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Abandoned Reset Life RAW novel - Chapter 230
10권 7화
통통통!
비가 오는 날 처마 밑을 향해 떨어져 돌에 부서지는 빗방울 소리처럼 도마를 빠르게 두드리는 칼질에 식재료가 일정한 크기로 썰린다.
‘대단하다. 이게 40년 경력의 칼질인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할까.
칼질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잘린 식재료가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마치 깎고 갈아서 만드는 유리처럼 말이다.
‘후우. 그럼 나도 시작해 볼까?’
칼을 든 진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세 개의 고깃덩이를 바라보며 눈빛을 서늘하게 가라앉혔다. 그러며 운암정 주방에 온 이후 처음으로 모든 신경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의 몸에서 사납고도 날카로운 기세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스윽!
진호가 가장 먼저 손을 가져간것은 숙성된 소고기였다.
물컹하면서도 차가운 식재료에 시리도록 날카로운 칼을 가져간 진호는 거침없이 갈랐다.
스억! 스억! 스억!
‘칼질은 최대한 적게.’
어차피 곧 다져져 형체를 찾아볼수 없는 식재료라 하여도 그 기본은 지켜야 했다.
숙성된 소고기와 돼지고기, 약간의 촌닭고기를 잘라 낸 진호는 그것들을 아주 잘게 썰기 시작했다.
그러며 후추, 소금 등 윤헌수 숙수가 필요한 조미료를 눈치껏 넘겨주었다.
‘어디까지 먹힐까’에서 황재상 쉐프를 보조하였던 가락이 다시금 폭발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손님께 대접하는 식사라는 생각 때문인지 육감을 포함한 모든 신경이 한계까지 날카롭게 살아났다.
진호는 거의 보지도 않고 보조하고 있었다.
이미 진호의 기세에 한 번 놀랐던 윤헌수 숙수는 다시 놀랐지만, 진호의 신경은 오직 자신의 도마위에 집중되어 있었다.
‘다 썰었네.’
당장 참기름 약간과 소금만 넣어버무려도 날을 새며 술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먹음직스럽게 빛나는 고기들을 본 진호는 흐뭇이 웃으며 칼 한 자루를 더 꺼내 들었다.
양손으로 다지기 위해서다.
탕, 탕, 탕, 탕탕탕탕탕!
엑셀을 최대한 밟는 스포츠카의 배기음 소리처럼, 한바탕 신명이 나는 난타 공연처럼 빠르고 경쾌하게 도마를 두드리는 두 자루의 칼은 세 종류의 고기들을 갈아 버리 듯 다져 갔다.
이내 다져진 고기의 근섬유들이 저들끼리 뭉쳐질 만큼 점성이 생기자, 진호는 그것을 볼에 담아 윤헌수 숙수의 조리대에 두고는 도마와 칼들을 빠르게 닦았다.
그런데 그 눈은 윤헌수 숙수의 도마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 진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할리 없는 윤헌수 숙수는 진호가 다져 놓은 고기를 보곤 강한 갈증을 느꼈다.
‘정말 욕심나는군.’
보조를 완벽하게 해내다 못해 식재료도 완벽하게 다루고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듯이, 본격적으로 보조를 시작한 진호는 여태까지 진짜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게 눈에 보였다.
지금 당장 운암정 주방의 조리대 하나를 맡겨도 될 정도였다.
‘어디…….’
무슨 충동인지 모르지만, 윤헌수는 진호를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전어 회 뜨세요. 뼈 있게. 초무침을 하겠습니다.”
“예!”
마침 도마와 칼을 모두 씻은 진호는 방금 전 새벽이 조리하기 위해 꺼내 놓은 전어들을 가져와 손질을 시작했다.
* * *
후록!
사람이라고는 오직 서버만 있는 운암정의 홀에 홀로 앉아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씁쓸한 녹차로 고픈 속을 달래던 노인은 이내 코끝을 스치는 향기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주방에서 가까워서 그런지 희미하게 풍겨 오는 음식의 냄새가 퍽 군침을 돌게 했기 때문이다.
