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63)
구미호
배우에게 목소리는 중요한 도구다.
‘특히 나에겐.’
얼굴의 화상은 혐오감 이전에 표정 연기가 제대로 안 된다는 치명적인 문제를 줬다.
이 빈자리를 목소리와 행동이 채워야 했으니 그 중요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아아아~”
괜히 옥타브를 올려보던 이안은 집을 훑어봤다.
변성기가 끝난 기념으로 열린 하우스 파티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그걸 치우고 있는 딜런도.
“가정부에게 맡기면 될 걸 왜 직접하고 있어요?”
“좋은 일은 마무리도 신경 써야 하는 법이거든. 대충 정리만 해둘 거란다.”
쓰레기 봉지를 대충 묶은 딜런은 손을 닦고 함께 소파에 앉았다.
“기분은 어떻니?”
“목이 답답한 게 사라지니 좋네요. 다시 연기할 수 있다는 건 훨씬 좋고요.”
이안은 목을 만지작거렸다.
라이 목소리로 연기하지 않으려던 건 안 좋은 기억 탓도 있지만, 바뀐 목소리가 훨씬 익숙한 도구인 탓도 컸다.
‘요리사가 익숙한 칼을 바꾼 것과 같지.’
아무리 실력 좋은 요리사도 낯선 칼에 베이곤 하지 않은가.
미성의 목소리로 연기하는 건 비슷한 느낌을 줬다. 원래 하던 방식으로 감정표현을 할 수 없으니 굉장히 답답했고.
‘그렇다고 과거랑 완전 똑같은 목소리는 아니지만.’
변성기를 조심히 보낸 지금과 일부러 긁었던 그때가 같을 리 없다. 목소리의 윤곽이 나올 때부터 가늠된 일이니 당혹스럽진 않고.
저음과 미성 그 경계에 있는 목소리는 허스키함이 사라지자 온화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났다.
이 정도는 충분히 노력으로 메울 수 있는 차이였다.
“그렇게 연기가 좋아?”
“당연하죠.”
연기 연습만으로 채울 수 없는 갈증을 2년 동안 참았다. 돌이켜 보면 진짜 용케 참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더는 참을 생각이 없고.
“그럼 전 오스틴에게 다녀올게요.”
“조금 이르지 않니?”
“미리 말해뒀어요.”
2년 동안 기다려온 건 오스틴도 마찬가지다.
가벼운 광고 계약 같은 건 몇 번 했지만 고작 그거에 성이 찰 리가 없다. 변성기가 끝났다는 말에 일찍 와도 좋다는 말을 한 걸 보면.
이안은 바로 경호원과 함께 WBE로 향했고 토요일에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을 지나쳐 오스틴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좀 오랜만이죠?”
“하하하, 통화는 꾸준히 하지 않았습니까?”
활짝 웃은 오스틴은 이안을 빠르게 살폈다.
“전에 봤을 때보다 꽤 큰 거 같은데요.”
“5피트 5인치 정도 돼요.”
대략 165cm라는 말에 오스틴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13살이죠?”
“몇 달 뒤면 14살이죠. 7학년이니 내후년이면 고등학교에 가고요.”
“이대로라면 꽤 클 거 같습니다.”
성장판 검사까진 굳이 안 해봤지만 그럴 거 같긴 했다.
과거에도 작은 편은 아니었는데 그때보다 좋은 환경도 좋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으니까.
“마음 같아선 근황을 더 묻고 싶지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제 마음을 바로 아시네요?”
“사실 저도 비슷한 마음입니다. 요즘 일거리가 부족해서 생계가 힘든 상황이었거든요.”
WBE에서 잘 나가는 에이전트가 잘도 그렇겠다.
가볍게 농담을 던진 그는 자리에 앉자 바로 작품 이야기를 꺼냈다.
“이안 앞으로 들어온 캐스팅은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네요.”
변성기를 이유로 휴식을 선언한 사람을 캐스팅할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그 기간이 2년이나 됐고.
“일단 복귀를 알렸으니 반응이 오긴 할 텐데 그렇게 빠르지도 않을 테고요. 그래서 일단 욕심을 내려놓는 게 어떻습니까?”
“그럼 예전처럼 엑스트라는 어때요?”
장난스러운 물음에 오스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농담으로라도 하지 말아주시죠. 그때처럼은 절대 안 됩니다.”
“에이, 알고 있어요.”
마음 같아선 그때처럼 엑스트라라도 괜찮으니 연기를 하고 싶지만 이건 오스틴에게 폐였다.
‘에미상 후보를 엑스트라로 넣는 에이전트라니.’
무능하거나 정신병이 있거나 둘 중 하나로 여겨지며 경력에 굵직한 획을 그을 거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분량은 적어도 임팩트가 있는 조연을 맡는 건 어떻습니까?”
“연기 복귀로는 나쁘지 않죠. 괜찮은 작품이라도 있어요?”
“눈에 들어온 게 있긴 합니다. 드라마 쪽 캐릭터죠.”
