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88)
그녀의 세상
짙은 은빛 안개가 세상을 뒤덮었다.
섬광의 잔상이 남은 게 아니다. 보이는 세상이 이렇게 바뀐 거지.
“에이미, 미안해!”
“괜찮아. 난 정말 괜찮다니까.”
울먹이며 아멜리아의 애칭을 부르는 목소리는 에이든이다. 이걸 깨달은 순간 팔뚝 위로 따뜻한 액체가 후두둑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촉각에 소녀는 몸을 움찔했다.
-눈물인가?
소녀의 생각이 느껴지자 이안은 당황했다. 지금까지 경험한 환상들은 감각을 공유했을 뿐 생각을 알 순 없었다.
순수하게 제 마음을 표현하는 아이처럼 마음의 빗장을 푼 소녀는 팔에 떨어지는 눈물을 훔쳐 입에 가져갔다.
-시다.
평소라면 느끼지 못했을 신맛이 입안에 감돌았고 소녀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감 중 가장 중요한 시력을 잃었지만 소홀했던 다른 감각은 선명해졌다.
소녀는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느끼기 시작했다.
“이식에 들어가는 수술비가 얼마라고?”
“잠시만 대출을 알아보고 올게.”
기대와 흥분 섞인 부모님의 대화.
염증을 억제한다면서 안구에 놓는 스테로이드 주사는 끔찍한 고통을 줬고 어느덧 소녀는 수술대에 놓였다.
다시 희미하게 보이는 세상. 하지만 이조차도 잠시였다.
“거부반응입니다.”
“왜요! 아직 얼마 안 됐잖아요!”
분노와 절망에 잠긴 부모와 달리 소녀는 그런 감정에 매몰되지 않았다.
-엄마가 조금 더 가까이 있나? 지금 부딪힌 건 책상?
미세한 소리와 손끝에 느껴지는 촉감 그리고 디퓨저의 향기까지. 모든 감각을 동원해 보이지 않는 세상을 채웠다.
감각과 생각을 공유하는 이안도 이 과정에 푹 빠져들었다.
‘재밌네.’
언제 이런 소리가 났더라. 어디서 맡아 본 냄새인데.
감각으로 이뤄지는 추리는 소홀히 대했던 감각을 일깨우기 충분했고 이 추리는 어느덧 상상력으로 뻗어갔다.
그와 함께 시간도 흘러갔다.
“에이미, 엄마랑 가자. 괜찮지?”
이혼과 함께 찢어진 가족.
불행의 원인이 된 거 같아서 슬퍼하던 소녀에겐 새로운 행복이 찾아왔다.
-빅 마운틴의 나무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란 말이지?
“응, 배를 만드는 것도 추운 밤에 불을 지피는 것도 전부 나무가 필요하니까. 하지만 무분별하게 사용하면 민둥산이 되겠지?”
-공유지의 비극이네.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남매가 함께 소설을 만드는 소리였다.
이안은 감탄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었구나.’
눈을 뜨나 감으나 가림막처럼 존재하는 은빛 안개는 어느덧 하나의 스크린이 됐다.
얼마 전 고소한 빵 냄새를 맡은 가게 앞에서 로맨스 코미디가 일어났고 산책하며 느낀 나무로 이뤄진 산의 숲은 전쟁터가 됐다.
진짜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짙은 피 냄새를 맡았다고 착각할 정도로 소녀가 상상하는 세상은 완성도가 높았다.
‘나도 대본 볼 때 상상하긴 하지만 이 정도는 절대 아닌데.’
시각적 디테일은 떨어졌지만 명작에서 발견한 하나의 오타처럼 작은 아쉬움만 남길 뿐이었다.
언제까지 이어지길 바란 행복은 짧았다.
에이든과 한동안 연락이 안 됐고 오랜만에 아버지가 찾아왔다.
“또 수술요? 전 괜찮다니까요. 지금으로도 충분해요.”
“딱 한 번만. 이번만 해보자. 응?”