드르르르륵!
카트를 밀고 온 홀 매니저가 음식을 내려놓았다.
“첫번째 요리는 자연산 송이버섯으로 만든 죽과 가을 별미 꽃게를 올해 처음으로 만든 고춧가루로 버무린 게장입니다.”
말은 게장이지만, 작아서 소박해보이기까지 한 접시에 담긴 건 오직 살 뿐이었다. 홀 매니저가 물러나자 노인은 말없이 젓가락을 들어 게장을 입에 가져갔다.
“……호오.”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게장에 살을 발라 낸 수고를 더한 것뿐이지만, 노인은 다르게 느껴지는 듯 무엇이 그리 만족스러운지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탄을 토해냈다.
그는 게장과 송이죽을 바닥까지 모두 비워 냈고, 바로 다음 요리가 나왔다.
그렇게 노인은 빠르게 음식들을 해치워 갔다.
탁!
디저트인 매실차까지 마신 노인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후우우.”
“식사는 어떠셨는지요.”
“멀리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보람이 있군.”
흐뭇이 웃은 노인은 테이블을 짚으며 일어서 주방으로 향했고, 그에 홀 매니저가 다급히 뒤따랐다.
그러나 홀에 있는 다른 서버들은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 * *
“후우우.”
“후욱! 후욱!”
창영과 새벽이 거친 숨을 몰아쉰다. 그들도 준비를 돕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이다.
둘은 지친 기색 하나도 없이 뒷정리를 마쳐 가는 진호와 윤헌수를 경이롭다는 듯 보았다.
특히나 해맑게 웃고 있는 진호는 더 그렇다는 듯 보았다.
주방을 잠식하다 못해 만지면 바로 주먹이 날아올 것 같았던 사나운 기세는 지금껏 보아 왔던 진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끄으응.”
칼을 본래 있던 자리에 꽂아 넣고, 기지개를 편 진호는 나른하게 웃었다.
‘이제야 좀 몸이 풀리는 것 같네.’
그간 스킬을 해금할 겸 숙수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지만, 극한까지 끌어올린 신경을 1시간이 넘도록 유지한 건 오랜만이었다.
‘하긴 요새 좀 여유롭기는 했지?’
‘우리들의 1987’에서 중국 바둑 대결 신을 찍다가 혼절한 이후로 거의 처음이다. 촬영에 들어갔을 때도 길어야 2, 30분일 뿐, 1시간이 넘도록 끌어올린 신경을 유지 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윤헌수 숙수님의 맛을 50퍼센트는 훔쳤어.’
나머지 50퍼센트는 운암정의 장맛이다.
“……주방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까?”
‘음?’
진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을 건넨 윤헌수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지만, 그가 보내는 신호들이 진호에게 많은 말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인정했다? 아니, 날 욕심내고 있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절로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아직까지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조금 의문이긴 했지만 말이다.
“예전에 황재상 쉐프님과 예능을 찍을 때 보조를 한 적은 있습니다.”
창영과 새벽이 탄성을 터트렸다.
대한민국에서 중식의 대가라 불리는 황재상 쉐프를 그들이 모를리 없었다. 무릇 요리사라면 맛있는 걸 많이 먹어 봐야 하는 존재니 말이다.
“흠. 그렇군요. 이번에 찍을 영화가 한식을 다루는 영화라고요?”
‘어? 이거? 잘하면?’
심장이 크게 뛰었다.
“예! 한식의 멋을…….”
“한식의 멋을 살리는 영화라고 했지. 그것도 서민을 위한 한식의 멋.”
“네. 바로 그거죠…… 어?”
누가 다가오는 걸 알았기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진호는 처음 보는 노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윤헌수와 창영, 새벽은 아니었다.
그들의 낯빛은 돌변했다.
“오셨습니까, 총주방장님.”
“초, 총주방장님!”
“아, 안녕하십니까-!”
