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75)
선의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배우라면 크로마키 앞에서 촬영하는 건 익숙하다.
초록색으로 칠해진 공간을 어떻게 상상력으로 잘 채울 수 있을지도 알고 있고.
“콘셉트 아트를 보길 잘 했네. 생각보다 더 특이한 도시야.”
“그렇죠?”
도시 내부 풍경은 두 개의 긴 건물이 서로 마주 보는 있는 형태였다.
그 사이를 흉물스럽게 변한 다리들이 연결하고 있으며 푸른 식물이 자라는 상층부와 달리 하층은 사막에서 들어온 모래가 황량하게 피어올랐다.
“이 굴뚝이 대본에 나오는 풍력 발전소입니다.”
“태양열 때문에 상승기류가 생기는 걸 이용한 거네요?”
“어… 맞아.”
감독인 준혁은 놀란 눈으로 이안을 봤다.
건축가의 조언까지 받아서 만든 설계인데 이걸 바로 눈치챘으니까.
“전기는 돈을 상징하는 건가요. 전기를 얻기 위해 상층부의 말을 따르는 거니까요.”
“그렇지. 빙하기 시기에 전기는 생명줄이거든.”
캄캄한 하층을 밝히는 불부터 식수를 만드는 해수 담수화 시설까지 전부 전기로 돌아갔다.
전기를 통제하는 시설은 상층부에 있었고.
감독의 디렉팅을 받은 배우들은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갔다.
그랜드 라인 하층부 사람들은 긴장한 모습으로 모였다.
상층부에 깔린 태양광 발전기를 관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위험한 일이다.
“문 열어!”
“알겠어!”
사람들이 단단하게 벽을 붙잡자 두 명이 두꺼운 철문을 힘겹게 열었다.
휘이익- 거센 바람과 몰아쳤고 힘겹게 버틴 사람들은 긴 굴뚝 안을 내려봤다.
“빌어먹을 진짜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밑으로 라이트를 비추자 빠르게 돌아가는 거대한 날개들이 보였다.
풍력 발전 날개를 관리하는 건 목숨을 내놓는 일이지만 안 할 수도 없다. 작은 손상을 내버려 뒀다간 그대로 박살 날 테니까.
실제로 날개 하나가 부서져서 완전히 작살 난 굴뚝도 있었다.
위아래 날개를 살피던 남성은 인상을 구겼다.
“망할! 멈췄는데?”
“진짜? 돌아버리겠네. 유진!”
동양인 소년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왜요.”
“반스, 그 인간 좀 데려와.”
“아, 중층 사람하고 엮이기 싫은데. 그냥 알아서 못 해요?”
“이게 되면 우리가 모래를 뒤집어쓰면서 하층에서 살겠냐. 중층에서 떵떵거리며 지내고 있겠지.”
중층은 상층의 명령을 따르는 치안대와 기술자 그리고 재앙 후 태어난 아이들이 지내는 곳이다.
하층에서 올라올 수 있도록 허락받은 사람은 일부인데 그중 한 명이 유진이었다.
“빨리 갔다 오기나 해!”
“알겠다고요.”
엘리베이터도 없다. 올려보는 것도 목이 아픈 건물을 두 다리로 걷는 수밖에.
곳곳에 설치된 덫을 피해 느긋하게 올라가던 이안은 창밖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다.
“사람?”
차갑고 건조한 모래바람을 뚫고 누군가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다.
물품을 찾기 위해 폐허를 다녀온 사람들도 아니다. 죽기 싫으면 혼자 움직이지 않으니까.
“외부 사람이다!”
눈이 동그랗게 커진 유진은 오르던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야, 반스는 어디 가고 혼자 내려왔어?!”
“밖에 낯선 사람이 온 거 같아요!”
“뭐?!”
빙하기가 심해진 다음엔 고립된 삶을 살았다. 다른 곳을 찾아보겠다고 떠난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그런 곳에 새로운 사람이라니.
“진짜지?! 또 구라였다고 하면 거꾸로 매달아 놓을 줄 알아!”
“내 말이 맞으면 발전기 날개에 묶어놓을 줄 알아요!”
