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73)
만우절
이안은 팬을 손가락으로 돌렸다.
탁탁거리는 분필 소리와 함께 칠판에는 도형이 그려졌다. 기하학 수업이고 집중하는 학생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렵진 않네.’
미국 수업은 좋은 성적을 받아야 다음 과정을 배울 수 있다. 그래서 동급생보다 2년 이상 수업이 늦어질 수도 있고 지금처럼 한 학년 빠르게 수업을 들을 수도 있다.
학업에 욕심이 없는 이안은 지금처럼 진도를 나갈 생각이 없었지만.
“널 보고 다른 애들도 더 열심히 하지 않겠니? 모범이 돼줬으면 좋겠구나.”
교장의 설득에 넘어가면서도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했는데 8학년 수업에 7학년들이 가득 채운 걸 보면 효과가 있긴 했다.
수업 종료 시간이 되고 선생님이 떠나자마자 애들이 몰려왔다.
“잘 지냈어?!”
“분장한 거 사진으로 봤어! 우리 학교 축제 때도 해줄 거야?!”
“아니, 그거 꼬리 다 뜯겼거든.”
아쉬워하는 애들을 보며 이안은 안도했다.
에반이 쥐어뜯지 않았으면 축제의 마스코트가 될 뻔했다.
없는 동안 수업이 어떻고 뉴욕 촬영은 재밌었냐 등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를 받아주던 이안에게 한 아이가 물었다.
“이안! 고등학교는 어쩔 거야?”
“고등학교?”
지금은 2013년 3월 말에 7학년이다.
애들이 목표로 하는 사립 고등학교는 연말부터 입학시험을 봐야 하니 궁금할 법도 했다.
“글쎄. 그냥 공립으로 진학하지 않을까?”
“왜?! 성적도 좋잖아.”
“맞아! 그냥 진학하면 아쉽잖아.”
공립이라도 여긴 베벌리힐스다.
부모나 학생이나 학업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과 직결되는 고등학교는 유명 사립으로 가길 원하는 이들이 태반이다.
이들로선 좋은 성적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촬영 동안에는 출석도 잘 못 하는데 그런 데를 어떻게 가.”
“그건 그렇지만…”
“아쉽다.”
다른 생각이 있다기보단 좋아하는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느껴져서 미소가 절로 나왔다.
물론 진학은 다른 이야기지만.
‘대학교에 갈지 말지도 고민이고.’
대학 생활에 관심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노숙자 시절 평범한 학생을 부러워한 적도 있고 어떤 경험일지 호기심도 있다.
다만 그걸 위해 시간을 쓰는 게 좋은지 확신이 안 설뿐이다.
대학은 어차피 먼일이니 다음 수업으로 이동하며 애들과 잡담을 나눴다.
“그럼 에일리언 헌터 촬영은 거의 끝난 거야?”
“세트장에서 몇 번 더 찍으면 끝나지.”
“잘 됐다! 그럼 방학 전까진 계속 학교에 나오겠네?”
아, 이걸 말 안 해줬구나.
“나 바로 다음 영화 촬영에 들어가는데.”
“……”
갑자기 조용해졌다.
고개를 돌리니 돌처럼 굳은 애들이 보였다.
“…방학 전에는 끝나지 않을까? 아마.”
위로해주려고 한 말이었는데 안 됐나 보다.
“잡아!”
좀비처럼 잡으려고 쫓아오는 걸 보면.
얼마 못 가 붙잡혀서 불평을 귀가 따갑게 들었다.
***
고준혁 감독은 주변을 둘러봤다.
돌아다니는 스태프 대부분이 다른 인종이다. 촬영 환경이 달라졌다는 걸 제일 쉽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어렵군. 어려워.’
감독 일을 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다시 초짜가 된 기분이다.
그만큼 미국과 한국의 촬영 환경은 달랐다.
“뭘 그렇게 생각하나?”
친근한 한국어와 말투.
누군지 고민할 것도 없다. 상대는 많은 작품을 함께 한 페르소나 같은 배우였으니까.
“오셨습니까?”
감독은 정중하게 노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박남수라는 이름은 어디서나 존경받는 원로 배우였다. 아무리 감독과 배우 관계고 많은 작품을 함께 했다고 해도 가볍게 대할 상대가 아니었다.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깍듯하게 대해. 멍하니 있던 이유나 말해 봐.”