이상할 정도로 간절한 부탁에 소녀는 끄덕였고 수술이 진행됐다.
아주 성공적으로.
“어때 잘 보이니?”
“네, 잘 보여요.”
아직 수술한 지 얼마 안 됐어도 누군지 어렴풋이 알아볼 순 있었다.
손의 촉감으로 느낀 얼굴과 눈으로 본 부모님의 얼굴을 비교하던 소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근데 오빠는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어머니는 손을 뻗어 소녀의 눈가를 덮었다.
“에이든은 언제나 너랑 함께한다고 했단다.”
“…네?”
의미를 깨달은 소녀는 펑펑 눈물을 흘렸고 한 번도 하지 않은 원망을 했다.
에이든이 남긴 사랑만큼 순조롭게 회복되는 시력과 달리 소녀는 빛을 잃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검은 세상은 은빛 스크린이 보여준 마법이 사라졌다는 걸 상징했다.
시간이 그저 흘러갔다.
-난 이렇게는 못 써.
에이든이 남겨놓은 소설은 거대한 장벽처럼 느껴졌다. 경외와 그리움을 느끼며 소설을 포기한 그녀는 할리우드의 작가가 됐다.
찬란한 재능의 잔재만으로도 그녀는 할리우드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그런대로 살아가던 그녀 눈에 어느 날 한 남자가 들어왔다.
-Last Elder에서 조연으로 나온 남자가 화제죠?
-얼굴의 화상을 극복하고 배우가 된 이안 프라이스 말이죠?
홀린 듯 그에 대해 찾아봤다.
자신보다 더 기구한 인생을 산 이야기에 푹 빠졌던 그녀는 어느덧 키보드를 앞에 섰다.
-모방 도시.
시력을 잃었던 시절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머릿속에 스파크가 튀는 것처럼 이야기가 쏟아졌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으며 그녀는 글을 썼다.
-소녀의 오빠, 에이단. 화상 입은 얼굴을 가졌으나 소녀는 몰랐다. 오해의 시작이었다.
그녀가 처음 쓴 문장을 본 이안은 환상에서 빠져나왔다.
주변에서 이상함을 못 느낄 정도로 찰나의 시간이 지났다.
평범하게 행동하려던 이안은 당혹감을 느꼈다.
‘미치겠네.’
감각이 미쳐 날뛰는 느낌이다.
숨소리만으로 이곳에 있는 사람이 몇 명인지 어렴풋이 느껴졌고 에이든의 아버지가 뿌린 향수에 무슨 향이 섞였는지 알 수 있다.
홍수처럼 몰아치는 감각은 혼란을 안겨줬다.
“…저기.”
“아, 미안해요.”
감각에 몰두했던 이안은 손을 놨고 해방된 손을 쥐락펴락하는 소녀를 봤다.
그녀의 생각과 감각을 공유했기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다.
‘손에서 느껴진 굳은살로 추측 중이겠지.’
펜을 얼마나 자주 잡는지, 어떤 악기를 연주하며 무슨 운동을 하는지.
손은 많은 정보를 품고 있고 그걸 해부하고 있을 터였다.
이안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때요. 무슨 악기를 주로 만지는지 알겠어요?”
손끝에 감각을 되살리던 아멜리아는 흠칫 놀랐다. 방금 만난 사람이 생각을 읽었다.
놀란 그녀는 진지하게 물었다.
“진짜 구미호는 아니죠?”
상상력이 풍부한 질문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민망하다는 웃는 소녀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
인간의 몸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변한다.
시각장애인이 촉각과 후각에 예민해지는 건 당연한 흐름이다.
‘그래도 이 정도로 예민하진 않을 텐데.’
웅장하게 퍼지는 오케스트라 음악이 들렸다. 평소라면 큰 덩어리로 들렸을 소리가 주의를 기울이니 분해되듯 들렸다.
무슨 악기들이 사용됐는지 훤히 느껴졌고 노력하면 바이올린이 몇 개나 동원됐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단순히 청각만이 아니라 시력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도 예민해졌다.
