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71)
용기
둘의 오해는 금방 풀렸다.
“그렇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어?”
친구 이름을 대는 게 어렵냐고?
머리에 난 혹에 얼음찜질하던 쿠퍼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너야 쉽…”
“그냥 내 이름을 말하면 됐잖아.”
생글 웃으며 툭 내뱉는 말에 쿠퍼는 움찔했다.
친구는 없어도 귀는 있다. 학교 여자애들이 왜 이렇게 요즘 이안을 두고 말이 많았나 했는데.
‘이러니 그렇지.’
여자라면 순간 설레지 않았을까? 남자에게도 이러는 걸 봐선 자각도 별로 없는 듯했다.
무슨 이탈리아인도 아니고.
“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했나 봐?”
“…친구는 무슨. 이름도 제대로 안 알려줬으면서.”
“미안, 그런 촬영이라서 어쩔 수 없었거든.”
“촬영?!”
화들짝 놀란 쿠퍼는 주변을 살폈다.
긴장할 때는 몰랐는데 카페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된 게 보였다.
“전화해준 학생과 편한 대화 상대가 되어주고…”
어떤 촬영인지 늘어놓는 말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초조함과 불안에 휩싸인 쿠퍼는 이어지는 말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너희 집에 촬영 협조를 위해 찾아갔어. 거기서 본 것 때문에 너와 직접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거고.”
“…봤다고? 네놈들이 뭔데 그걸 봐!”
쿠퍼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급하게 달려오려는 마커스를 손으로 막은 이안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진정해. 덕분에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았으니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았다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무시당하고 괴롭힘당하는 아픔을 네가 알기나 해?!”
어린 나이부터 성공한 유명인은 절대 공감 못 할 거다.
확신하고 소리를 지른 쿠퍼는 이안의 얼굴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내가 모를 거 같아?”
공허하고 탁한 눈동자와 건조한 목소리.
순간적으로 압도당한 쿠퍼는 무너지듯 자리에 앉았다. 공감? 뭐 이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미 들켰다는 게 중요하지.
“…하, 이제 경찰서에서 조사라도 받으면 되나? 감옥에 들어가면 되고?”
“조사야 필요하면 받아야지. 근데 나는 네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직접 만나보니 알겠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삐뚤어진 건 아니었고 아직 늦지 않았다.
“약속할 게 친구로서 널 최대한 도와줄게. 한 번만 믿어줄래?”
내민 손을 쿠퍼는 물끄러미 봤다.
이걸 잡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었지만 반대로 지금처럼 친구라면서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있었나 싶었다.
한참을 머뭇거린 소년은 힘겹게 손을 뻗었다.
굳게 마주 잡은 손.
이안은 활짝 웃었다.
***
카메라가 돌아갔다.
폐허처럼 황량한 뉴욕 거리에는 질퍽거리는 피 웅덩이가 고였다.
알파가 작동한 워프 때문에 끌려온 외계인들은 순식간에 고깃덩이가 됐다.
파지직-
과부하에 걸린 워프는 불길한 파열음과 함께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멈추라고! 이러다 진짜 죽는다고!”
“상관없어.”
“내가 상관있어! 악악, 케이든 이 망할 자식아 언제 오냐고!”
“케이든? 그놈은 안 와. 내가 이미 죽였거든.”
“그럴 리 없다고! 멍청하지만 쓸데없이 튼튼한 그놈이 죽었을 리 없어!”
촐싹거리는 베타와 무감정한 알파의 대화가 한 입을 통해 빠르게 오갔다.
얼굴의 가면이 순식간에 바뀌는 변검처럼 분위기와 어투가 찰나에 바뀌는데 약간의 뒤엉킴도 없었다.
“미쳤네.”
“저걸 저렇게 쉽게 소화한다고?”
대본을 줬던 게빈조차 컷을 여러 번 나눌 생각을 했지 저렇게 단번에 소화하길 기대한 건 아니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든 말든 촬영은 계속 이어졌다.
