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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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볼드윈
몇 번 경험한 밝은 섬광 대신 시야를 가린 검은 그림자가 사라졌다.
회색빛 세계에서 CT 사진과 차트를 보는 의사의 얼굴이 보였다.
“환자분, 췌장암이라도 항암치료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반응이 좋아서 병기가 감소하면 절제할 수 있는 예도 있습니다.”
“손자 녀석의 선배 덕분에 나도 어느 정도 알아보고 왔네. 잘해봤자 조금 더 사는 정도라지? 자식도 먼저 보냈는데 손자의 짐이 될 순 없지 않은가.”
췌장암.
이안은 노인의 기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하필 최악의 암으로 꼽히는 췌장암이다.
노인은 주름진 손을 뻗어 의사의 손을 잡았다.
“손자가 만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치료하는 척만 해주게. 어차피 갈 사람. 죄책감까지 남기고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부탁하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리는 걸 느끼는 순간, 다시 세상이 일그러졌다.
회색빛이었던 세상에 색이 돌아왔지만 현실로 돌아온 건 아니었다.
힘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노인의 눈에는 헛것이 보였다. 벽에서 사람이 나오기도 하고 이미 죽은 자식이 보이기도 했다.
진통제로 인한 환상이다. 진통제가 고통과 함께 두려움도 앗아갔는지, 임박한 죽음이 기껍기만 했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고개가 돌아갔다.
‘누구지?’
닉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낯선 남성이 방안으로 들어오자 노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카터?”
“네, 접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란다.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걱정?
이안은 노인의 말을 부정했다.
어투와 표정과 달리 냄새난다는 듯이 미세하게 찡그린 코와 무신경하게 주변 물건을 발로 미는 행동은 걱정하는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요즘 닉은 어떻니?”
“회사 일을 잘 하고 있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너까지 날 속이려 하지 말렴. 진즉에 다 알았단다. 닉은 거짓말하면 옛날부터 오른쪽 귓불을 만지작거렸거든.”
“그렇습니까?”
남성의 얼굴엔 순간 귀찮음이 스쳤다.
역시 걱정하던 게 아니었다.
“선배인 네가 더 잘 알잖니. 얼마나 그 일을 하고 싶었는지.”
“알죠. 그래서 취업을 도와줬고요.”
“한 번만 더 도와주렴. 염치없지만 마지막 부탁이란… 끄윽.”
누군가 배를 헤집어 놓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노인은 말을 잇지 못했고 눈을 깜빡이니 현실로 돌아왔다.
손을 맞잡고 의아하게 바라보는 노인이 보였다.
“…다 알고 있죠?”
갑작스러운 말을 이해 못 할 노인을 위해 이안은 오른쪽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그 의미를 눈치챈 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닉, 잠시 자리 좀 비켜주렴.”
“할아버지?”
“정말 잠시면 된단다.”
닉이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가자 노인은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이안이 가까이 다가가자 노인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습관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니? 어릴 때부터 많이 혼나서 거짓말을 잘 하지 않는 아이인데.”
“닉은 사실 엄청난 거짓말쟁이고, 허풍쟁이거든요. 노숙자에게 오스카를 받게 해주겠다고 할 정도로.”
진짜다. 이젠 없을 먼 미래의 일이지만.
그때를 떠올리며 작게 웃은 이안은 노인에게 물었다.
“그것보다 제대로 치료받는 게 낫지 않겠어요?”
“…다 아는 건 내가 아니라 너 같구나. 그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원.”
노인은 낡은 방을 쓱 둘러봤다. 긴 세월 동안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방이다.
“이 집은 닉의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살아온 집이란다. 힘들고 아픈 기억도 많지만 그만큼 기쁜 일도 많았지. 내겐 병원에서 보내는 한 달보다 이곳에서 보내는 하루가 더 가치 있단다.”
“…알겠어요. 비밀로 할게요.”
“고맙구나.”
고집이 느껴지는 말에 이안은 길게 주장하지 않고 물러났다.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
노숙자로 살면서 종종 봐온 이런 사람은 의견을 존중해주는 게 좋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았다. 기껏해야 원망이나 슬픔 가득한 표정을 짓게 할 뿐이니.
작게 기침한 노인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보였고 이안이 먼저 말했다.
“너무 갑자기 찾아왔죠? 자리를 비켜드릴 테니 편히 쉬세요.”
“…미안하지만 그렇게 해주겠니?”
“그럼요.”
침대에 눕는 걸 도와주고 나온 이안에게 밖에서 기다리던 닉이 다가왔다.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눴어?”
“그냥 잘 부탁한다고 하시던데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주무신대요. 나가서 이야기하죠.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요.”
살랑이는 바람이 스치자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근처 공원 벤치에 앉은 이안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진짜 정보 유출을 했어요?”
