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ll-backs are too good at football RAW novel - Chapter (924)
889화 One Team (19)
.전반 17분
대한민국 0 : 0 세르비아
전반전 초반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던 세르비아의 팬들. 한데 지금은 입을 다문 채 불안한 시선으로 그라운드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현재 축구공은 세르비아 진영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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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모브레이) – BBC 코멘테이터
“세컨볼을 다시 한국이 가져갑니다. 세르비아가 볼을 점유하는 것에 애를 먹습니다. 밀린코비치-사비치가 강한 압박을 보입니다만, 키. 능숙하게 볼을 지켜 냅니다.”
(마크 로렌슨) – BBC 공동-코멘테이터
“한국이 원하는 대로 경기를 풀어 나가고 있습니다. 예선 때도 말했지만, 이 팀은 무척 수준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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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르트스키 주르날(Sportski ?urnal)’은 세르비아 최대의 스포츠 전문 미디어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지면의 절반 이상을 축구 관련 소식으로 채우고 있다.
그런 ‘스포르트스키 주르날’에서 월드컵 취재를 위해 러시아로 온 모미르 보예비치(Momir Bojevic).
그는 과거 2011년 서울에서 펼쳐졌던 대한민국과 세르비아의 평가전을 취재했던 경험이 있었다.
‘놀라워, 정말 그때와 같은 팀인가?’
2011년 당시, 세르비아는 어린 유망주들을 주축으로 스쿼드를 구성. 완전체인 대한민국 A팀을 상대로 선전을 펼치며 1:2 석패를 안았다.
20대 초반의 선수들과 진짜 A팀과의 격차가 분명히 존재했던 만큼, 세르비아로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그렇게 현장 취재를 끝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모미르 보예비치는 A매치 주간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세르비아 축구협회의 혜안을 칭찬하는 기사를 작성했다.
내용 중에는 [‘굳이 무리하게 주축 선수들을 소집해 경기력을 평가받을 만큼의 값어치는 없었다.’]라든가, [‘돈이 아니라면 굳이 아시아의 팀을 상대로 친선전을 펼칠 이유가 있을까?’]라는 식의 자극적인 문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럽의 변방. 특히 미디어에 관해서는 특별히 내세울 것 없던 세르비아의 미디어였던 만큼, 자극적인 내용임에도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6년하고도 8개월. 세르비아가 세 개의 메이저 대회(2012 런던 올림픽/2014 브라질 월드컵/2016 리우 올림픽)에서 연이어 탈락하는 사이, 종전과는 반대로 한국과의 격차가 생겨 버린 것 같았다.
(마트코 실리얀) – 세르비아 RTS 캐스터
“답답한 경기가 계속해서 이어지는군요.”
(벨리보르 파프) – 세르비아 RTS 해설위원
“더 열심히 뛰어 줘야 합니다. 저들은 국가를 대표해서 저 무대에서 뛰고 있는 거니까요. 아직 전반전 20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꼭 후반전 40분처럼 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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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혀를 찬 모미르 보예비치가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뺀다.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모국의 언어로 된 중계방송을 듣고 있었는데,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지라 듣기 괴로웠다.
‘더 열심히 뛰어? 터무니없는 소리. 지금 이것보다 더 어떻게 열심히 뛰라는 거지?’
모미르 보예비치가 보기에, 세르비아의 선수들은 정말 열심히 뛰고 있었다. 특히 전방 압박의 강도는 조별 예선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방 압박이 힘을 발휘하기엔, 볼을 키핑하는 선수들의 컨디션이 너무나도 돋보였다.
구자철-기성용-김다온으로 이뤄진 대한민국의 3선은 세르비아의 전방 압박을 간단히 무력화하고 있다.
단순히 볼을 빼앗지 못한다고 하여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라면, 과연 축구라는 종목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부터 확인해 봐야 할 것이다.
“…….”
마냥 답답하기만 했던 기분을 걷어 내며, 모미르 보예비치는 직업 정신을 발휘해 보기로 한다.
애국심은 잠시 뒤쪽에 놓아두었다.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어.’
지금까지 월드컵 혹은 대한민국을 평가해 온 미디어는 빠지지 않고 [‘조직력이 좋은 팀’]이라는 세 단어를 포함해 왔다.
단순히 끈끈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려는 축구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피치 위에서 실현(實現)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이다.
클럽 축구 레벨에서라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질 요소지만, A팀에서 조직력을 이런 수준까지 끌어올린 팀은 드물다.
