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74)
고사
도로시가 말한 만우절 장난을 닉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바로 알아듣고 약속을 잡는 걸 보면.
이안은 다니엘을 툭툭 쳤다.
“너도 같이 갈래?”
눈치 빠른 다니엘은 무슨 말인지 눈치채곤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난 지금도 조마조마하거든. 넌 쟤한테 안 맞아봤지? 엄청 아프다고.”
“그래?”
“겉만 호리호리하지. 화나면 고릴라야. 각오하는 게 좋을걸?”
어차피 맞는 건 확정이다.
아니, 도로시가 라이를 두고 한 푼수 같은 발언을 떠올리면 그거로 끝나면 다행이다.
“아무튼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면 알려줄게. 나만의 일이 아니잖아.”
“…망할. 그때 왜 쓸데없이 아는 척을 해서.”
모르는 게 약이라는 인생의 큰 교훈을 얻었으니 남는 장사가 아닐까?
다니엘은 절대 동의하지 않겠지만.
놀러 온 애들이 떠나고 이안과 레이첼은 벤이 마련해줬던 연습실로 향했다.
집과 학교 다음으로 자주 오는 곳이고 어설프게 외부에서 만나는 것보단 이쪽 보안이 더 확실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도착한 둘이 보였다.
“둘 다 오랜만이네.”
“닉! 살이 좀 붙었네요? 이대로 쭉 가죠.”
“야, 농담이라도 끔찍하다. 요즘 사람 만나는 일이 많아서 이렇게 된 거지 곧 뺄 거야.”
글쎄.
아무리 발버둥 쳐도 미래엔 볼링핀 몸매가 되지 않을까?
흰 정장만큼 반가운 닉과 인사한 이안은 다른 상대를 봤다.
“엘리엇, 정말 오랜만이네요.”
“계약 이후로 처음 만났으니 한 3년 정도 됐을 겁니다. 두 분 다 정말 많이 컸군요.”
푸근하게 웃은 Big Sound Records CEO 엘리엇은 레이첼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안이야 화면으로 볼 기회가 많지만 평범한 학생으로 알려진 그녀는 기껏해야 파파라치 사진에 가끔 나올 뿐이다.
시선이 더 갈 수밖에.
“이제 레이디라고 불러야겠군요. 작곡하는 데 힘든 점은 없습니까?”
“없어요. 재밌거든요.”
“하하하, 좋은 대답입니다.”
웃으며 엘리엇은 과거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했다.
‘전에 만났을 때는 그냥 소심한 소녀였는데. 몸만 성장한 게 아니군.’
답변은 짧았고 낯가리는 모습은 여전했으나 우물쭈물하고 사람을 피하던 행동은 사라졌다.
바뀐 이유는 몰라도 바람직한 변화였다.
“마음 같아선 나누고 싶은 이야기 많지만 그건 편히 만날 수 있을 때로 미뤄두고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죠.”
“좋아요. 그래서 어떻게 된 거죠?”
닉은 종이를 하나 내밀며 답했다.
“확인을 해봤는데 정보가 유출된 건 아닌 거 같아. 누가 봐도 만우절 장난이거든.”
“기자 이름만 봐도 장난인 건 알겠네요.”
Lirpa loof라고 된 기자 이름을 뒤집으면 April fool, 만우절이 됐다.
댓글 목록을 보니 처음에만 속는 사람이 있고 금방 눈치챈 사람들이 나왔…
-내가 이안을 잘 아는데 걘 연기 외엔 관심이 없거든? 라이가 이안이라니 말이 되는 거짓말을 해야지.
하필 자신만만하게 일침을 놓는 도로시의 댓글이 보였다.
연기 외에는 관심이 없는 건 맞다. 딱 그 정도만 써줬으면 참 좋았을 텐데.
대충 다 읽은 이안이 종이를 레이첼에게 넘겨주자 엘리엇이 말문을 열었다.