“한 마디를 안 지냐!”
얄밉게 혀를 내민 유진은 붙잡으려는 손을 피해 내려갔다.
숨을 헉헉거리며 밖으로 나간 소년은 상대의 얼굴을 봤다. 노인이다. 마당발인 소년이 처음 보는 얼굴이고.
“괜찮아요?!”
“끄읍…”
희미한 미소를 지은 노인은 털썩 쓰러졌다.
상층부 사람은 노인을 치료하겠다며 데려갔고 하층이 노인의 소식으로 뜨겁게 달아올랐을 때.
-노인은 거짓 정보를 말한 죄로 체포됐다. 하층부는 소란을 피우지 말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
혁명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무기를 치켜든 하층민 사람들. 일주일 남짓 이어진 발단 촬영의 마지막이었다.
오늘치 촬영을 끝낸 준혁은 바쁜 촬영으로 까끌까끌하게 자란 수염을 손으로 쓸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 아이를 상석에 앉혀놓고 고사를 지낼 걸 그랬습니다.”
“허허, 그것도 재밌었겠구먼.”
남수는 웃음을 터트리며 아역들에게 둘러싸인 이안을 바라봤다.
아역들은 재앙 후 태어나 세뇌 교육을 받는 역할이고 초등학교 저학년쯤 됐다. 그런 애들을 온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이안! 나 집에서 위튜브 봤어! 우리처럼 엄청 작더라. 귀여웠어!”
“노래 부르는 것도 있던데! 불러주면 안 돼?!”
“안 돼.”
인간 버드나무가 된 이안은 해탈한 표정을 지었다.
애들을 데려가야 할 보호자들조차 흐뭇한 얼굴로 보고 있으니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이제 아이들은 돌아가야 합니다. 촬영장에 이렇게 오래 있으면 안 돼요.”
조연출이 경고하자 애들이 떠나갔고 이안은 뻐근한 몸을 풀었다.
“이 정도면 연기보다 육아에 더 재능있는 거 아니야?”
“시간 나면 우리 애 좀 맡아주라. 어찌나 장난을 많이 치는지 어제만 해도 집 안을 진흙투성이로 만들었거든.”
“전 비싼 몸인데 감당은 되겠어요?”
“지인 할인은 안 되냐? 할부나.”
엄살을 부리는 배우의 모습에 다른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얼핏 보면 촬영 초기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배우들끼리 친해 보였다. 하지만 촬영 현장 전반을 살피는 감독인 준혁은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딱 이안이 있을 때만 저러지.’
뭉쳐 다니는 친구끼리도 구심점이 되는 사람을 빼면 데면데면한 경우가 있지 않은가.
딱 그런 느낌이다.
“뭘 그렇게 생각하나.”
“저 아이가 배우들에게 왜 이렇게 인기가 많나 해서요.”
“뭐 어려운 질문이라고. 일단 NG를 거의 안 낼 정도로 연기를 잘 하지. 퇴근을 빨리 시켜주는 사람을 누가 싫어하겠나.”
이건 준혁도 실감한 부분이다. 매일 빡빡한 촬영 일정인데 숨통이 트이는 날은 보통 이안의 촬영이 있는 날이다.
“거기다 아역이고 동양인이지. 경쟁 상대로 여기지도 않을걸.”
먹는 파이가 다르다. 정글 같은 연예계에서 중립지대 같은 역할이란 뜻이다.
흥미로운 주장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준혁에게 한 명이 짜증 나는 얼굴로 찾아왔다.
“감독님. 제작부장, 그 인간 좀 바꾸면 안 됩니까?”
“왜 또.”
“저번엔 밥 가지고 난리더니 이번엔 조금 더 저렴한 숙소로 옮겨야겠답니다.”
한국에선 제작부장, 영어로는 라인 프로듀서.
순조롭게 진행되는 촬영과 달리 준혁의 신경을 긁는 인물이었다.
“이유는?”
“할리우드 기준으로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챙겨주려면 예산을 조금 더 타이트하게 가져갈 필요가 있답니다.”