그렇기에, 조직력은 A매치 경기에서 클럽 레벨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개개인의 역량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이를 거의 느껴지지 못하도록 만든다.
더구나 지금 대한민국 정도 되는 수준이라면, 단점을 가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장점을 더 극대화한다.
‘개성이 뚜렷하군.’
조별 예선 3경기, 대한민국 대표팀의 평균 볼 점유율은 62%였다.
월드컵 본선에 참가한 팀 중 4위에 해당하는 지표로, 스페인/프랑스/독일만이 한국보다 더 위에 있었다. 점유율의 의미가 크게 퇴색된 대회라지만, 그렇다고 아예 쓸모없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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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모브레이)
“놀랍습니다. 대한민국이 71:29로 점유율에서 앞서고 있습니다. 압도적인 차이입니다. 이것이 월드컵 16강 경기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마크 로렌슨)
“키. 그리고 다온이 너무 영리하게 볼을 지켜 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보셔도 좋습니다. 마치 행성과 위성처럼 늘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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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클롭이 도르트문트 시절에 활용한 게겐프레싱(Geghen Pressing)이 획기적인 전술로 평가를 받았던 건, 당시의 트렌드가 점유율에 있어서였다.
2006년 FIFA 독일 월드컵에서 큰 성공을 거둔 4-2-3-1을 변형, 라볼피아나(Lavolpiana)를 다시 주류로 끌어들이며 후방빌드업의 새 지평을 연 시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일종의 착각이다.
펩 과르디올라의 축구와 위르겐 클롭의 축구는 근본적으로 같은 곳에 뿌리를 뒀다. 점유율을 높인다는 것 자체가, ‘볼이 없을 때 그것을 빠르게 뺏어 와야 함’을 뜻한다.
실제로 과르디올라는 전방 압박에 높은 비중을 두고 있고, 짧은 패스를 가져가는 것도 전방 압박에 체력을 쏟은 선수들의 체력을 회복시키는 데 궁극적인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위르겐 클롭은 자신의 스쿼드로는 같은 축구를 할 수 없다 여겼다.
당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는 FC 바르셀로나의 세 얼간이도 없었고, 리오넬 메시와 같은 혼자만의 힘으로 경기의 판세를 바꿔 놓을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도 없었다.
대신 체력이 좋고 부지런히 뛰어 줄 수 있는 선수들은 몇 있었는데, 점유율을 높일 방법으로 [“볼을 되찾기 어렵다면, 네 명이서 동시에 압박하자.”]를 택한 것뿐이었다.
FC 바르셀로나처럼 짧은 패스를 통해 점유율을 높일 수 없다면, 상대에게 자주 볼을 넘겨주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탈취함으로써 점유하는 시간을 높일 수 있다고 여겼다.
바로 이게 게겐프레싱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였고, 오직 짧은 패스만이 점유율을 높일 유일한 방법이라 믿던 축구 감독들의 시야를 트이게 해 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한데 여기에서 또, 축구는 한 단계 발전한다.
기존 빌드업 상황에서 중추(中樞)가 되었던 건, 흔히 6번(DM) 포지션으로 표현되는 선수들이었다. 축구의 발전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선입견이 당연히 그렇게 여기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나 펩 과르디올라에게는 그 ‘당연히’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는 상대적으로 역할이 제한되었던 사이드백에게 다양한 실험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실험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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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준) – KBS 해설위원
“오늘 세르비아의 선수들이 굉장히 많이 뛰고 있습니다. 특히 전방 압박의 강도가 굉장히 강합니다. 하지만 시청자분들이 보시기에, 한국이 큰 위기를 겪지 않은 것처럼 느끼실 수 있거든요? 그건 기성용과 김다온 선수가 매우 안정적으로 볼을 지켜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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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가 오늘 택한 전술은 위르겐 클롭 방식의 게겐프레싱과 흡사했다. 기동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다수 전방에 배치하여, 높은 위치에서부터 압박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한국은 중앙의 압박이 거세어질 때마다, 좌우에 있는 윙백에게 패스를 보내어 가볍게 이를 무효화했다.
이를 견제하려면 중앙 미드필드의 활동폭을 더 키우거나 풀백을 높은 위치로 끌어 올려야만 하는데, 그러기엔 손흥민과 황희찬의 속도가 거슬렸다.
그렇다고 중앙 미드필드를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자니, 9.5번(SS)처럼 뛰는 황의조가 권창훈과 함께 포켓(Pocket)을 점유하고 끊임없이 위협을 가해 왔다.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군.’
