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ture Knight RAW novel - Chapter 13
퓨쳐나이트 13화
창가에 기대어 힘없이 돌아가는 인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엘라디온의 심중도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렇게 열의 있게 배우려는 그의 모습에 안타까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꼭 강찬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지 못해 아쉬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엘프족 젊은 청년들과 너무도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엘프란 종족은 거의 천 년에 가까운 기나긴 명을 누리는 종족이기에 그들은 결코 조바심 내거나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그에 반해 백 년도 안 되는 짧은 생을 살다가는 인간들은 짧은 생만큼이나 욕심 많고, 서두르며 참지 않는 종족이었다.
그런 그들의 삶은 엘프의 눈으로 봤을 땐 참으로 역동적이었다.
만일 엘프들이 그들 인간처럼 욕심과 의욕을 가지고 수백 년을 검술에 매진했다면 대륙 최고의 검사 자리는 모두 엘프가 차지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 엘프 중 현재 대륙에 알려진 검객은 대륙 5대 무신인 자신뿐이었다.
자신 외에는 단 한 명의 엘프도 세상에 알려진 자가 없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뭔가를 배우려는 의욕이나 의지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따로 검술 따위를 배우지 않아도 충분히 강했다.
성년이 되면 정령과 계약을 맺고, 그들의 힘을 아무런 노력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데다가 활을 다루는 데도 천부적 재능을 타고났다.
그런 엘프의 삶은 뭔가 역동성이 부족했다.
그나마 케레미온이 동년배 중 가장 돋보이는 이유는 그가 인간들에 대한 원한에 사무쳐 복수의 칼을 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올해로 97살, 인간의 나이로 치면 제이나와 마찬가지로 관속에 들어갈 나이다.
그런데 그의 성취는 겨우 소드 익스퍼트 초급 단계.
인간들에 비하면 그리 눈부시다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케레미온은 검술에 있어서 이 마을 최고의 기재임이 분명했다.
다만 그것이 누나의 복수를 위한 집착 때문이란 게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말이다.
케레미온의 내면에 도사린 어두운 마음이 언젠가 그 자신을 망칠지도 몰랐기에 엘라디온은 항상 제자에게 어두운 면을 버리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이미 원한에 너무도 깊이 사무쳐 버린 제자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였다.
그런 제자에게 복수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검 대신 활을 잡으라고도 했으나 제자의 대답은 참으로 황당한 것이어서 엘라디온은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던 적도 있었다.
자신의 제자가 말하는 검을 잡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멀리서 쏴서 죽이는 것만으론 성에 안 찹니다. 그들의 몸을 직접 칼로 베어야 저와 누님의 원한이 풀릴 것 같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베겠다고 말하는 제자의 눈빛으로 봐선 베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난도질할 기세였었다.
그런 제자를 생각한 엘라디온은 오늘도 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 * *
강찬이 집으로 돌아오자 제이나가 집 앞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줄곧 강찬을 기다린 듯했다.
“야! 어떻게 됐어? 가르쳐 준대?”
제이나는 그를 비웃거나 깔보려는 게 아니고 순수하게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찬의 귀에는 제이나가 자신을 놀리는 걸로만 들렸다.
그런 제이나를 빤히 바라보던 강찬이 이내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말했다.
“집에나 가. 나 혼자 있고 싶어.”
“…….”
강찬의 차가운 말에 갑자기 제이나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자신은 지금까지 강찬을 기다리며 걱정했는데 정작 자신에게 돌아오는 건 강찬의 냉대와 핀잔뿐.
그녀는 서러움에 그만 눈물을 터트렸다.
“으아앙앙! 아앙앙!”
제이나가 갑자기 울기 시작하자 그녀의 눈물은 그칠 줄 몰랐고, 강찬은 당황하며 그런 제이나를 달래려고 애썼다.
“제이나, 울지 마. 너한테 화낸 거 아니야.”
여자애를 달래 본 경험이 없는 강찬은 어떻게 제이나를 달래 줘야 할지 난감했다.
“엉엉! 어어어엉…….”
‘휴, 제이나가 이렇게 눈물이 많았던가?’
그는 문득 울부짖는 제이나를 보자 예전에 전장에서 만났던 어린 소녀가 생각났다.
상체밖에 남지 않은 부모의 시체 옆에 앉아 정말 서럽게 울부짖고 있던 그 아이.
그 아이에게 자신이 해 줄 수 있던 건 휴대용 전투 식량을 건네주는 것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조차 먹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마치 죽은 부모를 따라가겠다는 듯이 말이다.