드라마라면 좋다.
영화보다 결과물이 빨리 나오는 만큼 다음 캐스팅을 위한 다리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테니까.
오스틴도 같은 의견을 내뱉었다.
“어차피 복귀 사실을 알려도 반응이 미적지근할 겁니다. 아역에게 2년은 큰 변화를 가져올 기간이잖습니까.”
“키만 해도 꽤 컸죠. 목소리도 달라졌고요.”
“전 이 작품이 그런 의심을 털어낼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고요.”
…새로운 모습?
묘한 말이다.
“근데 드라마라고 했죠? 아직도 배역이 공백이라면 정규 시즌이 아닌가 봐요.”
“정규 시즌입니다.”
이상했다. 이미 정규 시즌 드라마는 방영을 시작했다.
어지간해선 캐스팅이 끝났을 시기인데 임팩트 있는 조연이 남아 있다고?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인데.’
여러 이유로 갑작스럽게 배우가 하차했거나.
“마땅한 배우를 캐스팅하지 못해서 곤란한 상태라고 하더군요.”
그래, 진짜 캐스팅이 쉽지 않은 경우.
“도대체 무슨 배역이길래 그래요?”
“이겁니다.”
이안은 먼저 제목을 봤다.
‘Moonlight?’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작품 개요를 슬쩍 보니 어디서 들어봤는지 바로 알았다.
“아, 도로시가 말한 드라마네요.”
“아시는군요?”
“소설이 원작인 드라마인 건 알아요. 걔가 이 소설 팬이라고 했거든요. 패러노멀 로맨스잖아요.”
판타지 로맨스라고도 불리며 환상, 초자연, 공상과학 같은 비현실적인 요소와 로맨스가 결합한 장르를 말한다.
뱀파이어와 연애를 작품이 이런 계열에 들어갔고.
“뱀파이어와 늑대인간 사이에서 사랑받는 소녀에 관한 이야깁니다. 다른 종족도 여럿 나오고요.”
“근데 캐스팅이 힘들 이유가 있어요? 팬이 많은 소설이라 처음부터 관심을 크게 받은 드라마잖아요.”
“그 팬덤이 문젭니다. 원작 그대로 캐릭터를 살리길 바라니까요.”
종이를 넘겨 배역을 확인한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만 하네요.”
“그렇죠?”
동양에서 넘어온 구미호 캐릭터였다. 외형은 소년이지만 속은 수백 살을 먹었고.
“팬덤 때문에 화이트워싱도 못 했나 봐요.”
“비중은 적어도 인기가 많은 캐릭터입니다. 원작자도 최대한 설정을 지켜달라고 했고요.”
“소년이라. 그냥 동안인 동양인 배우를 써도 괜찮겠는데요. 어차피 잘 구분 못 하잖아요.”
“그런 배우를 구하는 것도 일이죠.”
팬덤이 강한 작품을 찍다 보면 생기는 문제다.
“그래서 아직도 오디션 중이에요?”
“사실 거의 마무리 단계라고 들었습니다. 지금 오디션을 본다고 해도 안 들어주겠죠. 이쪽하고 인연이 없다면요.”
캐스팅을 맡은 곳을 본 이안은 빙그레 웃었다.
“정확히는 이안과 인연이 있죠.”
“아코스타네요.”
아코스타 캐스팅.
전 연인이자, invisible children에 캐스팅한 아델리아가 있는 곳이다.
***
“합격! 무조건 합격!”
“이 미친놈이?”
아델리아는 동생놈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아파! 머리 나빠지면 책임질 거야?”
“더 나빠질 구석도 없어. 그리고 누가 그딴 식으로 일하라고 했어?!”
그녀는 짜증을 냈다.
진짜 동생에게 일을 가르쳐주라고 한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싶은 기분이다.
물론 동생인 피터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안이잖아. 에미상 후보에까지 올랐고 사진을 보니까 잘 컸던데. 이 정도면 원작 팬들도 만족하겠지.”
“단순히 그 이유가 아니잖아. 이안을 처음 알아본 게 너라면서 실컷 떠들고 다닌 걸 모를 줄 알아?”
“내가 없는 말을 했나.”
어쩌다 이룬 인생 최대의 업적도 적당히 우려먹어야지.
혀를 찬 그녀는 시계를 봤다. 어차피 슬슬 도착할 시간이니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 됐다.
잠시 후 노크와 함께 이안이 들어왔다.
“오랜만이네요.”
아델리아는 들어오는 소년에게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오랜만이네. 처음 들어왔을 때는 작았는데 말이야.”
“한창 클 때잖아요.”
정수리가 보이던 소년이 어느덧 비슷한 높이에서 눈을 마주칠 정도가 됐다.
지나간 시간을 느끼기엔 충분한 차이였다.
“혹시 나도 기억하니?”
“물론이죠. 제작진 일이 아니라 이젠 캐스팅 일을 하시려고요?”
“기억하는구나! 정말 반갑다.”
저러다 또 정신 나간 소리를 내뱉을까 걱정한 아델리아는 먼저 나섰다.