“라이의 정체가 이안이다. 목소리가 비슷해서 이런 주장이 처음 나온 건 아니잖습니까.”
“그냥 무더기로 나온 예상 인물 중 하나였죠.”
순위로 따지면 한 30등 정도 되지 않을까?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느낌 차이도 있고 목소리에 담긴 감성은 상식적으로 아이가 냈다고 생각하기 힘들죠. 저만 해도 확신하고 찾아간 건 아니거든요.”
상식적으로.
흔하게 쓰는 말인데 이걸 깨부수는 건 쉽지 않았다.
닉이 바로 말을 받았다.
“애초에 변성기 후로는 후보에서도 빠졌잖아. 라이는 여전한 목소리로 2집을 냈는데 넌 목소리가 달라졌으니까.”
“지금 이런 만우절 장난이 올라온 이유는요?”
“글쎄. Moonlight와 라이 팬층 비슷해서 그럴걸. 구미호 분장으로 만우절 바로 전에 관심을 크게 받기도 했고.”
“정보가 유출되거나 한 건 아니란 뜻이죠?”
“라이의 일은 나와 닉이 직접 맡아서 하고 있으니 그럴 일은 없습니다. 증거가 될 것도 없고요.”
솔직히 라이가 CEO인 엘리엇이 나서서 관리할 급은 아니다.
입 무거운 직원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하는 건 팬심 때문이었다.
라이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 이안과 달리 잠시 골똘히 고민하던 레이첼은 의외의 말을 꺼냈다.
“이런 장난을 칠 정도면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순 없겠네요.”
“레이?”
“당장 하자는 말은 아니야. 그래도 생각해볼 때가 되긴 했잖아?”
살포시 웃는 그녀의 미소를 본 이안은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미 전부터 꽤 고민해온 티가 났다.
“괜찮겠어?”
“응, 계속 숨길 수도 없잖아. 거기다가 언제까지 내 욕심만 생각해서 어울려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라이는 그녀에게 처음 사귄 친구인 이안과 추억을 줬고 작곡이라는 몰랐던 재능을 일깨워줬다.
그만큼 소중한 이름인데 정체를 밝힌다는 건 큰 결심이었다.
‘정체가 공개되면 이안은 분명 라이 활동을 안 하겠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안락하다고 해서 계속 어리광을 부릴 순 없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겠다는 레이첼의 결심에 이안은 빙그레 웃었다.
“네 뜻대로 할게. 음… 2년 정도로 생각하고 계획을 짜는 게 좋겠죠?”
“서프라이즈 파티를 성급하게 열 순 없는 노릇이죠. 2년이면 충분할 거 같습니다. 그동안 미련 없이 즐길 수도 있고요.”
2년이라는 말에 살짝 기뻐하던 레이첼은 엘리엇이 찡긋 웃자 얼굴을 붉혔다.
“그럼 한 명 더 불러야겠네요.”
“혹시 오스틴?”
“네, 이건 라이의 일만이 아니잖아요.”
배우 업무를 담당하는 오스틴도 알아야 할 일이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시간이 돼요?”
-이안의 일이라면 없어도 만들어야죠.
주소를 받은 오스틴은 얼마 안 가서 도착했고 안에 있던 엘리엇을 보며 흠칫 놀랐다.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이 커지는 그를 향해 레이첼과 이안은 방긋 웃었다.
“제가 ‘RA’에요.”
“전 ‘I’고요.”
“…합쳐서 라이?”
“정답입니다! 상품으로 새로운 일거리를 드리죠!”
…이딴 게 상품?
오스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수상거부 가능합니까?”
“저런 이미 배송이 끝난 상품입니다. 포기하고 얌전히 앉으시죠.”
라이의 정체를 아는 비밀친구가 한 명 더 늘었다.
***
사락사락
스태프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넘겼다.
“이걸 왜 이제야 보내주는 건지.”
이안은 툴툴거렸다.
