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Abandoned Reset Life RAW novel - Chapter 61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3권 11화
숍에 들러 머리를 만지고, 대본 리딩장에 도착하니 리딩 시작까지 1시간 정도 남았다.
장경아 실장이 진지한 투로 말했다.
“아마 얼굴만 믿고 들어왔다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심술을 부려 애드리브를 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무작정 깎아 내리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제부터는 저희가 보조할 수 없기 때문에 참고 버티셔야 합니다. 이후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진호는 싱긋 웃었다.
그녀의 절절한 걱정이 참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그런 건 백 스테이지에서도 겪어 봤으니까요. 설마 몸싸움도 불사하는 거기 만큼 치열할까요.”
“하지만…….”
“그럼 리딩이 끝난 후에 뵙겠습니다!”
“예, 진호 씨. 파이팅입니다.”
“네, 다미앙 씨도 장 실장님도 파이팅!”
몸을 돌린 진호는 대본 리딩장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이진호입니다!”
1시간 전이지만, 사람들이 꽤 있었다.
왜인지 벽면에 늘어선 의자에 앉은 그들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진호입니다. 식사 하셨어요? 아, 드셨어요? 그래도 이거 가지고 계시다가 입이 심심 할 때 드세요. 혹시 호두나 밤, 아몬드 해바라기 씨에 알레르기 있으신 거 아니죠?”
“이진호라면 조연인…….”
“옙! 막내아들 박강호입니다! 선배님 이름은 어떻게 되시는지 물어도 될까요?”
“아, 예. 제 이름은…….”
“말 편히 하세요. 한참 후배입니다. 이제 스무 살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손에 놓인 뇌물과 진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얼굴로 캐스팅됐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생각이 박힌 듯싶었다.
‘어디까지 먹힐까에서의 모습이 진실이었나 보네.’
그들의 표정은 밝아졌다.
그렇게 일일이 인사한 진호는 자신의 이름표가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는 얼굴을 가리려는 양손을 초인적으로 눌렀다.
‘매니저가 있다니!’
배우가 아니라 매니저라고 했을 땐 살짝 당황했었다.
자칫 시작부터 흑역사를 만들 뻔 했다.
‘왜 다미앙 씨와 장 실장님이 그 쪽 의자에 앉나 싶더니!’
“후!”
그래도 시작을 잘 연 듯싶었다.
진호는 약간 허름해진 대본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끼익! 열리는 문을 보자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진호의 허리는 이후 쉼 없이 숙여져야 했다.
뇌물을 웃으며 받는 사람도 있었고, 차갑게 외면하는 사람도 있었다. 얼어붙어서 저러다 쓰러지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먼저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그저 서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리딩 10분 전 도착한 주연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우! 선혜. 너무 예뻐진 거 아냐? 갈수록 예뻐져?”
“선배님은 어떻게 주름 하나 안 느세요? 비결이라도 있으세요?”
“호찬아!”
“형님! 아, 선배님들도 안녕하십니까!”
마치 외딴 섬에 갇힌 느낌. 아니 자신만이 다른 공간에 있는 느낌이었지만, 진호는 기죽지 않았다.
‘겨우 이 정도야, 뭐.’
패션쇼 백 스테이지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에 불과했다. 최소한 한국어로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다 TV에서만 보던 이들을 실제로 보게 되어 신기한 것도 있었다. 아니, 이게 더 컸다.
‘김을수 아저씨! 엄마가 만날 죽는다고 아쉬워했는데!’
‘이금화 아줌마! 세상에 저런 쌍…… 아니, 이건 아니지.’
장년 노년 배우는 대충 알겠는데, 다른 젊은 배우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장경아 실장이 배우들의 프로필과 필모그래피를 주긴 했지만, 아 이런 작품도 있었구나 하는 정도일 뿐이었다.
이윽고 박찬성 PD와 김숙경 작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노년의 배우를 제외한 모든 배우가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그래요.”
진호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은 김숙경이 김을수를 보곤 환하게 웃었다.
“을수 오빠, 얼굴 보기 힘들어요?”
“내가 우리 숙경이 작품 안 하면 누가 해? 언제든지 불러 줘.”
“하여튼 말은 잘해.”
“이 얼굴에 말도 못하면 어따 써?”
리딩장에 웃음꽃이 폈다.
박찬성 PD와 김숙경 작가가 자리에 앉자 소음이 사라졌다.