강찬이 잠시 그런 상념에 젖어 멍하니 있을 때도 계속 울음을 터트린 제이나의 눈두덩은 퉁퉁 부어서 잘 떠지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들어가자. 내가 사과의 뜻으로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
강찬이 주저앉아 우는 제이나의 겨드랑이로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리고는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러자 제이나의 울음소리도 약간 누그러졌다.
강찬의 숙소는 처음 그가 머물던 곳에서 많이 달라져 있었다.
넘쳐 나는 시간을 모두 사냥과 먹는 것에 보냈기에 그의 집은 이제 사냥꾼의 집을 방불케 했다.
훈제로 만든 고기가 벽에 주렁주렁 달렸고, 잡아먹은 티메의 부드러운 털가죽 수백 개를 엮어 만든 이불 하며 엘프들에게 얻은 사냥꾼 활도 벽에 걸려 있었다.
그런 그의 방에는 이제 제이나 말고는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육식보다는 채식을 주로 하는 엘프들이 봤을 때 훈제된 고기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그의 방은 너무나 끔찍한 모습이었던 것이었다.
특히 작고 귀여운 토끼인 티메의 털가죽을 엮어 만든 이불은 항상 침착한 모습의 아르테온조차 까무러치게 한, 그의 회심의 역작이었다.
그는 제이나를 달래 주기 위해 자신이 제일 아끼는 음식인 키위에 절인 멧돼지 고기를 꺼내 불에 굽기 시작했다.
다 구우면 레몬을 살짝 뿌려 주는 게 포인트인 이 요리는 그가 고안한 특식으로 제이나도 매우 좋아했다.
조미료라는 개념이 거의 없는 엘프의 마을에선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요리에 속했다.
어느덧 굽던 고기가 알맞게 익자 언제 울었는지도 모르게 울음을 그친 제이나가 강찬 옆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선 강찬이 썰어 주는 고기를 아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야! 너능 후아, 후아, 어떠케 후후! 남쟈갸 요리를 이케 자하냐?”
뜨거운 고기에 말이 자꾸 세는 제이나를 보며 그녀의 귀여움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다 먹고 말해라.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흥!”
갑자기 강찬이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자 의아한 마음에 제이나도 같이 덩달아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왜? 왜 그래 갑자기?”
강찬이 아주 조심스럽게 제이나에게 말했다.
“우리 과일주 한잔할까?”
“과일쥬?”
제이나는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으로 눈을 정말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눈을 찔러 보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그들 엘프 마을에서는 성인이 안 된 엘프가 어른들 몰래 술을 마시는 일은 아주아주 나쁜 탈선 중의 탈선이었다.
물론 성인이라는 건 만 100세를 이상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얘가 진짜 미쳤어! 미쳤어! 어떻게 어른들 몰래 술을 먹어! 근데, 술은 있어?”
곧 죽어도 싫다고 안 하는 제이나를 보며 강찬은 제이나의 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내가 물 가지고 술이라고 할까?”
강찬이 집 앞의 땅을 파기 시작하더니 이내 작은 술통들을 꺼내 들었다.
“아직은 술이라기보단 과일 주스다. 그냥 기분만 내자는 거지. 어때, 좋아?”
“좋아!”
좋다고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리는 제이나를 보며 그는 과일주를 담그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꽤 종류별로 다양하게 갖춰진 그의 과일주 중에서 제이나는 산딸기를 마시자고 했다.
강찬이 산딸기라고 적힌 병을 따자 달콤한 산딸기 향이 퍼지며 그들의 후각을 자극했다.
“자, 받아.”
“응!”
과일 껍데기로 만든 잔에 과일주를 따르자 꽤 운치 있어 보였다.
“와! 색깔 그럴싸한데?”
“열심히 만들었다.”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는 강찬을 바라보며 제이나가 발그레 웃음 지었다.
“건배하자.”
“건배? 건배가 뭐야?”
“그런 게 있어. 그냥 너도 건배라고 해.”
“응, 알았어. 건배!”
과일주를 들이켜자 그는 그 씁쓰레한 맛에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 우주 정거장에서 동료와 함께 나눴던 마지막 술자리가 떠올랐다.
합성된 인공 알코올에 밋밋한 안주뿐이었지만 취기를 안주 삼아 토할 때까지 마음껏 마셨던 그날을 말이다.
정거장 외에서는 술을 마시는 것이 우주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기에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를 정거장.
그들은 그날 모두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질 때까지 마셨었다.
“캬아! 야, 이거 지대로 만들었는데! 한잔 더 줘 봐!”
벌써 얼굴이 벌게진 제이나가 잔을 들이밀자 강찬은 제이나의 잔을 반만 채웠다.
“조절하면서 마셔.”
“히야, 이거 진짜 맛 좋다! 히히히.”