“…난 정말 그런 일인지 몰랐어. 그냥 선배가 일에 필요하다고 해서 알려준 것뿐이라고.”
선배.
환상에서 본 그 남자였다.
“선배라고요?”
“응, 내가 속해 있는 프래터니티의 선배야. 내가 WBE에 입사할 수 있도록 도와줬고.”
프래터니티는 미국 대학교 등에 있는 남자의 사교 클럽을 말한다. 참고로 여자는 소로리티로 부른다.
백 년이 넘은 역사를 가진 곳도 많고 사회로 나갈 때 닉처럼 도움을 받기도 한다.
신입생 신고식에서 표백제를 먹이거나 학생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올 정도로 가혹한 신고식으로 유명하지만 그만큼 서로 끈끈했고.
“그럼 정말 아무런 의심 없이 자료를 줬겠네요?”
“그래, 나는 선배가 정보를 팔아먹었을 줄 몰랐다고.”
“자백은 왜 했어요?”
“모든 책임을 지면 돈을 준다고 했어. 당장 큰돈을 구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거든.”
흐름은 이해가 가지만 이게 끝이라고 넘기기엔 무언가 찝찝했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그 선배도 돈이 급한 사람이에요?”
“아니, 회사에서 나름 잘 나가는 사람이야. 돈이 급하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는데.”
“돈이 급한 것도 아닌데 회사 정보를 팔았다고요?”
자칫하면 자신의 경력이 완전히 망가질 정도로 위험한 행동을 했다고?
말이 안 됐…
‘아니지. 할 수도 있어.’
이안은 닉을 봤다. 처음부터 책임을 뒤집어씌울 상대가 있다면 가능했다.
“언제 정보를 넘겨줬죠?”
“2월이었지.”
2월이면 가능하다. 첫 번째 환상에서 의사 책상 위에 있던 달력은 1월이었다.
카터는 노인이 암에 걸려 돈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중요한 건 동기야. 돈이 별로 필요 없는 사람이 이런 짓을 왜 벌였지?’
이안은 카터라는 사람의 행동을 되짚어봤다.
아픈 사람도 수단으로 쓸 수 있는 비정하면서 사회적으론 성공한 사람. 예상되는 게 있다.
“소시오패스.”
“소시오패스?”
“닉, 잘 생각해봐요. 이건 중요한 질문이거든요. 오스틴도 잘 나가죠?”
“그렇지. 너도 알잖아. 능력이 있는 사람이란 거.”
“그럼 그 선배라는 사람하고 경쟁 상대겠네요. 둘 다 회사에서 잘 나가니까요.”
“…그렇지.”
카터의 목표가 돈이 아니라 오스틴이라면 행동이 이해가 갔다. 그렇다면 닉의 일이 끝이 아닐 거다.
“이번 캐스팅뿐만 아니라 최근에 오스틴의 일이 잘 안되지 않았나요? 이상하게 삐끗하는 느낌이요.”
“그래, 네 말이 맞아. 이런 망할! 개 같은 새끼!”
진실을 눈치챈 닉은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벌떡 일어났다.
사수인 오스틴은 떠나는 날에도 치료비에 보태라며 몰래 돈을 건네줬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배신했다니 죄책감과 분노를 느꼈다.
“당장 알려줘야겠어.”
“멈춰요. 그럼 받은 돈도 뱉어내야 하잖아요. 그리고 비밀유지 계약서도 썼죠? 소송까지 할 수 있는데 괜찮아요?”
냉정하게 현실을 일깨워주자 닉은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안은 속으로 혀를 찼다. 미래에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머리카락을 저렇게 낭비하고 있다니 안타까웠다.
‘일단 카터의 범행이 드러나는 건 사실이야. 그러니 닉이 에이전트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겠지.’
문제는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고 사내정치에 밀린 오스틴이 쫓겨나는 게 먼저일 수도 있다.
당장 손을 써야 하는 건 맞지만 이럴 때는 영리하게 일을 진행해야 한다.
“받은 돈을 아깝게 돌려줄 필요도 없어요. 비밀유지를 지키면서 오스틴을 돕는 건 어렵지 않거든요. 그냥 조금 돌아가면 될 뿐이니까요.”
“돌아간다고?”
이안은 핸드폰을 꺼내 바로 오스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스틴?”
-네, 무슨 일입니까? 이안 군.
“오늘 닉을 만났거든요. 근데 이상한 이야기를 하던데요.”
-이상한 이야기요?
“역시 요즘도 오스틴의 일이 잘 안 풀리냐고 묻더라고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냥 우연일 거라고 넘어갔던 기억들이 떠오르며 의심의 싹이 튼 게 느껴졌다.
-음, 다른 말은 없었나요?