하프라인 위쪽에서 볼을 빼앗는 것에 목적을 둔 게겐프레싱이 그 의미를 잃은 순간, 전술적인 균열이 곳곳에서 발생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한국 선수들 전원이 그것을 알고 있고, 어떻게 해야 그걸 이용할 수 있는지 안다는 거다.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건가?’
모미르 보예비치의 눈은 다시 한번, 압박을 버텨 낸 기성용으로부터 패스를 넘겨받은 김다온에게 향한다.
분명 그는 오른쪽 측면에 머물고 있지만, 플레이하는 방식은 사이드백이 아닌 6번. 좀 더 정확히는 레지스타(Regista)처럼 보였다.
구자철의 윙백 이동과 이재성의 부재로 인해 생긴 전방 플레이메이킹을 전담 중이다.
지금도.
{“오오오오-!!”}
김다온은 관중석을 들썩이게 만드는 절묘한 패스를 앞쪽으로 굴려 냈다. 황의조와 권창훈이 동시에 아래로 내려서며 수비의 시선을 끈 틈을 타, 뒤로 파고드는 손흥민을 겨냥했다.
제대로만 이어진다면 완벽한 기회로 연출될 수도 있었던 패스였으나, 한국에는 애석하게도 패스가 다소 강했다.
{“아아아…….”}
“휴우~”
안타까워하는 관중들이 탄식을 내뱉고, 모미르 보예비치 역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준이 달라.’
20년 가까이 축구를 취재해 온 세르비아 베테랑 기자의 눈엔, 대한민국 팀의 수준을 끊임없이 끌어올리는 독보적인 레벨의 오른쪽 풀백이 자리 잡고 있다.
***
.전반 31분
대한민국 0 : 0 세르비아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점점 더 명확해졌다. 그리고 그건, 월드컵 본선에서 해왔던 축구와 별반 다르지 않아 좋았다.
왼쪽의 흥민이 형에게 넓은 공간이 주어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션을 수행하면 됐다.
그러다 세르비아가 오른쪽 수비를 의식하면, 중앙으로 패스를 보내 두고 볼 없이 움직여 더 높은 위치로 올라섰다.
상대는 내 높이를 크게 의식하고 있다.
“창훈아!”
팔을 아래쪽 앞으로 뻗어, 패스를 보내 줬으면 하는 위치를 알린다. 보통 이렇게 패스가 향해 올 위치까지 알린다는 건, 다음 플레이를 위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함이다.
말인즉슨.
팡-
‘그렇지.’
다음 플레이를 어떻게 가져갈지 미리 정해 두었다는 뜻이다.
툭.
창훈이가 보내온 패스를 오른발 안쪽으로 가볍게 받아 둔 후, 난 왼쪽 먼 곳을 보며 바로 오른발을 뒤로 들어 올렸다.
“…….”
흥민이 형이 저곳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 포지셔닝은 왼쪽을 텅 비워 둔 상태다.
의조 형과 흥민이 형을 나란히 페널티박스 앞에 배치, 세르비아의 센터백을 단단히 묶어 두고 오른쪽에서 1:1을 하도록 만드는 세팅이다.
오늘 몇 번 시도했던 공격 전략이기에, 세르비아도 거기에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뻔한 것을 재미없게 여기 온 내겐, 이는 오히려 상대를 제대로 속일 기회처럼 느껴졌다. 상대가 무언가를 대비했다는 건, 달리 표현해 편견을 가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허를 찔렸을 때, 더 격렬하게 반응한다.
팡-!
길게 띄워 보낸 패스가 텅 빈 공간으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이내 자철이 형이 등장해 떨어지는 볼을 왼발로 붙잡았고, 그제야 세르비아의 수비는 반응하여 비워 두었던 오른쪽 측면으로 선수를 투입한다.
지금과 같은 플레이를 위해, 나는 조금 전 데드볼 상황에서 자철이 형과 입을 맞췄었다.
[“자철!! 올라가 봐!!”]A매치가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편안하게 떠들어도 상대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물론 이는 반대도 적용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자철이 형은 내가 시티에서 해 온 윙백 to 윙백을 알고 있었고, 그걸 해 보자는 뜻이라는 것도 단박에 파악했다.
그리고 제대로 플레이가 주효했을 때, 어떠한 식으로 다음을 가져가야 하는지도 말이다.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션의 마지막 패스를 윙어가 아닌 윙백이 받았다면, 망설이지 말고 박스 안을 곧바로 겨냥해 크로스를 띄워야 한다.