주방을 쩌렁쩌렁 울리는 그들의 외침.
“그래, 다들 오랜만이구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넷을 보며 진호는 눈을 부릅떴다.
‘에에엑?’
“창영이와 새벽이 실력이 많이 늘었더구나. 헛걸음을 하지 않은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아무도 없는 운암정의 홀에 윤헌수와 마주 앉은 총주방장 김덕주가 흐뭇하게 웃고 있다.
“……아직 멀었습니다. 오늘 드신 식사의 40퍼센트는 이진호 배우가 했습니다. 또한 요새 맛이 나아졌다는 소문 역시도 이진호 배우가 준 아로마 오일과 향초 덕분입니다.”
“그걸 감안하고 하는 말이다.”
“하나…….”
김덕주는 고개를 저었다.
“막내들의 맛이 그 정도이니 다른 아이들의 맛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아.”
흠칫!
윤헌수 숙수의 무심한 표정에 금이 갔다.
“서, 설마……?”
김덕주는 푸근한 눈빛을 지었다.
“그래, 이제 운암정의 주방은 네가 맡거라. 이 정도면 믿고 맡길수 있겠다.”
쿠당탕!
“……스승님!”
경악에 몸부림을 치다가 겨우 꺼낸 단어.
김덕주는 오랜만에 들어 본 그 단어에 일순간 아련해졌다.
“똑똑한 너라면 지난 2년 동안 내가 운암정을 찾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을 터. 할 수 있겠지?”
정말 말도 안 되지만, 아직도 한참 멀었지만, 이미 스승 김덕주는 생각을 굳힌 듯했다.
그리고 각오를 해서 그런지 경악은 빠르게 잦아들었다.
대신 그 자리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채우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그리고 짐을 지어 주어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그래. 넌 잘해 낼 게다. 자세한 이야기는 곧 날을 잡아서 더 나누자구나.”
“……예.”
후후 웃던 김덕주가 아차하며 물었다.
“그런데 이진호 배우는 어디까지 훔쳤느냐.”
“5할은 훔친 것 같습니다.”
“장맛을 빼곤 다 훔쳤다는 소리군.”
“예.”
“허헛. 재상이와 소희, 구성가의 구정경 사장이 그렇게 혀를 내두르며 칭찬을 하더라니……. 넌 어떠냐, 욕심이 나느냐?”
“그래서 이번 장을 담글 때 동참을 시킬까 합니다.”
“나중…… 아주 먼 훗날을 위하겠다는 거구나.”
윤헌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김덕주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둘은 그렇게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풀어 갔다.
* * *
“우린 언제까지 여기에 대기하고 있어야 할까요.”
진호의 그 질문에 주방에 쪼그려앉아 있던 새벽과 창영이 입맛을 다셨다. 답은 하나다. 윤헌수와 김덕주가 운암정을 나갈 때까지.
“홀 매니저님과 서버 누나들도 휴게실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저벅저벅!
“아직 안 갔군.”
윤헌수가 안으로 들어오자 세 사람은 다시 몸을 바로 했다.
진호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이야기가 길어질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새벽이와 창영이도.”
세 사람은 속으로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아직 윤헌수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진호 씨, 10월 말일에 장을 담글 겁니다.”
진호뿐만 아니라 창영과 새벽도 경악하며 윤헌수를 보았다.
진호는 터져 나오려는 함성을 억지로 누르며 크게 대답했다.
“네-!”
* * *
“와. 여기가…….”
순창 장의 명가의 정경이 이럴까.
저 끝까지 열을 맞추어 줄줄이 늘어선 항아리들이 만든 정경은 일순 진호를 압도시킬 정도였다.
‘역시 운암정 내에 있는 장독들은 전부가 아니었어!’
운암정이 하루에 소비하는 장의 양을 생각하면, 겨우 한 달이나 쓸수 있을까 의심될 만큼 운암정 내에 있는 장독의 숫자는 적었다.
“운암정의 전부인 곳이지. 그래, 옷은 좀 맞는가?”
