등장만으로 촬영장을 들썩이게 만든 벤과 함께 차에 올라탄 이안이 물었다.
“그래서 진짜 어쩐 일이에요?”
“그냥 보려고 온 거라니까. Sucker punch 홍보 때문에 한국에 다녀왔더니 네 생각이 더 나더라고.”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요.”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벤이 투덜거렸다.
“어찌나 너에 관해서 묻던지 내가 네 아빠인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까지 널 데리고 갔지.”
“출연도 안 한 영화 홍보를 제가 왜 따라가요.”
“하다못해 엑스트라로 넣었어야 했다고 프로듀서랑 올리버가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넌 모를 거야.”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긴 했지만 고작 콘도그를 주던 소년이 이렇게 잘 나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당사자인 이안조차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은 몰랐는데.
“인상적인 질문이라도 있었어요? 나중에 한국에 가거나, 인터뷰하면 참고하게요.”
“인상적인 질문?”
솔직히 영양가 있는 질문은 몇 개 없었다. 김치를 잘 먹는지 이런 이상한 걸 묻기나 했지.
애초에 영화 외적인 걸 물어보는 예의 없는 기자들이 정상적인 질문을 할 리가 없지만.
잠시 고민하니 퍼뜩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아! 이건 기자가 한 말은 아니고 홍보 때문에 만난 방송 관계자가 해준 말이거든? 신년특집으로 운세를 보는 쇼를 했나 봐. 한국의 샤먼을 데리고 한 예언? 뭐 그런 거지.”
“그런 것도 하는구나. 그런데요?”
“재미 삼아서 유명인들의 운세나 인생 같은 걸 봤는데 네 걸 본 샤먼이 그대로 기절했다던데.”
이안은 흠칫 놀랐다. 켕기는 게 있는 만큼 호기심과 불안을 담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절요? 왜 그랬다는데요.”
“자세하겐 말을 안 해줬다던데. 자신은 죽기 싫다면서.”
진지한 이안의 표정을 힐끔 본 벤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뭘 진지하게 받아들여. 그것도 지금 시대에 샤먼이 뭐냐. 그것도 다 쇼라니까.”
“그렇죠. 다 쇼죠.”
교황청이 인정한 구마 사제도 아니고 한국의 샤먼 같은 걸 진지하게 믿진 않았다.
다만 나중에 한국에 가게 된다면 한 번 재미 삼아 가볼까 싶은 생각만 있을 뿐.
“근데 우리 지금 어디로 가요?”
“집으로 간다니깐?”
“집 같은 소리 하지 말고요. 저도 눈이 있거든요?”
하루 이틀 촬영한 것도 아니고 같은 베벌리힐스 지역인데 집으로 가는 길도 모르겠는가.
벤은 능글맞게 웃으며 차를 움직였다.
“집은 집이야. 내가 투자용으로 사놓은 집이지만.”
“거길 왜 가는데요.”
“그건 가보면 알걸. 따라온 걸 후회하진 않을 테니까. 얌전히 있어 봐.”
도착한 곳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3층짜리 집으로 신축 건물인지 모던한 느낌이 났다.
안으로 들어가자 일반적인 집이 아니란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집에서 연기하다 보면 불편할 때도 많잖아. 저기 방들은 전부 방음이 되니깐 마음대로 연습해도 상관없어.”
“정말요?”
너무 좋았다. 주택가에 사는 만큼 큰 목소리로 연습할 수 없는 게 항상 아쉬웠으니까.
혹시 누가 들을까 봐 미래에 나오는 대본으로 연습할 수도 없고.
“내가 거짓말을 왜 하겠냐. 마음껏 와서 써도 돼.”
“저야 좋죠. 근데 어쩐 일로 이런 장소를 만들었어요?”
“어쩐 일로 만들었냐고?”
벤은 답을 미루며 눈동자를 굴렸고, 정답은 다른 사람이 알려줬다.
“이안! 왔구나!”
“레이첼?”
“이리로 와봐! 여기 엄청 대단해!”
레이첼이 나온 지하로 내려간 이안은 눈을 깜빡였다.
온갖 악기로 장식된 것도 모자라서 전문적인 녹음 시설까지 보였다.
뒤따라 내려온 벤은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뭐, 그렇게 됐다. 대본 연습도 하고, 노래 연습도 하면 좋잖냐. 안 그래? 친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면 더 좋고.”
점수 좀 따겠다고 집 하나를 통째로 개조하다니. 난봉꾼 벤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깜짝 놀랄 모습이다.
“난 3층에서 아일라와 함께 있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연락해. 알겠지?”
편하게 놀라며 벤은 눈치껏 빠져줬고 둘이 남게 된 이안은 악기들을 눈으로 훑었다.
통기타, 클래식 기타, 일렉, 베이스까지. 기타 종류만 해도 여럿이고 바이올린이나 피아노처럼 익숙한 악기뿐만 아니라 젬베 같은 악기도 보였다.
‘위튜브에 연주하는 영상을 올려도 좋겠네.’
악기 관리를 위해 사람을 따로 써야 할 정도로 종류와 숫자가 많았다.
“대단하지? 여깄는 것들을 마음대로 써도 된대. 프로그램으로 듣는 소리랑 진짜 악기 소리랑 엄청 다르더라고.”
“다르지. 괜히 연주자가 있는 게 아닌걸.”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 레이첼은 놀이공원에 온 아이처럼 악기들을 만지작거렸다.
악기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하고, 뭐가 생각났다는 듯이 환하게 웃기도 하던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있잖아. 사실 오늘 들려주고 싶은 게 있거든. 다음 라이 곡을 앨범처럼 내고 싶다고 했잖아.”
“혹시 다 완성했어?!”
“으응. 열 곡 정도.”
수줍게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놀랐다. 한 곡을 쓰는 데도 족히 5개월은 걸렸던 만큼 이번엔 연 단위로 예상했는데 벌써 다 썼다니.
대충 쓴 곡도 아닐 텐데.
‘아일라에게 통과 받은 곡일 테니까.’
이안은 기대를 가득 담아서 물었다.
“그래서 이번 앨범 주제가 뭔데? 콘셉트 앨범이라고 했잖아.”
“I’m Ra-I.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곡들로 채워봤어.”
단 한 곡만 올라와서 관심이 팍 식었지만 라이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많았다. 기대된다는 표정을 짓던 이안은 반짝이는 핸드폰 화면을 내려봤다.
-이안? 오늘 촬영 끝나고 온다고 하지 않았니. 도대체 언제 오는 거니.
-랜든, 이 자식이 외계인이라면서 끔찍한 괴생명체를 가져왔다고.
이안은 문자를 썼다.
-오늘 야간까지 연장 촬영이래요.
-아역이 야간 연장 촬영이라니. 내가 할리우드 생활을 하면서 처음 듣는 말이구나. 혹시 못 오는 건 아니겠지?
-음, 그럴 거 같아요.
핸드폰이 더는 울리지 않았다. 그만큼 문자 내용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알아서 탈출할 거라 믿은 이안은 자리에 앉았다.
“그럼 어디 한 번 들어볼까?”
천재가 만든 첫 번째 앨범.
처음 같지 않은 성과가 지하에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