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Broadcast of Murim Returnees RAW novel - Chapter (56)
〈 56화 〉 56 마지막 자비에요
* * *
1.
거울을 되찾고 돌아온 알현실.
묵언검객은 자신을 기다리던 왕자와 마주했다.
제가 흘린 피와
뒤집어쓴 왕비의 피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몰골.
소매로 훔쳐낸 핏자국이
얼굴에 뚜렷이 남은 그가
묵언검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까는 이성을 잃은 나머지 어머님께 심한 말을 해버렸습니다.”
어머니라.
아직도 그 얄팍한 관계를 고수하는 건가.
그렇게 말하듯이
밀짚모자의 챙을 고쳐 잡는 묵언검객.
낮게 가라앉은 그녀의 눈에는
지금껏 그녀가 왕자에게 품어왔던
속죄와 모성의 감정 따위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다.
“어머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소자에게 마음이 상하신 것은 이해하지만 부디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왕자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궁궐의 권력자가 모두 사라진 지금, 요계의 권력은 제 손 안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요계에서 어머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드릴 수 있습니다.”
한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자신감.
최고권력자가 된 그에게는
얻지 못할 사람이 없고
갖지 못할 보물이 없다.
묵언검객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기꺼이 내어줄 수 있다.
철컥.
“어머니?”
그녀가 그를 거절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귀, 귀부인. 정녕 끝을 보실 겁니까?”
“….”
“으허헉! 죄, 죄송합니다. 주제 넘는 소리를 했습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 강을 건넌 것이
왕자였는지, 묵언검객이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묵언검객이 검을 쥐었고
왕자가 그 검의 경계대상이라는 것.
“…어머님. 어찌하여 소자를 배척하십니까? 저입니다. 부디 제게서 효를 행할 기회를 앗아가지 말아주십시오.”
검을 쥔 채 걸음을 내딛는 묵언검객.
보이지 않지만
선명하게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그녀만의 검의 영역이
걸음을 따라 이동한다.
“이제 더러운 골목에서 숨죽이며 적의 뒤를 노리지 않아도 됩니다. 피로 몸을 씻는 대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습니다.”
“달콤한 간식도, 오래된 보물도, 부드러운 옷도 원하는 건 전부 드릴 수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시든 분부만 하시면 전부 가져다드릴 수 있단 말입니다!”
묵언검객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불현 듯 왕자의 인생에 끼어들 때와 마찬가지로
제 걸음을 유지하며 멀어질 뿐.
여기서 헤어지면 영영 남이 되고 만다.
그 사실을 왕자는 뒤늦게 깨달았다.
“제발 이런 식으로 떠나지는 말아주십시오. 어머님께 드리고 싶은 것들이 잔뜩 남았단 말입니다.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이 넘쳐난단 말입니다!”
진정성 넘치는 호소.
첫 만남과 같은 애달픈 표정.
그때와 달라진 것은 마음.
저 간절함을.
저 애절함을.
더는 무림에서의 기억과 겹쳐볼 수 없게 되었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배신한 사람은 두 번도 배신할 수 있죠. 다음은 더욱 중대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도 상처받는 건 그녀가 되니까.
험난한 무림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살아온 인생이고
그녀가 거쳐 왔던 무인의 인생.
“요계가 망한다 한들 걱정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인계에서 살아가기에 충분한 재산과 부하들을 챙긴다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그만하시지요, 왕자님. 이러다가 경을 치르십니다. 귀부인께서는 정말로 베실 겁니다.”
“마가놈! 당장 어머님을 말리지 않고 무얼 하는 것이냐. 너도 어머님을 따라 내게서 떠날 작정이냐? 네가 바라던 다시는 목숨이 위협받지 않을 권력을 눈앞에서 버리겠단 말이냐!”
묵언검객의 영역 안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따르던 마가놈이
흠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 그것은…….”
“남지 않는다면 네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가놈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지난 삼일 간.
그는 늘 머릿속으로 홀로 꿈꿔왔었다.
왕자가 아닌 자신이
귀부인의 곁에서 그녀를 모시고
그녀의 아이가 되어 보호받는 나날을.
왕자가 누리던 모든 것을 자신이 누리고
왕자가 해주었던 모든 것을 그가 해주는
왕자가 아닌 마가놈 자신이
묵언검객의 애정을 받고 싶다는 갈망!
그 남 모를 음습한 소망이 이루어질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그는 망설였다.
인생역전.
맹귀부목.
바닥을 기는 비렁뱅이처럼 비참했던 인생이
눈먼 거북이가 우연히 뜬 나무를 붙잡듯이
어쩌면 그의 인생에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유일무이한 기회.
‘이분을 곁에서 모시고 싶다는 소망 하나 때문에 그 모든 기회를 내려놓을 수 있는가?’
마가놈의 걸음이 멈췄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묵언검객의 뒤에서
그녀를 향해 절을 올리는 소리가 들려도
그녀는 멈춰 서지도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마가놈이 자신을 따르는 대신
안정적인 성공을 누릴 수 있는
권력을 선택한 것을
비겁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곳은 요계.
힘없는 인간은 가축이나 식량 취급을 당하는
축생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세상.
마가놈은 충분히 힘겨운 삶을 살아왔고
그에게는 권력을 잡을 이유가
그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보십시오, 어머님. 어머님을 보필할 마가놈 또한 제 곁을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야만의 세계에서 홀몸으로 어딜 가실 수 있겠습니까?”
“다 끝났습니다. 제 손을 잡고 왕비의 서관으로 가시지요. 제가 모셔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가 왕자를 따라갈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카앙!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걸음을 방해하는 왕자를 향해 휘두르는 검.