“알파!”
쩌렁쩌렁한 외침에 고개를 돌린 알파는 인상을 구겼다.
“잘도 살아있네. 조금 얕았나.”
죽었다고 생각한 케이든이다.
그 뒤로 줄줄이 도착한 헌터들은 무기를 빼 들었다.
“하, 날 막아보겠다고?”
가소롭다. 조소를 머금은 알파는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저들이 무기를 겨눈 곳은 자신이 아니었다. 계속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이지.
언제 두 파벌로 나뉘었냐는 듯이 헌터들은 하나가 되어 무기를 휘둘렀다.
붕대로 칭칭 감은 상의를 드러낸 케이든은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뭘 그렇게 놀라? 말썽부리는 애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도 어른의 일이잖아.”
“내가 말썽쟁이라고?”
“그럼 아니야? 일단 거기서 얌전히 있어. 다 끝나고 잔소리를 잔뜩 퍼부어줄 테니까.”
“케이든, 당장 와!”
알렉스의 부름에 케이든은 빠르게 전투에 참전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멍한 소년의 얼굴엔 오묘한 감정이 떠올랐다. 순간 소년은 한번 크게 휘청거렸다.
“망할 자식. 이러고 튄다고? 내가 직접 마주했으면 아주 궁둥이가 붉어질 때까지 때렸…아, 미안미안! 아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낑낑거린 베타는 위태롭게 보이는 워프에 손을 뻗었다.
빛을 잃은 워프 게이트는 뉴욕에서 천천히 모습을 감췄다.
“컷!”
촬영 끝을 알리는 말이 울리자 이안은 주변을 쓱 둘러봤다.
어느덧 뉴욕에서 촬영은 막바지였다. 일부 추가 촬영이 끝나면 LA로 돌아가 세트장 촬영을 하면 됐다.
벤은 이안의 머리를 거칠게 털었다.
“뭘 그렇게 아쉽다는 듯이 보고 있어?”
“에이, 촬영이 끝나면 항상 아쉽죠. 더 잘할 수도 있을 거 같잖아요.”
“살살 좀 해라. 요즘 따라 기합이 더 들어간 거 같아. 혹시 무슨 일 있어?”
원래도 연기에 미쳐 사는 게 보였는데 요즘 몰입도는 걱정될 수준이다.
걱정 가득한 벤의 눈빛에 이안은 싱긋 웃었다.
“그냥 엄청 연기하고 싶을 때가 떠올라서 그랬어요.”
쿠퍼의 상황은 차별과 괴롭힘을 당하며 꾸역꾸역 버텨왔던 과거와 비슷했다.
힘든 시기를 삐뚤어지지 않고 버텨올 수 있었던 건 연기 덕분이란 걸 새삼 다시 깨닫게 됐다.
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짙은 향수 냄새와 함께 가느다란 손가락이 눈을 가렸다.
“허니, 누구게?”
“속일 생각은 있어요?”
이 세상에 허니라고 부르는 사람은 샬럿 언더힐. 그녀 한 명뿐이다.
“어머, 이럴 때는 모른 척 당해주는 거라고. 그렇죠? 벤.”
“전 과거의 기억을 전부 버리고 새사람이 돼서 그런 건 모릅니다만.”
“그럼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해줄까요? 내가 알고 지내는 전 여친만 해도…”
샬럿의 손가락이 빠르게 접히자 벤은 질색하며 도망쳤다.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샬럿을 보니 왜 카사노바였던 벤이 그녀와는 인연이 없는 줄 알겠다.
“촬영은 확실히 끝났지?”
“네, 끝났어요.”
“그럼 데이트 가자.”
데이트는 무슨. 비즈니스 때문이니 미팅이지.
원래라면 사실을 바로 잡았을 테지만 이번엔 미안한 일도 있으니 얌전히 손을 내놨다.
“갑시다. 가요, 달링.”
“이러다 스캔들이라도 나겠다.”
