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ture Knight RAW novel - Chapter 133
퓨쳐나이트 133화
강찬이 지크욘과 함께 의장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고 있는 레드 마스호를 바라보며 감회에 빠져 있자 그의 뒤로 다가온 아르테온이 강찬에게 말을 걸었다.
“전함의 모습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네요.”
“예, 좀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저녁노을에 반사되는 거대한 레드 마스호의 선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자 그 모습은 진짜로 전설 속에 나오는 신의 방주와 같아 보였다.
“그래, 이것을 타고 적과 싸운단 말이지?”
“예, 마스터.”
“…….”
엘라디온은 침략자들이 만든 살인 병기로 그들과 싸우는 것을 그리 반기는 눈초리는 아닌 듯 보였다.
“이제 적에게 대항할 무기도 갖춰졌으니, 한바탕하는 일만 남았구나.”
“예, 마스터.”
얼마나 치열한 전쟁이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물론 이긴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승산이 없는 전투라 해도 싸워야만 했고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침략자의 손아귀에 떨어진 이 대륙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줄 수 있게 말이다.
그것은 그가 죽은 제이나와 한 약속이었고,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제이나를 생각하던 강찬은 문득 다른 한 사람을 떠올렸다.
‘플라티나는 잘 지낼까?’
“지크욘.”
“어, 왜?”
“나 잠깐 어디 좀 나갔다 올게.”
“어디 가는데? 나도 같이 가.”
“미안, 혼자 갔다 올게.”
“너, 혹시 그 아이 만나러 가냐?”
강찬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크욘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여긴 내가 지킬 테니 얼른 갔다가 와.”
“고맙다, 지크욘.”
강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간 이동 마법진을 통해 라크샤에 있는 엘프들의 마을을 향했다.
한 달 만에 찾아가는 그녀였다.
지크욘의 도움으로 엘프의 모습을 한 플라티나였지만, 그래도 녹색 엘프인 그녀가 엘프들의 무리 속에서 지낼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홀로 마을 외곽에 위치한 폭포 옆에 기거했다.
그곳은 예전에 강찬과 제이나가 함께 비밀 수련을 받던 그 장소와 많이 닮은 곳이었다.
한걸음에 폭포까지 달려간 강찬은 그리운 얼굴을 한 엘프 여인이 폭포 앞에 앉아 채소와 과일을 씻는 모습을 발견했다.
강찬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짐을 느꼈다.
수백 번, 수천 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을 그리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제이나…….’
물론 그녀는 제이나가 아니라 플라티나였다.
그녀를 보며 옛 추억을 쫓는다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행동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강찬에게 있어 제이나란 존재는 절대로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흠! 흠!”
채소와 과일을 씻던 그녀가 강찬의 인기척에 놀라 급히 뒤를 돌아봤다.
“강찬 님!”
물에 젖은 손으로 강찬을 반갑게 맞는 그녀의 뒤로 그녀가 씻고 있던 과일이 물살에 두둥실 떠내려 갔다.
이윽고 강찬의 신형이 번쩍이더니 어느새 그의 손에는 떠내려가던 과일이 들려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플라티나는 놀라움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그가 소드 마스터라는 지고무상한 존재란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인간 같지 않은 움직임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 내, 내 정신 좀 봐…… 미안해요.”
“여기.”
“고마워요.”
플라티나가 얼굴을 붉히며 강찬에게 과일을 받아들었다.
그녀의 수줍은 미소에 강찬은 순간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제이나와 폭포에서 사랑을 나누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에게 상처가 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달 만에 뵙네요.”
“그렇군…….”
강찬은 4일간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대륙 전역을 돌아다녔기에 시원한 폭포수를 보자 오랜만에 멱을 감고 싶어졌다.
그런 강찬이 갑자기 웃통을 벗어 던지자 플라티나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머!”
플라티나는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고 애를 썼고, 강찬은 그녀를 뒤로하고 폭포수를 맞으며 몸을 닦기 시작했다.
그의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근육이 폭포수에 젖어 번쩍이자 그 야성적인 모습에 플라티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그동안 많이 바쁘셨나 봐요?”
“…….”
“식사는 하셨나요?”
“아니.”
“그럼 우리 같이 먹어요. 지금 저도 밥 먹으려고 했는데.”
“그러지.”
함께 먹겠다는 강찬의 말에 그녀는 너무나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씻던 과일과 채소를 한 아름 안고 집으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강찬은 속으로 자신을 책망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녀에게 더는 정을 줘선 안 된다고 다짐하고 다짐해 봐도 그녀 앞에만 서면 흔들리는 자신을 그조차도 어쩔 수 없었다.