“너희도 스태프잖아.”
“우리는 미국 노조가 아니라서 신경 쓸 이유가 없나 보죠.”
까칠한 대답에 준혁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 문제로 이미 패트릭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할리우드에선 노조 가입이 안 된 스태프는 원래 이렇습니다. 다들 그래서 경력을 쌓고 노조에 가입하려고 하는 거고요.”
이쪽 환경에선 틀린 말은 아니어서 일단 넘어갔는데 또 말썽을 부렸다.
“일단 걱정하지 마. 숙소를 옮길 일은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확답을 받은 스태프가 돌아가자 남수가 조언을 했다.
“빨리 조치하는 게 나을 걸세. 벌써 스태프끼리 균열이 보이잖나.”
“알고 있습니다만.”
차별받는다는 생각에 불만이 쌓인 한국 스태프와 ‘노조 가입을 안 했어?’ 그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미국 스태프.
둘 사이가 벌어지는 게 보였다.
‘하나로 뭉쳐서 일해도 모자랄 판에…’
영화가 조별과제도 아니고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더 큰 문제는 해결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는 거다.
“중요한 제작부장을 갑자기 빼버릴 수도 없잖습니까. 일단 데리고 일하면서 왜 이러는지 이유부터 알아봐야죠.”
솔직히 인종차별이 가장 의심됐는데 이걸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마침 나타난 패트릭의 행동 때문이다.
“이안, 특별히 오늘 간식은 너희 콘도그로 준비해봤는데 어땠니?”
인종차별이라기엔 이안에겐 지극정성이다.
***
긴 노숙 생활을 한 이안은 관심과 배려를 받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았다.
그런 만큼 귀찮더라고 최대한 고맙게 생각했고.
‘근데 패트릭 이 인간은 예외지.’
바퀴벌레가 우렁각시 역할을 해준다고 좋진 않잖는가. 그런 느낌이다.
운전하는 마커스가 이안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입니다.”
“브레이커가 상냥하고 자상하게 군다고 생각해봐요. 딱 그런 느낌을 받고 있거든요.”
“…바로 이해했습니다.”
처음엔 너무 잘해줘서 이때는 멀쩡했나 싶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였지.’
한국 스태프에게 하는 짓을 보니 괜한 기대였다.
딱 자신에게 피해가 안 갈 수준에서 괴롭히는 꼴을 보니 더 짜증이 났다.
‘나한테 잘해주는 건 딱 본인에게 이득이 있으니까 그랬겠지. 아직 어리니까 살살 구슬려 먹기 쉽다고 생각했겠고.’
인맥이 좋다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테니 먹기 쉬운 꿀통처럼 보였을 거다.
집에 돌아와 대본도 제쳐두고 이안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엿을 먹일 수 있을까.”
단순히 패트릭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다. 한국인 스태프의 불만을 풀어주려고 하는 거지.
어쩌면 칸에 출품하지 못한 것도 패트릭 때문에 촬영 일정이 어긋나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방법을 고민하던 이안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렇게 인맥을 갖고 싶다고? 기회를 못 줄 것도 없지.”
겉보기엔 패트릭이 너무 잘 해주고 있다. 그런 사람을 홀대해봤자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될 뿐이다.
그러니 똑같이 겉만 그럴듯한 호의로 보답하면 될 일이다.
이안은 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이안? 어쩐 일이니.
“게빈 감독님! 편집은 잘 되고 있어요?”
-당연히 잘 되고…
-이안이야? 잘 지내고 있니?!
-랜든, 저리 가서 자네 일이나 하게나! 내 사무실 좀 그만 들어오고!
티격태격하는 게빈과 랜든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은 여전히 사이가 좋네요.”
-끔찍한 소리. 이번 영화가 끝나면 이 인간은 만나지도 않을 거란다.
-하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이 친구야. 이 영화가 잘 되면 세 번째도 찍어야지.
-안 해. 달러로 뺨을 쳐도 안 한다고.
둘의 대화를 들으며 이안이 웃음을 터트리자 게빈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그래서 어쩐 일이야.
“만날 여유가 되세요?”