예민한 감각은 활용하기에 따라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될 테지만.
‘근데 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아멜리아는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다. 그녀가 훌륭한 이야기꾼이 될 수 있는 이유였는데 환상 속에서 그 경험을 함께했다.
훌륭한 과외를 받은 성과는 고스란히 나타났다.
이안은 보던 소설을 내려놨다.
-칭크?
-찡긋?
낯선 타지에서 처음 듣는 말에 루는 윙크를 했다.
헛웃음을 지은 상대는 품에서 쇳덩이를 꺼냈다.
-미친놈 아니야?!
-이걸 바라는 게 아니었소? 아니면 말로 하면 될 것을.
희미하게 나는 화약 냄새에 루는 숨겨놨던 꼬리를 활짝 폈다.
-몸으로 하는 대화라. 좋소. 그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어울려 드려야지.
-고, 괴물!
탕!
귀를 때리는 총소리가 무색하게 몸을 슬쩍 돌려 피한 루는 가볍게 땅을 박찼다.
발끝에서 사각거리는 모래 소리가 아련하게 들릴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 루는 남성의 팔을 비틀었다.
-아아악!
짙은 화약 냄새와 열기가 느껴지는 총을 꼬리로 받아낸 루는 남자의 바지춤 안으로 총구부터 넣었다.
-어허, 움직이면 아랫도리가 몹시 아플 것이오.
말은 안 통해도 느낌은 통한다. 몸을 움츠린 상대 머리에 루는 손을 얹었다.
화륵 푸른 여우불이 제단의 불꽃처럼 피어났고 남성의 기억을 읽은 루는 벌벌 떠는 남성의 머리를 후려쳤다.
-허허, 쌍놈의 자식들일세. 겁도 없고.
-…후회하게 될 거다. 괴물 자식아.
-언제든 찾아오시게나. 낯선 땅에서 하는 여흥이라면 피하지 않을 테니.
어느새 영어로 능글맞게 대답한 루는 어두운 골목길을 나섰다. 찬란한 20세기 뉴욕의 풍경이 펼쳐졌다.
소설 초반부 내용이 직접 영상을 본 것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매캐한 바람과 함께 흔들린 꼬리 끝이 볼을 간지럽히는 것까지 느껴진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진짜 똑같이 되네.”
평소 대본을 보며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낫다.
어떤 감각을 느꼈을지 상상이 되니 더 생동감 있게 연기할 수도 있다.
‘거기다가 각본가로 활동한 경험도 도움이 될 테고.’
같은 대본이라도 각본가와 배우가 보는 견해 차이가 있다. 긴 경력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게 확 와닿았다.
이번에 얻은 게 너무 많아서 정리하려면 시간이 걸릴 거 같다.
이런 생각을 하던 이안은 입을 열었다.
“벤, 왔으면 인사를 해야죠.”
“…뭐야. 어떻게 알았어?”
재미없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 내민 벤은 옆에 털썩 앉았다.
“우리 집에서 그렇게 살금살금 움직일 사람은 둘뿐인데. 아빠는 벤보다 더 무겁거든요.”
“그걸 어떻게 구분하냐. 동양의 신비 같은 거야?”
과거로 돌아온 원인과 이런 변화가 생기는 이유는 도저히 모르겠다.
‘진짜 동양의 신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머리를 꽁꽁 싸매도 모를 일에 시간을 낭비할 바에 대본 하나를 더 읽는 게 낫다. 원인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짜잔, 선물.”
벤은 종이 가방을 위에 올려놨다.
묵직한 소리가 나자 의아하게 봤고 그는 빙긋 웃었다.
“선물이야. 우리 회사에 도는 것들. 대본도 있고 시놉시스나 줄거리만 있는 것도 있어. 아, 제목하고 프로듀서만 정해진 작품도 있고.”
“오!”
이안은 엄청난 선물을 받은 것처럼 종이 가방을 열었다.
글이 잔뜩 적힌 종이 더미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눈을 반짝이자 벤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그렇게 좋냐.”