“글쎄요.”
애인보단 이모와 조카 같다는 말을 듣지 않을까?
이안은 샬럿에게 한 대 맞을만한 생각을 했다.
***
데이트라고 해봤자 괜찮은 곳에서 식사했을 뿐이다.
배가 불러 기분이 좋아 보이는 샬럿에게 이안은 먼저 사과를 했다.
“이야기는 들었죠?”
“쿠퍼라는 아이였나? 그 아이 이야기를 방송에 안 내보낸다는 걸 듣긴 했어.”
“그렇게 됐어요. 정말 미안해요.”
쿠퍼는 심리상담을 받았고 상태가 괜찮아지고 있었다.
약물을 동반하는 정신과 치료는 조금 두고 보자는 판단을 받았을 정도로.
‘이익을 생각하면 방영하는 게 무조건 좋긴 하지만 쿠퍼에겐 좋을 게 없어.’
아무리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고 해도 그런 계획을 세웠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다.
물론 방송 측면에선 공개하는 게 나았으니 이안은 사과를 했고 샬럿은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기분이 안 좋아. 자, 날 똑바로 봐봐.”
이안과 눈을 마주친 샬럿은 진지하게 말했다.
“나, 샬럿 언더힐이야. 굳이 아이 사연 따위는 안 팔아도 그만이라고. 지금 네 사과는 날 무시하는 거야.”
“미안해요.”
“아니지.”
그녀는 장난스럽게 볼을 꼬집었다.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되잖아. 땡큐, 달링. 자, 마음을 듬뿍 담아서 한번 말해봐.”
어려운 요청은 아니다.
이안은 샬럿은 손을 잡고 말했다.
“고마워요, 달링.”
“……”
잠시 침묵에 빠졌던 샬럿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기에 한 번만 더 해줄래? 친구들에게 자랑 좀 해야겠다.”
“미쳤어요? 끝이에요, 끝!”
“왜? 나한테 끼 부린 거 아니었어? 또 나만 진심이었지.”
“진심이면 그 살살 올라간 입꼬리나 내리고 말해요. 놀리지 못해 안달이 나가지곤.”
툴툴거리자 샬럿은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티격태격하며 대화를 나누던 그녀는 이안을 뚫어지게 봤다.
“왜요?”
“그러고 보니 이번에 또 당한 거 같아서. 진짜 간단한 프로젝트라고 하지 않았어?”
“간단했잖아요.”
“이런 사건이 끼어있으면 이야기가 다르지.”
고양인 줄 알고 받았는데 상자 안에서 퓨마가 튀어나온 느낌이다.
“너, 뭔가 알고 이번 일을 벌인 건 아니지?”
이게 여자의 촉인가.
어차피 증거도 없으니 이안은 바로 시치미를 뗐다.
“에이, 제가 어떻게 이런 일까지 미리 알고 일을 벌여요. 그냥 우연이죠.”
“수상한데.”
“제가 좀 촉이 좋긴 해요. 그리고 나중에 일이 생기면 안 도와줄 거예요?”
뻔뻔한 이안의 물음에 샬럿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내가 어쩌다 너랑 친해져선. 나쁜 남자 스타일은 내 취향이 아니었는데.”
“나이를 먹으면 취향도 바뀐대요.”
“그런 말을 하는 게 이 입일까?”
입술을 살짝 꼬집은 샬럿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움이 필요하면 괜히 일 키우지 말고 꼭 연락해. 나쁜 일만 아니라면 도와줄 테니까.”
“제가 나쁜 일을 할 사람처럼 보여요?”
샬럿은 이안의 머리를 꾹꾹 누르듯 쓰다듬었다.
“아니니까 도와주는 거야.”
둘은 가볍게 웃었다.
***
사락사락
종이 넘기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출연 계약을 맺고 받은 그랜드 라인 대본이었다.
“역시 고준혁 감독이네.”
지금도 유명한 감독이지만 나중엔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감독 중 하나가 되는 인물이다.
