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Broadcast of Murim Returnees RAW novel - Chapter (188)
〈 188화 〉 188 바보 같아
* * *
1.
작디작은 블록으로 쌓아올린 미니어처들의 세계는 모형정원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있다.
작고도 평화로운, 손짓 한 번에 가볍게 꺾고 짓뭉개고 부술 수 있는 하찮은 일상.
미니어처들의 일상은 플레이어의 침공에 몇 번이고 위협받았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굴러 떨어지는.
바닥이 없는 참상.
하지만 대부분의 미니어처들은 금방 해방됐다.
채찍 시뮬레이터는 똥겜.
채찍의 조작감은 극악.
세간의 인식은 그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월드 1284의 미니어처들은 운이 나빴다.
그들의 플레이어는 독종이었다.
채찍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언젠가 다가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막연한 계시로만 여겼던.
종말의 그날마저 도래하였으니까.
[최종임무LAST TASK]처음 겪는 재앙임에도 어디선가 겪어본 것처럼 기시감이 드는, 거대한 플레이어의 침공에 맞서 전 인류가 영웅을 갈망하는 성소.
검사의 성소Swordman’s Sanctuary
무희의 성소Dancer’s Sanctuary
기사의 성소Knight’s Sanctuary
궁수의 성소Archer’s Sanctuary
전 인류가 사대성소에 모여들어 한 마음 한뜻으로 기도를 올린다.
종말을 알리는 검은 재와 믿음의 힘으로 벼린 하얀 재가 겹쳐 내리는, 흑백으로 물들어가며 진동하는 세상.
영웅들이 종말의 거인과 맞서는 진동이.
성소가 흔들리며 부서지는 굉음이.
미니어처들의 절박함을 부추긴다.
간절함은 부족했으나.
절박함은 충분하였던.
세상의 끝에 영웅을 바란 미니어처 인류.
그들의 기도가.
그들의 소망이.
세계멸망의 일보직전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영웅을 탄생시켰다.
[( ·_·)]궁수 미니어처.
제일 먼저 각성을 마친 그가 이계에서 넘어온 전설의 활을 쥐었다.
수백 발의 화살을 연달아 쏘아 보낼 수 있는 연사의 궁극에 달한 활.
머신건.
방아쇠를 누르는 것만으로도 활을 힘껏 당길 때의 위력이 연달아 터져나간다.
두두두두두
저 거대한 거인이 뒷걸음질을 칠 정도로 대단한 위력의 공세.
이 활이라면 할 수 있다.
저 거인을 미니어처계에서, 인간들의 세계에서 구축해낼 수 있다.
그런 믿음이.
그런 확신이.
머신건의 반동을 미니어처의 작은 몸으로도 견뎌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쓰러져라.
쓰러져라.
쓰러져라!
간절히 바라고 염원하여도.
거인은 쓰러지지 않았다.
내성 성문.
왕국수도에 있어야 할 그것이.
기사 미니어처가 다뤘던 그것이.
저 거인의 앞에 있기 때문이다.
[( )]궁수 미니어처의 덧없는 사격과 달리.
효율적인 파괴를 이어나가는 거인의 채찍.
각성이 끝나고 셋이 남았던 그들은.
방패를 부수니 둘이 되었다.
[(?_?)]혼자는 안 된다.
기회가 있다면 지금밖에 없다.
두두두두두!
[10HP] [10HP] [10HP] [10HP] [10HP]급속도로 줄어드는 거인의 체력.
거인은 방어를 하지 않았다.
전속력으로 검사 미니어처를 가격할 뿐.
쓰러지기 전에 먼저 쓰러뜨린다.
그런 거인의 악의에 찬 채찍질 앞에.
[() …]기사, 무희에 이어 검사가 쓰러졌다.
모든 동료가 쓰러지고 홀로 남겨진 궁수.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저 교활한 거인이 어째서 자신만 남겨뒀는지.
성소를 부수지 않고 영웅들만을 노렸는지.
[궁수 미니어처] [영웅각성 완료] [HERO POINT 1000% (1000/100)]이미 한계까지 가득 찬 HP.
이를 강제로 비집고 들어오는 믿음.
전 인류가 그에게 매달리는 무게.
[HERO P□IN□ 1751% (1751/100)]그 가혹한 부담이 근육을 파열시키고.
뼈를 부러뜨리며.
[HERO □□IN□ 4124% (4124/100)]신체를 붕괴시켰다.
[HE□□ □□□□□ □□□□□% (□□□□□/100)]단 한 명의 영웅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웠던 사명.
막대한 책임에서 비롯된 무게가 궁수 미니어처의 죽음을 초래했으니.
더는 누구도 지키지 않는 성소는 거대한 공동묘지로 전락하며, 세계의 끝을 맞이한다.
[최종임무LAST TASK 클리어]그것이 채찍 시뮬레이터 월드 1284의 최후였다.
2.
해냈다.
열 번을 도전해도 부족할 난이도였지만.
한계 이상으로 향상된 집중력이.
지혜와 본능을 넘어선 오성이.
이소혜에게 5트째의 공략을 성공하도록 도왔다.
“내가 빨랐어?!”
기대에 벅찬 이소혜의 물음.
그 천진한 물음에 시청자들은 아쉬움을 표했다.