더구나 지금처럼 반대 발 윙백을 둔 상태라면, 골대 안쪽으로 향하는 위협적인 크로스를 보낼 수 있다.
때마침 공격수 둘을 박스 정면에 배치해 두고 쇄도할 수 있는 포지셔닝을 잡은지라, 크로스는 자철이 형에게도 매력적인 선택지로 느껴질 것이다.
팡-!
‘그렇지.’
좋은 타이밍에 크로스가 향하는 것을 보며, 난 기대감을 품고 박스 안을 쳐다봤다.
축구공은 흥민이 형에게 닿기에는 너무 빨랐지만, 먼 쪽에 있던 의조 형이 발을 가져가기에는 충분했다. 다만, 조준이 틀렸는지 슈팅이 아닌 트래핑을 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볼을 뒤쪽에 남겨 두고 앞쪽으로 쭉 미끄러져 들어간 의조 형을 보니, 일부러 의도한 장면은 아닌 것 같았다.
황급하게 뛰어온 루카 밀리보예비치가 다급히 클리어를 해내고, 코너플랫과 가까운 오른쪽 사이드라인에서 스로인을 선언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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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근) – MBC 캐스터
“아- 아깝습니다. 지금은 볼을 받아 두는 거였나요?”
(안정환) – MBC 해설위원
“실수죠. 슈팅을 가져가려고 했는데, 발의 높낮이가 조금 틀렸습니다. 아, 황의조 선수. 마무리에 조금 더 집중력을 가져 줬으면 좋겠거든요? 다른 건 다 좋습니다만, 결정지어 줘야 하는 상황에서 너무 골을 넣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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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조 형은 이번 월드컵에서 득점을 올리는 데 애를 먹고 있다. 주어지는 기회는 꽤 되었지만, 마지막 슈팅이 번번이 빗나간다거나 아예 헛맞는 상황이 이어지는 중이다.
득점에만 집중하면 되는 마르세유에서와는 달리, 대표팀에서는 해야 하는 일이 많다 보니 결정력이 떨어져 버린 거다.
누구보다 답답할 것은 본인이니만큼, 난 끊임없이 형을 격려하며 긍정적인 말을 건네고 있다.
“의조!”
“?”
“침착하게! 하나면 하면 되니까!”
“…….”
사람들은 가끔 득점을 무척 쉽게 생각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1:1 상황이나 P.K라 할지라도 순간 주어지는 압박을 이겨 내고 침착하게 마무리를 해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그것을 놓쳤을 때의 비난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기회 앞에서 더 위축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 하나가 중요하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어 줄 한 방이 터져 나온다면, 이내 모든 부담을 떨쳐 버리고 골을 집어넣는 기계로 재탄생할 수도 있다.
“다온아!”
“…….”
아쉬움을 턴 의조 형에게 스로인을 보낸 후, 다시 축구공을 전달받아 뒤쪽으로 길게 패스를 보낸다.
민재를 아뎀 랴이치가 강하게 압박하려고 하지만, 영리한 저 녀석은 무모하게 전진에 집착하지 않고 몸을 획 돌려 골키퍼를 바라보는 것을 택했다.
‘나이스.’
빠르게 경험을 쌓아 나가고 있는 민재는 경기를 치를 때마다 쑥쑥 성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대회 첫 번째 페루전보다, 오늘이 훨씬 더 노련하다.
현우 형에게 패스를 보내고 빠르게 후방으로 후퇴해 다시 패스를 받아 주려 하는 것부터, 패스를 전달 받고 기계적으로 성용이 형이나 나를 찾은 게 아닌 것도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순간적으로 세르비아의 전방 압박이 느슨해진 상태였는데, 이쯤이면 슬슬 지칠 때도 됐다.
고작 전반 35분이라지만, 기계가 아닌 이상 30분 동안 피치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다 보면 지치기 마련이다.
볼이라도 점유했다면 얼마든 템포를 늦추며 체력을 회복할 수도 있었겠지만, 전반 극 초반 이후 세르비아는 우리에게 휘둘리기 바빴다.
전방 압박이 좋은 전술인 건 맞지만.
‘그만큼 반작용도 크거든.’
일단 게겐프레싱을 시도했다면, 반드시 전방에서 성과를 거둬야 한다. 이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땐, 많은 거리를 뛴 대가가 뒤따른다.
급격하게 느려진 세르비아의 선수들을 보며, 나는 슬슬 그 대가를 치를 타이밍이 왔음을 예감했다.