“좋죠. 우리 회사에 없는 것들도 꽤 있잖아요.”
대형 에이전시에는 프로듀서나 감독도 속해 있다.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정보가 도는 곳은 같은 에이전시고.
즐겁게 보던 이안은 대본 하나를 툭 하고 놨다.
“당장 들어갈 작품이 없으면 이거나 준비해봐요. 성과가 나쁘지 않을 걸요.”
“그래?”
막대한 자본과 뛰어난 제작자들이 모인 할리우드라도 모든 영화가 성공하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대박 나는 작품보다 잘해야 손익분기를 넘기는 영화들이 훨씬 많다. 그만큼 좋은 작품을 고르는 건 어려운데.
‘이안은 잘 고른단 말이야.’
최소한 무난하게 성공할 작품을 골라냈다.
흥미롭게 대본을 보던 벤은 문득 드는 생각에 물었다.
“너 나중에 연출까지 할 생각이냐? 패트릭처럼 말이야.”
“연출요?”
배우에서 연출까지 손을 뻗는 경우가 드문 건 아니다. 성과를 내기 힘들어서 그렇지.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데요. 갑자기 그런 말을 왜 해요?”
“네가 하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당연히 들지. 좋은 감독들은 물론이고 영화사 대표하고도 친하지?”
“그렇죠.”
아이작, 게빈, 랜든. 이 셋만 해도 이름값 높은 감독이고 영화사를 이끄는 필릭스도 입맛이 그래서 그렇지 실력은 뛰어났다.
“좋은 배우들하고도 친하고 스태프들 사이에서 소문도 좋잖아. 실력 좋은 스태프를 구하기도 쉬울걸.”
“그리고요.”
“요즘 관심을 크게 받는 작가 남매랑도 엄청 친해졌잖아. 괜찮은 각본을 만들기도 좋은 환경 아니야?”
쭉 나열하니 이런 소리를 하는 이유는 알겠다.
‘진짜 만들고 싶은 작품이 있으면 나쁜 방법은 아니지.’
이안은 빠르게 기억을 뒤적였다. 괜한 간섭으로 망친 영화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방향만 더 잘 잡았으면 훨씬 괜찮았을 영화도 꽤 많았다. 그중에 참여하고 싶은 작품들도 있고.
직접 제작하는 작품에 배우로 참여한다. 드문 케이스는 아니지만.
“너무 앞선 생각이죠. 아직 고등학교도 못 갔다고요. 거기다가 연출을 하려면 웬만하면 대학까지 가는 게 좋잖아요.”
“대학이야 가면 되지. 실력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음… 그건 나중에 생각해볼게요.”
흥미롭긴 한데 지금은 원래 만들어질 작품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다.
벤도 그냥 해본 말이었는지 대본을 들었다.
“아무튼 대본 골라줘서 고맙다. 한 번 준비해봐야겠네. 버디물이라. 괜찮으려나.”
버디물은 두 주인공이 콤비로 활약하는 장르다.
벤이 대본을 들고 돌아가자 이안은 전화를 들었다.
-오! 이안 어쩐 일이니?
“데미안, 잘 지냈어요? 공작새 새끼들도 꽤 컸던데요.”
-우리 애들은 엄청 잘 자라지! 요즘 깃털 색이 엄청 좋다고.
공작새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 걸 적당히 호응하며 들은 이안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벤하고 같은 에이전시였죠?”
-응, 그런데 왜. 에이전시 옮기려고?
“아뇨, 그건 아니고 괜찮은 대본이 보여서요. 추천해주려고 했죠.”
-그래? 어떤 건데.
“버디물이요.”
우정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선 친구들을 공평하게 대해줘야 했다.
‘이번 기회에 둘이 친해지면 좋잖아.’
이안은 방긋 웃었다.
오디션에서 만난 둘이 삿대질하기 일주일 전이었다.
***
-허니, 다음 주 토요일이야. 그때 만나자.
“좋아요.”
샬럿의 집.
언더힐 가문에 정식으로 초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