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ollywood Child Actor to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91)
프레드와 아론
첫 주연 드라마인 Melted Moonlight는 4부작으로 결정됐다.
러닝타임이 3시간 정도 되니 책 1권 내용을 담기엔 충분했다.
‘그나저나 주연이라.’
평생 인연이 없던 명칭이 붙으니 묘한 기분이다.
엑스트라부터 시작된 연기 인생을 하나하나 되짚고 있으니 누군가 머리를 거칠게 쓸었다.
“주연이라며 좋냐?”
“좋죠.”
벤의 물음에 이안은 선선히 동의했다.
같은 할리우드 배우라고 해도 노골적으로 급이 정해져 있다. 출연료부터 촬영 시 사용하는 트레일러까지 모든 곳에 차별이 들어간다.
짧은 드라마라도 그런 주연급으로 발돋움할 기회였다.
‘근데 이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단역, 조연, 주연 관계없이 연기만 할 수 있으면 돼.’
주연이 무조건 조연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데도 좋아하는 건.
“조연이 하는 연기와 주연이 하는 연기는 다르잖아요. 다양한 연기를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안 좋아해요. 드러낼 수 있는 존재감부터 다르잖아요.”
조연은 이야기를 매끄럽게 하고 주연을 빛내주는 존재다. 당연히 주연보다 두드러지면 안 됐다.
그런 한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연기해도 된다니 기대가 됐다.
눈을 반짝이자 벤은 짓궂게 웃었다.
“이렇게 나서는 걸 좋아하다가 나중에 공작새 녀석처럼 되는 건 아닌지 몰라.”
“진짜 공작새가 된 벤보단 낫죠. 여기 사진도 저장해놨다고요.”
공작새 벤이라는 데미안 작가의 현대미술 사진이 핸드폰 화면에 떡하니 보였다.
벤은 기겁하며 소리쳤다.
“야! 당장 안 지워?!”
“그러게 술을 적당히 마셔야죠!”
“안 그래도 금주 중이니까 빨리 지우라고. 이딴 걸 왜 저장해놓는 거야.”
기어코 벤이 핸드폰을 뺏어 사진을 지웠으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인터넷에 검색하면 수두룩하게 뜨던데요.”
“아오, 진짜 그때 털을 죄다 뽑아놨어야 했는데.”
“왜요. 할리우드 절친 사진으로 유명해졌잖아요.”
“그니까 걔랑 내가 왜 절친이냐고. 아니라고 그렇게 인터뷰를 해도 어떻게 된 게 믿질 않아.”
당연히 안 믿지. 싫어하는 사이면서 같이 버디물을 찍는 게 말이 되나.
루머에 고통받는 피해자처럼 굴어봤자 그냥 옆에서 보면 웃길 따름이다.
투덜거리며 불평을 토로한 벤은 이안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아무튼 축하한다. 이렇게 발전하다 보면 영화에서도 주연으로 찍을 수 있을 거야. 대신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신예가 검증된 인기 스타의 벽을 넘는 게 얼마나 힘든진 알지?”
“알죠. 안정적으로 영화를 흥행시킬 스타를 포기하고 도전해볼 가치를 보여줘야 하잖아요.”
괜히 할리우드 영화에서 남녀 주연 연령차가 기본 10년에서 많게는 30살까지도 나는 게 아니다.
벤은 이안을 반응을 살피고 입꼬리를 올렸다.
“하긴 누굴 걱정하냐. 알고 있다니 됐다. 난 가본다.”
과하게 들떴을까 걱정돼서 찾아온 게 맞는지 벤은 훌쩍 떠났다.
촬영 준비와 다른 스케줄로 바쁠 텐데 굳이 찾아올 정도로 생각해주고 있다니 고마웠다.
자리에 앉은 이안은 핸드폰에 연락이 와 있는걸 봤다.
-이안! 이번 영화에 우리 안도 출연을 확정했어!
안?
아는 이름이다. 데미안이 키우는 공작새 이름이니까.