“아, 예! 총주방장님.”
진호는 전통 방식으로 장을 담글거라며 준 새하얀 삼베옷과 짚신을 보며 싱긋 웃었다.
“어서 장을 담그고 싶네요.”
“허허헛. 따라오게.”
그가 안내한 곳은 황토로 벽을 쌓고 기와를 올린 커다란 공간이었다.
그 안에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수천 개의 메주가 매달려 있었다.
냄새가 얼마나 심한지 눈이 따가 울 정도였다.
“사계절 모든 바람을 맞으며 숙성시킨 된장의 냄새는 어떤가?”
“좋은 말로도 구수하다고 할 수가 없네요.”
“허허헛!”
김덕주뿐만 아니라 먼저 와 있던 다른 숙수 5명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의 앞에는 메주를 쓸 콩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와, 이걸 3일 동안 쓸 콩, 못 쓸콩을 일일이 골라서 메주로 만들다 못해 천장에 달린 메주들로 장까지 만들어야 한다고?’
주방 최고 숙수들이 빠지는 이 3일 동안 운암정은 문을 닫는다.
‘가능해? ……아니,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는구나.’
진호의 눈빛은 삽시간에 달라졌고, 김덕주는 흐뭇이 웃었다.
“콩을 고르는 법을 가르쳐 주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진호는 김덕주의 손에 이끌려 산처럼 쌓인 콩 앞에 앉았고, 그렇게 3일이 흘렀다.
“수고…… 하셨습니다.”
옆에 운석이 떨어져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윤헌수마저도 피로에 절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덕주와 다른 다섯 숙수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장독 옆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진호는 달랐다.
‘아, 해금했다.’
몸속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정확히는 손과 발이 근질거리고 있었다.
“역시 젊음이 좋구만. 그래, 소감은 어떤가?”
“음식을 더 맛있게 만들고,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경험을 하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김덕주와 윤헌수를 비롯한 숙수들은 흐뭇하게 웃었다.
진호는 그런 그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런데…….”
“음?”
“곰팡이가 많이 펴서 빼놓은 메주들을 좀 써도 될까요? 물론 저대로 버리실 거라면요!”
“음?”
“영화 촬영에 쓸 장은 직접 만들고 싶어서요. 가능…… 할까요?”
‘제발 되라. 제발.’
“……흐음. 그런 거라면 아예 장을 빌려줄 수도 있네만.”
“아뇨, 아뇨. 그런 민폐를 끼칠수는 없죠. 빼놓으신 메주면 돼요!”
“으음…….”
서로를 바라본 그들은 숙수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3일 동안 진호가 얼마나 수고를 했는지 알기 때문에 작은 보답을 하려는 것이다. 분명 그들의 입장에선 서툴기 그지없었지만, 그외에 식사나 간식 같은 걸 진호가 책임졌기 때문이다.
한 손이 늘었다고 반나절 일찍 끝낸 점도 있다.
“뭐, 그러시게. 맑고 깊은 장맛을 위해 배제시키긴 했어도 바깥에선 썩 좋은 취급을 받을 테니.”
그렇지 않았다면, 품질이 떨어졌다 생각했으면, 결코 내놓지 않고 폐기시켰을 것이다. 그것은 요리사로서의 자존심이었다.
진호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아자-! 드디어 그걸 만들 수 있는 건가!’
스킬의 주인공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만들어 만인을 감동시킨 장. 거기엔 곰팡이가 핀 메주가 필요했다.
스킬은 아직 얻지 못했지만, 요 며칠 사이 습득한 장을 만든 노하우라면 그 장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태양 여왕의 황금손이 어우러지면?’
상상 이상의 환상적인 장이 탄생할 수도 있었다.
진호는 벌떡 일어나 장을 만드는 곳을 향해 달려갔고, 숙수들은 그모습을 보며 흐뭇이 웃었다.
그렇게 다시 보름이 지난 후, 진호는 스킬을 온전히 습득할 수 있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