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Broadcast of Murim Returnees RAW novel - Chapter (58)
〈 58화 〉 58 옷쇼핑
* * *
1.
영업시간이 끝난 뮤지컬 스타디움.
형형색색의 조명과 함께 빛나는 분수대를 보며
주아영은 물에 비친 제 모습을 쳐다봤다.
앞머리는 잘 정돈됐는지.
옷에 구김은 없는지.
데이트라도 나서는 것처럼 열심인 그녀의 모습에
오늘도 남자 한 명이 다가왔다.
“저 초면에 이런 말씀은 안 드리는 편인데”
“저 만나는 사람 있어요.”
“아.”
퇴짜 맞은 남자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쓸쓸히 밤거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남자보다는 언니한테 관심을 받으면 좋을 텐데.’
주아영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며칠이고 문자 한 통도 없는 매정한 언니.
자신만 언니가 좋아 죽는 건 아닌지
불안감이 들 때마다
괜스레 속상해지고 뭐든 때리고 싶었다.
때마침 그녀의 눈에 띄는 분수대의 물줄기.
딱밤이라도 놓을 것처럼
엄지 위에 말아 올린 중지에
힘을 꾹 싣고 분풀이를 하려고 했다.
“어?”
갑자기 등 뒤에서 불쑥 내밀어진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아 뒤로 당겼다.
화아악
쏴아아아아
잠시 수그러들었던 물줄기가
한층 더 세차게 물줄기를 뿜으며
그녀가 팔을 내밀던 자리를 흠뻑 적셨다.
“언니?”
[그러다 옷 젖어요.]“앞으론 종종 이러고 있을까 봐요. 저 방금 엄청 설렌 거 알아요?”
오랜만에 본 해응응은
변함없이 차분하고 아름다우며 멋있기까지 했다.
홱.
그녀의 솔직한 찬사에도
바보 같은 소리는 말라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는 해응응.
“진짠데…….”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리기도 잠시.
주아영은 자연스레 해응응의 팔에 매달리듯이
바짝 붙어서 팔짱을 꼈다.
“저 오늘 진짜 벼르고 왔거든요? 풀셋으로 다 맞춰드리기 전에는 집에 안 보낼 거예요.”
[그건 좀 참아주세요]“어떡할까나. 언니 하는 거 봐서? 흐흫. 일찍 집에 가고 싶으면 오늘은 저한테 잘 보이시란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언니를 이겨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
주아영의 그런 적극성이 해응응은 싫지 않았다.
2.
“짜자잔. 어때요? 여기 옷가게 분위기.”
맵시 있는 얇은 옷과 몸 선이 돋보이는 의복들.
마네킹에 입힌 옷 중 뭘 고르더라도
언니라면 전부 소화할 거라고 믿는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치던 주아영에게
해응응은 청천벽력 같은 답변을 돌려주었다.
[얇아서 싫어요.]“네에에? 다시 생각해보면 안 돼요? 언니는 몸매도 좋잖아요. 분명 입으면 패션모델처럼 잘 어울릴 거라고요. 네?”
주아영이 소개해준 옷가게는
해응응의 눈에도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옷의 아름다움을 평가하는 심미안은
하오문의 기녀수업과
황궁의 후궁수업을 겪으며
원치 않아도 길러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어떤 옷이 제 몸에 문제가 되는지도 알게 되었죠.’
옷의 재질이 얇은 옷은 최악이다.
반투명하거나 노출이 있는 옷도 위험하다.
한동안은 신경 쓸 일이 없었지만
옷가게에 오고 나서야 뒤늦게 떠오른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금제가 있는 탓이다.
【금제】
[영구문신(하복부)] 당신의 하복부에는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자궁문신이 새겨져있다.내공을 운용하면 자주색으로 빛나는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혼자만의 비밀.
‘무림계에서는 혼자만의 비밀은 아니었지만요.’
천하제일미녀를 하오문의 기녀로 기르겠다며
단단히 벼르던 하오문주가
튼살이나 체형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보겠다며
그녀의 나신을 처음 보았던 날,
어찌나 놀랐던지.
