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of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10
109화 선인(2)
개인리그를 앞두고 마계에 불려온 이신은 덤덤히 그레모리에게 물었다.
“다음 상대가 누구입니까?”
“다음 상대는 악마군주 단탈리안이에요. 하지만 오늘 카이저를 부른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럼?”
“드릴 선물이 있어요.”
“선물 말입니까?”
“네. 아직 예전의 성세를 다 되찾지는 못했지만 카이저를 만나고서 서열과 세력을 회복하고 있고,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저를 무시하지 못하죠. 때문에 그런 고마움을 담아 준비했어요.”
“주시겠다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기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선물을 주겠다니 딱히 마다할 생각도 없는 이신이었다.
그레모리는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엇보다도 하급 악마가 되신 것에 대한 축하의 의미도 있고요.”
하급 악마라는 말에 이신은 움찔했다.
한동안 신경을 끄고 있었던 일이 다시금 떠오른 것이다.
“선물이라고 해봐야 약소한 것이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선물이 무엇입니까?”
“하급 악마가 되면 누구에게나 생기는 권한이 있지요.”
그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바로 영지에요.”
“영지?”
“하급 이상의 악마는 누구나 자기만의 영역이 있지요. 생명체가 많이 자생하는 영지일수록 그 주인인 악마에게 많은 마력을 공급해주죠. 힘없는 악마는 불모지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지만, 아무튼 누구에게나 영지는 있죠.”
이신은 당혹감을 느꼈다.
영지라고 하면, 옛날 귀족들이 다스리던 그런 땅을 말하는 게 아닌가. 그곳에 사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며 통치하는 그런 의미라고 생각했다.
그레모리의 말을 들어보면 세금 대신 마력을 주인에게 공급해주는 것 같았다.
“그런 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서열전 외에는 마계의 일에 관심이 없는 이신이었다.
자신에게 얼마나 이득을 줄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런 번거로운 일을 마계에 와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이신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그레모리는 웃으며 말했다.
“영지를 얻는다고 해서 일거리가 더 생기는 건 아니에요. 그냥 편히 쉴 수 있는 장소가 하나 생겼다고 보시면 되요.”
“제가 무언가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겁니까?”
“네. 원하시면 영지의 관리도 제 시녀가 맡으면 되고요.”
“시녀?”
아무리 그래도 영지의 관리를 일개 시녀에게 맡긴다니.
하긴, 이곳은 마계였다.
자신의 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이신은 판단했다.
“어쨌든 가보면 아실 거예요. 약소한 선물에 불과하니 크게 부담 가지실 필요가 없어요.”
“일단 한 번 가보겠습니다. 제 영지라는 곳은 어디에 있습니까?”
“궁전 뒤뜰에요.”
“……?”
이신이 의아한 눈으로 그레모리를 쳐다보았다.
그레모리는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말했을 텐데요. 정말 약소한 선물이라고요.”
아무튼 일단은 가보기로 했다.
이신은 시녀의 안내를 받아 궁전 뒤뜰로 갔다.
“이곳입니다, 계약자님.”
“정말 약소하다면 약소하군.”
뒤뜰에는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 한 채가 있었다.
물론 덩그러니 원룸처럼 작은 오두막 한 채만 있는 건 아니었다.
큼직한 오두막은 외견 상 넓고 방도 여러 개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울타리가 쳐져 있으며 앞마당도 있었다. 앞마당은 아무것도 없이 휑했는데, 물론 이신은 무언가를 심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단 들어가 봐야지.’
어쨌거나 선물로 받은 것이니 말이다.
울타리의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안으로 발을 들인 순간 묘한 기분이 느꼈다.
‘이게 뭐지?’
느껴본 지 꽤나 오래 된 감각.
바로 안락함이었다.
마치 피로로 무거워진 몸을 잠자리에 뉘었을 때처럼 포근하고, 쌀쌀한 날씨에 두꺼운 이불을 머리까지 덮은 것처럼 따스했다.
‘이런 게 바로 영지라는 건가.’
기분 좋은 안락함을 느끼며 이신은 안으로 들어섰다.
앞마당에는 아무것도 심어져 있지 않은 채 흙만 존재했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20평쯤 되어 보이는 오두막 내부는 겉보기와 달리 상당히 호사스러웠다. 침대와 탁자와 의자와 옷장과 책꽂이 등 필요한 가구가 하나같이 사치스러웠다.
바닥에 깔린 융단도 현실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마계만의 기하학적인 패턴이 수놓아져 있고, 또한 밟을 때마다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팔걸이와 등받이가 정교하게 조각된 가죽 소파에 앉았다.
영지가 주는 포근한 느낌과 더불어 더없이 편안했다.
모든 복잡한 상념이 사라지고서 마음이 맑고 편안해졌다.
따라 들어온 시녀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마실 것을 드릴까요?”
“어.”
시녀는 빠르게 따듯한 차를 가져다주었다.
이름 모를 차는 녹차와 비슷한데 맛의 균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살짝 달콤한 맛이 나 혀를 즐겁게 했다.
좋은 것들로만 가득 찬 마계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방금 선물 받은 이 작은 영지였다.
잠깐 있었음에도 몇 시간쯤 푹 쉰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진다.
안락함에 몸과 마음을 맡긴 채, 이신은 그대로 소파에서 잠들었다.
***
“카이저는 어떠니?”
“무척 흡족해하는 반응이었습니다.”
이신을 안내해주었던 시녀가 그레모리의 물음에 대답했다.
“후훗, 그렇구나.”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존귀하신 악마군주 그레모리님의 궁전 안에 마련된 영지이니까요. 그 어떤 악마가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요?”