ㅠㅠㅠ
ㄲㅂ
졌지만 잘 싸웠다
【기록경쟁】
①묵언검객 : 70번 임무 Clear, 44분 43초]
②이소혜 : 70번 임무 Clear, 44분 45초]
내기의 승패를 가른 시간은 불과 2초였다.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이후.
이소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방송을 껐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넋 나간 채로 캡슐 밖에 나와 허탈한 얼굴로 담벼락에 기대어 설 뿐.
[수고했어요]쪽지와 함께 건네진 생수병을 들고 멍하니 서있자니, 손가락이 허리를 쿡 찔렀다.
“하지 마. 기분 싱숭생숭하단 말야.”
해응응은 얌전히 손가락을 도로 물리고는 이소혜의 옆에서 담벼락 위에 걸터앉았다.
시야 한쪽에서 흔들거리는 묵언검객의 다리를 애써 외면한 채, 생수병을 깔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간신히 입이 열린 것은 하늘에 펼쳐진 구름이 시야 끝까지 밀려난 뒤였다.
“이렇게 바로 나와도 되는 거야? 좀 더 시청자들하고 있어야지. 컨텐츠도 좋았는데.”
[지금은 여기에 있고 싶었어요]“악질이네.”
이럴 땐 속 시원하게 미워할 수 있도록 자리라도 비켜주면 좋을 텐데.
승부에서 이긴 걸로도 모자라 착한 사람까지 되고 싶다는 건가.
그런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미웠다.
그렇게 느끼는 자신은 더욱 싫었다.
끝내 패배한 자신이 제일 원망스러웠다.
“쭉 생각했어. 널 상대로 이런 팽팽한 대결을 펼칠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고.”
[재대결 신청이라면 언제든지 받아줄게요.]“바보야.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내가 강해지는 속도 이상으로 네가 강해지니까 그렇지.”
놓쳐버렸다.
묵언검객을 이길 수 있던 유일무이한 기회를.
말도 안 나올 정도로 분했다.
[이 정도까지 해낸 것도 대단한 일이에요.]그런 그녀를.
묵언검객은 타이르듯이 어르고 달랬다.
[저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 사람은 다시는 없을지도 모르니까요.]“말도 안 되는 소릴. 스피드마스터 같은 괴물들 게임영상은 보기나 했어? 나 같은 거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그럼 그때는 제가 훨씬 더 강해져있겠죠.]“아니거든? 스피드마스터 짱 쎄거든?”
[제가 더 짱짱 쎄요.]어린 애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헛웃음을 지으며 담벼락에 기댄 등을 뗀 이소혜가 빙글 몸을 돌렸다.
“그렇게까지 호언장담 했으니 약속은 무조건 지켜. 한 입으로 두 말하면 남자도 아니야.”
[…저 남자 아닌데요?]“웃기고 있네. 게임 하는 폼만 봐서는 상남자가 따로 없으면서.”
해응응은 이소혜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감정을 꾹 눌러 삼킨 채.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는 눈망울.
‘꼭 대결에서 진 무림인 같은 표정이네요.’
승부욕이 강한만큼 상심 또한 크다.
이소혜의 승부욕은 이미 어엿한 무림인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이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특했다.
[그럼 오늘만이에요.]담벼락에서 사뿐히 내려와 그녀에게 다가선다.
놀란 눈으로 뒷걸음질 치는 이소혜.
그런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뭐하는 거야?”
[오늘만 해주는 남자의 격려에요.]“바보 같아.”
눈에 힘을 주며 해응응을 노려보던 이소혜.
독기어린 시선도 잠시.
자신보다 작은 해응응이 어떻게 머리를 짚고 있나 싶더라니, 발뒤꿈치를 들고 있음을 눈치 챘다.
그런 적 없는 척 시치미를 뚝 떼는 모습까지 어쩜 이리도 황당하고 얄미운지.
“진짜 바보 같아.”
힘 풀린 눈으로 입을 꾹 다문 이소혜.
어디 고생해보라며 잠자코 머리를 문지르는 손길을 받아들이며 서있었다.
푸른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도록.
선선한 바람이 차갑게 볼을 할퀴도록.
늦은 저녁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도록.
발을 들지 않아도 편하게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게 무릎 굽힌 자신을 깨닫기 전까지.
‘뭐하고 있는 거야, 나도.’
이소혜가 슬그머니 해응응의 팔을 밀었다.
“언제까지 서있을 셈이야?”
[앉아서 받고 싶나요?]“내 몸은 누구처럼 괴물같이 튼튼하지 않아. 감기 걸린다고. 바보.”
[딱밤 한 대만 때려도 되나요?]이소혜가 낼름 혀를 내밀며 메롱을 하고는 뒤돌아 달렸다.
‘기운을 차린 건 다행이지만……. 역시 한 대 때려주고 싶네요.’
부르르 우는 주먹을 애써 참는 해응응.
그녀는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이소혜의 고개 숙인 얼굴.
오만가지 감정이 묻어나는 얼굴은 이미 저물었던 노을의 색을 띄고 있었다.
3.
“그래서 도대체 뭔 짓을 했던 거야?”
집에 돌아와 영상을 킨 이소혜.
그녀는 해응응의 최종미션을 보고는, 멍하니 입을 벌리며 중얼거렸다.
“미쳤네, 진짜.”
졌다고 억울했던 마음이 저절로 싹 사라지는 정신 나간 대격돌이 펼쳐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