“도전인 건 알고 있었지만 참 낯설다는 생각을 해서요.”
“영어도 잘 못 하는 나만 할까. 쏼라쏼라, 머리가 아플 정도거든. 미군에게 초콜릿을 받아먹었을 때가 생각나기도 하고.”
껄껄 웃은 남수는 주머니에서 작은 초콜릿을 꺼내 흔들었다.
항상 들고 다니며 배우들에게 나눠주는 게 그의 습관이었다.
“그나저나 이안, 그 아이는 언제쯤 오겠나?”
“학교 수업이 있으니 시간에 맞춰서 올 겁니다.”
“그렇구만.”
남수는 이안을 떠올려봤다.
국제입양돼서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아역이 된 아이. 이 스토리로 대중에게 큰 관심을 받았지만 남수와 같은 연예계 쪽 사람은 다른 데 관심을 뒀다.
“연기는 직접 보니 어떻던가.”
“적어도 실망하진 않으실 겁니다. 자란 환경 탓인지 몰라도 장난기도 꽤 있어 보였고요.”
“하하하,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지. 한 방 먹었다지?”
“얼마나 능청스러운지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속았을 걸요.”
준혁이 연기를 인정하자 남수는 기대된다는 얼굴을 했다.
성인 배우들만큼 잘하는 배우들도 여럿 있지만.
‘어린 나이에 갖기 힘든 깊이가 있었지.’
안목 있는 사람들이 이안에게 주목한 이유였다.
“빨리 호흡을 맞춰보고 싶구먼.”
남수는 대본을 펼쳤다.
그의 역할은 그랜드 라인 밖에서 넘어온 용진이라는 인물인데 상층부는 심문이 끝나고 그를 감금했다.
신경 쓰지 말라는 상층부의 명령에 하층부가 반발하면서 혁명의 씨앗이 된 캐릭터기도 하고.
‘치매 걸린 노인이라.’
힘들게 구출했는데 치매 걸린 상태라는 걸 깨달은 하층부 사람들은 노인을 이안이 연기하는 유진에게 맡겼다.
그러니 이안과 함께 연기할 시간이 많은 배역이었다.
대본리딩을 위해 배우들이 하나둘씩 들어왔고 그들과 적당히 남수가 인사하고 있을 때 기다리던 소년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좀 늦었나요?”
“딱 맞춰서 왔네. 어서 와!”
“켈리 씨, 오랜만이네요. 이번엔 여기서 일하시는구나. 어, 휴즈 씨도 있네요.”
아직 촬영하지도 않았는데 스태프들과 친근하게 인사하는 이안의 모습을 사람들은 신기하게 봤다.
사실 이안은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 신비한 존재였다.
-신데렐라처럼 밤 9시가 되면 유명한 시상식도 빠져나와야 하는 아역.
-나이를 핑계로 파티장에는 잘 나타나지도 않음.
-작품 활동 외에는 학교생활을 하느라 바쁨.
배우들이 만나고 싶어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인맥을 늘리기 위해 파티장을 열심히 다니는 배우들에 비해 인맥이 부족하냐? 그것도 아니다.
배우, 감독할 것 없이 굵직한 인맥을 잡고 있었다.
배우도 언론으로 만나는 아역인데 스태프와는 친해 보이니 신기할 수밖에.
간단하게 처음 만나는 배우들과도 인사를 하던 이안은 남수 앞에 섰다.
“아! 용진 역할인 박남수 배우님이죠?”
어릴 때 이후 한 번도 한국에 가본 적 없는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정확한 한국어.
알고 있었지만 남수는 새삼 놀랐다.
‘언어는 안 쓰면 녹스는 법인데.’
외국에 오래 살다 보니 한국어가 서툴러진 경우는 흔하지 않나.
궁금증이 생긴 그가 물었다.
“그냥 편하게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된단다. 그보다 한국어가 유창하구나. 평소에 따로 연습이라도 하니?”
“한국어로 된 대본으로도 연기 연습을 하거든요. 같은 학교에 한국인 애들도 있고요.”
“한국어로 된 대본?”