해남파의 제자가
문파에서 문신이 새겨질 리도 없었는데
떡하니 하복부에 문신이 새겨져 있으니
그 까칠했던 하오문주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동정심을 보였다.
어쩌다가 이런 문신이 생겼느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해남파에 들기 전의 일은. 그 또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림비망록에 떨어진 거의 직후에
해남파에 거두어진 그녀에게
그 이전의 기억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미친년 취급을 받고 싶지 않은 이상
현실세계의 일을 이야기할 수도 없지 않은가.
덕분에 하오문주는
그녀의 인생역경과 우여곡절을
본인의 상상으로 가득 채우고는
하오문 내에서 가해지는
부당한 핍박과 견제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고자
그녀를 자신의 수제자 후보라고 공언했다.
‘그때 그시절에는 가당찮은 가식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면 생각이 달라지네요.’
하오문주가 해남파의 재정을 압박하여
그녀를 반강제로 하오문에 끌고 간 일만큼은
결코 용서할 수 없지만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제외하면
언제나 그녀의 뒤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며
구음절맥으로부터도 그녀를 지켜내고자 했던
하오문주의 진심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면 지옥 같던 나날도 이처럼 다르게 보일 수가 있군요.’
현실세계에서는 가족을 잃고
무림계에서는 또 다른 가족이라 여겼던
해남파와 생이별을 하며
복수심과 원한을 불태웠던 해응응.
그 어린 시절의 그녀와
현실세계로 귀환해 다시금 젊음을 되찾은
보다 성숙한 정신을 지닌 지금의 그녀는
신체연령은 같아도 정신연령은 확연히 달랐다.
남자였을 적.
무림인이었을 적.
귀환자가 된 지금.
세 번이나 어른이 된 몸이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정으로 어른이 된 건 이번이 처음인 건 아닐까요.’
그런 어른스러운 성찰과 함께
피팅룸에서 나온 해응응을 반긴 것은
“와! 제 말이 맞았죠? 이건 무조건 어울릴 수밖에 없다니깐요? 언니 정말 이쁘시다. 파스텔 톤도 입혀보고 싶으니까 다음엔 이거 입어봐요!”
주아영의 정신없는 칭찬과
그녀가 미리 코디세팅을 끝마치고
자동화 레일 위에 올라온 시착의상 10세트였다.
[방금은 7세트 아니었나요?]“자꾸 입히고 싶은 옷이 늘어나는 걸 어떡해요! 추가요금도 내고 두 세트 늘렸으니까 빨리 입어봐요, 언니. 네?”
돈도 안 내고 주구장창 옷만 갈아입는다면
점원의 눈치가 보인다는 핑계라도 대었을 것을.
점원 없이도 버튼클릭 몇 번으로
자동화레일을 따라 시착의상이 피팅룸에 모이는
2050년의 현대문물은
반요곡의 인계최강자 해응응이라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제 사정에 맞춰서 길고 두꺼운 의상 위주로 추천을 해주는 건 고맙지만요.’
그 고마움도 입어야 할 옷이 줄을 서기 시작하면
어쩐지 피로와의 싸움이 되어버린다.
요괴와의 싸움에서도
이렇게까지 기진맥진하지는 않았건만.
몸이 힘들어서 그런지
해응응은 자꾸만 옛일들이 떠올랐다.
오늘부터 해응응 님의 후궁생활을 돕고자 배속된 궁녀 초희라고 하옵니다.
옷은 무사복이면 충분하시다니요. 후궁의 몸가짐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 너절한 옷쪼가리만큼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분홍색 치파오가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그 옷은 사복으로 입으시고 궁중예절에 맞는 적남백흑홍색의 옷을 고르셔야 합니다.
입으면 안 될 것은 무엇이 그리도 많고
지켜야 할 예절도 어찌나 많던지.
옷 하나를 고르는데도
옷의 재질과 유래, 예절과 전통을 따지던
깐깐했던 궁녀, 초희.
그녀의 깐깐함을 떠올리면
주아영의 옷쇼핑도 어떻게든 견뎌볼 수 있었다.
