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Abandoned Reset Life RAW novel - Chapter 46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2권 21화
가게 주인은 하드 케이스와 기타 줄, 피크, 조율기 등 온갖 물품을 한 아름 챙겨 주었다.
하시마의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외면하며 도착한 공연장엔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기타는 안타깝게도 입구에 맡겨야 했다.
‘조금만 기다려. 곧 연주해 줄게.’
제대로 연주하는 건 한국에서일 테지만, 그래도 빌리브 프로덕션에서 잡아 준 호텔에서도 조금은 연주할 수 있을 것이다.
“하, 내가 이분의 독주회를 듣게 될 줄이야! 정말 팬인데! 이게 다…….”
진호는 안 들리는 척 다미앙을 보았다.
“일본은 어떤 식기가 좋아요?”
진호는 이곳에 여행이 아니라 일을 하러 온 것이다.
이번 촬영에서 진호는 앞으로 혼자 살게 된 하시마 료를 걱정하며 요리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 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브로맨스가 이번 촬영의 핵심이었다.
“식기는 이미 후원 계약을 맺었고, 식재료만 고르시면 됩니다. 정확히는 하시마 씨에게 식재료 고르는 법 등을 가르치시는 겁니다.”
“그거 어려운 건데…….”
박 코흐트와 새벽 시장을 돌며 온갖 잔소리를 들은 기억을 떠올린 진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셰프 레벨이 아니라 일반인 레벨입니다.”
“아, 그러면 쉽죠. 요리도 레시피 대로 가르치면 되고.”
진호는 크게 안심하며 화이트 노이즈 너머의 무대를 보았다. 검은 색 커다란 피아노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저기…….”
“응?”
눈이 마주친 옆 여성이 입을 벌렸다.
“마, 맞죠?”
“……네?”
“이진호 씨, 디올의 뮤즈!”
진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를 아세요?”
“패, 팬이에요! 사인 좀!”
여성이 핸드백에서 잡지 한 권을 꺼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보그 재팬은 이렇게 얇지 않은데?’
표지는 보그 재팬인데 두께가 0.5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됐다.
“당신의 사진집이에요. 팬 사이트에서 나눠 주고 있어요!”
“헐?”
팬 사이트, 팬클럽이란 소리였다.
진호는 당황해서 다미앙을 보았는데 그도 놀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진호의 흥분한 얼굴에 여성의 눈동자가 풀렸다.
팬 사이트는 한국에 만들어졌는데 회원수가 무려 만 명을 넘겼다고 한다. 일본도 저번 도전, 세프의 아바타를 통해 천 명을 넘겼다고 했다. 그간 진호가 찍은 화보나 인터뷰, 몰카 등으로 사진집을 만들어 매달 교부하는데, 배송료만 받는다고 했다.
왠지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뿌듯 하면서도 여태껏 존재여부를 몰라 봐서 미안하기도 했다. 진호는 귀중한 정보를 알려 준 그녀와 사진도 찍고 악수와 포옹도 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한국에 가면 팬클럽부터 가입해야겠네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진호는 씩 웃었다. 좋은 기타도 사고, 팬클럽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참 보람찬 하루였다.
“아, 시작하네요.”
턱시도를 입은 백발의 노인. 우레와 같이 쏟아지는 박수 속에 진호도 박수를 쳤다.
‘거장인가?’
몸을 두른 아우라가 범상치 않았다. 피에트로나 팀 존스를 처음 보았을 때 느낀 압박감과 비교해도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노인이 건반 위에 손을 얹자 진호는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조용히 하라는 강요가 몸짓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몸짓으로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표현의 아득한 차이를 느끼자 호승심이 끓었다. 진호는 뚫어져라 노인을 보았고, 노인의 손은 건반을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눌렀다.
두응!
묵직한 저음이 커다란 공연장을 울리는 순간이었다. 진호는 눈을 부릅떴다.
“……거장 맞구나.”
시작부터 숨을 사로잡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주특, 눈물이 흘렀다.