촬영 전에 스태프 이름을 외우는 건 루틴이다. 민감한 개인정보가 들어간 것도, 보내주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걸 질질 끌다가 보내줬으니 짜증이 날 수밖에.
‘한국인 이름도 꽤 있네.’
할리우드 시스템으로 촬영하는 만큼 일부였지만 한국인 이름이 여럿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흥미롭게 이름을 외우던 이안은 멈칫했다.
“라인 프로듀서 패트릭 켈리? 낯익은 이름인데.”
라인 프로듀서는 현장에서 스케줄, 소품, 예산, 숙박 및 식사 등 물리적 업무를 담당하는 중요 직책이다.
그런 사람의 이름이 익숙한 이유를 고민하던 이안은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오스틴의 수첩.’
수첩 내용을 적은 공책을 꺼내 빠르게 훑어봤다.
더럽고 추잡한 일에 엮인 이름들을 살피던 이안은 페이지 넘기는 걸 멈췄다.
-시니어 프로듀서, 패트릭 켈리. 인종차별로 몇 차례 현장에서 문제 일으킨 적 있음.
시니어면 다른 프로듀서들을 감독하는 역할이고 보통 총괄 바로 아래였다. 라인보다 더 높은 직책이지만 경력이 쌓여 승진했다면 말이 된다.
공책을 채울 때는 쓰기 급급해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고 있으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혹시 옛날에 날 촬영장에서 쫓아냈던 그 인간인가.”
얼굴의 화상 때문에 캐스팅되고도 현장에서 쫓겨나는 일은 꽤 많았다.
그걸 하나하나 마음에 담아둔 건 아니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배우 일을 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기억에 선명히 남은 것들도 있었다.
-이건 뭐야? 원숭이도 아니고 괴물 같네. 다른 배우들이 불편해하는 거 안 보여? 내보내.
참 주옥같은 말이라서 잊을 수가 없다.
동일인물인지는 촬영 날 보면 알 수 있다.
“멍청하게 자신의 경력에 먹칠할 리도 없고 원래 영화도 제대로 뽑혔으니 큰 문제는 없으려나.”
어차피 촬영이 코앞인데 중요한 라인 프로듀서를 바꿀 수도, 갱생 펀치를 날릴 수도 없다.
일단 두고 보는 수밖에.
결론을 내리고 스태프 이름을 외울 때 문자 한 통이 왔다.
-한국에선 촬영 전에 하는 고사라는 행사가 있습니다. 첫 촬영 날 있을 예정이니 최대한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고사?”
처음 듣는 말이다.
이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
그랜드 라인의 스태프와 배우 태반은 할리우드 사람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한국의 촬영 현장을 알 리가 없으니 지금 풍경은 신기하게 다가왔다.
“뭐 하는 거래?”
“나도 잘은 모르는데 촬영 중에 아무런 사고가 안 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거라는데.”
“그렇구나.”
스태프들은 테이블 위를 기웃거리며 봤다.
큰 떡 주변으로 사과, 바나나, 오렌지, 포도 같은 과일과 밥과 말린 생선까지 올라가 있다.
과일은 위를 잘라놓은 것부터가 신기했고.
“이안, 너도 처음 보는 거야? 넌 한국어도 할 줄 알잖아.”
“한국어는 할 줄 알아도 한국에 가본 기억은 없거든요. 근데 명절에 저런 걸 하는 건 알아요.”
“테이블에 칠면조를 올린 것과 비슷하단 말이지?”
“아마요?”
이안이 주연 배우와 잡담을 나누자 옆으로 남수가 다가왔다.
“신기하니?”
“네. 이게 도움이 돼요?”
“안 했다가 사고가 난 촬영장도 여럿 있단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해서 나쁠 건 없고.”
촬영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정도로 생각하면 될 거 같았다.
양쪽 초에 불을 붙였고 감독은 정면에 태블릿을 올려놨다. 뭔가 싶었는데 켜진 화면에는 이상한 게 있었다.
“돼지머리?”
분홍색 돼지 머리다.