처음 캐스팅 요청이 들어왔을 때 깜짝 놀랐을 정도다.
당연히 이 작품도 본 기억이 있었다.
‘근데 칸에도 출품이 됐던가?’
안 됐던 거 같은데.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후반 작업을 하다가 기간을 놓쳤을 수도 있으니까.
그보다 중요한 건 대본이다.
“확실히 재밌긴 재밌는데 유진이라…”
이안은 자신이 맡은 유진이라는 인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자신이 봤던 영화에선 없던 인물이다.
있었는데 사라졌거나 자신 때문에 생겼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정답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계약은 맺었고 이 캐릭터로 연기를 한다는 게 중요하지.
그랜드 라인은 건설 중에 빙하기가 찾아왔고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여러 나라의 노동자들이 함께 사는 상태였다.
유진은 어린 나이부터 이들 사이에서 통역 역할을 하며 살아온 캐릭터였다.
“하층을 빠삭하게 아는 길잡이 역할이기도 하고.”
제법 중요한 조연이 새로 생겼으니 알던 내용과 달라진 부분도 꽤 보였다.
이걸 비교하며 한참 대본에 빠져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쿠퍼였다.
“쿠퍼!”
-으응, 존.
“이안이라고 부르라니까.”
-…그래, 이안.
이안이라고 부르는 게 어색한 듯 쿠퍼는 쭈뼛거렸다.
“근데 이 시간엔 어쩐 일이야.”
밤이 꽤 늦은 시간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전화한 적이 없는 시간이고.
-혹시 방해됐어?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뭘 말하려나 싶었는데 뒤이은 말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방금까지 감독님과 부모님하고 이야기했거든? 내 이야기를 방영해달라고 했어.
“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알아. 근데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을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
“…후회 안 하겠어?”
-하겠지.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덜 후회할 거 같아.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말에 이안은 설득을 포기했다.
어쩌면 살면서 처음으로 낸 큰 용기일지도 모른다. 그걸 차마 꺾을 순 없었다.
“아이작 감독님이 허락했다고?”
-응, 내 뜻대로 해준대.
감독님이 허락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편집으로 최대한 여론을 돌릴 자신이 있다는 뜻일 테니까.
‘차라리 잘 됐어. 쿠퍼를 괴롭힌 놈들도 고생을 해봐야지.’
애를 벼랑 끝까지 밀어붙였으면 자신도 거기서 떨어질 각오를 해야 하는 법이다.
“걱정하지 마. 난 네 편이니까.”
-알고 있어. 그리고 네이선도 도와준다고 했고.
“네이선이?”
같은 반 네이선이 도와준다면 크게 걱정할 거 없을 거다.
“내가 도와줄 건 따로 없고?”
-도와줄 거? 음… 나도 큰 용기를 냈잖아. 너도 용기를 내줬으면 좋겠어.
“용기? 내가?”
겁쟁이처럼 군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굉장히 의아한 말이다.
-부끄러움을 참을 수 있는 용기 말이야. 우리 학교에 훨씬 좋은 추억을 남겨주면 좋고.
“잠시만.”
느낌이 안 좋다.
더 들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고 막으려 했으나 그 전에 쿠퍼는 말을 이었다.
-계약서에 구미호 분장 이야기가 있던데. 한 번 해주는 게 어때?
“…야, 너 옆에 누구 있지?”
쿠퍼가 이렇게 말을 유창하게 한다고? 이것부터 수상했다.
짧은 침묵이 지나고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허니, 기대하고 있을게!
“야! 로티!”
뚝!
통화가 끊겼고 아무리 다시 걸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의미한 노력을 하는 사이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이안, 난데.
“들어와요.”
안으로 들어온 벤은 수상한 상자를 내려놨다.
“넷플러스에서 너한테 주라고 하던데.”
…이러기 있냐.
역시 방송하는 놈들은 전부 한통속이다.
상자 안에서 아홉개 꼬리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