“…내가 알기론 이 영화에 공작새가 나오진 않았는데.”
미래가 바뀌었다. 이 변화가 흥행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는 가늠이 안 갔지만.
‘와, 공작새 둘하고 촬영이라니.’
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이안은 침묵을 선택했다.
***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렇게 변한 종이가 넘어갔다.
꽃피지 못하고 저문 한 사람의 흔적이다. 종이가 구겨질까 걱정하며 페이지를 조심히 넘겼다.
집중해서 보고 있자니 호기심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걸 보는 게 연기에 도움이 돼? 그냥 낙서장이잖아. 별 내용도 없던데.”
“도움이 안 될 거 같아?”
“솔직히 작사·작곡한 곡을 보는 게 더 낫잖아.”
음악은 많은 걸 내포하고 있다. 직접 쓴 가사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왔는지 알 수 있고.
레이첼의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가사는 그대로 고민 끝에 쓴 거잖아. 여기엔 좀 더 날 것의 흔적이 남아 있달까. 여기 봐봐 종이를 찢은 흔적이 보이지?”
“응.”
“다음 페이지엔 펜을 꾹 눌러쓰면 생긴 자국이 어렴풋이 보이잖아. 뭐 같아?”
“…m7? 기타 코드인가.”
“아마 맞을걸. 근데 이 뒤에 선생님에게 혼났다고 욕설을 잔뜩 적어 놨단 말이야. 수업 중에 딴짓하면서 작곡을 하지 않았을까?”
낙서장 곳곳 남긴 흔적을 연결해 제이라는 사람의 삶을 뒤쫓는다.
이런저런 추측을 덧붙여 설명해주니 재미가 붙었는지 그녀는 한 곳을 가리켰다.
“그럼 이 레베카 가드너라는 이름은 좋아하는 사람 이름일까.”
“어… 아마?”
좋아하는 사람 이름이긴 하다. 프레드가 제이의 무덤 앞에서 놀리듯 떠들어댄 야한 잡지에 나오는 사람 이름이었으니까.
‘취향은 글래머였나.’
이렇게 깊게 사생활을 파헤칠 생각은 없었는데 알게 된 걸 어떡하겠는가. 일단 기억해둬야지.
만약 하늘에서 제이가 보고 있다면 절망하고 있지 않을까. 문득 드는 생각을 애써 지웠다.
“악보 쪽은 어때?”
“재밌는 사람이던데. 독특한 도전을 많이 했더라고. 음, 오토바이를 타고 바다로 뛰어드는 사람 같달까.”
“평범한 사람이라면 안 했을 도전이라고?”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야. 끊어놓고 보면 괜찮거든. 오토바이를 타는 것과 바다로 뛰어드는 건 문제가 없잖아. 둘을 같이해서 그렇지.”
역시 레이첼에게 악보 해석을 도와달라고 하길 잘했다.
“삐뚤어졌네?”
“그렇지. 일부러 듣는 사람이 화나라고 만든 곡일걸.”
쿡쿡 웃음을 터트린 그녀는 악보를 손으로 톡톡 두들겼다.
“나중에 인기를 끈 곡과 비슷한 멜로디도 여럿 있을 정도거든? 좋은 멜로디를 이렇게 괴상하게 엮어놨으니 더 화가 났을걸.”
“진짜 재밌는 사람이네.”
악보만 봐도 제이는 반골 기질이 꽤 강했다.
제이가 스노우 레이크 멤버들에게 하는 대사만 봐도 그 모습이 드러나고.
‘근데 왜 도와줬을까.’
원래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고 둘 사이를 연결한 프레드의 동생도 제이랑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툴툴거리며 괴롭히긴 했지만 최선을 다해 가르쳤다. 그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죽은 사람에게 직접 물어볼 순 없는 노릇이니까.
“고마워. 도움이 많이 됐다.”
“그래?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배시시 웃은 그녀는 악보들을 조심히 상자에 넣었다.