“네! 계속 물어봐도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집으로 들어가더라고요. 안 말해줄 거 같아요. 치사하지 않아요?”
-네, 치사하군요. 아무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화를 끊은 이안은 멍한 닉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쉽죠?”
“그거로 될까?”
“오스틴은 유능하니 알아서 꼬리를 잡겠죠. 정 안 될 거 같으면 다른 떡밥을 던지면 될 뿐이고요. 우린 그냥 기다리면 돼요.”
카터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날 때까지.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지금 다니는 일은 그만두고 우리 가게로 출근해요. 마침 아버지가 새로 가게를 연다고 해서 일손이 부족하니까요.”
“날 신경써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시끄러워요. 할아버지 때문이거든요? 그리고 에이전트로 일할 준비도 다시 하고요. 일이 잘 풀려도 어차피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할 거예요.”
정보를 팔아먹었다는 오명만 벗겨질 뿐이지 거짓 자백을 한 건 그대로 남을 거다.
좋은 에이전시에 취업하는 건 힘들 테고 신인을 찾으며 밑바닥부터 노력해야 할 거다.
‘쉽진 않겠지만 잘 하겠지.’
지금보다 더한 상황에도 성공한 그를 봤으니까.
“…네가 도와준 걸 후회 안 할 정도로 노력할게.”
“그럼 됐어요. 아, 콘도그를 가져왔으니까 그것도 가져가고요. 이번에 신메뉴로 만든 오징어 먹물 콘도그도 있어요.”
“맛은 괜찮은 거지?”
“주는 대로 먹어요. 뭘 잘했다고 맛 타령을 하고 있어요?”
이안의 핀잔에 닉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웃어보는 듯했다.
***
“…닉이 그런 말을 했다고?”
통화를 종료한 오스틴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꽤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실력이 녹슨 게 아니냐는 말이 들릴 정도로 일이 잘 안 풀리는 상황이었다.
“우연이 아니다. 우연이 아니란 말이지?”
누군가 일을 방해하고 있다니 오히려 좋았다. 운이 나쁘거나 실력이 부족해서 일이 잘 안 풀린 게 아니니 범인만 잡으면 된다.
누가 이딴 짓을 벌였을까? 예상되는 사람들을 머릿속으로 추려보던 그는 내선전화로 밑에 직원을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근래에 우리가 맡았던 일을 전부 가져와 봐. 확인할 게 있으니까.”
오스틴은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겁 없이 자신을 사냥감 취급한 인간이 누군지 너무 궁금했다.
***
이안은 지난 경험을 떠올려봤다.
마일즈의 사고, 다니엘의 자살, 이번에 닉의 누명까지. 이 세 번의 일을 통해 환상을 봤다.
‘전부 나랑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었어.’
마일즈는 노숙자 시절 도움을 받았고 다니엘은 배우가 되는 꿈을 심어준 세 노숙자 중 한 명이었다.
에이전트였던 닉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환상은 당사자가 아니라 관계자를 통해서도 보였지.’
첫 번째는 마일즈를 통해 봤지만, 다니엘과 닉은 가족을 통해 봤다.
환상이 보이는 이유는 정확히 몰라도 미래의 비극을 막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문제는 이번에 본 검은 그림자지. 이전에는 섬광과 함께 환상이 보였는데 이번엔 아니었어.’
마치 사신의 검은 망토가 눈을 가리는 듯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후, 모르겠다.”
확신하기엔 아직 사례가 부족했다. 머릿속 추측을 밀어낸 이안은 몸을 일으켰다.
황폐하게 꾸며진 드라마 세트장이 보였다. invisible children 시즌2가 촬영될 장소였다.
새로 지어진 임시 건물도 보였고 시간 변화를 보여주는 것처럼 시즌1과 다르게 꾸며진 기존 장소도 보였다.
천천히 세트장을 살피는 이안에게 누군가 뛰어왔다.
“이안! 벌써 왔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벤자민의 아역이다. 반갑게 인사를 하던 이안은 뒤이은 무거운 발걸음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성큼 다가온 남성이 명함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WBE 에이전트인 카터 볼드윈이라고 합니다. 레오 로저스의 에이전트죠.”
카터 볼드윈.
이름이 선명하게 적힌 명함을 받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안 프라이스라고 해요.”
“알고 있습니다. 꼭 뵙고 싶은 배우였거든요.”
“별말씀을.”
닉을 에이전트에서 콘도그 가게 직원으로 만든 사람.
한 번쯤 보고 싶다는 생각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아, 이놈을 어떻게 엿 먹이지.’
닉에겐 오스틴에게 뒷일을 맡기라고 했지만 정작 이안 본인은 그렇게 넘어가기 싫었다.
이안과 카터는 서로를 향해 속내를 숨긴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