처음 보는 광경에 스태프들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원래는 저기 위에 진짜 삶은 돼지머리를 올려놔야 해.”
“진짜요?”
“그럼. 한국에서 하던 대로 하면 너무 무서워할 거 같아서 바꿨다고 하더구나.”
참수형 된 돼지머리를 상에 올려놓는다니.
문화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그럼 고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공동프로듀서 중 한국인이 앞으로 나와 종이 내용을 읽었다.
“유세차 계사년 4월 7일 그랜드 라인 감독 고준혁 외 참례자 일동은…”
진지하게 시작한 축문을 듣던 이안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작 기간 중 NG 귀신, 거지 같은 날씨 귀신, 게으름 귀신은 부디 얼씬도 하지 않게 해주시고 단번에 오케이 귀신과 무사고 대박 귀신을 저희에게 몰아주시어…”
내용이 웃겼다.
진짜 별의별 귀신이 다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뭐라고 했는데?”
모여든 배우들과 속닥거리며 설명해주는 사이 축문을 다 읽은 프로듀서는 절하는 순서를 알려줬다.
한국인인 감독과 촬영감독이 먼저 절을 했고 뒤이어 남수가 절을 하자 다른 배우들도 얼떨결에 따라 했다.
이안도 동료 배우들과 함께 몸을 숙였는데.
“…어?”
순간 눈에 빛이 번쩍였다.
그동안 수차례 환상을 봤을 때와 같은 현상이고 이안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주변에 보이는 건 똑같은 촬영 전 고사현장이다.
이전과 달리 아무런 환상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걱정하는 동료를 안심시킨 이안은 일단 절을 끝내고 일어났다.
‘뭐지? 잘못 본 건가. 아닌데 진짜 빛이 번쩍였는데.’
그렇다고 망막에 문제 있으면 생기는 광시증도 아니다.
진짜 이건 또 뭔가 싶었다.
“멍해 보이는구나.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게 있니?”
“아뇨. 전 멀쩡해요.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 그랬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남수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고사는 어느덧 마지막에 순서가 됐다.
감독인 준혁은 라이터를 켜서 축문에 불을 붙였고 종이가 불타기 시작했다.
탁탁!
“저건 왜 저러는 거예요?”
타오르는 축문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모습은 특이해 보였다.
“타는 축문이 바닥에 떨어지면 안 좋거든. 그래서 저러는 거란다.”
설명을 듣고 호기심이 생겨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탄내가 코끝을 스칠 때 아쉬운 마음을 느껴야 했다.
화르륵-
“오!”
아까와 달리 불이 바닥에 안 떨어지고 하늘로 솟으며 축문을 빠르게 불태웠으니까.
“불꽃이 하늘로 쭉 올라가다니 영화가 잘 되려나 봅니다!”
미신이라도 듣기 좋은 말이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울렸고 사람들은 첫 촬영을 위해 흩어졌다.
분장을 위해 걸음을 옮기던 이안의 귀로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나라까지 와서 시답지 않은 일을 하긴.”
맞네.
상대의 얼굴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라인 프로듀서인 패트릭 켈리 씨?”
“아, 이안 프라이스. 만나서 반갑구나”
기억보단 젊어도 촬영장에 쫓아냈던 사람과 오스틴 수첩의 인종차별주의자가 같다는 건 알아보겠다.
이걸 깨달은 이안은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해봐요.”
“그래, 잘 해보자.”
정말 잘 하는 게 좋을 거다.
가장 싫어하는 세 가지 중 하나가 인종차별주의자고.
‘그냥 당해야 했던 때와 지금은 위치가 다르니까.’
이안은 방긋 웃었다.
***
분명 같은 사람이 맞는데.
“어디 불편한 곳은 없니?”
“밥이나 간식은 만족스럽고?”
“지금 지내는 트레일러가 불편하면 꼭 말해.”
그 패트릭이 한 말이다.
‘…뭔데 잘 해줘?’
이안은 혼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