“이번 연락이 너무 갑작스러웠던 건 알지?”
“알죠. 놓치기엔 너무 좋은 기회라서 어쩔 수 없었어요.”
“친분으로 해줄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야. 앞서 좋은 연기를 선보인 배우들이 아닌 널 뽑을 이유를 보여줘야 해. 나는 냉정한 눈으로 판단할 거고.”
이안은 명백히 후발주자다.
수차례 오디션을 보며 충분히 매력을 보여준 다른 배우들을 밀어내려면 이 한 번을 잘 살려야 했다.
얼핏 섭섭하게 들릴 만한 말에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를 받은 거로 만족해요.”
“좋아.”
아델리아는 카메라를 켰다.
최종 결정권자인 쇼러너에게 보여줄 영상 촬영을 시작하자 이안이 먼저 물었다.
“원작에 있는 대사로 연기를 해도 상관없죠?”
“그거로 준비해왔다면 얼마든지.”
확답을 받은 이안은 깊게 숨을 내뱉으며 오디션 전에 읽었던 원작을 떠올렸다.
‘솔직히 난 로맨스를 잘 몰라.’
미녀와 야수도 아니고. 끔찍한 얼굴로 로맨스를 찍었을 리가 없잖는가.
빈자리를 채워줄 연애 경험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얼마 안 되는 경험을 준 상대가 바로 앞에 있었다.
이안은 살포시 발을 내디뎠다.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발걸음은 바람과 같은 자유를 품고 있었다.
“이 밤중에 어딜 가느냐.”
검은 눈동자에는 걱정과 따스함이 감돌았다.
성큼 다가와 묻는 말에 당황했던 아델리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정확한 대사는 떠오르지 않지만 대본으로 본 적이 있는 장면이다.
얼추 맞춰줄 순 있다.
“말릴 생각이야?”
“말릴 생각이라면 들어주겠느냐.”
“아니.”
“그렇구나.”
소년의 입가에는 씁쓸함이 감돌았다.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자 아델리아는 흠칫 놀랐다. 목선에 따스한 손길이 스쳤다.
옷깃을 매만져준 소년은 부드럽게 말했다.
“날이 춥구나. 지치고 힘들 때면 언제든 찾아오거라. 널 위한 꼬리 하나쯤은 언제든 내어줄 테니.”
아델리아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작은 숨결이 살랑이는 꼬리처럼 얼굴을 스치고 가는 느낌이 들었고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눈이 기분 좋은 소름을 만들었다.
홀린 듯이 소년을 보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합격.”
내뱉고 나서 자신이 한 말을 깨달은 아델리아는 배시시 웃는 소년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 여우냐.’
화끈한 얼굴을 식히며 생각했다.
일단 쇼러너와 이야기부터 해봐야겠다.
***
“이안! 이안, 노라죠.”
“잘 시간이야. 자자.”
“아? 아닌데?”
에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얌전히 이안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밝은 금발을 간지럽혀주자 고양이처럼 늘어진 아이는 품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따뜻한 아이의 체온을 느끼며 이안은 책을 넘겼다.
‘Moonlight’
전학 온 학교에서 사랑에 빠진 소녀는 좋아하던 소년이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되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 드라마의 오디션을 봤다니까 하이톤의 비명을 지른 도로시가 떠올랐다.
“아, 안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를 네가 연기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싫어?”
“미쳤어. 미쳤어! 당연히 싫지. 몰입이 안 되잖아. 제발 안 돼라! 응, 안 될 거야.”
거의 빌다시피 외치는 도로시를 보며 이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진짜 나랑 레이첼이 라이인 걸 알면 난리 나겠네.’
시간이 지나면 팬심이 가라앉을 줄 알았던 도로시는 Say Goodbye 이후로 더욱 라이에게 빠져든 상태였다.
2집이 나왔을 때 남의 집까지 와서 방방 뛰며 좋아할 정도였고.
‘난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후회해도 늦었다고 판단한 이안은 울리는 핸드폰을 들었다.
아델리아의 전화였다.
-축하해요. 캐스팅 됐어요.
“정말요?”
-네, 너무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고요.
“고마워요.”
나중에 따로 보자며 연락을 끊은 이안은 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이안? 어쩐 일이야.
“좋은 말씀 전하려고 합니다.”
-…아니지?
불길함을 느낀 도로시가 부정을 넘어 통화를 종료하기 전에 이안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캐스팅이 확정됐습니다. 절 드라마에서 보실 수 있게 됐어요.”
-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울리자, 이안은 통화를 바로 종료했다.
“…이안?”
“아, 미안.”
놀라 눈을 뜬 에반의 머리를 쓸어줬다.
“예방 접종을 놔줬거든.”
이런 경험이 쌓이면 라이의 정체를 알게 됐을 때 덜 충격받지 않을까?
도로시가 동의 못 할 생각을 했다.
그날 집까지 쳐들어와 울먹이는 도로시 때문에 진땀을 뺀 건 덤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