“네, 번역한 거로 보면 맛이 안 살잖아요. 다른 나라 언어로 된 대본들도 봐요.”
남수는 눈을 깜빡였다.
여러 언어도 대본을 보는 건 그럴 수 있다. 여러 언어를 잘 하는 사람은 꽤 있으니까.
근데 다른 나라 대본까지 욕심을 낼 정도면 엄청 많이 본다는 뜻이다.
“도대체 한 달간 대본을 몇 개나 보니?”
“글쎄요. 좋은 대본은 반복해서 보기도 해서요. 박스 단위긴 하죠.”
해맑게 웃는 아이의 눈을 본 남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열정? 아니 거의 광기인가.’
연기 쪽에 오랫동안 몸을 담고 있다면 드물게 볼 수 있다. 밥은 굶더라도 연기에 모든 걸 바치는 사람 말이다.
보통 그 끝은 안 좋은 경우가 많았고.
걱정돼도 초면에 이런저런 조언을 남길 순 없으니 남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구나. 앞으로 잘 해보자꾸나.”
“물론이죠. 잘 해봐요!”
배우들끼리도 인사가 대충 끝나자 준혁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해보죠.”
준혁의 말과 함께 대본 넘기는 소리와 배우들의 연기 소리가 뒤엉켰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화산이 폭발했다는 뉴스 장면과 함께 배경을 설명하는 지문이 지나갔고 그랜드 라인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줬다.
쿵!
벽에 기대고 있던 사람은 부딪히는 소리에 조용히 밖을 나갔다.
“찾았다.”
거대한 장벽처럼 새워진 건물에 부딪혀 죽은 새를 집어 들었다.
생명은 위대하다. 인간이 어떻게든 버티는 것처럼 동물들도 최대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추운 빙하기 날씨와 건조한 사막에도 새들이 날아다닐 정도로.
품에 죽은 새를 숨기고 들어오던 남성은 갑자기 들린 말에 흠칫 놀랐다.
“제이크, 배가 두툼하네요. 새로운 옷이라도 찾았어요?”
“망할, 유진이냐.”
제이크는 인상을 구겼다.
어린 나이에 하층에서 살아남을 정도로 똑똑하고 눈치가 빠른 아이다. 새를 잡은 건 들켰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방금 그 소리를 아저씨 혼자 들은 게 아니거든요. 사람들 눈을 피하게 해주는 대신 반띵 어때요?”
“반띵? 강도냐?”
“에이, 잡히면 한 조각도 못 먹을 텐데. 어라, 어디서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망할 자식! 그래, 절반. 됐냐!”
중요 조연인 제이크와 유진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었고 이안의 연기는 능글맞은 캐릭터 성이 잘 드러났다.
스타트를 잘 끊은 만큼 대본리딩은 빠르게 진행됐다.
아무 탈 없이 진행된다고 생각할 때 이안이 손을 들었다.
“이안, 왜 그러니?”
“여기 대사가 조금 이상해서요.”
준혁은 대본을 봤다.
반란을 일으킨 하층부 사람들을 이끌고 길잡이 역할을 하는 유진의 대사였다.
“상층부에서 일부러 미로처럼 꼬아놓은 길이잖아요. 근데 보내주신 평면도를 봤는데 여기 설명대로 가면 막다른 길이에요.”
“그래?”
“네, 잠시만요.”
이안은 펜을 들어 빈 종이 쓱쓱 선을 그었다.
순식간에 그어진 선들은 보내준 평면도로 바뀌었다. 길의 폭도 똑같이 표현해서 마치 평면도에 대고 그린 것처럼 정확했다.
“와… 저걸 어떻게 외워?”
“나도 모르지.”
이안은 현재 위치에서 지문에 나온 대로 선을 그었고 진짜 막다른 길이 나왔다.
“진짜 그렇네?”
“아마 이쯤에서 헷갈리신 거 같아요.”
물론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니지만 이런 실수를 알아챘다는 게 자체가 놀랍다.
그냥 참고나 하라고 보내준 자료까지 꼼꼼히 확인하면서 대본을 준비했다는 뜻이니까.
“수정하도록 할게. 고맙다.”
짧게 감사를 전한 준혁은 간단하게 손으로 수정하곤 대본리딩을 이어갔다.