고독하고도 외로운 절규가 너무도 안타깝고 안쓰러워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진호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옥탑방 스타의 감수성은 기타뿐만이 아니라 피아노, 아니 음악 전체에 통용되는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장이 말하고자 하는 감성과 거장이 연주한 모든 음이 생생하게 기억되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기타로 똑같이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난했기에 악보를 구할 길이 없어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외워야 했던 주인공. 후천적인 노력으로 얻게 된 기억력과 절대음감이었다.
‘전국 수석이 도와주고 있어.’
교양 수업인 음악으로의 여행정 명진 교수가 가르쳐 준 화성학이 피아노의 음표와 코드를 기타의 음표와 코드로 바꾸고 있었다.
두응!
짝짝짝짝짝짝!
가장 먼저 일어난 진호가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쳤고, 이어 다른 사람들도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쳤다.
“하아, 정말 대단한 분이시네요.”
“저는 진호 씨가 뉴에이지에도 조예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 건 잘 모르지만, 저분이 대단하다는 것 정도는 알 것 같아요.”
“하핫. 유키 구라모토, 현대에 손 꼽히는 피아니스트 중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뭐 하십니까?”
“복기요. 아니, 편곡이랄까?”
진호의 양손이 마치 허상으로 만들어진 기타를 연주하는 듯 움직였다.
‘아, 이건 이렇게 표현하는 게 좋겠다.’
거슬린다는 게 아니다. 이상하다는 게 아니다. 그저 지금의 자신에게 맞지 않을 뿐이었다.
연륜의 감성은 젊은이가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맞게 고치면 되는 것이다. 옥탑방 스타의 감수성이 그걸 가능케 하고 있었다.
진호는 신이 나 곡을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외모 때문에 주목을 하게 된 거장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짝짝짝짝짝짝!
마지막 기립 박수를 끝으로 유키 구라모토의 독주회는 끝났다. 진호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해 준 거장과 악수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지인이 아니면 만날 수 없단 말에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 진호는 온 목적대로 마트에 가서 하시마 료에게 식재료 고르는 법을 세심하게 가르쳤다.
“양파는 쥐어 봐서 단단함이 느껴져야 해요. 토마토는 이 정도 색깔과 단단함이…….”
하시마 료는 가르쳐 주는 걸 핸드폰으로 찍고 노트에 적으며 질문도 던졌다.
그렇게 한가득 장을 본 그들은 숙소로 향했다.
응성웅성, 와글와글.
완연한 저녁이 되자 거리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한 아름 커다란 마트 봉지를 든 두 미남자와 캠코더 한 대가 사람들의 시선을 뺏었다.
“숙소는 좋아요? 커요?”
자취 생활. 로망이었다. 술 먹고 늦게 들어가도 혼날 일 없고, 어질러 놓아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 나만의 공간.
“지, 진짱, 아무렇지도 않아?”
왜인지 어깨를 움츠린 하시마 료가 이쪽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눈으로 훑는다. 그제야 몰린 시선을 알아차린 진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는 익숙해서요.”
“진짱은 여러모로 대단하네…….”
“형은 엄살을 떨고요. 아이돌이었던 사람이……. 응?”
어디선가에서 물결쳐 온 피아노 선율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누가 누구나 칠 수 있는 피아노를 치나 보다.”
“누구나 칠 수 있는 피아노요?”
“얼마 전 이 앞의 작은 공원에 생겼는데, 그곳이 원래 이 동네 명물이거든. 뮤지션들이 거리 공연을 하는.”
진호의 눈이 번쩍 떠지는 말이었다.
“우리 구경 가죠!”
진호는 반문은 듣지 않겠다는 듯 그의 손목을 잡고 발을 뗐다.
“어? 어? 너, 넘어져!”
그쪽으로 향할수록 피아노 연주는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현란하고 빨랐다.
‘이런 곡도 있구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고 중간중간 거슬리는 음들도 있어서 썩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단한 ‘속주’였다. 기타로 따라 했다가는 손가락이 망가질 것 같았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이군요.”
“유명한 곡인가 보네요…….”
진호는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빛냈다.
마치 홍대를 연상시키는 모습이 공원에 펼쳐져 있었고, 어떤 사내가 캠코더 마사지를 받으며 허를 한 녹색 피아노의 건반을 두들기고 있었다.