“언니 죄송해요. 저만 너무 신난 건 아니죠?”
[저도 좋아요.]“와 다행이다. 힘드시면 이쯤에서 그만하고 야식이나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그럼 세 세트만 더 맞춰드릴게요!”
헬스 트레이너냐고.
피팅룸으로 돌아가는 해응응의 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3.
옷쇼핑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주아영은 조금 심술이 났다.
“또 안 돼요?”
[미안해요.]무슨 이유에서인지 열심히 고른 옷을
한 번 입어보지도 않고 연달아 거절하는 해응응.
10분가량을 옷 한 벌도 입어보질 않고
헛고생만 계속하니
주아영의 입술만 댓 발 나왔다.
“언니, 안 되는 옷이 정확히 뭐에요?”
[얇거나 짧은 옷은 전부 안 돼요.]“그럼 이 스웨터는요? 한 번 만져보세요.”
[속살이 보여서 입을 수 없어요.]“무조건 두껍고 노출 없는 온 몸을 칭칭 뒤덮는 옷이어야만 한다는 거죠?”
해응응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아영은 아쉬움 가득한 얼굴을 하다가
퇴짜 맞은 옷들을 옷걸이에 걸었다.
“사극복장을 평상복으로 입고 다니실 때에 눈치 챘어야 했는데. 언니 진짜 보수적인 거 아시죠? 진짜 조선시대 궁궐에서도 이렇게 깐깐하진 않을 거예요. 완전 유교녀.”
“…”
“뭐 그래도 옷은 본인 취향이니까요. 오늘은 언니를 위해 옷을 맞추러 왔으니 제가 맞춰야죠. 이 옷은 어때요?”
속살은 하나도 안 보이고
재질도 두꺼운데다가
색깔도 살짝 어두워서 마음에 안 드는 남색에
입으면 살짝 뚱뚱해보여서 별로다 싶은
평상시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브이넥 네이비블루 폴라 니트.
그녀가 이 옷을 싫어할 모든 기준들은
해응응에게는 이 옷을 골라야 할 이유가 되어
오늘의 옷쇼핑에서
처음으로 [입어볼게요]라는 필담을 이끌어내었다.
“어울리려나?”
해응응이 평상시에 입고 다니는 무사복도
우중충한 색상에 두터운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흔치 않은 사극복장과
이를 받쳐주는 미모에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가 방점을 찍으니
해응응만의 고유한 패션센스가 되었다.
‘그래도 사극컨셉이 깨지면 지금처럼 옷이 잘 살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피팅품 외부 디스플레이 패널의
표시가 로 바뀌며
조금은 수줍은 듯
주춤주춤 걸어 나오는 해응응.
“와”
무어가 그리도 부끄러운지
자꾸만 복부를 내려다보며 불안해하는
낯선 옷에 적응을 못하는 모습.
퍽 우습게도 보일 수 있는 그 모습마저도
치수를 몰라 넉넉하게 고른 사이즈와 어우러지며
품이 넓은 폴라티에 휘감긴
마치 어른의 옷을 빌려 입은 소녀 같은
기묘한 배덕감을 선사했다.
“언니, 이것도 입어 봐요.”
네이비 색 상의에 조화롭게 어울리는
베이지 색 롱 와이드 팬츠.
언니만 떠올리면
연관검색어처럼 자동으로 생각나는
사극녀라는 단어가 거짓말처럼 쏙 사라질 만큼
그녀는 품이 넓은 폴라 티의 매력을
100% 살려냈다.
드르륵
미닫이형 문을 열며
조심스레 바지춤을 잡아당기며 나오는 언니.
“언니 솔직히 말해봐요. 모델알바 해봤죠?”
폴라 티에 와이드 팬츠 한 세트만으로도
각 잡고 촬영하는 패션모델 뺨치는
옷을 살려냈다는 표현에 부족함이 없을 옷태.
