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ture Knight RAW novel - Chapter 25
퓨쳐나이트 25화
* * *
어두운 동굴 속, 칙칙한 작은 불빛 아래 녹색 피부의 여인과 검은 피부의 남자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작은 불빛이라 할지라도 검은 피부의 남자는 극히 눈이 부신 듯 미간을 모으고 있었다.
둘은 피부는 달라도 모두 조각을 깎아 놓은 듯한 아름다운 얼굴 때문에 마치 남매 같아 보일 정도였다.
“온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그린 님을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어둠에 지존으로 군림하시는 네미츠 님을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 어둠의 지존이라니요. 누가 들으면 제가 꼭 무슨 마왕이라도 되는 줄 알겠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대륙 제일의 검객이라고 불러드릴까요?”
“하하 그거야 수백 년 전에 일이지요. 이제 저보다 강한 검객이 대륙에는 수두룩하답니다.”
“제가 직접 돌아다녀 봤지만 아직까지 말씀하신 정도로 걸출한 검객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는걸요?”
“하하! 그건 그린 님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담소를 나누던 네미츠의 얼굴이 서서히 진지하게 바뀌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현재 고전 중이라 들었습니다만?”
어둠 속 최고의 정보망을 가진 그들에게 숨길 것이 없는 그린은 사실 그대로 털어놨다.
“고전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약간 전세가 주춤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오크족만 가세했을 뿐인데 주춤이라…… 그렇다면 엘프들과 드워프들까지 몰려와 연합군에 가세한다면 상황이 많이 어려워지시겠군요.”
먼 산을 바라보듯 네미츠가 말하자 그린은 정곡을 찌르는 그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네, 맞는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네미츠 님을 찾아온 것이지요.”
“저희 힘이 필요하시다는 겁니까?”
“네, 엘프들이 연합군과 합류하기 전에 엘프의 숲을 공격하기에는 저희로서 병력이 부족하기에 이렇게 간청 드리고자 합니다.”
“엘프의 숲을 공격한다? 참으로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군요.”
칙칙한 그의 눈이 살의로 가득 차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있는 듯해도 선택은 뒤로 미루고 깊은 수심에 잠겨 버리는 네미츠 때문에 그린은 애가 탔다.
지금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한 게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드워프들과 엘프들이 손잡고 가공할 성능의 기간테스를 수백 기나 생산 중이라는 첩보를 들은 마당에 장차 대륙 정벌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지 모를 그들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하지만 엘프의 숲에서 그들과 싸운다는 것은 사방이 적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숲에는 가디언인 엔트들이 우글거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사실 다크 엘프보단 그들이 비밀리에 사육한다는 블랙 샌티패드였다.
숲을 보호하는 가디언인 엔트들을 무력화시키기에는 블랙 샌티패드 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드래곤 본에 비견되는 강력한 껍질과 강철도 녹이는 강력한 부식액으로 무장한 이 거대한 지내는 지하 생명체의 먹이 사슬에서 딥 드래곤을 제외하고는 최상위에 군림하는 괴수였다.
그린에게는 반드시 그 무시무시한 괴수가 필요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그렇게 그린의 애간장을 태우던 네미츠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 또한 그들에게 받을 게 많지요. 그런 제의라면 이번 협정은 확정입니다. 당신들과 함께하겠습니다.”
오래 기다린 만큼이나 시원스럽게 동맹을 선택해 준 네미츠를 향해 그린이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것으로 그들의 운명은 정해졌군요. 멸망이라는 운명이……. 이제 약조대로 엘프의 숲은 영원히 당신들의 것입니다.”
“엘프의 숲이라, 정말 그립군요.”
“저도 그리워요. 그곳에서의 좋았던 기억은 단 하나도 없지만 말이죠.”
이런 중요한 교섭 자리에서 그린은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 생각나고야 말았는지 말을 마친 그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분노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
광폭함.
거대한 분노.
그런 그녀의 거대한 분노를 읽은 네미츠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대륙 제일에 광기를 자랑하는 그녀가 흥분하고 있을 때 같이 있어 봐야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아! 그럼 전 서둘러 병력을 준비하겠습니다.”