진호는 그걸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새 건데?’
허름한 악기가 낼 수 있는 울림이 아니었다. 거기다 뭇 관중들 사이에 이질적인 존재가 섞여 있었다.
진호는 그제야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의 홍보 방식도 있네요.”
진호는 낯빛이 굳어진 하세가와를 슬쩍 외면했다. 하시마 료는 눈치채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인터넷 방송이 아니었다. 어떤 예비 연예인 혹은 무명의 이슈 만들기였다.
깜짝 놀란 다미앙이 풀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진호 씨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 두뇌일 겁니다.”
따단단!
“와아아아아!”
함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껏 여운에 젖은 얼굴로 일어나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던 남성이 한 곳을 보며 깜짝 놀랐다.
“어? 선생님은?”
남성의 시선을 좇은 사람들은 헛 숨을 삼켰다. 유키 구라모토가 그 곳에 있었다.
유키 구라모토는 옅게 웃으며 계속하라는 손짓을 했고, 남성은 감격한 표정으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번져 갔다.
하지만 거장의 얼굴을 살핀 진호는 순간 의아한 점이 생겼다.
“……설마 모르시는 건가?”
“예?”
“아뇨, 그냥 이 상황을 즐기시는 것 같아서요. 마치 손자의 재롱을 보듯. 캠코더가 있으니 인터넷 방송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젊은이들의 놀이라고요.”
“……설마요.”
“그렇지 않으면 이런 연주에 저렇게 웃으실 수가 없잖아요. 저런분께서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닐 텐데.”
“흠, 가능성이 있군요. 확실히 구라모토 씨는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는 스타일이긴 합니다. 어쩌면 매니저끼리만 이야기를 나눈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일본인은 본인이 죄를 인정해야만 죄가 된다.’
민족성의 차이였다. 다미앙은 속으로 씁쓸히 웃었다.
진호는 순간 거부감이 들었다.
“무조건 저랑 상의하셔야 해요.”
“당연한 말씀을. 진호 씨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신뢰라는 것 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역시 다미앙 씨와 계약한 건 최고의 선택이었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와 동시에 화려함만 가득한 연주가 끝났고, 다시 사람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유키 구라모토는 즐길 건 다 즐겼다는 듯 옅게 웃으며 돌아섰고, 남성도 웃으며 돌아섰다.
진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용당한 것을 깨닫고 씁쓸히 웃을 거장을 떠올리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다고 붙잡아 말할 수는 없었다. 하시마 료에게도 타격이 간다.
“흠…….”
진호는 료를 보았다. 여전히 하얀 낯빛인 그는 사라지는 남성을 부럽다는 듯 보고 있었다.
‘아니, 아이돌이었다는 사람이……. 꿀릴 것도 없구만.’
왠지 화가 났다.
“형, 우리도 공연해 보죠.”
더 이상 거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친구가 된 하시마 료가 더 잘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뭐?”
다미앙과 하세가와도 놀라서 진호를 보았다.
진호는 흩어지기 시작한 사람들을 가리켰다.
“봐요, 형을 홍보하기에 좋은 기회잖아요.”
마틴 000-28EC를 연주하기에도 아주 좋은 기회였다. 패션쇼 때 느낀 그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무대였다.
하세가와의 눈이 빛났다.
“해라, 료.”
“하, 하지만…….”
“수백 관객들 앞에서도 춤추고 노래했던 사람이 왜 이렇게 쫄아 있어요? 실수할까 봐 무서워요? 에이, 그게 뭐 무서워요. 사람인데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안 죽습니다. 안 죽어요.”
진호는 하시마의 손을 잡았다.
“그냥 이 순간을 즐기는 거예요, 형.”
‘……그래, 이러려고 진짱을 부른 게 아니잖아!’
성공하기 위해서 진호를 부른 것이었다. 진호의 외모에 도움을 받기 위해 부른 것이었다.
‘이 멍청한 놈! 이게 어떻게 온 기회인지 알잖아!’
“그래, 하자.”
진호는 환하게 웃었다.
“으흐흐, 탁월한 선택입니다.”
진호는 다미앙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