“며칠 뒤에 대본리딩이랬지? 촬영 전에 에반 좀 자주 놀아줘.”
“아아, 그래야지.”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면 자주 만나긴 힘들 테니까.
껌딱지처럼 달라붙는 에반과 놀아주며 이안은 촬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
“같이 대본리딩이라니 두 번째인가.”
“촬영으로 따지면 세 번째 작품이지. 네가 갑자기 엑스트라로 튀어나온 적이 있잖아.”
“아!”
아이작의 조언을 듣고 엑스트라로 엄청 참여했던 때가 떠올랐다.
다니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그때 얼마나 놀란 줄 아냐. 어휴, 그때 이상한 걸 눈치채고 알아서 조심했어야 했는데.”
“너도 정상은 아니었어. 원소기호 20번까지 노래를 외워왔다고? 어디 지금이라도 한 번 들어볼 수 있을까?”
“…닥쳐.”
얼굴이 빨개진 다니엘을 보며 이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 혼자 사는 사람처럼 굴던 애가 이렇게 컸다니 뿌듯한 마음이 느끼며 주의를 줬다.
“술, 담배는 몰라도 약은 안 된다? 알지?”
“뭔 당연한 소리를 갑자기 하고 있어.”
“고등학생이 돼서 하우스파티에 초대되도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되고. 이상한 게 섞여 있을지 모르잖아.”
“안 마셔! 그리고 그런 자리에 가지도 않거든?”
이안은 다니엘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작게 속삭였다.
“솔직히 말해봐. 친구가 없는 건 아니고? 비밀로 할 테니까.”
“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다니엘을 놀리다 보니 함께 탄 차는 어느새 대본리딩 장소에 도착했다.
오는 내내 티격태격한 덕분인지 긴장이 꽤 풀린듯한 소년의 어깨를 툭 쳤다.
“가자.”
배우끼리 호흡을 맞추는 대본리딩은 이미 익숙한 일이다. 스태프부터 배우까지 낯선 얼굴들이 수두룩했고 그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안면을 트는 사이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안! 잘 지냈냐.”
“프레드? 여긴 어쩐 일이에요.”
스노우 레이크의 리더인 프레드가 반갑게 다가왔다.
“우리 영화잖아. 궁금해서 찾아왔지. 옆에는 누구?”
“다니엘이라고 프레드의 동생인 에릭 역할을 할 배우에요.”
“얘가 에릭이라고?”
프레드는 다니엘을 위아래고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 동생하고 같은 건 머리카락 색밖에 없는데. 제이도 에릭도 너무 잘 생긴 애들로 한 거 아니야?”
“얼굴보단 연기로 뽑혔죠.”
“확실히 그런 거 같다.”
잘 생겼기에 오히려 연기파로 분류된 다니엘은 그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거리감 없는 사람에게 면역력이 없는 걸 모르는 프레드는 친근하게 다가갔다.
“좋네. 나이는 고등학생인가. 나중에 진짜 에릭하고 한 번 같이 만나자고. 뺀질거리는 얼굴하고 직접 만나면 도움이 될 거 아니야.”
“나도 불러요. 프레드랑 같이 보내기엔 불안하거든요.”
“내가 어때서?”
양심도 없다.
“남의 무덤에서 한 짓이 있잖아요.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아하하, 남자의 우정이란 그런 거 아니겠어?”
평소에 즐겨보던 야한 잡지를 떠벌리는 게 우정이라면 필요 없다.
유쾌하게 웃고 떠드는 프레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고 한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프레드 켈리 역을 맡은 아론 브래들리입니다.”
“오, 내 역할인 친구구만.”
이안은 아론을 봤다. 다니엘을 비롯해 몇몇 배우가 바뀌긴 했으나 주연은 바뀌지 않았다.
‘둘이 꽤 닮았네. 형제라고 해도 믿겠는걸.’
비슷하게 스타일링한 탓이 크긴 하지만 왜 그를 뽑았는지 외모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 진짜 팬입니다. 기회가 될 때 콘서트도 자주 갔습니다.”