시녀가 선망의 눈길로 그레모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레모리의 권속에 속한 시녀는 그녀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했다.
“후훗, 그렇지. 하지만 기억하렴. 그는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얻게 해주었단다. 카이저의 진정한 값어치에 비하면, 이 정도는 티끌에 불과한 것이지.”
“명심하고 성심껏 그의 시중을 들겠습니다, 악마군주 그레모리님.”
시녀는 공손히 대답했다.
어쨌거나 카이저가 만족했다니 그레모리로서도 대만족이었다.
상급 악마 엘티마, 암두시아스, 벨리알, 플라우로스, 데카라비아, 세에레.
카이저는 그레모리를 위하여 이 같은 상대를 격파하고 그녀를 서열 66위로 올려주었다.
계약자로서 서열전에 임할 때에는 단 한 번도 망설이거나 실책을 범한 적이 있었다. 늘 단호하고 빈틈이 없어서 믿음직했다.
그런 그의 서열전 전적도 어느새 6승 1패.
10승을 기록할 때마다 계약을 유지할지 해지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계약 조항이 있었으므로, 그레모리로서는 그에게 신경 써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를 완전한 내 권속으로 만들고 싶은데.’
그레모리는 카이저 때문에 안달복달했다. 그를 권속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어떤 대우라도 해줄 용의가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가.
다름 아닌 악마군주 그레모리! 강자존의 마계에서 가장 지체 높은 72악마의 하나였다.
그런 그녀의 권속이 되는 것은 수많은 악마가 바라 마지않는 영광이었다.
심지어 그레모리는 72악마군주 가운데 가장 휘하의 악마들에게 상냥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기에, 추락하기 전에는 수많은 악마가 그녀에게 모여들었더랬다.
그런 그녀가 간절히 바랄 정도였던 것이다.
‘여유를 갖고 기다려보자. 아직 카이저는 마계에 익숙해지지 않았어.’
힘을 가진 자에게 마계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악마군주 그레모리의 총애를 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그녀는 그에게 만끽하게 해줄 참이었다.
계약자를 권속으로 삼고 싶어 하는 것은 비단 그레모리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상위 서열에서는 이미 악마군주들이 실력을 성적으로 충분히 입증한 계약자들을 권속으로 삼은 상태였다.
하위 서열에서도 조아생 뮈라나 오운(오자서)이 그런 케이스였다.
문제는 이신이 아직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점.
이미 하급 악마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인간으로서 인간 세계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인간계에 있는 육신이 아직 수명을 다하지 않는 한, 그는 언제든 마력을 포기하고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번에 영지를 마련해준 것 또한 그의 마음을 사기 위한 장치였다.
그레모리의 궁전 내부에 마련된 영지!
그 영지는 자체로 아주 특별한 기능을 한다.
영지는 그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 특성이 만들어진다.
악마들의 영지마다 고유의 특성이 있으며, 따라서 악마들은 훌륭한 영지 특성을 얻기 위해 좋은 땅에 자리를 잡고 싶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갓 하급 악마가 된 이신이 이러한 곳에 영지를 얻은 것은, 수많은 악마들이 부러워하고 시기할 만한 일이었다.
바로 그녀의 능력인 치유가 영지 특성으로 작용하니 말이다!
‘영지를 갖게 되면 능력도 더 빨리 각성할 수 있을 거야. 능력을 각성해 악마로서의 진정한 힘을 얻으면, 카이저도 보다 악마로서의 자신의 존재에 매력을 느끼겠지.’
그레모리는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목적을 향해 손을 썼다.
일단은 계약을 연장하는 것.
그리고 그의 마음을 얻어 자신의 권속으로 만드는 것.
어차피 인간에게는 한정된 수명이 있었다.
생을 다하여 죽으면 그때도 다시 설득할 기회가 생긴다. 악마군주 그레모리에게 그 기다림은 그다지 긴 게 아니었다.
결국 언제가 되었건 카이저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레모리가 제시한 길을 선택하는 편이 그에게 가장 이로울 것이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당신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요. 나를 위해 싸워줄 것. 악마군주로서의 나의 명예를 지켜줄 것. 그것 하나면 돼요. 그러니 어서 나에게 왔으면 좋겠군요.’
***
오랜만의 휴식이었다.
프로게이머가 되고부터 숨 가쁘게 살아왔던 이신이었다.
분야만 특이할 뿐, 이신은 전형적인 워커홀릭이었다.
게임에 대한 열정과 인정해주지 않는 부모님에 대한 반발로 치열하게 살아온 이신.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어 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연습을 하고 또 했다.
어쩌면 그레모리의 부름을 처음 받았을 때 손목뿐만이 아니라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프로게이머의 모든 직업병을 짊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신이라 불리는 경지를 손에 넣은 대가를 몸으로 치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휴식과는 거리가 한참 먼 이신.
체질적으로 쉬는 것을 못하는 그가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오두막에서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그동안 못했던 휴식을 다 하겠다는 듯, 이신은 영지가 주는 달콤한 안락함에 취했다.
이 휴식이 길게 지속되면 선수로서의 감각이 무뎌질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야 연습 좀 하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정도.
지금의 휴식은 이신에게 득이 되는 일이었다.
여유를 가지고 늘 긴장 상태로 놓여 있는 정신을 진정시킨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나태함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자 이신의 마음속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다음 서열전은 악마군주 단탈리안이라고 했던가? 내 상대가 누가 될지 궁금해지는군.’
승부의 세계가 주는 흥분과 짜릿함은 영지의 안락함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