그 검을 웬디고의 팔이 받아쳤다.
“왕자, 물러서다.”
“…정녕. 소자를 거절하시는 것입니까? 어머님을 위해 제가 드리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없단 말입니까?!”
“위험하다, 왕자. 인간, 정말로 벤다.”
웬디고는 실감했다.
요계최강의 요괴장군 빅트로를 해치운
인계최강의 검이 얼마나 대단한지.
하지만 동시에 깨달았다.
그만한 격전을 치르고도 아무 피해가 없을 만큼
그녀가 무사하진 못하다는 사실을.
“명령을 내려라. 인간을 죽이라고.”
“웬디고! 어머님을 죽이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것이냐!”
“여기서 보내면 적이 된다. 약할 때 죽인다. 그것이 요계의 상식. 틀렸나?”
왕자의 눈이 거칠게 떨렸다.
웬디고의 말이 맞았다.
이대로 묵언검객이 요계를 떠난다면
그녀의 행보를 돌이켜보았을 때
반요나 요괴인 자신들과 적이 되는 수순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 바.
저지른다면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인계최강을 쓰러뜨릴 절호의 기회 따위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어차피 어머님은 두 번 다시 나를 사랑해주시지 않을 것이다. 결코 나를 용서해주시도 않겠지.’
잠깐이나마 서로를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여겼던
왕자와 묵언검객, 그 두 사람이기에.
왕자는 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묵언검객이 어떤 사람인지를.
웬디고의 말이 옳다.
어머니도 결국은 인간.
인간이 아니라도 저런 싸움을 벌인 뒤라면
어느 때보다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너를… 어머니라고 불러도 되겠는가?
부디 이 옥비녀를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머님.
어머님?
저는 어머님을 믿습니다.
하지만 쌓아온 시간의 무게가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관계를 향한 미련이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주었던
모성애를 향한 감사함이
어리석은 짓임을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남자의 순정이
마지막 일선을 넘지 못하게 붙들었다.
“보내드려라.”
“후회할 것이다, 왕자.”
알고 있다. 물론 후회하겠지.
그렇기에 더욱
두 번은 되풀이할 수 없다.
“전부 내 어리석음이 자아낸 결과인 것을, 어찌 어머니를 탓할 수 있으랴.”
쓸쓸이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왕자의 시선을 무시한 채
묵언검객은 왕비의 차원문 앞에 섰다.
이 문 너머
반요곡의 인계가 기다리고 있다.
“…….”
요계의 유일무이한 권력자가 될 왕자.
그를 이대로 두고 떠나는 것이
과연 옳은 결정일까.
그녀의 안에서
강렬한 살인충동이 일어났다.
죽이세요.
후환은 배제해야만 해요.
한 순간의 정 때문에 죽어나간 고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굳이 재차 헤아려야만 하나요?
본능적인 속삭임.
그것이 옳다는 사실을 묵언검객은 알고 있다.
벼랑 끝에 선 요계에 나타난 유일한 통치자.
요괴왕의 피를 이은 정당한 왕위계승자.
그의 곁을 지키는 투사팀의 면면들을 감안하면
그가 차기 요괴왕이 되어
요계를 통일하고
언젠가 인계로 넘어올지도 모른다는 것쯤은
차갑게 식은 가슴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어머니.
잠시나마 봄철의 따스한 햇살 아래서
부드럽게 녹아내렸던
간질거리는 감각을 기억하기에.
겨울철 거울처럼 뿌옇게 성에가 낀
울퉁불퉁 얼어붙은
차디찬 마음을 되찾고도
겨울바람이 차다고 봄바람을 잊지는 않았다.
‘마지막 자비에요.’
묵언검객이 아닌 해응응으로써.
그녀는 왕자를 베지 않고 차원문에 몸을 실었다.
2.
묵언검객이 떠나간 차원문.
인계와 이어지는 게이트를 앞둔 그에게
마가놈이 물었다.
“따라가실 겁니까?”
“…그런다고 어머님의 뜻이 바뀌지는 않겠지.”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되었다.”
왕자는 힘없이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격전의 여파로 들어 엎어진 대리석바닥.
그 밑의 흙바닥을 보니
어느덧 그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하나의 단어를 적고 있었다.
??
혹독한 세상풍파에 떠는 몸을 덮을
옷이 되어주고
혼자서는 설 수 없는 앙상한 가지를 잡아줄
손이 되어주겠다던
어머니의 마음을 담은
뜻 깊은 내력을 지닌 그 글자, 의지.
“그래….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는데.”
하다못해 그가 복수가 아닌
어머님을 향한 사과를 우선시 했더라면.
저 매정한 마음이
달라졌을지도 몰랐겠지만.
이제는 늦었다.
어머니를 잃은 대신에
그는 요계의 유일무이한 권력자가 되었으니까.
이 권력에 그만한 가치는 있는가.
마가놈은 그렇다고 여겼지만
왕자는 알 수 없었다.
진정으로 알 수 없었다.
“저… 그리고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꼭 지금 해야만 하는 말인가?”
“부기맨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귀부인보다 먼저 인계로 떠난 것 같습니다.”
속모를 녀석은 마지막까지도 제 멋대로 떠났군.
화가 치밀어오를 법도 하건만
왕자는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디 가서 당하실 분은 아니지만 우리 중 하나는 인계로 떠났으니, 그분께서도 혼자가 되지는 않으시겠구나.”
부기맨은 투사팀에서도 묵언검객 다음 가던
암묵적인 2인자.
그가 함께 한다면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부탁하마, 부기맨. 언젠가 다시금 어머님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네가 그분의 곁을 지켜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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