-나도 일만 하는 건 아니니 당연히 되지. 언제가 좋겠니?
이유를 묻지도 않고 약속을 잡으려는 게빈은 참 고마웠으나 그가 목표가 아니었다.
“에드워즈 씨를 또 뵙고 싶어서요. 두 감독님과 친한 분이라고 들었는데 저번에 만났을 때는 제대로 이야기도 못 나눠본 거 같아서요.”
-필릭스? 어렵지 않단다. 안 그래도 너에게 관심 많은 친구였거든.
“고마워요!”
관심이 많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약속은 빠르게 잡혔다.
하와이안 피자를 잔뜩 주문한 죄로 촬영장에서 쫓겨났던 필릭스는 환한 웃음으로 반겨줬다.
“두 번째 만남이지? 편하게 필릭스라고 부르거라.”
“그때는 제대로 이야기도 못 나눠서 아쉬웠거든요. 이안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만났지만 이안이 원하는 건 더 깊은 친분이다.
이걸 얻는 방법은 예상대로 쉬웠다.
“처음 뵀을 때는 정신없어서 말을 못 했는데 저도 하와이안 피자 좋아해요.”
“오! 그렇니? 뭘 좀 아는구나!”
공감대를 형성한 이안은 한 발자국 더 나갔다.
“그리고 독특한 음식을 도전하는 것도 좋아하고요.”
이안의 말을 들은 게빈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몇 년 동안 봐온 결과 도전은커녕 음식에 크게 관심도 없었다. 연기만 할 수 있으면 매일 콘도그만 먹고 살 수도 있는 아이고.
거짓말을 바로 눈치챈 게빈과 달리 필릭스는 눈을 반짝였다.
“정말이니?”
“물론이죠. 어떤 걸 드셨는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얼마든지! 조금 유명한 것부터 말하자면 영국의 장어 젤리와 중국의 취두부 같은 것도 있지. 그리고 또…”
게빈은 포크를 내려놓고 장어 젤리의 비린내와 식감을 토론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이어가는 둘을 질린 눈으로 봤다.
괜히 소개해줬다.
***
촬영을 시작한 지 보름이 넘어갔다.
시간이 갈수록 한국 스태프들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패트릭 때문에 불만이 계속 쌓였다.
이런 불만은 크게 신경도 안 쓰고 이안을 잘 대해주던 그는 놀란 얼굴을 했다.
“이 영화를 공동 제작하는 영화사의 CEO인 에드워즈 씨?”
“네! 필릭스가 요즘 잘 해주는 스태프가 있다니까 같이 식사하자고 했어요. 언제 시간이 나세요?”
“나야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지!”
“그래요? 그럼 바로 약속을 잡을게요.”
패트릭은 히죽 웃었다.
필릭스면 꽤 거물이다. 이렇게 따로 식사 자리를 갖는 건 힘들 정도로.
‘역시 아시안 꼬맹이가 뭐 그렇지.’
제법 똑똑하다지만 그뿐이다. 좀만 잘해줬더니 이렇게 나오는 걸 보면.
기대를 가득 품고 약속 장소로 찾아간 패트릭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뭔가 일이 잘못됐다.
“여기가 요즘 주목받는 식당인 곤충식당이란다. 바싹 튀긴 귀뚜라미를 타코 식으로 먹을 수 있지.”
“와! 저희 영화에서 하층부 사람이 먹는 것도 곤충으로 만든 음식이잖아요. 안 그래도 궁금했어요.”
“하하하, 내가 그래서 이곳으로 골랐지. 곤충은 미래의 음식이잖니.”
화기애애한 둘의 목소리가 제대로 안 들렸다.
옆 테이블을 보니 녹색 소스와 생전 모습 그대로인 귀뚜라미들이 토르티야 위에 올라갔다.
‘…지옥인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 때 이안이 팔을 붙잡았다.
“옆 테이블을 구경할 정도로 기대됐어요? 그럼 잔뜩 드셔야겠네요.”
“하하하, 얼마든지 시켜도 좋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패트릭은 활짝 웃는 둘을 보며 그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