“예에? 아! 말씀 중에 죄송해요. 제가 그만 다른 일에 잠시 정신이 팔렸네요. 내 정신 좀 봐, 호호호. 너무 기대돼서 그런지 참을 수가 없군요.”
기대에 부푼 얼굴로 혀를 날름이는 그녀의 모습에 네미츠는 그녀의 광기를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저도 기대가 큽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아이들이 지상까지 배웅해 드릴 겁니다.”
“아, 네에.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약속한 그날 봬요.”
깍듯이 인사하고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지상으로 떠나가는 그린을 바라보는 그의 심정은 복잡했다.
‘저주를 받으며 세상에서 버려진 두 종족의 복수가 이렇게 시작되는 건가? 후, 안타깝지만 이 끝이 파멸이라 해도 나는 너와 함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 같구나, 라카사.’
동굴 안을 밝혀 주던 칙칙한 작은 불빛이 꺼지자 그도 암흑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 *
우르칸타가 그 난리법석을 떨며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강찬은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강찬은 아르테온의 최고위급 치유 마법 덕분에 흉터 하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말끔히 치유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침묵하면서 도통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두 그런 그가 강대한 우르칸타의 무위에 겁을 먹고 의기소침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조용히 눈을 감은 이유는 죽음을 무릅쓰고 얻어진 소중한 경험들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강찬은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자신의 바이오칩에 저장된 우르칸타와의 결전을 끊임없이 반복해 가며 그와의 대결을 되새겼다.
보통은 사색이라 해야 옳겠지만 그는 머릿속 있는 바이오칩 덕분에 그는 보통 무인과는 차원이 다른 사색을 하고 있었다.
바이오칩에는 그가 눈으로 직접 경험한 우르칸타와의 결전이 하나도 빠짐없이 저장되어 있었고, 그 생생한 영상들과 다양한 자료들을 토대로 자신의 문제점을 찾고, 배울 점 등을 유추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강찬은 우르칸타의 동작 하나하나를 슬로 모션으로 치밀하게 살피며 그가 어떻게 마나를 다스리는지 그 흐름을 면밀히 파악했다.
그의 동작마다 육체에 가해지는 힘과 호흡의 변화를 주시하며 자신과 비교해 그동안 자신이 잘못 생각해 온 점들을 찾아 그 모든 걸 머릿속에 고이 담아 두었다.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란 말도 있듯, 적에게도 분명히 배울 점이 있었다.
그를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한 장본인인 우르칸타는 보면 볼수록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배울 점들이 무궁무진했다.
그 정도로 우르칸타가 이룩한 무의 경지는 대단한 것이었다.
‘정말 대단한 실력자였어. 아직도 치가 떨리는군.’
그의 휘두르던 거대하고 무식한 도를 생각하자 절로 몸서리가 쳐지는 강찬이었다.
그러나 그 끔찍했던 우르칸타가 더는 진전을 보이지 않던 강찬에게 새로운 돌파구가 되어 줄 줄은 그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케레미온과의 대결 이후 1년 동안을 폭포에만 틀어박혀 홀로 고된 강훈련을 계속한 강찬은 불과 1년 만에 마나 소드를 뿜어낼 수 있는 기적을 일궈 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듯 더는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강찬은 매일 머리를 싸매고 전전긍긍했고, 그런 그가 걱정된 제이나가 잠시 바람이라도 쏘일 겸 함께 외출하자고 졸랐다.
그렇게 마을로 나온 두 사람은 우연히도 우르칸타를 만나게 되었고, 강찬은 그와 생각지도 못한 생사투를 벌여 적지 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 이제 좀 괜찮아?”
침대에 걸터앉아 조용히 사색에 잠겨 있던 강찬에게 제이나가 다가왔다.
그녀가 가져온 바구니 안에는 그가 좋아하던 과일이 한 아름 담겨 있었다.
강찬은 눈을 감은 채로 제이나를 맞았다.