역시 술이 있는 자리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둘은 다시 식욕이 끓어오르면서 구운 멧돼지 요리를 안주 삼아 과일주를 마셔 가며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웃고 떠들며 놀았다.
다행히 강찬이 머무는 숙소가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둘은 더욱 마음 편히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그는 오늘은 정말 취하고 싶은 날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둑어둑했던 하늘이 어느덧 어두컴컴한 밤이 되었고, 둘은 모닥불 앞에서 앉아 과일 디저트를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의논했다.
“역시 그랬구나.”
제이나는 술이 달아올라 붉어진 얼굴을 자신의 무릎 사이에 묻고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강찬의 눈빛이 모닥불 때문인지 활활 타오르는 듯이 일렁였다. 그런 강찬을 바라보던 제이나가 강찬 옆으로 다가와 귀에다 속삭였다.
“그럼, 이렇게 할까?”
“……?”
“내가 마법 배우는 거 그만두고 검술을 배우면서 너한테 내가 배우는 걸 그대로 가르쳐 주면 되잖아.”
제이나의 말에 강찬이 과일을 먹다 말고 말했다.
“뭐?”
“내가 가르쳐 줄게. 어때?”
“절대 안 돼.”
안 된다는 강찬의 단호한 대답에 제이나가 더욱 얼굴을 들이밀며 강찬을 설득하려 했다.
“남들한테 숨기면 되잖아. 응? 나 어차피 마법에는 전혀 소질이 없어서 다른 과목으로 옮길 거야. 그래서 이왕이면 내 친구인 너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는 검술 쪽이었으면 좋겠어.”
“그래도 안 돼. 난 친구에 나쁜 짓을 시킬 수 없어.”
“그게 왜 나쁜 짓이야? 넌 내 친군데. 하나밖에 없는 내 친군데.”
제이나가 강찬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고, 그런 제이나에게서 무척 좋은 냄새가 났다.
“날마다 엘라디온 님을 찾아갈 거야. 그리고 될 때까지 부탁할 거야. 그러니깐 제이나, 그런 위험 짓 하지 마.”
“알았어.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난 검술을 배울 거야. 그러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내가 도와줄게.”
“고맙다.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정말 너 같은 친구를 만난 건 행운이야.”
강찬의 진심 어린 말에 제이나의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응! 나도.”
* * *
이튿날 집 밖으로 나선 엘라디온은 누군가 집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에 미간을 모았다. 새벽 일찍부터 앉아 있었는지 그의 어깨는 새벽이슬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소용없는 짓일세.”
엘라디온은 차가운 말 한마디를 던지고는 자신의 갈 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그가 떠난 지 한참이 지나도록 강찬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다. 그러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회심에 미소를 지었다.
‘저에게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어르신.’
제이나가 검술을 배우기로 하고 엘라디온의 제자가 되는 날, 강찬의 검술 수업도 함께 시작되었다.
비록 그는 제이나와 함께 가르침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지만 강찬은 포기하지 않고 전날 밤 몰래 수련장을 찾아가 전함에서 가져온 캠코더를 근처 나무 위에 설치해 뒀다.
우주군에서 사용하는 이 초소형 캠코더는 엄지손가락 정도의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태양풍 속에서도 천만 장에 달하는 초고해상도 사진 촬영이 가능하며 동영상은 64K 화질로 2주일 연속 촬영이 가능한 최신형 모델이었다.
그 외에도 야간 자외선 촬영 기능과 더불어 엑스선을 통한 투시 촬영도 가능해 포로나 민간인들의 소지품 검열 때 주로 사용하던 장비였다.
그런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캠코더 안에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전부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진과 동영상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전에 전함에 갔을 때 챙겨 온 것인데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은 그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치사하기는 하지만 임무를 위해선 어쩔 수 없지.’
몰래 훔쳐 배워야 하는 사실이 좀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는 그저 임무 탓으로만 돌리며 묵묵히 캠코더를 설치했다.
그렇게 이튿날이 되었고, 그는 무선으로 전달되는 캠코더의 영상을 통해 제이나와 함께 즐거운 검술 수련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정해진 검술 수련이 끝난 후에도 머릿속에 저장해 둔 엘라디온의 말을 곱씹으며 온종일 수련에만 매진했다.
그러다 가끔 자신이 모르는 언어가 나오면 기억해 뒀다가 어쩔 수 없이 제이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럴 때마다 제이나는 그걸 어떻게 아느냐며 매우 놀라워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아는 것 안에서 최대한 강찬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몰래 도둑질로 배우는 그도 점차 나름대로 검에 대한 기초가 서서히 잡혀 가기 시작했다.
그의 옆에는 제이나라는 매우 든든한 조력자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