마치 주인이 억지로 입힌 옷을
벗고 싶어 발버둥치는 애완동물처럼
자꾸만 옷을 내려다보거나
몸을 안절부절 못하거나
복부 위를 손으로 꾹 누르는가 싶으면
바지춤을 자꾸만 복부로 끌어올리는 언니.
“풋. 그렇게 입으시면 안 돼요. 너무 올려 입으셨잖아요. 사이즈가 너무 크다 싶어서 불안하시면 허리의 고무줄을 당기세요. 이렇게.”
하복부까지 끌어올려 회음부가 도드라지는
약간 민망한 차림의 와이드 팬츠를
골반 높이로 끌어내리고자 손을 뻗는 주아영.
홱
그 손길을 해응응이 허리를 뒤로 빼며 피했다.
“아이 참. 가만히 계세요.”
다시금 뻗은 주아영의 손이
발뒤꿈치로 지면을 가볍게 밀치듯 몸을 뒤로 뺀
해응응의 앞을 허무하게 스쳤다.
“언니 뭐해요? 자꾸 도망 다니면 고쳐드릴 수가 없잖아요. 혹시 다 큰 어른이 옷 맞춰주는 정도로 부끄럼을 타는 건 아니죠?”
아이를 타이르듯 대하니
조금 욱하는 얼굴로 노려보는 해응응.
화를 내는 표정마저도
차마 감추지 못하는 당혹스러움 때문에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주아영은 짜증이 나기보다는
이런 언니의 모습마저도 신선하고 즐거웠다.
늘 차갑고 우울하며 속을 알 수 없는
어딘가 먼 곳으로 훌쩍 떠날 것처럼
가까이 하기 어려운 표정만 짓던 언니가
실은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싶어서.
“에잇, 에잇!”
연체동물처럼 허리가 휙휙 휘어지거나
제 자리에 웅크려 앉고
뒤로 훌쩍 뛰고 빙글빙글 돌아서 피하고
붙잡으려는 손을 손등으로 받아 감아 흘리며
5분가량을 씨름한 끝에
다리로 한쪽 다리를 휘어 감고
두 팔과 허리를 동시에 끌어안은 뒤에야
목욕하기 싫은 고양이처럼 도망치던 해응응을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요! 참나, 저 좋자고 이러는 것도 아니고 허리 좀 맞춰드리겠다는데.”
끝내 주아영에게 붙잡힌 것이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부루퉁한 얼굴을 한 해응응.
“어디보자, 골반이…”
도망치지 못하게 두 팔과 허리를 감싼 채로
허리춤을 더듬어 골반의 위치를 잡은 주아영.
보기 흉하게 끌어올린 와이드 팬츠를
골반에 딱 걸치는
좋은 느낌의 위치까지 맞춰 내리자
피팅룸 거울에 비친 모습이 한결 나아졌다.
“어때요, 언니?”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뚱한 눈으로 거울을 통해 마주보는 해응응.
‘어라?’
한참 언니와 놀 때는 깨닫지 못했는데
이렇게 찬찬히 눈을 마주치고 있자니
주아영은 뒤늦게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봤다.
쓸데없이 민활한 언니를 따라잡느라
가빠진 호흡 때문에 상기된 얼굴을 하며
등 뒤에서 몸을 끌어안고
폴라 니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허리춤과 골반의 부드럽고도 탄탄한 몸을 만지며
팬츠 위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그녀.
‘이거, 조금 야하지 않나요?’
똑같이 한껏 몸을 썼는데도
지친 기색 하나 없는 안정적인 호흡.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풀어줘’라고 말하는 것처럼 뚱한 시선.
조금도 이 상황을
이상하게 의식하지 않는 태연스러움까지.
“뭐, 뭐어. 이 정도? 높이는 이게 적당하다구요.”
찔리는 마음에 화들짝 떨어져서
그리 말하는 주아영.
설레는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이제 벗어도 되나요?]따위의 필담을 들이미는 해응응.
괜히 자기만 마음을 졸이는 것 같아서
주아영은 심술이 났다.
“아~뇨? 아직 한참 남았는데요?”
해응응은 이 날 20세트의 옷을 입어본 뒤에야
옷쇼핑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