둘은 곧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다 온 것 같으니 인사부터 하고 시작하죠. 아는 사람도 있고, 여기서 처음 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연출을 맡은 박찬성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작가 김숙경이에요. 제 스타일 들어 봐서 아시겠지만, 쓸데없는 애드리브 싫어하는 거 알죠? 잘부탁할게요. 이번 작품 잘 만들어 봐요.”
공기가 쫄깃 조여지는 느낌이었다.
남자주 연 배우가 일어섰다. 듣기로 요새 연기력이 출중한 남자 배우 중 한 명이라고 했다.
“출생의 비밀이 아주 많은 박 과장, 박현재 역할을 맡은 김경호입니다.”
유쾌한 소개였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뭐든지 척척 이선아 역할을 맡은 박혜선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남주라고 착각하는 박현호 역할을 맡은 이승준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아, 아, 안녕하세요. 아, 아, 악녀 최희연 역할의 기, 김혜림 이……입니다. 처, 첫 서브입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우와.’
아까 그, 얼어붙어서 저러다 쓰러지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 사람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어 다른 사람들도 소개를 했다.
그러다 사람들의 시선이 진호에게로 몰렸다.
‘나구나!’
진호가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박 회장님 막내아들 박강호 역할을 맡은 이진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다음 차례가 됐다.
이윽고 모든 사람의 소개가 끝나 자리딩에 들어갔다.
“신 넘버 1. 이직 후 첫 출근하는 박 과장. 회사 로비를 보며 독백한다.”
진호는 김경호를 봤다가 깜짝 놀랐다.
방금까지 유쾌했던 그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눈빛이 서늘하고 사나웠다.
“……드디어 왔네.”
‘흡!’
순식간에 눈과 귀를 뺏겼다.
짧은 대사였지만, 품고 있는 사연이 보통이 아님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주연 배우구나!’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은 당연 하다는 듯한 눈빛을 짓고 있었다.
“눈빛을 수습한 박 과장은 웃으며 로비를 향해 걷는다. 그 순간 옆에서 출근 시간에 늦은 이선아가 자전거를 급하게 몰고 오다 갑자기 나타난 박 과장을 발견한다.”
“어? 어? 비켜요!”
“박 과장 멍청한 표정.”
“잉?”
“다급한 이선아. 본 성격 나온다.”
“비키라고! 이 멍충아!”
“어? 어?”
“우당탕! 비명. 일어난 박 과장.”
“뭡니까! 에이, 똥 밟았네.”
“아야야야. 내가 비키라고 했잖아요!”
“이선아 박 과장의 팔이 부러진 걸 확인한다.”
“어? 파, 팔이?”
“뭐가…… 어라?”
“풋!”
“푸훗!”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진호도 마찬가지였다. 복수의 화신 박 과장은 의외로 허술했다.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신은 계속 진행되었다.
드디어 진호 자신이 나올 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박현호 역할의 이승준이 입을 열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회장님.”
“반가우면서도 미간을 찌푸리는 박 회장.”
“집에선 아버지라고 불러.”
“예, 아버지.”
“앉자.”
“식탁에 앉은 박 회장. 빈자리에 눈살을 찌푸린다.”
“아줌마, 강호는 아직 잡니까?”
“어, 어제 안 들어오셨어요.”
“뭐!”
두근.
이제 곧 등장이었다.
진호는 심호흡을 하며 박강호에게 몰입했다.
‘난 지금 술에 취한 재벌 2세다. 막나가는 철부지 재벌 2세.’
김을수를 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슬그미니 진호에게로 옮겨 왔다.
두근,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보자라는 포식자들의 시선이 심장을 옥죄었다. 선배가 후배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닌 포식자가 피식자를 바라보는 눈빛.
‘얼굴만 믿고 들어온 놈.’
‘작품을 망치지나 않았으면 좋겠네.’
기대하는 박찬성 PD의 눈도 조금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박강호에게 몰입하자 주위 모든 게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멍해지고, 몸에 힘이 빠지며, 입안에서 술맛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머리 한편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오는 박강호.”
‘후읍! 가자!’
“다녀왔습니돠─! 아버지! 엄마! 귀염둥이 막내 왔져요!”
우렁차게 터져 나오는 술주정과 양 볼에 올린 양 주먹.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호를 무시하던 이들도 놀라서 바라봤다.
김을수의 눈도 살짝 흔들렸다. 웅성거림이 생겼다.
“소리치는 박 회장.”
“……야, 인마! 너 뭐 하는 놈이야!”
살짝 타이밍이 늦은 김을수는 만회하려는 듯 더 크게 소리쳤다.