“그래, 이젠 괜찮아.”
자신이 왔는데도 여전히 눈을 감고 뭔가에 홀린 듯한 강찬을 보고는 제이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강찬이 자신을 보호하려고 그 광폭한 우르칸타에게 맞서 죽음 직전까지 갔었다는 말을 엘라디온에게 들었다.
그런 제이나는 강찬의 저런 넋 나간 모습이 마치 자신 때문인 것만 같아서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녀가 우는 듯하자 강찬이 서서히 눈을 떴다.
“왜 울지?”
강찬이 눈을 떠 자신을 바라보자 제이나는 그런 강찬의 눈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고 소리 질렀다.
“이 바보! 왜 그랬어? 나 따위 그냥 버리고 도망치지! 하마터면 아저씨까지 죽을 뻔했잖아!”
제이나가 연약한 손으로 강찬의 가슴을 때렸다.
“내가 살더라도 아저씨가 죽었다면 내가 기뻐할 줄 알았어?”
가슴을 때리던 제이나가 강찬의 옷을 붙잡고는 가슴에 기대어 울부짖었다.
그동안 강찬이 혼수상태로 누워 있을 때의 걱정과 불안감이 한 번에 폭발해 버린 것이었다.
강찬은 그런 제이나를 달래 주고자 안절부절못했다.
평소에 제이나가 워낙 눈물이 많아 여러 차례 달래 줘 본 적이 있긴 했지만 지금처럼 자신의 가슴에 안겨서 우는 제이나는 처음이었기에 약간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그런 그는 천천히 제이나의 등을 두드리다가 그래도 그칠 기미가 없자 하는 수없이 제이나를 꼭 끌어안아 줬다.
그런 그는 조금 놀랐다.
품 안의 제이나는 정말로 작고 여렸기 때문이다.
‘제이나가 이렇게 작았던가? 정말 가늘군.’
제이나는 정말 강찬의 품에 쏙 들어올 만큼 작고 연약했다.
한동안 그렇게 제이나를 안고 있자 제이나의 눈물도 점점 잦아들었고, 강찬은 속으로 안도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녀는 눈물을 그친 후에도 강찬의 가슴에 기대어 떨어질 줄을 몰랐고, 그런 그녀를 안고 있는 강찬은 난감해졌다.
그런 제이나가 싫은 건 결코 아니었지만 왠지 남들이 보기에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싫어도 자신에게 바짝 기대어 있는 제이나의 가슴의 감촉이 온몸으로 느껴지자 강찬은 아무 말 못하고 그저 얼굴만 빨개져 멀뚱멀뚱 벽만 바라보았다.
그런 그에게 제이나가 작게 속삭였다.
“참 듣기 좋다. 아저씨 심장 소리.”
제이나는 강찬의 힘찬 심장 소리에 그가 살아 있음을 안도하는 것인지 그의 가슴에 조용히 기대어 있었다.
“아저씨가 죽었다면, 난 아마…….”
제이나의 그 작은 몸이 오들오들 떨리며 강찬의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자 강찬은 제이나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느껴졌고, 자신도 모르게 제이나를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제이나에게 속삭였다.
“내가 제이나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야. 만약 그때 제이나가 어떻게 됐다면, 나도 아마…….”
강찬이 뒤를 흐리자 제이나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고개를 빠끔히 들어 강찬을 올려다봤다.
그런 제이나의 얼굴은 눈물 때문에 조금 붓긴 했지만 되레 그런 모습이 엘프인 그녀의 미모를 더욱 빛나게 하는 듯했다.
“살아갈 수 없을 거야. 제이나 없이는.”
강찬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가슴이 시키는 대로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진심 어린 말을 들은 제이나의 표정은 너무나도 행복한 미소로 바뀌며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강찬의 입술과 포갰다.
강찬은 너무 놀라 움찔했지만 너무나도 작고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맞닿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끼며 천천히 그녀와의 입맞춤 속으로 빠져들었다.
23살 여름, 너무도 늦은 그의 첫 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