중간에 이안이 나선 것을 빼면 리딩은 무사히 끝났고 배우들은 서로 수고했다는 말을 하며 이안에게 다가왔다.
“난 대사 외우기도 바쁜데 어떻게 그걸 외웠어?”
“진짜 똑같던데. 너 진짜 대단하다.”
“에이, 길잡이 역할을 하려면 그 정도는 외워야죠.”
진짜 유진이라도 된 것처럼 대답하자 배우들은 웃음을 터트리며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리딩도 끝났고 각자 집으로 흩어지려 할 때 남수가 이안에게 다가왔다.
“얘야. 근데 그건 왜 외웠니?”
“왜 외웠냐고요?”
이안은 남수와 얼굴을 마주했다.
뭔가 눈치챈 듯한 표정이었고 손짓을 해서 고개를 살짝 숙이게 한 소년은 노인에게 속삭였다.
“퍼포먼스죠.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 나중에 촬영할 때 도움이 되거든요.”
장난기 가득한 아이의 얼굴을 본 노인은 가볍게 웃었다.
밉지 않게 영리했다.
꽤 재밌는 촬영이 될 거 같았다.
***
과거로 돌아오고 나서 이상할 정도로 애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덕분에 친구라고 불러도 될만한 아이들이 수두룩했지만 그래도 가장 친한 사람을 뽑으라면 넷이었다.
레이첼, 다니엘, 도로시, 래리.
다니엘을 제외하면 과거에는 인연이 전혀 없던 사람들이고 어떻게 친해졌나 싶을 정도로 각자 개성이 있었다.
“이안! 나랑 언제 또 야구하자. 응?!”
“싫어.”
“아, 왜! 내가 얼마 전에 같은 학교 애들하고 야구를 했는데 말이야. 1회에…”
라디오 생중계도 아니고 9회 말까지 경기 상황을 말해주려는 래리는 물에 가라앉아도 입만 동동 뜰 사람이다.
당연히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시끄러워, 래리.”
책을 읽던 다니엘은 짜증스럽게 쿠션을 던졌다.
“너도 이야기를 듣고 싶었구나? 솔직하게 말을 하지. 내가 말해줄게.”
“악! 꺼져!”
조용한 걸 좋아하는 다니엘은 래리와 항상 티격태격했다.
레이첼은 옆에서 고개를 까딱이며 온갖 노래를 듣기에 바빴고.
이렇게 종종 만나는 게 신기할 정도로 전부 어긋난 톱니바퀴 같았다. 구심점이 되는 이안이 없었다면 인연을 이어가지 못했을 거다.
이안은 다니엘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고맙다, 다니엘.’
다니엘의 희생으로 고막을 지키게 된 이안이 대본을 읽는 사이 문이 벌컥 열렸다.
“이안! 이안!”
“왜?”
대본을 슬쩍 내리니 얼굴이 상기된 도로시가 보였다. 꽤 서둘러 온 티가 났다.
“어제 엄청 웃긴 일이 있었어. 어제가 만우절이었잖아.”
“아, 그랬지.”
미국에선 만우절 때 어른들도 장난을 친다.
어제만 해도 오이를 넣은 콘도그를 엄마와 할머니에게 준 딜런이 등짝을 맞았다.
“누가 엄청 유명한 음악 잡지 SNS가 해킹해서 만우절 장난을 올렸거든?”
“그래? 뭘 올렸는데.”
해킹까지 해서 장난을 쳤다고?
진짜 이상한 인간이다.
“진짜 황당하다니까. 라이랑 네가 같은 사람이라고 CEO인 엘리엇이 인터뷰를 했다는 가짜 기사를 올렸다고.”
“푸흡!”
물로 목을 축이던 다니엘이 성대하게 물을 뿜었다.
더럽다는 듯이 뒤로 물러난 도로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네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긴 하지? 목소리가 비슷하면 뭐해. 설마 내가 라이랑 이안도 구분 못 할까. 그렇지?”
“……”
이불을 걷어찰 미래의 도로시를 위해서 이안은 침묵을 선택했다.
‘따로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심각한 일은 아닌 거 같긴 한데’
일단 닉과 연락 좀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