“마음에 드는 친구인걸. 이래놓고 나오미나 다른 애들을 더 좋아한다고 하는 건 아니지?”
“아닙니다. 진짜 프레드 씨 팬입니다. 이번 오디션에 합격한 것도 그 덕분이고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프레드는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하는 곡들을 줄기차게 늘어놓으며 칭찬을 하니 기분이 한껏 좋아진 그는 이안을 돌아봤다.
“봐봐. 내 인기가 이 정도라니까. 그러니까 라이 노래보단 내 노래를 들으라니까.”
“들으면 되잖아요.”
둘의 대화를 들은 아론은 이안을 휙 봤다.
“혹시 저번에 라이 관련된 글을 SNS에 올린 게 이 배우 때문입니까?”
“뭐, 그랬지. 나오미한테 엄청 혼나고 글을 내렸지만.”
쓸데없는 논란을 만든 거니 혼나긴 해야 했다.
‘오히려 도움이 되긴 했지만.’
누군데 프레드가 언급하냐면서 라이 채널로 유입된 사람이 꽤 많았다. 문제라면.
“맞는 말만 썼잖습니까. 좋아하는 여자들이 이해 안 되던데요. 오죽하면 댓글로 싸우기까지 했겠습니까.”
그 스타에 그 팬이라고 아론 같은 사람이 꽤 섞여 있었다.
자유로운 표현의 나라답게 댓글과 커뮤니티에 투기판이 벌어졌고.
“근데 졌잖아요.”
“…안 졌어. 그냥 시간 낭비라서 포기했던 거지.”
추한 변명이다. 승패는 명확하게 갈렸으니까.
‘도로시가 엄청 상쾌한 얼굴로 찾아왔었지.’
상쾌한 얼굴만 봐도 무슨 글을 주고받았는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성공한 키보드 워리어와 그걸 고스란히 따라 하는 팬이라.’
1+1 행사 같은 조합은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꽤 시끌벅적한 촬영이 될 거 같다.
***
아론을 포함해서 스노우 레이크의 주연 배우는 변하지 않았다.
이미 성공을 거둔 조합답게 대본리딩은 부드럽게 진행됐다. 당연히 이안과 다니엘도 문제가 없었고.
첫 촬영 날까지 순조롭게 일이 진행됐고 스태프들은 흥미로운 얼굴로 한 곳을 봤다.
“이렇게 준비하는 게 맞지?”
“네, 고마워요.”
“뭘 약속이었는데.”
이 영화의 프로듀서인 패트릭은 차려진 상을 봤다. 이안이 원한 고사상이다.
“기도문 같은 걸 해야 한다며.”
“제가 준비해왔는데 가볍게 할 거예요.”
이안은 그랜드 라인의 감독인 준혁의 도움을 받아 쓴 축문을 펼쳤다.
유세차(維歲次)로 시작한 축문을 읽은 이안은 종이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타오른 불꽃은 하늘로 치솟으며 사라졌다.
“후우…”
여기까진 순조로웠지만 진짜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한국인 스태프도 한 명 없는 곳에서 홀로 한 고사가 효과가 있을지 확인하는 순간이다.
긴장된 마음으로 돼지 머리가 뜬 태블릿 화면을 올리고 절을 했고 이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번쩍이는 섬광이 보였다. 속으로 기뻐하는 이안 옆으로 프레드가 쓱 다가왔다.
“영화가 잘 되길 비는 거라고?”
“네.”
“그럼 나도 해야지. 우리 이야기가 담긴 영화인데. 잠시만 내가 이 자리에 딱 맞는 게 있거든.”
활짝 웃은 그는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비키니를 입은 여자 사진이 표지인 옛 야한 잡지는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제이, 네가 좋아하던 거야. 우리 영화 잘 부탁할게.”
절을 하는 프레드를 보며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제이가 무덤을 박차고 일어나 멱살을 잡아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