“시간이 몇 신데 이제 들어와!”
“경례하는 박강호.”
“술 마시다 왔습니다! 오늘은 5 차!”
“이 자식이!”
“박 회장이 더 화내기 전에 먼저 화내는 엄마. 다급히 달려와 강호의 엉덩이를 때린다.”
“강호 너 이놈의 자식! 누가 이렇게 늦게 들어오래!”
“아악! 아파! 아프아! 잘못했어요! 흔들지…… 웨엑!”
“꺄악! 어서 올라가!”
“네엥─! 어? 밥이다? 아줌마 나도 밥.”
“혈압 오른 엄마.”
“올라가-!”
“풋.”
“풉.”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김을수와 이금화도 웃음을 참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든 진호는 주위 반응을 보곤 슬그미니 주먹을 쥐었다.
벽에 세워진 의자에 앉아 있던 다미앙과 장경아 실장도 주먹을 쥐었다.
‘됐다!’
“난장판이 된 아침식사. 박 회장 일어난다.”
“저놈 저거 카드 다 잘라 버려! 에이!”
“같이 가시죠, 아버지.”
“회장님이라고 불러!”
“예, 회장님.”
“흥! 오, 오빠.”
“다시.”
“흐, 흥! 오빠.”
“다시!”
“흐흐흥! 오, 오빠!”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불편함을 보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김혜림의 낯빛은 더욱더 질려 갔다. 결국 참다못한 김숙경이 입을 열었다.
“쉬었다 가죠.”
“죄, 죄송합니다! 흑!”
악녀 역할을 맡은 김혜림이 얼굴을 감싸며 리딩장을 뛰쳐나갔다.
‘어이구.’
그녀가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스킬을 얻은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
“옙?”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진호는 깜짝 놀랐다.
끝판왕 시어머니 이금화가 호의 가득한 눈빛을 짓고 있었다.
“우리 아들 정말 술 먹고 들어온 거 아니지?”
“어? 들켰나요?”
은근히 주목하고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저, 정말?”
“술은 아니지만, 사이다 한잔 했습니다!”
진호는 정말 용기 내어 너스레를 떨었다.
“……뭐어? 푸호호호호!”
“하하하하핫! 아주 천성이네, 천성이야!”
김을수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진호는 머리를 긁었다.
“흐흐흐. 감사합니다. 아 그런데 쿠키나 양갱은 입에 좀 맞으세요? 직접 만들어 봤는데, 입맛에 맞을 지 걱정이네요.”
사람들이 다시 놀랐다.
“아니, 직접 만들었다고?”
“선생님. 진호가 어디까지 먹힐까에서 황재상 쉐프의 오른팔로 유명하잖아요. 요리 엄청 잘해요. 뭐 그것 때문에 여자 친구한테 오빤 요리사 역할도 해 놓고 왜 저만큼요리를 못하냐며 쿠사리 좀 먹었죠. 아, 진호라고 불러도 되지?”
가만히 있어도 아우라가 넘쳐흐른다.
정상에서 본 자만이 가지는 아우라. 진호는 한 번 더 이래서 주연 배우를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옙! 편히 불러 주십시오. 이제 스무 살입니다!”
“그래. 형이라고 불러. 그런데 이런 것도 만들 줄 알았어?”
“요리가 취미라서…….”
사람들이 푸근하게 웃었다.
얼굴 잘생기고, 연기도 흠잡을 곳 별로 없이 잘하는데, 요리란 취미 까지 가졌다.
“거기다 한국대 경영학과래요!”
서브 남주 이승준이 외치자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아니, 그래? 아들이 아니라 사위 였어?”
김을수의 눈빛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변했다.
다른 딸 가진 부모들도 마찬가지였다.
“아하하하하.”
“잠깐. 숙경이 너 이래서 얘를 뽑았구나?”
“호호. 들켰나요?”
진호는 조연이지만, 자칫 무거워 질 수 있는 극의 분위기를 환기시켜 줄 감초다.
주연부터 조연까지 중요 배역들 모두 가끔 허술한 면을 보이지만, 진호만큼 감초에 충실한 역할은 없다.
거기다 여주와 더불어 남주의 마음을 흔들 키워드이기도 하다.
제법 중요한 역할이었다.
화려한 출연진에 안심했던 사람들은 더 안심할 수 있었다.
이윽고 눈이 빨간 김혜림이 들어 오자 분위기는 다시 싸늘해졌고, 리딩이 재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