샤워를 마친 강찬이 플라티나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녹색 엘프도 엘프인지라 그녀가 먹는 음식은 엘프들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식탁 위에는 온통 풀떼기와 과일 뿐이었다. 하지만 강찬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엘프들의 식탁은 그에게도 매우 익숙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것 한번 먹어 봐요.”
그녀가 파인애플과 치즈를 곁들여 만든 그라탱을 포크로 떠서 강찬 앞에 내밀었다.
하지만 강찬은 정색하며 그녀가 내민 음식을 받아먹지 않았다.
“내 손으로 먹지.”
“예…….”
강찬의 싸늘한 말에 풀이 죽은 플라티나가 우울한 표정으로 레몬 에이드를 마시자 강찬은 헛기침을 하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험! 험! 그래, 여기서 지내는 건 불편하지 않아?”
“불편이요? 아뇨, 전혀요. 여기처럼 아름답고 먹을 것이 풍성한 곳은 처음인걸요.”
엘프의 숲만큼은 아니었지만 라크샤의 숲도 대륙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풍요로운 숲이었다.
척박한 아이스랜드에서 살던 그녀가 보기엔 지상 낙원이나 다름없었다.
“여긴 참 좋은 곳이에요. 제가 태어난 아이스랜드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이런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플라티나의 말에 강찬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그녀가 말하는 소원은 과거 자신이 간절히 바라던 소원이었기 때문이다.
제이나와 함께 말이다…….
플라티나는 강찬이 전처럼 슬픔에 잠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봤다.
그가 자신의 모습에서 다른 여인을 찾고 있다고 해도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건 자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찾는 여인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여인. 질투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플라티나는 자신이 죽은 다른 여인 대신이라도 좋았다.
그저 강찬 옆에서 평생을 함께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서로 바라만 보던 둘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그러던 중, 강찬은 처음의 차갑던 말투가 아닌 다소 다정해진 말투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이스랜드란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나?”
“네, 그곳에서 300년 정도 살았죠.”
“…….”
강찬은 그녀의 나이가 300살이 넘는다는 소리에 내심 조금 놀랐다.
그녀의 나이가 생각보다 많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플라티나가 제이나를 닮은 것이 아니라 제이나가 플라티나를 닮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강찬은 그러한 사실을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아이스랜드는 버림받은 땅이라고 들었는데, 그곳이 그렇게 살기 어려운 곳인가?”
강찬이 살기 어려운 곳이냐고 묻자 플라티나가 잠시 창문 밖을 내다보며 한숨짓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살 만하지만, 제가 태어났을 당시만 해도 참으로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죠.”
“추위 때문에?”
“춥기도 엄청나게 춥죠. 아이스랜드는 그 이름처럼 1년 내내 얼음이 녹지 않는 땅이니까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참기 힘든 건 배고픔이었어요. 저희처럼 육식을 못하는 종족에게 그곳에서 먹을 수 있는 거라곤 동굴 바위에 낀 이끼나 차가운 바다 속의 해초뿐이었으니까요.”
“그럼 이끼랑 해초만 먹고 그렇게 번성했단 말인가?”
“아뇨, 물론 아니죠. 처음 이끼와 해초로 연명할 때는 정말이지 수많은 형제들이 죽어 나갔어요. 추위에 얼어 죽고, 배고픔에 굶어 죽고…….”
플라티나의 얼굴은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 슬픔에 잠겼다.
“제 동생도 그때를 넘기고 못 죽었죠. 저희는 그때를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렀어요.”
“저런…….”
그녀는 옛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애써 눈물을 참고 당당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다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것?”
“혹시 강찬 님은 얼음에 피는 버섯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얼음에 피는 버섯?”
“네, 얼음에만 피는 버섯이요. 저희는 그것을 아이스 머쉬룸이라고 불러요.”
“그럼 그 버섯을 먹고 그토록 번성한 것인가?”
“예, 얼마나 맛있는데요. 영양가도 많고요. 저희 녹색 엘프족은 그 아이스 머쉬룸을 방대한 빙하 초원에서 대단위로 경작해요. 아이스 머쉬룸은 재배하는 데 별로 손도 안 가고 빨리 자라서 수백만에 달하는 저희 녹색 엘프족이 먹기에도 충분한 양이었죠. 근데 그 아이스 머쉬룸을 노리는 몬스터들이 얼마나 많은지,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스 트롤들이 농장으로 침입했어요. 다들 놈들을 막아 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뭐, 그 덕에 저희들은 모두가 훌륭한 전사가 되었죠.”