또 여기에서 하나 고려해야 할 건, 지금이 보름이 조금 넘는 시간에 치르는 네 번째 경기라는 거다. 정확히는 16일에 네 경기였고, 클럽 기준으로도 꽤 빡빡한 일정이었다.
게다가 월드컵이라는 무대. 러시아를 제외한 모두가 원정을 떠나온 상태에서 강행군을 이어가는 셈이다.
집중력을 유지하는 일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어려워지고, 체력적인 부분마저 부담을 느낀다면 판단력은 쉽게 상실될 수밖에 없다.
약간의 여유가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바라보고 있는 피치는 5분 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공기가 변했어.’
인간은 누구나, 모든 현상을 단편적으로 파악하려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하나의 사건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전조(前兆)가 있는지를 볼 수 있는 눈을 기른다면, 삶이 훨씬 더 다채로워짐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건 축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경기 시작부터 피치 위에서 있었던 모든 사건과 선택들. 나는 그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 재미있는 일을 시도할 만큼은 알고 있다.
“…….”
왼쪽으로 이동한 창훈이와 자철/흥민을 중심으로 빌드업이 만들어지고, 당연하다는 듯 사이드라인으로 벌려 선 희찬이가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션을 위한 포지셔닝을 잡는다.
현재 내가 기다리는 건 단 한 번의 탈(脫)압박이었는데, 그것이 오른쪽으로의 전환을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경기를 중계할 카메라와 팬들의 눈은 지금 볼이 있는 곳에 고정되어 있겠지만, 몇 초 뒤 그럴듯한 장면이 만들어질 장소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바로 여기다.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그냥 알아.’
가끔, 피치 위의 모든 것들이 내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물기를 머금은 잔디와 거대한 경기장 내부 특유의 공기가 피치의 비밀을 말해 준다.
그러한 순간이 오면, 난 어김없이 예언자가 되곤 했다. 머릿속으로 그렸던 장면들이 실제로 펼쳐지고, 이렇게 될 거야라고 믿었던 일들이 현실이 됐다.
매 경기에서 그런 건 아니고, 일 년에 몇 번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지금!’
몸을 왼쪽으로 슬쩍 움직이며 속임수 동작을 가져간 창훈이가 멋진 상체 페인팅으로 루카 밀리보예비치의 무게중심을 완전히 무너뜨려 놓는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생각한 나는 하프라인 아래에서부터 재빨리 움직였고, 예상한 대로 패스는 희찬이에게 이어졌다.
오늘 경기 내내 우리의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션에 당한 세르비아는 재빨리 수비 간격을 벌리는 식으로 대처에 들어갔다.
‘계속 똑같아.’
희찬이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 알렉산다르 콜라로프가 비워 둔 자리. 거기로 정확히 뛰어 들어가고 있던 나는 입을 크게 벌리며 희찬이의 이름을 외쳤다.
“희찬!!!”
“!”
말했듯, 나는 이런 전개를 예측했다.
다만 한 가지, 상상도 못 한 게 있다.
발로 패스를 보내올 거로 생각했던 희찬이가 앞으로 한 발을 내디디며 가슴으로 볼을 튕겨 보내온 거다.
툭-
“????”
머리나 발이 아닌 가슴팍을 활용한 패스에, 콜라로프는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옆으로 흐르는 축구공을 그대로 보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절묘하게도 패스는 내가 달려가는 앞에 뚝 떨어졌고, 속도를 죽이며 몸을 살짝 띄워 올린 나는 발등으로 축구공을 가볍게 앞으로 밀어 놓았다.
어디까지나 트래핑 실수를 줄이기 위했던 행동으로, 속도는 볼을 밀어낸 직후 다시 빨라졌다.
{“와아아아-!!!”}
순식간에 페널티 라인이 뒤로 지나가고, 오른쪽 하프 스페이스를 따라서 쭉 움직였던 내가 자리 잡은 곳은 오른쪽 델란떼로(Delantero)가 되었다.
“…….”
“…….”
슬쩍 고개를 들어 쳐다본 블라디미르 스토이코비치는 각도를 좁히고자 살짝 앞으로 달려 나온 상황이다.
일반적이라면 반대편 포스트 낮은 곳을 겨냥하고 슈팅을 보내겠지만, 나는 지금의 이 상황을 처음 머릿속에 떠올렸던 대로 몸을 이끌기로 했다.
슈팅을 보낼 위치는.
‘가까운 쪽.’
스토이코비치의 왼발과 골포스트 사이, 축구공 두 개 정도가 들어갈 좁은 공간이다.
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