플라티나는 간만에 말 상대를 만나서인지 쉬지 않고 고향 얘기를 떠들어 댔다.
아무리 강찬이 좋아서 동족조차 마다하고 따라온 그녀였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는 제아무리 독한 맘을 먹는다 해서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찬은 그렇게 신이 나서 떠들어 대는 플라티나를 보며 또다시 제이나 생각에 빠졌다.
쉴 새 없이 조잘대는 모습이 영락없는 수다쟁이 제이나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강찬은 자신도 모르게 행복한 표정을 지었고, 그의 미소에 플라티나도 덩달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플라티나의 입에서 그린의 이름이 거론되자 강찬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칼날처럼 살벌하게 변했다.
“…….”
“왜, 왜 그러세요, 갑자기?”
제이나를 죽인 자가 그린이란 사실을 모르는 플라티나는 강찬이 갑자기 정색하는 이유를 몰라 당황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강찬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너, 그린이란 여자의 과거도 잘 알고 있냐?”
“당연히 잘 알죠,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데요.”
강찬은 이번 기회를 통해 그린의 과거를 듣고 싶었다.
제이나를 죽인 그 망할 년이 대륙 전쟁을 벌인 이유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들려 줘, 그녀의 과거를…….”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싶나요?”
“그래.”
녹색 엘프들에게 그린이란 존재는 신과도 같았기에, 그린의 과거사와 이념은 그들에게는 신앙과도 같았다. 그런 그녀의 과거를 플라티나가 모를 리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들려 드릴까요?”
“태어났을 때부터.”
“그럼 얘기가 좀 긴데, 괜찮으시겠어요.”
“상관없다.”
상관없다는 강찬의 말에 플라티나는 식탁 위의 접시를 치우고 차를 내왔다. 얘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플라티나는 강찬이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심정을 이해해 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머니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이었어요.”
그 후로 그녀는 그린의 과거에 대해서 강찬에게 소상히 전했고, 강찬은 진지하게 그린의 과거를 경청했다. 그렇게 밤은 깊어지고, 강찬은 그린의 대한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저 공허한 마음뿐이었다.
그녀가 제아무리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제이나를 죽인 것이 용서되지 않기 때문이다.
플라티나는 그런 강찬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가 조금이라도 자신들 종족의 처지를 이해해 줬으면 해서였다.
그러나 강찬의 생각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자신이 불행했다고 타인까지 불행하게 만들다니,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건 너뿐만이 아니다.’
그린의 불행한 과거 이야기는 오히려 그의 복수심만을 더욱 자극했다.
그 누구보다 불우한 인생을 살아온 강찬이었지만 그는 세상에 복수하려는 생각 따위는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상처의 고통을 잘 알기에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이 더욱 두렵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그린은 달랐던 것이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받은 고통을 타인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것도 모르는 채로…….
지구에서 온 침략자의 앞잡이가 된 그녀.
오히려 강찬의 마음은 편했다.
이젠 둘 다 한꺼번에 부숴 버리면 되기 때문에 말이다.
전라의 에델린 옆에 누워 있던 벤질러가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잠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놓인 최고급 위스키 한잔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의 인기척에 잠이 깬 에델린이 베개에 얼굴을 묻고 물었다.
“으음, 안 자요?”
“생각할 게 있어서, 먼저 자라.”
3년이란 시간 동안 벤질러와 수도 없이 살을 섞어 온 에델린은 이미 그의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와의 동거는 이제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녀 역시 주어진 환경에 순응한 것이다.
벤질러는 에델린의 가슴께 아래로 내려간 이불을 덮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 앞에 섰다.
그러고는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계획한 대로 이제 이 별은 자신의 것이었고, 그들에게 거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뭔가가 불안했다.
드래곤들이 그날 이후로 종적을 감추고 3년이란 세월 동안 쥐 죽은 듯 잠잠한 것도 수상했고, 각 왕국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왕족과 기사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조용히 숨어 지내는 것도 수상했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뭘까? 대체 무슨 꿍꿍이지?’
본능적으로 뭔가가 그의 심기를 자극했다.
제아무리 꿍꿍이가 있어 봤자 제깟 것들이 하면 뭘 하겠는가만, 그래도 뭔가 뒤가 구린 것만은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